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대표도 왔어?”“허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허 대표님, 지난번에 경주에서 만났었죠. 저는... “...육윤엽이 오늘 초대한 하객은 대부분 아시아계 사람이었다. 일찍 이민 했어도 대부분 한국에서 장사를 하고 있기에 다들 자연히 허태준을 알았다.사람들의 시선은 순식간에 전이되었다. 방금전까지 천생연분으로 불리던 두 사람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이 사태에 불쾌감을 보이지 않았다.심유진은 멍하니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허태준을 바라보았다. Mike 엄은 당황하였으나 이내 반짝이는 눈으로 허태준을 바라보았다.그는 옷맵시를 단정히 하고 급히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기억난 듯 돌아서서 심유진을 바라보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저기..., 혹시 허 대표님한테 인사하러 가지 않겠어요?”그는 물었다.“네?”심유진은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Mike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의식하자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에요. 다녀오세요.”“네.”Mike 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심유진은 질투가 났다. 허태준의 매력은 어마어마했다. 소개팅남도 자신을 제쳐두고 저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게 하다니.하지만 허태준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그는 사람들을 파헤치면서 앞으로 걸었다.양옆에서 부단히 손을 내밀어와 허태준과 친한척하였지만 허태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시종일관 한곳에 머물렀다.Mike 엄은 한참을 기다려서야 자신의 앞을 지나는 허태준을 만나게 되었다.그는 허태준을 불러세웠다.“허 대표님...”심유진을 대할 때의 여유로움은 온데간데없고 긴장감이 역력했다.더 의외인 것은 허태준은 아까처럼 앞만 본채 사람들을 지나지 않고 걸음을 멈춰 Mike 엄을 위아래 훑어보고 질문하기까지 하였다.“당신은?”Mike 엄은 긴장하였다. “저, 저는...“그는 격동되어 말 한마디 완전히 끝맺지 못했다.“저는 ST 전자 엄정호의 둘째 아들, Mike라고 합니다. 저번
허태준은 오늘 정성 들여 꾸민 것 같았다.몸에 딱 맞게 맞춘 검정색 턱시도는 유난히 기품 있어 보였다. 하얀 셔츠는 살에 딱 달라붙어 팽팽한 가슴근육이 그대로 보였다. 안에 입은 하얀색 정장 조끼는 그의 군더더기 없는 허리 라인을 강조하였다. 허리 아래로는 곧게 뻗은 두 다리가 검정색 정장 바지에 가려져 라인이 그려졌다.허태준은 자잘한 앞머리를 전부 올려 왁스로 고정하여 그윽하고 밤하늘 같은 눈동자를 드러냈다.허태준의 눈을 마주친 순간 심유진은 혼이 뺏긴 것처럼 멍하니 제자리에 서있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웃어 보였다.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허태준은 구석에 서있는 피아니스트를 바라보면서 몇 번 없는 존대어린 말투로 요구를 제기했다.“한 곡 더 연주해 주시겠어요?”피아니스트는 미국 사람이었고 육윤엽의 친구였다. 그래서 이 업계에 발을 내디딘적이 없어 허태준이라는 사람을 몰랐다. 하지만 연회에서 다른 사람이 허태준에 대한 태도를 보니 허태준의 몸값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지체하지 않았다.경쾌한 곡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왔다. 허태준은 심유진에게 신사다운 인사를 하였다. 이윽고 넓은 손바닥이 그녀의 손 옆에 놓여졌다.그는 말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유혹에 넘어간 듯 심유진의 머리는 이미 작동을 멈췄다. 심유진은 자연스레 오른손을 내밀었다.그녀의 손끝이 그의 손바닥에 대이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입꼬리는 더욱 짙어지더니 그는 눈을 깜빡이며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Mike 엄의 매너 손과는 다르게 허태준의 팔은 심유진의 허리를 꽉 감쌌다. 두 사람의 몸은 바짝 붙어졌다. 가슴에 가슴을 대니 호흡마저 힘들었다.심유진은 하이힐을 신었지만 허태준은 심유진보다 머리 절반은 더 컸다. 심유진의 정수리는 허태준의 턱에 대였다. 눈길이 닿는 곳은 허태준의 툭 튀어나온 울대뼈였다.허태준이 침을 삼키거나 살짝 웃을 때면 울대뼈는 같이 진동하였다. 그럴 때마다 심유진의 얼굴은 뜨거워 났
