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손이라도 데워요.”그녀는 뜨거운 물을 심유진에게 건넸다.“알다시피 여기에는 뜨거운 물이 없어요. 일부러 물을 끓여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어요.”심유진은 컵을 두 손으로 들었다. 끊임없이 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에 심유진의 움츠려있던 어깨는 천천히 펴졌다.심유진은 감동하면서 소리냈다. 다른 사람들의 이상한 눈빛이 아니라면 컵을 얼어붙은 얼굴에 대고 싶었다.“Maria가 아니라면 죽었을 거예요.”심유진은 잠긴 목소리로 Maria한테 말했다.“전혀 오바하지 않았어요.”Maria는 큰 눈으로 심유진을 노려봤다.“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아까 물어보니까 앞에 계신 손님이 다 먹고 결산하고 있다네요. 우리도 곧 들어갈 수 있으니 유진 씨도 밖에서 더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네요.”심유진은 이 말에 살아났다.아니나 다를까 오분도 지나지 않아 웨이터가 준비되었다고 통지하러 왔다.레스토랑 안은 에어컨이 빵빵했다. 심유진의 얼어붙은 사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웨이터는 앞에서 자리로 안내했다. 홀 중앙까지 가자 심유진과 Maria는 한창 웃고 있는 Judy 일행을 발견했다.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높았다. 조용한 편도 아닌 레스토랑 안이고 심유진과 Maria가 거리를 두고 서있어도 그들의 얘기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아까 걔 표정 봤어? 하하하! 분이 풀리는 거 있지!”“김욱 씨가 Judy 편에 설 줄 몰랐어요. 솔직히 그 천한 년 편을 들어주고 Judy를 벌할 줄 알았거든요.”“김욱 씨는 늘 공정한 분이잖아요? 역시 제가 숭배하는 남자예요!”“근데 김욱 씨랑 그 천한 년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관계가 없다면 김욱 씨가 왜 갑자기 육 대표님에게 여자 비서를 안배해 주겠어요? 그런데 관계가 있다고 하기에도..., 오늘 일어난 일은 어떻게 설명하죠?”“예전에 잠깐 관계가 있었나 보죠. 김욱 씨도 그랬잖아요? 직장 내 괴롭힘은 용납할 수 없다고. 그 천한 년이 Judy를 괴롭힌 걸 딱 김욱 씨한테 잡힌 거죠. 김욱 씨도 지
심유진은 프로필 사진으로 누군지 알아냈다. 끝없는 밤하늘, 중간에는 금빛이 나는 초승달, 그 옆에는 작지만 밝아 무시할 수 없는 별이 있었다.이것은 별이 지난주에 그린 그림 숙제다. 별이 설명하길 이 그림의 이름은 >다. 심유진이 자신을 별이라고 부르고 자신도 심유진의 이름에 달이 들어간 줄 알았다고 한다. 심유진은 당연히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별인 줄 알았다. 별이의 빠른 속도에 감탄하고 있던 중 대화창을 누르자 허태준의 이름이 떴다.허태준이 그녀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 것은 별로 희한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별이의 그림을 프로필 사진으로 쓰니..., 그것도 이렇게 의미가 있는 그림을 쓰니 심유진의 마음은 조금 복잡했다.맞은 쪽에 앉은 Maria는 이미 포크와 나이프를 잡았다. 한입 먹고는 연신 감탄했다.“Shen! 이것 좀 먹어봐요! 완전 맛있어요!”심유진은 흠칫하다가 시선을 허태준의 프로필 사진에서 뗐다.“좋죠.”그녀는 웃으면서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었다.아직 완성하지 못한 자료를 생각하며 심유진은 길게 식사하지 않았다.Maria와 같이 떠날 때 그 일행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들 상 위의 음식은 이미 비었지만 끼리끼리 붙어서 각종 포즈를 하면서 셀카를 찍고 있었다.이번에 심유진은 멈춰 서지 않았다.레스토랑 출구까지 걸어왔을 때 안에서 한 여인의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심유진은 이런 광경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Maria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이 목소리는..., Judy 같은데요?”“네?”심유진은 흥미진진했다.레스토랑 안의 사람들은 식사를 멈추고 호기심에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모두의 시선이 멈춰 있는 곳에는 Judy와 제복을 입은 여성 웨이터가 있었다.Judy는 여성 웨이터보다 키가 한 뼘 더 컸다. 상대방을 손가락질하면서 욕하는 모습이 괴롭히는 모습 같았다.“돈을 내면서 여기서 식사하는데 당신 눈치나 봐야겠어요?”“고객은 하늘같은 존재란 걸 모르나봐요?
