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과 하은설은 화요일 아침 비행기를 예매했다.김욱은 당연한 듯 그들의 짐을 차에 싯고 비행기장에 데려다줬다.떠나기 전, 심유진은 집 열쇠와 하은설 주택 열쇠를 김욱한테 맡겼다. 그러면서 김욱한테 평소 자주 집에 가보고 청소 아주머니를 불으라고 재차 강조했다.김욱은 툴툴거렸다.“내가 네 보모라도 되는 줄 알아?”“당연히 그건 아니지.”심유진은 김욱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오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정말?”김욱은 바로 심유진을 놀릴 생각에 신났다.“그럼 선택해. 나야? 허태준이야?”심유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당연히 오빠지!”부탁할 일이 있을때에야 입에 사탕발린 말을 하는 심유진이 였다.게다가 어려운 일도 아니고 김욱의 기분이 풀린다면 뭐든 할 것 같았다.반면, 김욱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김욱은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내 허태준과의 카톡 창을 열었다. 그는 음성메시지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그럼 다시 한번 말해봐. 나야? 허태준이야?”그제서야 심유진은 겁을 먹고 입을 꾹 닫았다.“흥!”김욱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캐리어는 네가 알아서 끌어.”그러면서 김욱은 밀차에 한가득 쌓인 캐리어에서 손을 뗐다.심유진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밀차를 끌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김욱을 뒤쫓아 갔다.“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오빠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를 사랑하잖아! 오빠! 그러니까 화 풀어. 응?”김욱은 오글거려서 구역질 날 것 같았다.“너 메스껍게 굴지 마.”김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심유진을 피하려 노력했다.하은설은 뒤에서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너와 김욱 씨 사이가 참 좋아.”하은설은 감탄하며 말했다.“그렇지.”심유진은 비록 김욱과 자주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그는 심유진한테 허태준만큼 소중한 사람이였다. 김욱은 심유진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뭐해?”김욱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들을 바라봤다.한참이나 뒤 떨어진 두
“그래요.”하은설은 먼저 앞으로 다가가 김욱을 힘껏 껴안았다.김욱의 몸에서는 부드러운 우드 향이 났다.하은설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뭔지 모를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김욱과 떨어지게 돼서가 아니라, 10년 넘게 공부하고 생활한 제2의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게 몹시 아쉬웠다.김욱이 혹시라도 눈치를 챌까 봐 하은설은 황급히 그를 놓아주고는 등을 돌렸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욱은 하은설을 놀리기에 바빴다.“은설 씨, 부끄러워 하지 말아요.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하은설은 극구 부인했다.“누가 운다 그래요! 저 안 울어요!”벅차오르는 감정을 꾸역꾸역 참는 하은설의 모습을 보다 못한 심유진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울어도 돼. 괜찮아.”심유진은 하은설을 위로했다.“나 정말 울 생각 하나도 없었다니까?”심유진과 김욱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하은설은 근심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그만하고 어서 가자. 저기 외국 사람들도 다 쳐다보잖아.”하은설은 김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김욱 씨, 저희 이만 가볼게요.”김욱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잘 가요.”...심유진은 항공권을 예매한 후 바로 허태준한테 비행기 티켓을 알려줬다.허태준은 사람을 보내 배웅하러 가겠다고 했었다.그 뒤로 허태준이 워낙 바빴던 지라 심유진은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연락을 하지 않았다.비행기가 착륙한 후에야 심유진은 허태준한테 연락했다.[저 도착했는데, 사람은 보냈어요?]허태준은 전화번호 하나를 보냈다.[여기로 전화해 봐요.]심유진이 전화를 걸자 상대방은 이미 비행장에 도착했으니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둘은 서로를 바로 알아볼 수 있게 전화를 끊지 않았다.최근 해외에 바이러스 확진자가 늘면서 국내로 피신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국제선 입국장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휴대폰을 들고 손을 흔드는 검은 옷차림의 젊은 남자가 심유진의 시선에 들어왔다.남자는 심유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저는 허 대표님의 비서, 홍인우라고 합니다.”홍인
