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퇴원하잖아?”하은설은 위로했다.“곧 보게 될 테니까 울지마.”“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심유진은 하은설을 노려보았다.“그 얼굴을 하고서는.”하은설은 심유진의 표정을 모방하였다.“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야.”“풋!”심유진은 하은설의 표정 연기에 웃음이 터졌다. 슬펐던 기분은 삽시간에 사라졌다.“토요일에 별이를 데리고 디즈니로 갈 거야.”심유진은 말했다.“어머나!”하은설은 대단한 일이라도 들은 듯했다.“심 대표님이 퇴원해서 출근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디즈니로 간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하은설은 장난이었지만 듣고 있는 심유진은 가슴이 또 찡해났다.심유진은 업무 때문에 아이한테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했다. 심유진이 블루 항공에 출근하게 되면 예전 업무 상태가 될 것이다. 심유진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심유진이 한참 동안 반응이 없자 하은설은 장난을 심하게 친 줄 알고 사과했다.“가슴에 담아두지 마... ”“은설아.”심유진은 정색했다. 하은설은 깜짝 놀랐다.“왜?”하은설의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다. 심유진이 절교하자는 얘기를 할 가봐서였다.“너의 의견을 물어봐야 할 일이 있어.”심유진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까스로 결심을 내렸다.“응?”하은설이 생각했던 반응과는 달랐다. 하은설은 이 초 동안 멈칫하더니 그제야 심유진처럼 정색해서 물었다.“뭔데?”“며칠 전에 허태준 씨가 문서를 줬어. 허태준 씨와 별이의 친자확인 결과였어.”심유진은 평소와 똑같은 말투로 얘기했지만 하은설은 조급해하면서 재촉했다.“그래서 결과는?”“별이가 허태준 씨의 친아들이 맞대.”“Oh! My! God!”하은설은 소리 질렀다.“그래서, 그래서!”하은설은 흥분해서 날뛰었다.“허태준 씨가 별이를 받아들이겠대? 너네 두 사람 재결합하는 거 아니야? 어머 어머! 얼마나 지났다고! 전개가 너무 빠르네!”“진정 좀 해.”심유진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멍멍해진 귀를 막았다.하은설은 호흡을 몇 번이나 가
병원에서의 시간은 항상 늦게 갔다.심유진은 재활 외에 김욱더러 회사의 운영체계라든지 경영 범위라든지 등에 대해 수업하게 했다. 그래야 입사 전 준비를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여유로움이 사라지자 예전처럼 힘들지 않았다.심유진은 일찍 출원하게 해달라고 했고 의사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대신 정기적으로 복진하러 와야 한다고 했고 주의 사항도 적어주었다.심유진이 출원을 하는 날에 육윤엽은 업무를 팽개치고 직접 데리러 왔다.“네 방은 이미 사람을 시켜서 꾸며놓았다. 생필품도 준비해 놓았으니 바로 입주해도 될 거야.”육윤엽은 신이 났다.“유진아, 내가 이날만을 삼십 년 넘게 기다렸단다.”육윤엽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니 심유진은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윤엽의 호의를 거절했다.“저도 제집이 있어요. 별이가 다니는 학교랑도 가깝구요. 그래서... 당분간은 그쪽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육윤엽의 심정을 고려하여 심유진은 당분간이라는 어휘를 썼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주말에는 별이도 휴식하니까 집에 돌아와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육윤엽은 실망하는 표정이었다.“어쩔 수 없지.”육윤엽은 타협했다. 그리고 조건을 달았다.“별이가 다니게 될 초등학교는 내가 고르마. 초등학교에 입학하거든 우리 쪽으로 건너와서 지내려무나.”심유진은 대답했다.“네.”육윤엽의 웃음은 그제야 돌아왔다.**평일 점심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심유진은 문밖 카펫 아래서 하은설이 숨겨놓은 비상열쇠를 꺼내 아파트 문을 열었다.일 년 만에 돌아와서 익숙한 풍경을 보니 심유진은 코끝이 찡해났다.육윤엽과 김욱은 먼저 들어왔다. 그들은 신발장에서 일회용 슬리퍼를 꺼내서 갈아신고 제집 마당을 돌듯 이 작은 아파트를 돌아보았다. 이 아파트는 거실 두 개와 방 세 개로 이루어졌으며 작은 아파트였다.육윤엽은 별이의 방에 제일 오래 머물렀다. 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침대 위에 놓인 인형을 만지작거리다가 책상 위에 놓여진 회화책도 펼쳐보았다.“애는 언제 하교해? 나
