앨런은 다락방 열쇠를 뺏으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다. 하지만 이내 경찰이 그를 막아섰다.경찰은 허리춤에 준비해 둔 총을 만지작거리며 경고했다.“움직이지 마!”앨런은 총을 발견한 후에야 뒤로 물러섰다.앨런이 얌전히 물러나자 경찰은 수갑을 꺼내 그의 손에 채웠다.김욱은 그 틈을 타, 재빨리 다락방에 채워져 있는 자물쇠를 열었다.김욱이 문을 열자 미세한 불빛이 다락방에 비쳤다.다락방이 워낙 깜깜했던 지라 김욱은 허공을 대고 심유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유진아?”반면 김욱이 밝은 곳에 서있어서 심유진은 그를 한눈에 발견할 수 있었다.“오빠! 나 여기 있어!”눈앞이 여전히 깜깜했지만 김욱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드디어 심유진의 윤곽이 눈앞에 나타나자 김욱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유진아!”“오빠!”심유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경찰은 소리를 듣고 물었다.“찾았어요?”김욱은 감격스러워 뒤돌아 말했다.“네! 제 동생이 여기 있어요!”그의 말을 듣고 경찰은 험악한 표정으로 앨런을 바라봤다.“다른 할 말 있어요?”앨런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고집을 부렸다.“제가 제 와이프랑 잠시 불화가 있었을 뿐인데 당신들이 뭔 상관이에요!”“와이프랑 불화가 있든 말든 제 알 바가 아니지만 폭력을 사용하면 위법이죠.”경찰은 전혀 그의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전 폭력을 행사한 적 없어요! 때린 적도 없다고요!”앨런은 점점 감정이 격해졌다.“신체검사해 보면 알겠네! 전 거짓말 한 적 없어요!”“앨런 씨가 저한테 폭력을 쓰지 않았어요.”심유진이 끼어들어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심유진은 발에 채워진 족쇄를 흔들며 그의 범행을 밝혔다.쇠사슬이 서로 부딪치는 찰랑이는 소리가 김욱의 귀에까지 전해졌다.“저를 노예처럼 쇠사슬로 붙잡아 두었으니 이건 명백한 납치죠.”김욱은 그제야 그녀의 발에 채워진 족쇄를 발견했다.이어서 그가 족쇄를 풀어보려 했지만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심유진은 슬그머니 귀띔해 줬다
김욱은 더 캐묻지 않고 경찰한테 눈길을 돌렸다.“경찰관님, 제 동생 족쇄를 풀 수 있게 사람을 좀 불러와도 될까요?”경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가능하죠.”그러고는 무전기를 꺼내 본사에 지원요청을 했다.“이놈은 제가 먼저 경찰서에 데려가겠습니다.”“네.”김욱은 대답하며 다른 경찰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했다.“너희들이 뭔데 나를 데려가! 여긴 내 집이야! 너희들은 날 절대 데려갈 수 없어!”앨런은 격하게 반항했지만 경찰은 손쉽게 그를 제압했다.“총 쏘기 전에 순순히 따라와!”경찰도 점차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잠시만요!”갑자기 다락방에서 심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모든 이의 시선이 다락방으로 향했다.“프레디!”아직 발이 묶여 있는 심유진은 다락방에서 내려올 수 없어 허공에 대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프레디 그 아이를 함께 데려가 줘요! 경찰관님! 아무래도 프레디가 지속적으로 가정폭력을 당한 것 같아요. 만약 가능하시다면 프레디의 몸에 상처가 있는지 검사해 주세요!”경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아가.”경찰은 프레디를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이리 내 곁으로 와봐.”앨런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빨리 네 방으로 들어가!”프레디는 경찰과 앨런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했다.“넌 입 다물어!”경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앨런에게 경고를 날린 뒤 부드러운 표정으로 프레디를 위로했다.“아가야, 무서워 하지 마. 아저씨가 널 지켜줄게.”경찰은 커다란 손을 프레디의 앞에 내밀었다. 프레디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경찰은 벅찬 마음으로 프레디를 칭찬했다.“그래, 아가! 넌 참 용감한 아이야.”프레디는 멀뚱히 경찰을 바라봤다.“혹시 아버지가 너를 학대했어? 경찰 아저씨한테 말해줘.”경찰은 프레디가 불안해할까 봐 부드러운 어조로 차근차근 물었다.프레디는 앨런의 냉혹한 눈빛에 무서워서 입을 열지 못했다.“이 아이를 잠시 돌봐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먼저