그는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심유진을 가로안았다. 팔뚝은 섬세하게 그녀의 치맛자락을 눌러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홀 안은 다시 웅성거렸다.“심유진 씨가 왜 저러지?”“다친 건가?”“심하게 다쳤나?”“의사를 불러오죠!”...허태준은 여전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심유진한테 물었다.“방이 어디야?”심유진은 아픔을 참으면서 계단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이층이요.”허태준은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갔다.하지만 가는 길에 누군가가 그들의 길을 막았다.육윤엽은 김욱을 데리고 그들 앞에 섰다.“허 대표님.”육윤엽은 웃는 둥 마는 둥 했다. 눈치로 김욱더러 심유진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유진이는 저희가 돌볼 테니 돌아가 보세요.”김욱이 한발 다가서자 허태준은 민첩하게 옆으로 비켜 김욱이 내민 손을 피했다.“제가 위에까지 데려다주죠.”예전과 같은 타협이 아니라 이번에 허태준은 견결히 육윤엽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리고 김욱을 돌아 걸어갔다.육윤엽은 화가 났다. 하지만 하객들 앞이라 풍채를 잃어서는 안 되기에 큰소리치지 못했다.그는 허태준의 멀어져 가는 모습을 눈을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홀로 남아 어쩔 줄 몰라 하는 하객들을 상대했다.“괜찮습니다! 다들 연회를 계속 즐기시죠! 아무 일 없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안고 방으로 들어가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히 눕혔다.그는 그녀의 수백 개 자잘한 보석이 박힌 고급 하이힐을 벗겼다. 그녀의 부어오른 발목을 보자 이마는 또 찌푸려졌다.“미안해.”그는 마음속의 공포감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목소리는 모래처럼 까끌까끌했다.그의 죄책감과 자책은 전부 얼굴에 그려놓은 듯했다.심유진의 가슴은 찡해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허태준의 이마를 손으로 폈다.허태준은 멈칫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심유진의 손끝은 그의 눈썹을 쓸었다. 허태준의 울퉁불퉁한 주름은 펴졌다.“당신 잘못이 아니에요.”그녀의 목소
허태준의 몸은 흠칫했다. 그녀 목에 맞춘 입술은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심유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심유진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그래서 N 시티에는 출장 오신 건가요?”심유진은 나름 가벼운 화제를 꺼내 이 방 안의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허태준은 묵묵부답이었다.심유진은 삼십 초 동안 기다리다가 혼잣말을 이어갔다.“질문도 참..., 출장한다고 얘기했는데.”하지만 몇 초 후 허태준의 묵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그는 별이처럼 얼굴을 그녀의 목에 파묻는 것을 좋아했다. 말할 때면 입술이 그녀의 피부에 닿아 찌릿하고 간지러워 힘들었다.심유진은 몸을 돌려 의혹스레 그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네?”허태준도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 보았다.“출장이 아니야.”허태준은 진지하게 말했다.“널 보러 일부러 온 거야.”심유진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당황해하면서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말투도 극히 부자연스러웠다.“전에 영통할 때 출장 간다고 하지 않았었나요?”“그때 날 찾을 줄 몰랐어. 사실대로 얘기하면 날 못 오게 할 거면서.”허태준은 자신이 거짓말했음을 당당히 인정했다.하은설이 실수로 얘기를 꺼내기 전에 그는 이번 저녁 연회 요청을 받은 적이 없었다.나중에 그는 빙빙 에돌아 김욱한테 물었다. 그제야 육윤엽이 저녁 연회를 빌어 그녀의 신분을 공개한다는 것을 알았다.이것은 심유진 인생에 더없이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보고 싶었다.그래서 그는 미룰 수 있는 업무를 다음 주로 미뤘다. 미루지 못한 임무는 하루를 들여 먹지 않고 쉬지 않고 완성하여 겨우 새벽에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공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유진한테서 영상 통화할 수 있겠냐는 문자가 도착했다.공항에 있다는 것이 발각될 것을 알면서도 난생처음으로 그녀가 먼저 영상통화를 하자고 하니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그런다고 와요?”심유진은
