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형민은 간다고 했지만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허태준은 상황 파악이 되었기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여형민은 나은희와 같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연기일 뿐이라도.연회장은 상상처럼 시끌벅적하지 않았다.손님들은 제자리에 앉아있었고 웨이터들은 일사불란하게 음식을 배달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사람은 약간의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여형민과 허태준은 홀을 지나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정씨 부모의 자리는 이미 비어있었다. 나아주머니도 자리에 없었다. 여형민은 그들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다.“재하를 돌보러 병원에 갔습니다.”그는 나은희가 손님들과 어떻게 얘기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손님들이 떠나지 않은것을 보니 아마 곧이곧대로 전부 얘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는 나은희가 나아주버님과 이혼에 관한 얘기를 했는지도 모른다—아직 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녀는 자신보다 상황 파악을 더 잘했다.그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여형민도 마찬가지였다.둘은 누구도 아는체하지 않았고 각자 음식을 먹고 있었다.아마도 아까 그 사건 때문인지 주위 사람들은 그들의 표정에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이 서로 맞지 않아 표정이 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아주버님은 분부했다.“은희야, 조금 이따가 형민이와 함께 테이블마다 술을 따라주거라. 험한 꼴을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하면서.”“네.”나은희는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여형민은 그녀를 흘끔 쳐다보고서 똑같이 무표정으로 대답했다.“네.”**나아주버님은 여형민과 나은희를 위해 생수를 준비했다. 술병에 생수를 담아놓으니 술인지 물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오늘 온 손님들은 많았다. 오십 테이블이나 된다. 그들은 한 테이블 한 테이블 돌아가면서 술을 따랐다. 진짜 술을 마셨다면 아무리 주량이 좋다고 해도 취하고 말 것이다.여형민은 나아주버님의 친절이 고맙지 않았다.그는 웨이터한테 와인 한 병을 달라고 하고 사람들과 한 잔 한 잔 같이 마셨다.중도에 여형민을 조롱하
......여형민은 점점 짜증이 났다.“나랑 나...”그가 입을 열자 마자 허태준은 말을 짤랐다.“우리 둘도 마셔야지.”여형민은 불만스레 허태준을 노려보았다.허태준은 눈빛으로 여형민에게 실수하지 말라는 경고를 날렸다. 술을 마시자 일부러 물었다.“취했어? 옆에 휴식실에서 쉴래?”허태준의 말로 인해 온 테이블의 시선은 여형민에게로 집중되었다.다들 걱정스레 여형민을 바라보았다.큰 아저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은희야, 형민이의 얼굴색이 빨간 것이 걱정되는구나. 아버지랑 얘기해서 먼저 집에 데려가 휴식하게 해야 하지 않겠냐?”여형민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거절했다.“아닙니다. 취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다들 큰 아저씨의 의견에 찬성하는 것 같았다.나아주버님도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여형민이 괜찮다고 하자 친히 이쪽으로 와서 여형민을 타일렀다.“여기는 이제 되었으니 은희랑 먼저 가보거라.”그리고 나은희한테 분부했다.“먹을 것을 포장하게 하였으니 조금 이따가 잊지 말고 챙기거라. 그리고 형민이랑 집에 가보거라.”나은희는 대답했다.“네.”장인어른이 입을 열자 여형민도 말을 들었다. 술잔을 들고 조용히 옆에 서 있었을 뿐이다.**포장된 음식은 나은희의 손에 쥐어있었다.나아주버님은 그들을 위해 차량을 안배했다. 나은희가 찾지 못할까 봐 정차된 위치에 대해 중복으로 여러 번 알려주었다.허태준은 다가가서 그들한테 물었다.“저도 태워주면 안 되나요? 술을 마셔서 운전할 수가 없어서요.”“그래!”나아주버님은 흔쾌히 대답했다.“어디로 가려거든 기사한테 얘기하면 돼. 너를 먼저 보내주라고 할게.”“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허태준은 감사를 표하며 여형민의 팔을 잡았다.“가자.”여형민은 허태준한테 끌려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나은희는 포장한 음식을 들고 그들 뒤를 따라나섰다.“허대표님이 계시니 바래다 주지 않을게요.”나은희는 포장된 음식을 허태준한테 건네주면서 말했다.“아버지 차를 타고 가세요. 주차된 위치는 아버지가 여러 번 얘기해
”네?”허태준의 입에서 죄송하단 말이 나오다니, 나은희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허태준은 다시 한번 반복했다.“죄송합니다.”“뭐가요?”나은희는 의혹이 앞섰다.“오늘 일어난 일은 형민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허태준이 말했다.“다 제가 벌인 일이예요.”그는 옆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일 친한 친구가 자신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는 게 더 싫었다.나은희는 눈을 깜빡였지만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왜죠?”허태준은 결혼식을 파괴할 이유가 없었다.그는 두 신인과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두 가족에도 아무런 원한이 없을 것인데.아무리 생각해도 여형민의 죄를 뒤집어쓰는 것 같은데.“심연희가 더 괴로워하기를 바랐어요.”심연희 얘기가 나오자 허태준의 눈에는 음침함이 스쳐 지나갔다.심연희는 심유진을 다치게 하고 법정이 열리기 전에 사라져 도주범이 되어 추격당했다. 나은희는 허태준과 심유진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허태준이 심유진을 위해 심연희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하지만 이 일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갔다.