심유진 발목에 채워진 족쇄가 너무 두꺼웠던 탓에 한참 후에야 끊어낼 수 있었다.족쇄가 풀린 순간 심유진은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심유진은 족쇄를 푸느라 수고한 경찰한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다락방에서 탈출했다.프레디는 이미 경찰과 함께 집을 떠났다. 아래층에는 김욱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멍을 때리고 있었다.“오빠?”심유진은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김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심유진의 발로 눈길을 돌렸다.“다 됐어?”“응.”심유진은 후련한 듯 총총 뛰었다.“그럼 우리 경찰서로 가자.”김욱은 심유진을 데리고 집 밖을 나섰다.“어서 가서 진술해야 해. 그리고 마리아 씨...”김욱은 독기 가득해서 말했다.“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거야.”김욱의 입에서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심유진은 마음이 무거워 났다.“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심유진은 팔꿈치로 김욱을 꾹꾹 찌르며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오빠가 그렇게 매력이 많지만 않았어도 내가 납치될 일은 없었잖아.”“이제 와서 내 탓 하는 거야?”김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심유진을 탓했다.“네가 처음부터 너의 신분을 밝혔으면 될 일이었잖아. 사람들이 네가 내 동생인 걸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그는 경찰차에 타고 있는 앨런을 짚으며 말했다.“저 변태 놈 자식은 네가 붙여 온 거잖아! 이게 나랑 뭔 상관인데!”심유진은 김욱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마침 앨런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앨런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눈빛으로 심유진을 빤히 쳐다봤다.심유진은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잠시 후 그들은 경찰서로 향했다.김욱과 심유진은 조사에 협조하기 위해 경찰차의 뒤를 따랐다.“공범이 있어요.”조사하는 도중 심유진은 마리아를 거론했다.“마리아 씨는 총으로 저를 위협하고 앨런 씨의 집에 데려다 놓았어요.”앨런은 마리아가 공범이라는 사실을 부인했고 이 사건은 납치 사건이 아니라고 했다.그는 끝까지
“하지만 앨런 그 자식은...”김욱은 불타오르는 화를 컨트롤 하기 위해 핸들을 꼭 잡았다.심유진은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사실 프레디가 좀 이상한 걸 여러 번 알아차렸지만 왜 학대를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심유진은 자신이 만약 조금만 세심하고 예리했더라면 프레디가 이토록 힘들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쓰렸다.“네 탓이 아니야.”김욱은 자기 탓 하고 있는 심유진을 일깨워줬다.“프레디가 그런 못된 아버지를 만났기에 그런 일을 당한 거야.”심유진은 더듬대며 어렵게 입을 뗐다.“그럼... 프레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지금 상황대로 라면 앨런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게다가 프레디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아마 보육원에 맡겨져서 새 부모를 기다려야 하는 거야?”“그건 아니야.”프레디한테 마음이 쓰였던 김욱은 경찰한테 물었었다.“프레디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 살아계신대. 아마 그분들한테 맡겨질 거야.”심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리고 방금 법무부에 전화해서 모어에서 우리 회사 기밀을 빼돌린 거에 대해 고소진행하라고 했어.”심유진과 마리아는 마침 차 안에서 이 사건에 대해 말이 나왔었다. 마리아는 자신이 블루 항공과 진생 그룹이 협력한다는 정보를 폭로했다는 사실을 직접 범행을 인정했다. 이 증거로 모어 항공을 고소하기에 충분했다.“응”심유진은 한참을 뜸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오빠, 나 화요일에 경주로 돌아가.”“뭐?”심유진은 김욱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김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너 회사일 때문에 가는 거야? 아니면 허태준을 위해서 가는 거야?”심유진은 김욱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회사 때문도 있고 태준 씨 때문이기도 해.”김욱은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래서 어느 쪽이 더 큰 퍼센트를 차지하는데?”어느새 심유진은 입술이 바짝 말라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겨우 용기를 내 김욱한테 사실대로 말했다.“태준
