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다.하루의 업무를 마치고 허태준은 파일을 닫고 펜을 놓았다.옆에 놓인 핸드폰은 울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별이는 두 날 전 유치원에서 조직한 겨울 캠프를 떠났기에 핸드폰을 가지고 갈 수 없어 연락할 길이 없었다.오랜 습관이 바뀌게 되니 허태준은 정신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잃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업무를 했고 생기를 점점 잃어갔다.그는 피곤하여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두 손가락으로 아픈 눈썹 혈을 지그시 눌렀다.12시가 다가오자 통유리창을 통해 여전히 불빛이 환한 옆 건물 인터넷 회사를 볼수 있었다.마음속의 허전함은 조금 가셔지는 듯했다—적어도 이렇게 깊은 밤에 외로운 사람은 허태준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허태준은 여형민에게 전화했다.그날 대회장 주차장에서 여형민을 버린 채 떠난 후로 그에게서 삼십여 통의 전화가 걸려와도 허태준은 받지 않았다. 그 뒤로 여형민은 허태준을 찾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허태준은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 여전히 답장이 없다.전화도 무응답이었다.허태준은 지금 남은 게 시간뿐이었다.그래서 그는 전화를 한 통 한 통 걸었고 문자도 한 통 한 통 보냈다. 심지어 심한 말까지 했다. “전화를 안 받으면 집 앞에까지 찾아갈 거야.”아마도 허태준한테서 광기를 느꼈는지 여형민은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상당히 불친절한 말투였다.“저녁인데 뭐 하는 거야? 여자나 찾지! 나를 왜 귀찮게 해!”그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금방 잠에서 깬 목소리가 아니었다.허태준은 여형민의 분노를 무시한 채 물었다.“술 마실래?”“마시긴 뭘 마셔!”**허태준은 위스키 한 병을 까자마자 룸의 문이 열렸다.여형민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들어왔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 말이다.“미친놈! 이렇게 늦었는데 나를 왜 불러!”허태준은 술이 담긴 잔을 건네면서 말했다.“마셔봐. 비싼 술이야.”비싸다는 말은 마법과도 같아 여형민은 금세 부정적인 정서를 버렸다.그는 천천히 한 모금을 음미하면서 평가를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널 좋아하니까.”허태준의 목소리는 룸 안에 퍼졌다. 은근 질투하는 것 같았다.“누가 나은희를 좋아한대!”여형민은 발칵 뒤집힌 듯했다. 술잔을 탁자에 쾅 하고 놓고 허태준한테 경고했다.“제멋대로 상상하지 마!”하지만 그의 반짝이는 눈과 피날 것 같이 빨갛게 물든 귀는 그의 마음을 폭로하였다.“나도 눈이 있어서 볼 수 있어.”허태준은 피식하더니 금세 정색했다.“나한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여형민의 몸은 흠칫했다.허태준의 말은 바늘처럼 그의 몸을 찔러댔다. 그의 모든 기를 방출한 것 같았다.술을 마시자 그는 용기를 얻었다. 자존심 또한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은 게 아니라...내 마음을 아직 잘 모르겠어.”여형민은 솔직하게 말했다.그는 나은희한테 아직 증오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그녀가 하찮은 수법으로 그를 해치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게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증오했던 마음도 함께 보낸 오랜 시간 동안 점점 옅어만 갔다. 이윽고 무언가 다른,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여형민은 이게 무슨 감정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그는 단지 나은희가 자신을 오해할 때 화가 나고 슬퍼지고 무서워졌다는 감정을 느낄 뿐이다. 나은희가 이혼 얘기를 꺼낼 때 그의 몸속 모든 세포가 반항을 하는 것 같았다.“그게 좋아하는 거야.”허태준은 결론을 내려줬다.다만 이런 좋아하는 마음은 아직 그가 나은희에 대한 습관적인 반감에 가려져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여형민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허태준한테 정곡을 찔리자 그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소화해야만 했다.“좋아한다면 잘해줘.”허태준은 말렸다.“쓸데없는 자존심은 버리고. 마누라가 떠나면 후회하게 될 거야.”“너처럼?”여형민은 곁눈질로 허태준을 보면서 장난스레 웃었다.“나는 너랑 달라.”허태준은 당당했다.“심유진은 날 좋아하지 않아.”그는 그녀를 조사했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얼마나 차갑고 매정하게 대했는지를 잘 알았
무슨 일?“무슨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다.”허태준은 자신을 비웃었다.그래야 그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심유진은 하필 입을 꾹 다물고만 있어 허태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허태준은 또 짜증이 났다.“술이나 줘.”그는 긴 팔을 내밀면서 술잔을 가지려 했다. 여형민은 뒤로 숨으면서 술잔 안의 술을 흘렸다. 두 사람의 옷은 술에 젖었다.질척한 옷감이 피부에 닿자 차가워났다. 허태준은 이마를 찌푸렸다.그는 옷을 벗어 던지고 웨이터를 불렀다.“새것으로 부탁해요.”오늘의 웨이터는 새로 온 사람이었다. 매니저의 귀띔하에 허태준을 기억했지만 여형민은 몰랐다. 이 시각 룸안에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을 한 두 사람을 보자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되니 허태준은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그는 양팔을 안고 여형민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무료했다.여형민은 잘못을 인지하고 더 까불지 않았다.“옷은 내가 빨아줄게.”