육윤엽이 사영은을 버린 것은 아니다. 육윤엽이 죽음과 맞서 싸울 때 사영은이 남몰래 벌인 짓이였다.육윤엽은 사영은을 몇 년이나 찾았다. 두 사람이 또다시 만나기 전까지 줄곧 그녀를 찾고 있었다.심유진의 마음속에 육윤엽에 대한 미움은 이 몇 달간의 지극정성인 보살핌과 관심 속에서 점차 사라졌다. 이제는 미움 대신 가슴만 아팠다.육윤엽은 심유진한테 보상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심유진 또한 육윤엽한테 보상하고 싶었다. 그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사실 별이는 제가 어릴 때랑 많이 달라요.”심유진은 앞으로 다가가 육윤엽의 시선이 멈춰있는 곳을 바라보았다.별이의 오관은 심유진과 허태준의 좋은 점만 모아놓았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저 보면 누구를 닮았는지 말하기 곤란하다.그래서 몇 년 동안 심유진은 별이와 허태준을 연관 짓지 못했다.“제가 어릴 때는 진짜 못났어요. 저를 못 본 것도 어찌 보면 잘된 일이에요.”심유진은 육윤엽을 위로하였다.육윤엽은 심유진을 노려보았다.“얘는 무슨 말을! 네 엄마 아빠가 다 잘났는데 네가 어떻게 못났을 수 있겠니?”심유진은 멈칫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부끄럽지도 않으세요?”김욱도 육윤엽을 거들었다.“삼촌이 젊었을 적 사진이 집에 있는데. 어느 스타 못지않아.”사실 심유진도 육윤엽의 얼굴에서 왕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사실 사영은의 허영심으로는 육윤엽이 어지간히 잘생기지 않고서야 가난하기 그지없는 육윤엽에게 시집가지 않았을 것이다.심유진은 육윤엽이 자기 자랑을 이렇게 할 줄 몰랐다. 육윤엽을 달리 보게 된다.“맞다.”육윤엽은 갑자기 생각났다.“네 어릴 적 사진첩이... 있을까?”심유진 얼굴의 미소는 옅어졌다.“없어요.”심유진이 어릴 때에는 사처에 사진관이 들어섰었다. 심훈은 옛날식 카메라도 여러 대를 샀었다.하지만 심유진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사영은이 심유진을 욕할 때 늘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얼굴만 봐도 재수가
육윤엽은 별이를 빨리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하교 시간이 한 시간 넘짓 남았지만 육윤엽은 심유진을 재촉해서 문을 나섰다.예외 없이 그들이 도착했을 때 유치원 문어구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심유진은 이마를 짚으며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육윤엽은 경비 아저씨와 한참을 얘기하다가 풀이 죽어 돌아왔다.“이 학교 경비는 왜 이렇게 인정이 없어? 학부모가 들어가서 애들이 수업하는 것도 못 보게 해!”육윤엽은 차문을 넘어 심유진한테 푸념했다.“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잖아요.”심유진은 위로했다.“이제 반 시간만 더 기다리면 돼요. 빨리 지나갈 거예요.”육윤엽은 여기서 기다리기만 싫었다. 그래서 김욱더러 근처의 쇼핑몰로 가게 했다. 반 시간도 안 돼 각종 장난감이 트렁크를 가득 메웠다.심유진은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육윤엽은 당당했다.“처음으로 외손주를 보는 건데 좋은 인상을 남겨야 나를 좋아하지.”심유진은 어쩔 수 없었다.“이러다가 별이의 버릇을 잘못 들일 거에요.”“그때 가서 보지.”육윤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심유진의 태양혈은 아파 났다.그들이 다시 유치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하교 시간을 넘었다. 문어구에는 오가는 학부모와 아이들이 있었다.심유진은 사람들이 육윤엽을 밀치게 될까 봐 육윤엽더러 차에 앉아 있으라 하고 자신이 별이를 데려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육윤엽은 한사코 거절하면서 기어이 같이 가겠다고 했다.육윤엽은 걸어가는 내내 긴장하였다. 그래서 심유진한테 끊임없이 질문했다.“별이가 날 좋아할까?”“장난감을 좋아할까?”“날 무서워하지 않겠지?”...심유진은 한번 또 한 번 반복했다.“별이는 아버지를 좋아할 거예요.”**심유진이 별이를 데리러 온 횟수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하은설이 데리러 왔다. 그래서 심유진은 별이를 찾는 데 시간을 좀 들였다.심유진이 올 때마다 별이의 반 아이들은 대부분 떠나고 없었다. 별이는 여전히 얌전하게 의자에 앉아서 블록을 놀고 있었다.별이의 반의 선생님은 심유진을 알고 있었다. 별이가 유치원