심유진과 하은설은 화요일 아침 비행기를 예매했다.김욱은 당연한 듯 그들의 짐을 차에 싯고 비행기장에 데려다줬다.떠나기 전, 심유진은 집 열쇠와 하은설 주택 열쇠를 김욱한테 맡겼다. 그러면서 김욱한테 평소 자주 집에 가보고 청소 아주머니를 불으라고 재차 강조했다.김욱은 툴툴거렸다.“내가 네 보모라도 되는 줄 알아?”“당연히 그건 아니지.”심유진은 김욱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오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정말?”김욱은 바로 심유진을 놀릴 생각에 신났다.“그럼 선택해. 나야? 허태준이야?”심유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당연히 오빠지!”부탁할 일이 있을때에야 입에 사탕발린 말을 하는 심유진이 였다.게다가 어려운 일도 아니고 김욱의 기분이 풀린다면 뭐든 할 것 같았다.반면, 김욱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김욱은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내 허태준과의 카톡 창을 열었다. 그는 음성메시지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그럼 다시 한번 말해봐. 나야? 허태준이야?”그제서야 심유진은 겁을 먹고 입을 꾹 닫았다.“흥!”김욱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캐리어는 네가 알아서 끌어.”그러면서 김욱은 밀차에 한가득 쌓인 캐리어에서 손을 뗐다.심유진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밀차를 끌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김욱을 뒤쫓아 갔다.“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오빠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를 사랑하잖아! 오빠! 그러니까 화 풀어. 응?”김욱은 오글거려서 구역질 날 것 같았다.“너 메스껍게 굴지 마.”김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심유진을 피하려 노력했다.하은설은 뒤에서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너와 김욱 씨 사이가 참 좋아.”하은설은 감탄하며 말했다.“그렇지.”심유진은 비록 김욱과 자주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그는 심유진한테 허태준만큼 소중한 사람이였다. 김욱은 심유진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뭐해?”김욱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들을 바라봤다.한참이나 뒤 떨어진 두
“그래요.”하은설은 먼저 앞으로 다가가 김욱을 힘껏 껴안았다.김욱의 몸에서는 부드러운 우드 향이 났다.하은설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뭔지 모를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김욱과 떨어지게 돼서가 아니라, 10년 넘게 공부하고 생활한 제2의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게 몹시 아쉬웠다.김욱이 혹시라도 눈치를 챌까 봐 하은설은 황급히 그를 놓아주고는 등을 돌렸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욱은 하은설을 놀리기에 바빴다.“은설 씨, 부끄러워 하지 말아요.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하은설은 극구 부인했다.“누가 운다 그래요! 저 안 울어요!”벅차오르는 감정을 꾸역꾸역 참는 하은설의 모습을 보다 못한 심유진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울어도 돼. 괜찮아.”심유진은 하은설을 위로했다.“나 정말 울 생각 하나도 없었다니까?”심유진과 김욱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하은설은 근심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그만하고 어서 가자. 저기 외국 사람들도 다 쳐다보잖아.”하은설은 김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김욱 씨, 저희 이만 가볼게요.”김욱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잘 가요.”...심유진은 항공권을 예매한 후 바로 허태준한테 비행기 티켓을 알려줬다.허태준은 사람을 보내 배웅하러 가겠다고 했었다.그 뒤로 허태준이 워낙 바빴던 지라 심유진은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연락을 하지 않았다.비행기가 착륙한 후에야 심유진은 허태준한테 연락했다.[저 도착했는데, 사람은 보냈어요?]허태준은 전화번호 하나를 보냈다.[여기로 전화해 봐요.]심유진이 전화를 걸자 상대방은 이미 비행장에 도착했으니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둘은 서로를 바로 알아볼 수 있게 전화를 끊지 않았다.최근 해외에 바이러스 확진자가 늘면서 국내로 피신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국제선 입국장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휴대폰을 들고 손을 흔드는 검은 옷차림의 젊은 남자가 심유진의 시선에 들어왔다.남자는 심유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저는 허 대표님의 비서, 홍인우라고 합니다.”홍인