웨이터는 나가자마자 다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여형민의 빨아주겠다는 말을 듣고 그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웨이터의 머릿속에는 피 끓는 드라마가 스쳐 지나갔다.허태준은 차갑게 웨이터를 바라보았다. 웨이터는 몸을 흠칫했다.그는 미소를 띠면서 물었다.“허대표님, 옷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나요?”허태준은 사이즈를 얘기하였고 웨이터는 받아적었다. 그리고 급히 떠났다.옷이 더러워지자 허태준은 계속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결산하고 웨이터가 보내온 새 옷을 들고 떠나려 했다.여형민은 금세 따라붙었다.“나도 데려다주지?”그는 예쁘게 웃었다.두 사람은 모두 술을 마셨기에 운전을 할 수 없었다. 허태준은 데리러 올 기사가 있었지만 여형민은 없었다.웨이터는 문밖에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 사람은 너무 주동적인 게 아닐까?더 놀라운 것은 허태준이 거절하지 않은 것이다.**경주의 상류층에는 금세 CY 허대표가 게이라는
코를 찌르는 향수냄새에 허태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허태준은 그녀를 밀어내면서 말했다. “꺼져.” 여자들을 옆에 끼고 좋아하던 다른 사람들도 허태준의 목소리에 숨을 죽였다. 대표는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내 기억 좀 봐.” 그는 아가씨들을 내보내고 직원을 불러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 크고 마른 체형의 젊은 남자들이 들어왔다. 20대 정도 돼보였는데 값싼 정장을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한 모습이 무척 느끼했다. 그들은 아까 들어온 여자들처럼 허태준에게 들러붙었다. 허태준은 예상도 못하고 있다가 그들이 자신에게 달라붙고 나서야 화가 나서 몸을 일으켰다. 허태준은 주변사람들의 만류에도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왔다. 허태준은 화장실부터 갔다. 그는 수도꼭지를 틀고 아까 남자들이 입을 맞춘 얼굴을 벅벅 씻어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아까의 그 구역질 나는 상황을 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지만 허태준은 얼굴을 씻느라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대표님?” 놀란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세요?” 허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김욱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허태준이 급히 피했다. 그는 휴지를 뽑아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언제 귀국하셨어요?” 허태준이 침착한 척하며 김욱에게 물었다. 하지만 심장은 계속 거세게 뛰고 있었다. 긴장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주머니에 꽂은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제요.” 김욱이 손을 씻으며 대답했다. “비약회사와의 합작을 논하려고 들어왔어요.” 비약은 무역회사였는데 CY 그룹과도 합작한 적이 있었기에 허태준도 낯설지 않았다. “그렇군요.” 허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유진의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유진의 일에 관해서 허태준은 직접 들은 사실만 믿을 수 있었다. 직접 들은 것이 없다면 그는 계속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욱이
“무슨 일인데?” 허태준이 물었다. 여형민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말했다. “어제 킹 호텔에서 유진 씨를 만났어.” 허태준은 심장이 덜컹했다. 잠시 뇌가 멈춘 것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온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허태준은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여형민은 한번 더 방금 했던 말을 중복했다. “어제 고객님 한 분을 킹 호텔에 모셔다 드렸는데 체크인할 때 유진 씨 오빠를 만났어. 이름이 뭐더라? 김... “김욱.” 허태준이 먼저 대답했다. “그래, 맞아! 그래서 내가 인사를 하려는데 자세히 보니까 옆에 누굴 부축하고 있더라고.” 여형민이 뒤의 말을 이어가지 않아도 허태준은 그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허태준은 손발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심유진이 귀국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젯밤 김욱과 만났지만 그 역시도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거리감은 허태준에게 두려움을 안겨줬다. 그는 이 원인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의자에 걸린 외투를 들고 허태준이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켜서인지 아니면 너무 불안해서인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행히 얼른 테이블을 붙잡았기에 여형민 앞에서 주저앉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여형민이 얼른 달려와서 부축했다. “괜찮아. 나 나갔다 올게. 오늘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 비서한테 대신 전달해 줘. 중요한 일은 일단 부대표한테 전달하고 급하지 않은 건 나 돌아와서 다시 보자고.” “지금 킹 호텔로 갈 거야?” 여형민이 시간을 확인했다. “다섯 시밖에 안 됐어. 유진 씨가 일어나지도 않았겠다.” “집에 가서 씻으려고.” 허태준은 지금 온몸에 술냄새와 향수냄새가 가득했다. 일에 집중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왠지 그 코를 찌르는 냄새가 너무 불편했다. 여형민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같이 갈까?”여형민은 허태준이 순간 흥분해서 심유진을 자극할만한 말을 내뱉을까 봐 두려웠다.