허태준이 자신을 데리고 파티에 참석하려고 예복을 준비했다고 심유진은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쇼핑백을 열었을 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검은색 벨벳 재질의 롱스커트였다.너무도 수수한 드레스라 파티에 입고 가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심유진은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녀는 놀라서 급히 쇼핑백을 집어던지고 홍인우한테 달려가 물었다.“혹시... 누가 돌아가셨나요?”“네.”홍인우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리 작은 아가씨께서...”심유진은 한참 생각한 후에야 “작은 아가씨”가 누구인지 감이 잡혔다.“허아리가?”“네.”심유진은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심유진은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걔, 걔가...”지난번 허아리가 납치되고 납치범이 허태준한테 백만 억 원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심유진은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했다.그 뒤로 후속 뉴스도 보도 되지 않았지만 괜히 아픈 곳을 건드릴까 봐 심유진은 굳이 허태준한테 묻지 않았다.하지만 허태준이 워낙 티를 내지 않아 심유진은 마냥 허아리가 구출되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일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흐르고 있었다...심유진은 허아리가 너무 싫어서 미울지경이 였다. 하지만 허아리도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 아이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홍인우는 심유진이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지만 서둘러 말해주지 않았다.“이 일에 대해서는 허 대표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겁니다.”“네.”심유진은 수많은 의문을 뒤로 하고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홍인우는 심유진을 데리고 교외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갔다.장례식장 앞의 넓은 공터에는 수많은 고급 승용차가 늘어서 있었다.“오늘 작은 아가씨를 조문하러 오신 분들이 많아요.”홍인우는 장례식장에 들어가기 전 심유진한테 귀띔해주었다.그리고는 홍인우는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장례식장에는 추모행렬이 끝이 없었다. 그중 허씨 가문은 가장 큰
허태준이 고개를 들자 심유진과 눈을 마주쳤다.“이리 와요.”허태준은 심유진을 향해 손을 내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손을 꽉 잡았다.허태준의 손은 언제나 그랬듯 차가웠다. 빈소에 난방을 켜지 않아 그의 손은 평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심유진은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곧게 펴고 허태준의 옆자리에 섰다. 그녀는 허태준과 함께 추모객을 맞이했다.허태준의 인맥이 넓어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장례식은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났다.심유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하루 종일 허태준과 서서 추모객을 맞이했다. 물 한 모금도 마실 새가 없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마 마음이 너무 아팠던 나머지 신경이 마비된 것 같다.“오늘 밤 빈소를 지킬 거예요?”심유진은 조심스레 허태준한테 물었다.허아리의 시신은 내일 아침 묻을 거기 때문에 장례식은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허태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허아리는 허태준의 친딸이 아니었다. 허태준한테 허아리는 낯선 사람보다는 익숙한 아이일 뿐이었다. 장례식도 허 아주버님과 허 아주머니의 강요하에 진행될 수 있었다.“힘들어요?”허태준은 걱정 가득한 눈빛을 하고 심유진한테 물었다.“그냥 배가 좀 고프네요.”심유진은 그제야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잠깐 나가서 밥 먹을까요?”“그래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장례식 밖으로 나갔다.심유진은 여전히 빈소에 남아있는 허 아주버님을 발견했다.“아저씨는 안 가신대요?”“아버지는 남아서 빈소를 지키겠대요.”허태준은 무덤덤하게 말했다.“허아리가 아버지의 친손녀는 아니지만 그래도 허씨 가문의 일원이죠. 둘째 삼촌네 가족이 모두 없으니 아버지라도 자리를 지킬 수밖에요.”“태서 씨는요? 태서 씨가 아리의 친아빠인데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죠?”허 씨네 집안은 참으로 파라만장했다. 허태준의 둘째 삼촌은 어린 여자아이를 성추행한 죄로 형을 선고받았고 허택양은 유럽에서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수감