허태준이 자신을 데리고 파티에 참석하려고 예복을 준비했다고 심유진은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쇼핑백을 열었을 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검은색 벨벳 재질의 롱스커트였다.너무도 수수한 드레스라 파티에 입고 가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심유진은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녀는 놀라서 급히 쇼핑백을 집어던지고 홍인우한테 달려가 물었다.“혹시... 누가 돌아가셨나요?”“네.”홍인우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리 작은 아가씨께서...”심유진은 한참 생각한 후에야 “작은 아가씨”가 누구인지 감이 잡혔다.“허아리가?”“네.”심유진은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심유진은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걔, 걔가...”지난번 허아리가 납치되고 납치범이 허태준한테 백만 억 원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심유진은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했다.그 뒤로 후속 뉴스도 보도 되지 않았지만 괜히 아픈 곳을 건드릴까 봐 심유진은 굳이 허태준한테 묻지 않았다.하지만 허태준이 워낙 티를 내지 않아 심유진은 마냥 허아리가 구출되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일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흐르고 있었다...심유진은 허아리가 너무 싫어서 미울지경이 였다. 하지만 허아리도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 아이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홍인우는 심유진이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지만 서둘러 말해주지 않았다.“이 일에 대해서는 허 대표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겁니다.”“네.”심유진은 수많은 의문을 뒤로 하고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홍인우는 심유진을 데리고 교외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갔다.장례식장 앞의 넓은 공터에는 수많은 고급 승용차가 늘어서 있었다.“오늘 작은 아가씨를 조문하러 오신 분들이 많아요.”홍인우는 장례식장에 들어가기 전 심유진한테 귀띔해주었다.그리고는 홍인우는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장례식장에는 추모행렬이 끝이 없었다. 그중 허씨 가문은 가장 큰
허태준이 고개를 들자 심유진과 눈을 마주쳤다.“이리 와요.”허태준은 심유진을 향해 손을 내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손을 꽉 잡았다.허태준의 손은 언제나 그랬듯 차가웠다. 빈소에 난방을 켜지 않아 그의 손은 평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심유진은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곧게 펴고 허태준의 옆자리에 섰다. 그녀는 허태준과 함께 추모객을 맞이했다.허태준의 인맥이 넓어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장례식은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났다.심유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하루 종일 허태준과 서서 추모객을 맞이했다. 물 한 모금도 마실 새가 없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마 마음이 너무 아팠던 나머지 신경이 마비된 것 같다.“오늘 밤 빈소를 지킬 거예요?”심유진은 조심스레 허태준한테 물었다.허아리의 시신은 내일 아침 묻을 거기 때문에 장례식은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허태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허아리는 허태준의 친딸이 아니었다. 허태준한테 허아리는 낯선 사람보다는 익숙한 아이일 뿐이었다. 장례식도 허 아주버님과 허 아주머니의 강요하에 진행될 수 있었다.“힘들어요?”허태준은 걱정 가득한 눈빛을 하고 심유진한테 물었다.“그냥 배가 좀 고프네요.”심유진은 그제야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잠깐 나가서 밥 먹을까요?”“그래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장례식 밖으로 나갔다.심유진은 여전히 빈소에 남아있는 허 아주버님을 발견했다.“아저씨는 안 가신대요?”“아버지는 남아서 빈소를 지키겠대요.”허태준은 무덤덤하게 말했다.“허아리가 아버지의 친손녀는 아니지만 그래도 허씨 가문의 일원이죠. 둘째 삼촌네 가족이 모두 없으니 아버지라도 자리를 지킬 수밖에요.”“태서 씨는요? 태서 씨가 아리의 친아빠인데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죠?”허 씨네 집안은 참으로 파라만장했다. 허태준의 둘째 삼촌은 어린 여자아이를 성추행한 죄로 형을 선고받았고 허택양은 유럽에서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수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