너무나도 눈에 익은 광경이었다. 예전의 심유진은 매일이다시피 이런 경험을 했다. 웨이터가 Judy한테 욕을 먹자 이상한 손님들 때문에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녀는 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Maria를 붙잡고 말했다.“가요.”Maria는 촬영 중이던 핸드폰을 치웠다. 화도 나지만 유감이었다.“네.”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분노에 차서 말했다.“Judy는 진짜 너무 한 것 같아요! 사적으로 이런 사람인 줄 정말 몰랐네요!”심유진은 Judy의 행동에 대해 평가하지 않았다.Maria한테 이간질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헤어질 때 Maria는 말했다.“육 대표님한테 Judy의 진짜 모습을 알려야겠어요!”**한창 저녁 식사 시간이기에 퀸 애비뉴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거의 빈 택시가 없었다.Maria는 주동적으로 심유진을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심유진은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결국 심유진은 길을 건너서 지하철을 탔다.겨울밤 찬바람은 심유진의 긴 머리카락이 뒤로 가게 쌩쌩 불었다.심유진은 목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바람을 마주한 채 걸어갔다.코끝은 얼어서 빨갛게 변했고 콧물도 계속 흘렀다. 심유진은 종이로 닦고 또 닦았다.N 시티의 지하철은 몇백 년의 역사가 있다. 그래서 국내 지하철보다 많이 낡았고 역 안은 에어컨을 느낄 수 없었다.차에 오르자 얼어붙은 몸은 그제야 조금씩 따뜻해 지는 것 같았다.역을 나서자 심유진은 금세 찬 바람에 둘러싸여 코트 끝자락이 강풍에 휘날렸다.심유진은 코를 훌쩍이면서 아파트로 걸어갔다. 경비를 서던 관리원이 인사했다.“밖이 춥죠?”심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관리원은 심유진을 쳐다보다가 친근하게 타일렀다.“내일 기온이 더 떨어진대요. 눈이 내릴 수도 있으니까 두껍게 입고 다녀요! 감기 걸리지 말고!”심유진은 힘을 들여 “네.”하고 대답한 후 감사 인사로 웃어 보였다.“고마워요.”**“엄마!”심유진이 집에 들어서
허태준은 옅은 회색 생활복을 입고 있었다. 코튼 후드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져 하얗고 긴 팔을 드러냈다.“왜 이렇게 빨리 왔어?”그는 티슈로 물에 젖은 손을 닦으면서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심유진은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따뜻하고 편안한 슬리퍼로 갈아신으면서 별이와 함께 허태준한테로 걸어갔다.“밥만 먹는데요, 뭘.”그녀는 어깨에 걸친 가방을 쇼파에 벗어던지고 허태준한테 물었다.“두 사람은요? 밥 먹었어요?”“방금 먹었어.”허태준은 대답했다.“설거지하는 중이야.”심유진은 흠칫했다. 시선은 차가운 물에 적셔져 빨갛게 변한 허태준의 손에 머물렀다. 그리고 조급히 알려줬다.“집에 식기 세척기가 있는데요!”“식기 세척기라 해도 내 손으로 씻은 것보다 깨끗하지 못해.”허태준은 덤덤히 말했지만 그의 말에서 꼼꼼한 성격을 볼 수 있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결벽이 어느 만큼 심각한지 알기에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었다.“그러면 적어도 뜨거운 물을 쓰지!”허태준은 동그랗게 만 종이를 장거리 슛을 해 쓰레기통에 버렸다.“괜찮아.”그는 까만 눈동자로 평온하게 심유진을 바라보았다.“안 추워.”“손이 이렇게 빨개졌는데 안 춥다구요?”심유진은 화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허태준의 한마디는 심유진을 더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당신 손이 더 빨개.”심유진은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확실히...자기 손이 더 빨간 것 같았다.심유진은 조마조마하여 손을 뒤로 감췄다. 하지만 별이가 한쪽 팔을 잡아당겨 움직일 수가 없었다.“맞아요! 엄마 손은 완전 차가워요!”별이는 일부러 심유진의 말에 반대되게 행동하듯 심유진의 손을 허태준의 손에 가져갔다.“아빠, 빨리 엄마 손을 따뜻하게 해줘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잡았다.허태준은 늘 몸이 차가웠다. 그랬기에 두 손도 항시 차가웠다. 거기다 아까 찬물에 식기를 씻었기에 손은 더 차가웠다.하지만 그런 손이라도 심유진의 손보다는 따뜻했다.허태준은 두 눈을 작게 뜨면서 위험한 빛을 내뿜었다.심유진은 움찔했다.