하지만 이내 그녀는 용기가 생겼다.그녀는 Mike 엄과 아무 사이도 아니다. 설사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해도 허태준이 관여할 바는 못 된다.허태준은 심유진의 무엇도 아니다.“흠흠.”문어구에서 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왔다.허태준과 심유진은 일동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김욱은 문어구에 서서 노크하는 척했다.“오빠!”심유진은 구원자를 본 것처럼 눈에 불을 켰다.김욱이 한걸음 다가오자마자 허태준은 사람을 얼려 죽일 것만 같은 눈으로 김욱을 바라보았다.김욱은 살려고 멈춰 섰다. 그리고 심유진과 거리를 두고 말했다.“가족 주치의를 불러왔으니 상처를 보여줘.”“네! 어서 들어오라고 해요!”심유진은 급히 말했다.김욱은 문밖에 대고 소리쳤다.“양 선생님.”가족 주치의는 약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허태준은 이마를 찌푸리고 불쾌하게 물었다.“여의사는 없나요?”심유진은 발을 삐끗했으니 상처를 진단하려면 의사가 직접 손으로 만져야 했다.다른 남자가 그녀의 연약한 피부를 만질 것을 생각하니 허태준은 질투가 나 폭발하기 직전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갈기갈기 찢고 싶어졌다.“없어.”김욱도 어쩔 수 없었다.“가족 주치의는 이분밖에 없어. 양의사는 의술이 상당하셔. 그리고 삼촌과도 오랜 친구니까 허 대표님, 까칠하게 굴지 마세요.”양의사도 이 상황이 우스웠다.“걱정 마세요, 허 대표님. 우리 눈에 환자는 성별이 따로 없답니다. 더욱이 저한테는 마누라와 아이가 있으니 허 대표님이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짓을 안 합니다.”양의사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심유진은 얼굴이 빨개졌다. 허태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양 선생님, 허 대표님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그녀는 허태준을 노려보고 말했다.“허 대표님의 정신은 잘못됐어요!”허태준의 눈가는 몇 번 뛰었다.이 세상에서 그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그녀 하나뿐일 것이다.하지만 허태준은 화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금 기뻤다.양의사는 허태준이 다른 말을 하지 않자 곧바로 심유진한테 다가가 그녀의
양의사는 오래 방에 머무르지 않았다.양의사가 가자마자 심유진은 허태준의 손에서 의료용 알코올을 뺏고 김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오빠!”김욱은 옆에 푸르뎅뎅한 얼굴을 하고 석고처럼 서있는 허태준을 흘끔 보았다. 그리고 허태준의 옆을 지날 때 걸음을 빨리했다.의료용 알코올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김욱은 얼굴을 찌푸렸다. 빨래집게로 코를 집고 싶었다.“잠깐만.”김욱은 침대 머리에서 티슈 두 장을 뽑아 알코올 병을 휘감고 나서야 손에 넣었다.김욱의 반응은 허태준의 반응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심유진의 마음속은 더 복잡해 났다.심유진은 고민하다가 입 모양으로 허태준한테 말했다.“먼저 내려가서 손님들이랑 얘기하고 있을래요? 여기는 오빠가 있으면 돼요.”허태준은 이리로 한번 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아무리 그녀를 위해 일부러 왔다고 하지만 아래층 홀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N 시티 상업계의 엘리트들이었기에 그들과의 교류는 손실 볼 것이 없었다.하지만 허태준의 귀에는 자신을 내쫓으려는 말로 들린다.극도의 자존심은 그 고귀한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자신을 남겨달라고 요청하지 못하게 했다.그는 눈을 드리운 채 대답하였다.“그래.”그리고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문을 나섰다.김욱은 시선이 육중한 문에 가려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허 대표님이 화났네.”심유진도 자연히 느꼈다.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다.그녀가 봤을 때 그녀가 한 일은 허태준이 잘 되라고 한 일인데..., 자신한테 약을 못 바르게 한 것도 허태준의 손에 약을 묻히고 싶지 않아서였고 허태준더러 내려가서 교류하게 한 것도 인맥을 넓히게 하기 위해서였다.“도대체 화낼 게 뭐가 있다고.”김욱한테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후 그녀는 답답해서 물었다.김욱은 허태준이 불쌍해졌다.동생은 너무나도 둔감하였다. 허 대표는 아마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꼴을 적지 않게 당할 것이다.“앞으로 이런 말은 직접 해.”김욱은 상냥히 설명해 줬다.“그리고... ”김욱은 갑자기 얼굴색이 변하더니 차