차에 탄 후 심유진은 별이의 등을 다독이면서 말했다.“자, 고개 들어.”별이는 그제야 토끼같이 빨간 눈을 드러냈다. 그리고 차 안을 호기심에 차서 바라보았다. 옆에 수상한 할아버지도 바라보았다.“엄마...”별이는 심유진의 팔을 찌르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할아버지는 누구야?”갑자기 자기 얘기가 나오자 육윤엽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나, 나는...”육윤엽은 혀가 마비된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완전한 말을 구사하지 못했다.심유진은 육윤엽의 말을 이어 했다.“이 사람은 엄마의 아버지야. 별이의 외할아버지지.”별이는 재빨리 이 소식을 소화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달콤하게 육윤엽을 불렀다.“외할아버지~”육윤엽의 몸은 흠칫하였다. 눈에는 물기가 가득 찼다. 그는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목이 멘 채로 대답했다.“그래!”자신과 상봉하던 때를 빼고 심유진은 육윤엽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다. 마음이 저릿하더니 심유진은 고개를 숙여 별이와 의논했다.“할아버지는 별이를 좋아하는데, 할아버지가 별이를 안아도 될까?”별이는 낯을 가리지 않았다. 별이는 기대에 찬 눈으로 육윤엽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육윤엽의 몸은 또 한 번 흠칫했다.육윤엽은 눈을 깜빡이더니 눈가의 눈물은 속눈썹에 붙었다.별이는 놀라서 말했다.“엄마! 외할아버지가 울어요!”별이는 안간힘을 들여 심유진의 품을 떠나 육윤엽의 무릎에 앉았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육윤엽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외할아버지, 울지 마요! 제가 맛있는 것을 사줄게요! 저 용돈 많아요! 절반 나눠줄게요, 네?”별이는 육윤엽을 아기 달래듯이 달래줬다. 육윤엽의 눈물은 더 많아졌다.그는 억지로 웃어 보였으나 예쁜 미소는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려왔다.“외할아버지는 별이의 용돈을 갖고 싶지 않아. 그냥 우리 별이를 보니까 너무 기뻐서 그래.”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기쁜데 왜 울어요?”누구도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육윤엽은 재빨리 기운을 차리고 별이를 안고 이야기를
심유진의 눈꺼풀은 뛰었다. 심장이 두근댔다.“그... ”당황해 나자 심유진의 머리는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엉켜졌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자마자 머뭇거렸다.별이도 심유진의 난처함을 알아차렸는지 대신 육윤엽한테 대답했다.“제 진짜 아빠가 아니에요!”별이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흥분했던 기운은 사라졌다.“제가 제일 좋아하는 허삼촌이에요. 저한테 아빠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제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셨어요.”“허삼촌?”육윤엽은 금방 알아차렸다.“허태준 씨?”“네, 허태준 삼촌이에요.”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태준을 닮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눈에는 외로움이 가득 찼다.심유진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마음속의 저울은 슬그머니 허태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육윤엽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했다. 최대한 별이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허태준 씨가 아빠였으면 좋겠어?”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심스레 심유진을 쳐다보면서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였다.육윤엽은 거의 즉시 별이의 마음을 알아챘다.“괜찮아, 먼저 놀고 있어!”육윤엽은 억지로 그렇게 어둡지 않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허삼촌이 언제 올지도 모르니까!”육윤엽은 거의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김욱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나서서 이 화제를 중지시켰다.“별아, 이 아이언맨 아머를 써볼래? 가슴에 불도 켜진다?”별이의 주의력은 금방 빼앗겼다.“좋아요! 너무 멋져요!”김욱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슬그머니 닦으면서 시름을 놓았다.**김욱은 별이를 데리고 방으로 가서 옷을 바꿔입혔다. 육윤엽은 심유진과 거실에 앉아서 얘기하였다.육윤엽은 심유진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별이가 허태준 씨를 아빠라고 부르는데 반대하지 않아?”“반대 해봤지만 효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내버려뒀어요.”심유진은 소심해져서 손안에 든 머그컵을 꼭 잡았다. 눈꺼풀을 드리운 채 자신의 시선을 가렸다.“이런 일을