허태준의 따뜻한 몸 때문에 심유진의 얼어붙은 손은 조금씩 온도를 되찾기 시작했다.심유진은 시름이 놓였다.“이제 가도 되죠?”그녀는 허태준한테 물었다.허태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한 채 그녀의 손을 옷 속에서 빼냈다.“목욕물을 받아놓을 테니 목욕해.”그는 말하면서 별이한테 임무를 안배해 줬다.“엄마한테 판람근을 탄 물을 갖다주고 다 마실 때까지 감독해.”“네!”별이는 임무를 받자마자 총총 뛰어갔다. 심유진이 막아서려야 막아설 틈도 없었다.허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 마시고 욕실로 가.”**허태준은 이미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넣었다. 판람근의 위치도 별이한테 이미 알려주었다.별이는 조심스레 보온병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심유진 곁으로 다가왔다.“엄마, 빨리 마셔요!”별이는 보온병을 심유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별이는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심유진의 무릎을 베고 누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태준의 임무를 엄격히 집행하는 듯했다.판람근의 쓴 향에 심유진은 이마를 찌푸렸다.심유진은 별이한테 장난쳤다.“너무 쓴데, 안 마시면 안 돼?”“안 돼요!”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심유진을 바라보았다. 심유진의 장난에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다 마셔야 해요!”심유진은 욕실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을 보자 소리를 낮춰 별이와 협상했다.“지금은 아빠가 우리 둘 대화를 듣지 못하니 이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주방에 가서 약을 다 버리고 아빠한테 비밀로 하자. 응?”별이는 심유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바닥에서 일어난 후 슬리퍼를 끌면서 욕실로 총총 달아갔다.반쯤 열린 문 사이로 심유진은 별이가 허태준한테 고자질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아빠! 엄마가 또 말을 안 들어요! 약을 안 먹겠대요! 약을 슬그머니 버리겠대요!”심유진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 아들놈을 괜히 키웠어.일 분 후 허태준은 별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허태준의 차가운 시선으로
심유진의 몸은 흠칫하였다.심유진은 무의식적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발을 움직이자마자 등은 물방울이 가득 맺힌 문에 닿았다. 얇은 셔츠는 금세 젖었다. 면으로 짜인 셔츠는 피부에 닿았고 재질의 훌륭한 통기성은 허울이 되었다.안개 속에 허태준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준수한 얼굴도 점점 또렷해졌다.심유진은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구석에서 벌벌 떨었다.“오, 오지 마요.”심유진은 떨린 목소리로 경고했다.“발은 다 나았거든요. 허태준 씨의 도움이 필요 없어요.”허태준은 말없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몇 초 후 그녀한테 손을 내밀었다.“와봐.”그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심유진은 손을 이미 문고리에 올려놓았다. 머릿속은 재빨리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다.허태준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기 전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심유진은 경황실색하여 고막이 터질 정도로 소리 질렀다.허태준의 시선은 덤덤히 그녀의 얼굴에 머물면서 그녀한테 귀띔했다.“조용히 해. 별이를 놀래킬라.”심유진은 즉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내려줘요!”그녀는 그의 귓가에 이를 악물고 공기와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허태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그는 제멋대로 욕조 옆 걸상에 앉았다. 심유진을 품에 안은 채 조심히 그녀의 양말과 슬리퍼를 벗겨냈다.심유진은 발가락과 발끝을 겨우 걸칠만한 덧신을 신고 있었다. 공기 중에 노출된 발목은 이미 얼어서 보라색을 띠고 있어 하얗고 긴 다리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허태준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속눈썹 틈새로 심유진은 그의 불만을 볼 수 있었다.심유진은 잘못한 것을 알고 가만히 있었다. 그의 화를 돋우어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초래할까이다.“내일에는 어그부츠를 신고 출근할게요. 제일 긴 어그부츠요!”심유진은 제기했다.허태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위로 올렸다.하루 종일 하이힐을 신었고 방금 전 지하철역에서 몇백 미터를 걸어왔기에 심유진의 장딴지