허아리의 죽음이 허태준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허태서가 도망간 날이었다.몇 년 동안 재정 악화가 지속되었던 YT 그룹은 파산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오랫동안 권력을 잡았던 허태서는 미리 사람을 심어둔 덕에 미리 소문을 듣게 되었다. 소문을 들은 허태서는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미 짐을 싸고 도망쳤다.이에 경찰은 전 국민 수배령을 내렸고 허태준도 사람을 시켜 허태서를 찾는데 돌입했다.허태준이 찾아내기도 전에 허태서한테서 연락이 왔다.전화기 속 허태서의 말투는 투박스러웠다.“허태준, 네 딸이 내 손에 있어. 네 딸이 죽지 않길 바란다면 200억 현금과 차 한대를 준비해서 도원길 28번 입구에 세워둬! 경찰에 신고할 생각하지 마! 돈과 차를 받는 즉시 네 딸을 돌려주지!”“허아리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요!”허태준은 허태서가 바라는 대로 조급한 척하며 그를 안심시켰다.“돈과 차 얼마든지 준비할 테니까 아리만 무사하면 돼요!” "한나절의 시간을 줄게. 오늘 자정까지 모든 물건을 내 눈앞에 가져다 놔!”이 말을 끝으로 허태서는 전화를 끊었다.허태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허태서가 새로운 사냥감을 찾지 못하도록 묶어둔 것이다.허태준은 허아리를 돌보는 보모한테 전화했다.신호음이 한참 울린 후에야 연락이 닿았다. 자신을 응급실 간호사라고 칭하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간호사는 보모가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아서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는 중이라고 전했다.간호사는 한 번도 허아리를 거론하지 않았다. 정황상 허아리가 허태서 손에 있는게 확실해 보였다.허태준은 즉시 경찰한테 신고했다.그날 밤 경찰은 도원로 28번지 주위에서 잠복수사를 했다.하지만 현장에 나타난 것은 허태서의 심부름으로 차를 빼돌리러 온 무고한 행인이었다.사건 직후 허태서는 다시 한번 허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허태서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허태준, 네가 날 갖고 놀아?”허태준은 입을 꾹 닫았다.“그래, 딸을 돌려받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허태서가
200억 현금을 담기 위해 허태준은 수납공간이 큰 SUV를 준비했다.물론, 허태준은 이 사실을 경찰한테 알렷다. 경찰은 되는 힘껏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그리고 아침 9시.허태준은 차를 몰고 리조트 대문 앞에 도착했다.사실 대문에는 문도 달려있지 않아 누구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리조트 내에는 여러 별장이 비어 있었다.허아리는 그 많은 별장 중 한 곳에 숨어 있다.그는 허태준에게 차를 몰고 별장 구역에 들어서도록 명령했다. 그러고는 입구 쪽에 차를 세워둔 다음 멀찍이 서있으라고 했다.허태준은 그가 요구한 대로 다 해주었다.이때, 허태서가 조용히 그의 움직임을 관찰했다.30분 후, 허태서는 비로소 허아리를 끌고 허태준 앞에 나타났다.비록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허태서의 손에 쥐어진 칼이 햇빛 아래서 반짝거렸다.그는 허아리의 목에 칼을 겨누며 주위를 살폈다.허태준은 두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저 진짜 혼자예요! 이제 아리를 풀어주세요.”허태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반면 허아리는 허태준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아빠! 빨리 저 좀 구해주세요!”“무서워 하지 마!”허태준은 그녀를 위로하며 따뜻하게 말했다.“이젠 안전해.”허태서는 못마땅 해서 허아리를 차 안에 실어 놓았다. 그는 칼을 휘두르며 그녀를 협박했다.“움직이지 마. 아니면 죽여버릴 거야.”허아리는 몸을 쭈그리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사이 허태서는 차 트렁크를 열어보았다.안에는 오만 원 수표가 잔뜩 쌓여 있었다.금액이 200억이 맞든 아니든 한평생을 써도 남을 돈이었기에 허태서는 돈을 세보지도 않았다.허태서는 만족스럽게 운전석에 올라탔다.허태준이 차 열쇠를 차에 남겨두어 그는 손쉽게 시동을 걸었다.허태서가 떠나려 하다 허태준은 그를 다급히 불러세웠다.“돈도 다 줬는데 왜 아리를 풀어주지 않는 거예요?”“뭐 그리 급해.”허태서는 이빨을 다 드러내며 그를 비웃었다.“내가 안전한 것을 확인하면 바로 네 딸을 내려줄 거야.”그