심유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많이 좋아졌어요.”“다행이네요.”Mike 엄의 말투에는 거리감이 묻어있다. 두 사람이 금방 얘기를 나눌 때보다 더 거리감이 있다.“경험이 풍부하신 정형외과 의사를 아는데 필요하시면 연락해 볼게요.”“됐어요!”육윤엽은 퉁명스레 거절했다.아까 허태준을 위해 변명한 행동이 육윤엽의 심기를 거슬렸다. 그래서 육윤엽은 Mike 엄한테 좋게 말할 수 없었다.“이렇게 작은 병인데 우리 가족 주치의가 치료하지 못할까.”Mike 엄은 멋쩍어하면서 바로 뉘우쳤다.“제가 너무 잘난척했네요.”두 사람이 더 큰 충돌을 일으킬까 봐 심유진은 김욱한테 눈치 줬다.김욱은 금세 알아차리고 Mike 엄을 향해 말했다.“Mike 씨, 방금 제가 올라올 때 NY 그룹임 대표가 찾는 것 같던데, 내려가서 만나 뵙지 않겠어요?”Mike 엄도 금세 알아차렸다.“네.”그는 재빨리 대답하고 얼굴에는 적절한 미안함을 띤 채 말했다.“그럼 저는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육윤엽은 찬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Mike 엄이 떠나고 나서야 그는 말했다.“NY 그룹 임 대표가 우리 유진이보다 중요해? 중요한 걸 파악할 줄 모르네!”“됐어요, 아버지.”심유진은 귀찮다는 듯이 육윤엽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대놓고 말했다.“무슨 생각이신지 다 알아요. 이번 한 번만 말할게요. 더 이상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마세요. 또 한 번 저한테 다른 사람을 갖다 붙인다면 저한테 망신 준다고 하지 마세요.”예전에 몇 번 있은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 때문에 심유진은 집에서 주선하는 소개팅을 유난히 배척했다. 육윤엽이 심 씨 일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도, 육윤엽은 진심으로 심유진한테 잘해준다는 것을 알아도 배척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윤엽이 그녀의 의견 따윈 무시한 채 그녀의 인생에 간섭해도 되는 이유가 못 된다.그녀가 견결하게 나오자 육윤엽은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하기에는 아쉽다.“Mike 엄이
김욱의 질문은 너무 적나라했다. 심유진은 어쩔 바를 몰랐다.“네?”심유진은 눈을 깜빡이면서 넘어가려 했다.“저도 아버지가 너무한 것 같아 일부로 화를 돋웠어요.”“그래서 넌 허 대표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거야?”김욱은 캐물었다.심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손톱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한테 거짓말을 하기 싫었다.김욱은 오랜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나는 네 대답을 알 것 같아.” 그는 담담히 말했다. 시덥잖은 일상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앞으로 삼촌이 무슨 행동을 취하든 내가 도와줄게.”심유진은 고개를 들었다.김욱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표정은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었다.“이 얘기는 삼촌한테 하지 마.”그는 그녀한테 말했다.“아니면 나 쫓겨나.”김욱은 늘 그녀를 친여동생으로 대해줬지만 그들의 관계는 육윤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감정의 두터운 정도를 따지고 보면 김욱과 육윤엽의 감정이 더 깊었다.그녀는 그녀와 육윤엽이 의견 충돌이 있을 때 김욱이 자신을 선택할 줄 몰랐다. 하지만 오늘 그는 이렇게 행동했다.“오빠...”하지만 그녀가 진심을 담아 얘기를 하기도 전에 김욱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내가 널 도와주는 건 삼촌이 이 일에 있어서 잘못 했기 때문이야. 너랑 허 대표를 붙여놓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나도 삼촌을 위해 변명해야겠어. 가끔 삼촌이 독단적으로 행동하지만 삼촌은 이 세상에서 널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야. 이것만은 의심하지 말아줘.”심유진은 울먹이면서 대답했다.“알고 있어요.”“그래.”김욱은 그녀의 발을 자기 무릎에서 내려놨다. 그리고 티슈로 손에 묻은 알콜을 세심하게 닦아냈다.“쯧.”아직 가시지 않은 약 냄새를 맡으면서 김욱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신속히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심유진한테 물었다.“오늘 집에 갈래, 아니면 여기 남아 있을래?”김욱이 한참을 주무른 덕인지 부어오른 발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