”고마워요.”심유진이 말했다.허태준은 이마를 찌푸렸다.별이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허태준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별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허태준을 교육하기 시작했다.“아빠, 엄마한테 괜찮다고 말해야죠!”허태준은 심유진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별이는 기뻤다. 하지만 심유진은 등 뒤가 차가워 나는 것 같았다.그녀는 급히 우유를 마시고 컵을 팽개친 채 도망가듯 안방으로 갔다.“잘게요! 다들 일찍 자요!”별이는 도망가는듯한 심유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엄마는 다 컸는데 왜 아직도 철이 없죠?”허태준은 부드러운 눈을 하고 별이의 고개를 어루만졌다.“엄마는 철이 안 들어도 괜찮아. 별이랑 아빠가 엄마를 보호하면 돼.” **아마도 우유의 작용인지 심유진은 빠르게 잠이 들었다.하지만 한밤중에 추워서 깼다.두터운 오리털 이불은 그녀의 몸에 잘 덥혀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꿈결에 차 던진 것이 아니었다.심유진은 따뜻해지려고 몸을 움츠리고 두 팔로 자신을 꼬옥 안았다. 하지만 뼛속부터 전해져오는 냉기는 그녀를 떨게 했다.처음에는 보일러가 고장난 게 아닐지 의심했다.그녀는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핸드폰을 들고 보일러 밸브를 검사하러 갔다.서재를 지날 때 그녀는 놀랍게도 아래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서재 안에 있던 사람도 밖의 기척을 느낀 것 같았다.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전해지더니 몇 초 후 서재의 문이 열렸다.허태준은 여전히 생활복을 입고 있었다. 눈썹사이로는 예전보다 강한 예리함이 묻어져 나왔다.그의 어깨를 넘어 심유진은 책상 위의 노트북을 보았다. 아마 밤을 새우면서 일을 했나 보다.“왜 아직 안 잤어?”허태준은 물었다.심유진은 점퍼를 더 여미면서 말했다.“보일러가 고장난 것 같아서 보러 가는 중이었어요.”그녀는 얘기할 때 치아가 떨려 아래위 이가 맞부딪혔다.허태준은 의심스러웠다.“보일러가 고장났어?”심유진은 놀
이날 밤 심유진은 제대로 자지 못했다.밤중에 추워서 덜덜 떨다가 또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어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그녀가 깼을 때 방안은 빛 한줄기 없이 어두웠다.그녀는 어렴풋이 천장을 한참 바라보고 나서야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여느 때와 같이 그녀는 습관적으로 옆으로 누워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을 보려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자마자 큰 힘에 의해 잡혀 왔다.심유진은 쓰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찬찬히 보고 나서야 침대 옆에 엎드린 거뭇한 그림자를 발견했다.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검은 그림자가 허태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허태준은 자신의 팔을 깔고 있어 몸이 뒤틀린 채로 두 다리를 쭉 땅에 뻗었다.심유진은 가슴이 아파 허태준과 두 손이 잡힌 채로 허태준을 밀어보았다.“일어나봐요!”허태준은 잠에 깊게 들지 않아 심유진이 부르자마자 눈을 떴다.“깼어?”그는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는 잠에 잠겨 거칠어졌다.심유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허태준은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열은 내린 것 같네.”그는 시름을 놓은 말투로 말했다. 허태준은 두 손으로 침대를 짚어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났다.“더 잘래?”그는 물었다.심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허태준은 창가로 걸어가 두터운 암막 커튼을 열어 그 작은 틈새로 햇빛이 들어오게 하였다. 한줄기 햇빛은 금세 방안을 밝혔다.심유진은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침을 삼켜 목구멍에 물을 묻혔다. 그리고는 급하게 물었다.“몇 시예요? 별이는 학교 갔어요?”밖의 빛을 보니 이르지 않은 것 같았다.허태준은 돌아와서 그녀의 폰을 켰다.“열 시가 다 되어가. 별이는 학교에 안 갔어. 아마도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을 거야.”그녀가 이불을 차던지는 것을 대비해 허태준은 온밤 심유진을 돌보았다. 중도에 해열 패치를 두 번이나 갈아주어 아침 다섯 시쯤 스르르 잠이 들었다.여덟 시가 되어서 별이는 허태준을 찾아왔다. 그는 심유진의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