”그때 가서 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육윤엽은 연회를 여는 일에 있어서는 이골이 났다.“천천히 하면 돼. 언젠가는 습관이 되어야 할 거야.”심유진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재벌 집 딸의 생활에 공포감이 들었다.“지금 후회하면 늦을까요?”심유진은 물었다.육윤엽은 차가운 눈으로 심유진을 노려보았다.“후회? 꿈도 꾸지 마라!”어렵사리 찾은 딸인데 하도 심유진이 그동안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지금까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심유진이 겨우 한발 물러서자 육윤엽은 파죽지세로 행동했다.**심유진은 집에서 휴양하는 날에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매일 아침 하은설과 별이보다 일찍 일어나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다. 그들이 문을 나서면 김욱이 보내온 자료를 보면서 앞으로 맡게 될 업무 내용을 숙지하였다.오후 세 시, 네 시쯤 되었을 때 심유진은 차를 타고 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간다. 심유진의 다리는 아직 다 낫지 않았기에 운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너무 오래 못 본 터라 별이는 예전보다 훨씬 심유진을 따랐다. 심유진이 집에만 있으면 시종 심유진과 붙어있으려고 했다. 그녀한테 매달리고 안으면서 손을 심유진의 몸에서 떼려 하지 않았다.하은설은 못 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신이 질투한다고 강조하기도 했고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도 했지만 결국엔 세 사람이서 한데 엉켜져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목요일 저녁.심유진은 곧 회사에 출근하러 간다는 일을 선포했다. 별이의 기운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심유진은 별이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아파 났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별이가 방에 돌아가서 자자 하은설은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면서 심유진한테 물었다.“한잔할래?”심유진도 가슴이 복잡하여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좋지.”두 여인은 나란히 바닥에 앉아 쇼파에 등을 기댔다.하은설은 맥주캔을 들어 심유진과 건배했다. 그리고 절반을 마셔버렸다.“이렇게 빨리 출근해?”하은설의 시선은
금요일.심유진은 집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자고 싶어서 잔 게 아니라 숙취도 있었고 온밤을 울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알람이 울렸지만 심유진은 듣지 못했다.배고픔에 위가 저릿하면서 아파지자 그제야 심유진은 정신을 차렸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점심 열두 시가 지났다.스크린에는 몇 통의 전화가 떴다. 전부 김욱이 걸어온 것이었다.아마도 오랫동안 응답을 듣지 못한 탓인지 김욱은 카톡으로 통지했다.“두 시에 집으로 갈게.”심유진은 번개같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남아있던 피곤함은 삽시간에 사라졌다.**김욱은 제때 도착했다.심유진은 여전히 호두알만큼 부은 두 눈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김욱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왜 이렇게 된 거야?”“아니에요.”심유진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눈가에 얹은 얼음을 더 세게 눌렀다.“어제저녁에 하은설이 치정극을 보자고 졸라서 봤더니 좀 많이 울었어요.”김욱은 그녀의 말을 믿는다는 뜻으로 대답했다.“응.”“그럼 지금 나갈 수 있겠어?”김욱은 걱정스레 물었다.“아니면 조금 있다가 떠날까?”“아니에요!”심유진은 방으로 뛰어가 서랍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자신의 초췌한 몰골을 가렸다.“가요.”심유진은 신을 갈아신고 씩씩하게 문을 나섰다.그들이 가는 곳은 N 시티에서 제일 유명한 럭셔리 매장이었다.심유진은 이 도시에서 몇 년을 일했지만 가끔 고객들과 쇼핑할 때만이 이곳에 한 번씩 들르곤 했다. 그녀는 거무튀튀한 패딩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매장 입구에 서서 생각하였다.“이러고 들어가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심유진은 육윤엽이 말한 예복을 고르는 곳이 한때 허태준이 그녀를 데리고 간 V.style처럼 상대적으로 폐쇄되고 프라이빗한 곳인 줄 알았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김욱만 볼 수 있는 그런 곳인 줄 알았다.하지만...“이상할 건 뭐 있어.”김욱은 웃으면서 팔을 건넸다.“같이 들어가자.”매장 안은 사람이 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