차들이 충돌되자 마침내 허태서가 타고 있는 차도 멈춰 섰다. 다행히 차의 옆면을 들이받아 차 안에 사람들에게 큰 피해가 없었다.허태서의 차가 멈추자 경찰은 일사불란하게 차에서 내려 그를 에워쌌다.“허태서, 차에서 내려!”진 경위는 소리쳤다.잠시 후 허태서는 차 문만 열고 내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김욱은 허아리를 팔로 감싸고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한 발짝만 다가오기만 해봐. 바로 죽여버릴 거야!”경찰을 협박한 후과를 생각할 틈도 없이 그는 빨리 빠져나가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아직 인질이 그의 손에 있어 경찰은 뒤로 물러섰다. 경찰은 총을 꺼내 허태서한테 겨눴다.“허태서, 네가 만약 강제로 연행되면 우리는 너를 사살할 권리가 주어져.”진 경위는 재차 경고했다.허태서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그가 손에 힘을 주자 칼끝은 허아리의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아!”찢기는 아픔에 허아리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진 경위가 부하한테 눈짓을 하자 경찰 부대는 반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여전히 총을 들고 있었다.“총 내려놔!”허태서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네가 아이를 놓아주면 우리도 자연스레 총을 내려놓을 거야.”진 경위는 침착하게 대응했다.“내가 바보로 보여? 내가 이 아이를 놓으면 너희 나를 감옥에 넣어버릴 거잖아!”말하면서 허태서는 허아리를 더 세게 껴안았다.“나는 감옥에 갈 수 없어! 돈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감옥에 가겠어?”“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어.”진 경위는 도리를 따지며 그를 설득해 보려고 했다.“네가 법을 어긴 이상 우리는 지구 끝까지 너를 찾아갈 거야. 그러니까 칼 버리고 인질을 풀어줘. 네 의지로 경찰서에 사서 진술하면 형을 적게 받을 수 있어.”허태서는 곰곰이 고민했다. 한참 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던졌다.“그래. 좋아.”그는 결정을 내린 듯 말했다.경찰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경찰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거리를 좁혀가는 그때, 그는 모든 사람들이 방비하는 틈을 타 허아
허태준은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내일 얘기합시다.”...항상 별이 생각뿐인 심유진은 길가의 가게에서 국수 두 그릇을 포장했다. 그녀는 허태준이 허씨 가문의 별장에 가도록 계속 재촉했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9시가 넘었다. 모두 잠을 자지 못한 듯 허 씨 별장에는 여전히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허태준은 미리 허 아주머니한테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모가 문을 열어주며 깜짝 의아해했다.“도련님, 왜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별이는 자나요?”허태준은 물었다.보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니요. 오늘 사모님 기분이 안 좋으셔서 도련님이 하루 종일 사모님과 함께 있어줬지 뭐예요. 두 분이 저녁을 먹고 서재에 그림을 그리러 들어가고는 나오지 않았어요.”허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그는 심유진을 데리고 서재로 발길을 옮겼다.허 아주머니와 별이는 똑같이 책상에 엎드려 한 손에 붓 하나씩 쥐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아빠! 엄마!”허태준과 심유진을 본 별이는 붓을 한쪽에 집어 던지고 단숨에 뛰어가서 반겼다.별이를 품에 안자 허태준의 표정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며칠 동안 할머니 말 잘 들었어?”허태준은 별이의 코를 콕 치면서 물었다.별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허 아주머니가 앞장서서 말했다.“별이가 말을 어찌나 잘 듣는지 심지어 오늘 나한테 맛있는 것도 해줬어!”허 아주머니의 붉은 눈시울과 잠긴 목소리로 그녀가 한참 울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하지만 허 아주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정말요?”심유진은 눈을 부릅뜨며 별이를 놀렸다.“별이가 이렇게 대단한 아이였어?”별이는 쑥스러워서 볼이 빨개졌다.“아주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어요.”“그래도 아주 대단해.”허 아주머니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유진이 왔어?”허 아주머니의 눈길은 심유진한테서 멈춰 섰다. 그녀는 너무 기뻤다.“일 때문에 잠시 들렀어요.”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