허태준의 집은 킹 호텔과 매우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호텔 주변을 몇 바퀴 빙빙 돌면서 긴장이 조금 가시고 나서야 킹 호텔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호텔 로비로 들어가고 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심장이 뛰었다. 허태준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직원들의 환영을 거부하고 혼자 휴게실 소파에 앉았다. 그는 일부러 시야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사용하는 모든 손님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이렇게 무작정 기다린다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허태준에게는 더욱 쉽지 않았다. 그의 손을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온몸의 근육은 경직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마다 허태준은 한 사람 한 사람 자세히 살펴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다. 허태준이 다급히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다가갔다. 김욱은 심유진보다 먼저 그를 발견하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허대표님?” 심유진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태준을 보는 순간 심유진은 얼굴이 굳어졌다.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허태준은 그 반응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좋은 아침입니다.” 허태준이 억지로 웃었다. “좋은 아침이네요.” 대답한 건 김욱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출근할 때 마침 킹 호텔을 지나고 있는데 어제 여형민이 여기에서 두 분을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제 운을 테스트해 보고자 들어와 봤어요.” 김욱이 장난을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희를 만난 게 행운인가요 불행인가요?” 허태준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행운이죠.” 허태준에게는 엄청 큰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어디 가세요?” 허태준이 화제를 돌렸다. “병원이요.” 김욱이 대답하자 허태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심유진의 다리로 갔다. “무슨 일 있어요?”
사영은이 죽고 난 후 허태준은 병원의 감시인원들을 다 철수했기에 이 중요한 소식을 놓친 것이었다. 허태준은 자신이 조금 더 일찍 알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사영은의 후사는 대충 사람을 붙여서 처리하면 되는 거였기에 심유진이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지금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허태준은 잠시 멈칫하다가 조금의 기대를 품은 채 물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아니요.” 심유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심유진은 한시라도 빨리 허태준을 떼여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허태준은 그 냉정한 말투에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입을 뗄 수 있었다. “알겠어요.” 김욱은 허태준을 살피다가 자리를 뜨면서 낮게 그에게 말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유진이는 강한 애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심유진의 다리는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었지만 저번에 미국에서 만났을 때에 비하면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이제는 혼자 걸을 수 있었지만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했고 오래 걸으려면 아직도 부축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김욱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허태준을 거절한 건 이 원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욱은 몰랐지만 허태준은 잘 알고 있었다. 김욱의 따뜻한 배려에 허태준은 씁쓸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허태준은 주차장까지 같이 가서 그들이 차에 오르는 걸 보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김욱도 차 안에서 허태준이 가는 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 심유진은 여전히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차 시동을 걸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혹시 대표님이랑 싸웠어?” 김욱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사실 김욱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심유진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계속 멍을 때리고 있기도 했고 의사의 권유는 듣지도 않은 채 재활운동의 강도를 높이기도 했으며 말수도 훨씬 적어졌다. 허태준이 그리워서 얼른 회복한 후 귀
하지만 심유진이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사영은은 어쨌든 자신의 친엄마이기에 아무리 그녀를 증오한다한들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해주지 않는 건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심유진은 추워서 몸이 떨리는데도 나가지 않았다. 김욱은 한숨을 쉬며 심유진을 따랐다.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해뒀기에 영안실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사영은 씨 가족 되시죠?” 흰색 가운을 입은 젊은 남성이었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인지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느라 그런 건지 말투나 태도에서 귀찮음이 묻어 나왔다. “맞아요.” 심유진이 얼른 사과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남성이 심유진과 김욱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사영은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분이 오래 기다리셨죠.” 사영은이 세상을 뜬 지도 보름이나 지났다. 심유진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세상을 뜨기 전 한동안 수액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았었기에 사영은은 뼈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유진은 보고 있기가 힘들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남성은 그런 심유진을 비웃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때 김욱이 나서서 말했다. 남성은 잠시 멈칫하다가 김욱의 의도를 알았는지 거만한 태도로 자신의 이름표를 보여주며 말했다. “고소라도 하시게요? 하세요.” 김욱이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입을 열기도 전에 심유진이 그를 말렸다. “죄송해요, 저희 오빠가 좀 충동적이라.” 심유진은 김욱에게 눈치를 줬다. “저희가 어떤 절차를 밟으면 될까요?” 심유진은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남성은 복수를 하려는 건지 일부러 그들을 이리저리 뛰게 만들며 여러 복잡한 자료들을 요구했다. 심유진은 거동이 불편했기에 대부분 자료들은 김욱이 가져왔고 심유진은 지하 1층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에는 한기가 맴돌았다. 심유진은 한참을 추운 복도에 있은 탓인지 나오자마자 재채기를 했다. “감기 걸린 거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