“애초에 심연희가 정재하를 버린 건데 그 사람이 속상할 게 뭐가 있어요?”나은희의 인상 속에 헤어지면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상대방의 생활은 이미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기에 상대방이 잘살고 있다고 해서 마음이 불편할 일도 없다.하필 심연희는 나은희와 상반되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심연희는 정재하를 차버리고 허태서한테 시집간 후 꿈에 그리던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비참하게 살았기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타격이 심했다.각 매체에서 정재하와 나지희의 행복한 모습을 보게 되니 그녀의 마음은 불공정으로 가득 찼다—나 지혜가 얻게 된 모든 것은 원래 그녀의 것이었다!필경 정재하는 한 마리의 개처럼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그녀가 아니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말이다.하지만 막다른 길에 선 심연희에게 정재하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은희는 몸을 휘청했다. 마음 깊숙이에서부터 희열이 머리를 내밀자마자 나은희는 싹을 잘랐다.여형민이 이혼을 원치 않은 이유는 그녀와 다를 것이다. 그녀는 좋을 대로 해석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할 말은 다 했어요.”허태준은 똑바로 앉고 안전벨트를 맸다.“여형민과 같은 동네에 사니까 집 부근까지 데려다주면 됩니다.”“...네.”나은희는 머리를 흔들면서 쓸데없는 잡생각을 훌훌 털어버리고 입술을 오므린 채 엑셀을 밟았다. 화려한 슈퍼카는 빨간색 번개마냥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면서 주차장을 떠났다.**나은희는 허태준을 동네 문앞에다가 내려놓았다.허태준은 차에서 내리고 나서 주머니에서 무음모드를 해놓은 핸드폰을 꺼냈다.스크린에는 여형민한테서 온 전화뿐이었다. 삼십몇 통이나 되었다. 안 읽은 메세지도 이십여 개나 되었다. 보지 않아도 이 메세지를 누가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허태준은 무시한 채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와 열정적이게 인사를 나눈 경비한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심연희의 사건을 해결하니 해결해야 할 일들이 또 한 건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 시름을 놓기에는 일찍 하다. 남은 일들이 더 성가신 일들이기 때문이다.그중 제일 성가신것은...허태준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심유진은 도대체 언제 자신한테 연락을 줄까?** 심연희가 잡힌 뉴스는 금세 각 웹사이트 메인에 떴다.이 사건과 동시에 일어난 일은 바로 사영은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사건은 폭탄과도 같아 그 영향은 어마어마했다.사영은은 머리를 다쳐 혼수상태에 빠졌고 의사도 식물인간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사영은은 호흡기와 영양액으로 목숨을 부지했다.하지만 어제저녁에 순찰을 돌던 간호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사영은의 호흡기는 누군가에 의해 제거되었고 그녀 침대 옆 계측기에는 아무런 기복이 없는 직선이 그려져 있었다.한차례의 구급을 진행한 후 의사는 정식으로 사영은의 사망을 선고했다.신고를 접수한 경
밤이 깊었다.하루의 업무를 마치고 허태준은 파일을 닫고 펜을 놓았다.옆에 놓인 핸드폰은 울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별이는 두 날 전 유치원에서 조직한 겨울 캠프를 떠났기에 핸드폰을 가지고 갈 수 없어 연락할 길이 없었다.오랜 습관이 바뀌게 되니 허태준은 정신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잃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업무를 했고 생기를 점점 잃어갔다.그는 피곤하여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두 손가락으로 아픈 눈썹 혈을 지그시 눌렀다.12시가 다가오자 통유리창을 통해 여전히 불빛이 환한 옆 건물 인터넷 회사를 볼수 있었다.마음속의 허전함은 조금 가셔지는 듯했다—적어도 이렇게 깊은 밤에 외로운 사람은 허태준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허태준은 여형민에게 전화했다.그날 대회장 주차장에서 여형민을 버린 채 떠난 후로 그에게서 삼십여 통의 전화가 걸려와도 허태준은 받지 않았다. 그 뒤로 여형민은 허태준을 찾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허태준은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 여전히 답장이 없다.전화도 무응답이었다.허태준은 지금 남은 게 시간뿐이었다.그래서 그는 전화를 한 통 한 통 걸었고 문자도 한 통 한 통 보냈다. 심지어 심한 말까지 했다. “전화를 안 받으면 집 앞에까지 찾아갈 거야.”아마도 허태준한테서 광기를 느꼈는지 여형민은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상당히 불친절한 말투였다.“저녁인데 뭐 하는 거야? 여자나 찾지! 나를 왜 귀찮게 해!”그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금방 잠에서 깬 목소리가 아니었다.허태준은 여형민의 분노를 무시한 채 물었다.“술 마실래?”“마시긴 뭘 마셔!”**허태준은 위스키 한 병을 까자마자 룸의 문이 열렸다.여형민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들어왔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 말이다.“미친놈! 이렇게 늦었는데 나를 왜 불러!”허태준은 술이 담긴 잔을 건네면서 말했다.“마셔봐. 비싼 술이야.”비싸다는 말은 마법과도 같아 여형민은 금세 부정적인 정서를 버렸다.그는 천천히 한 모금을 음미하면서 평가를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널 좋아하니까.”허태준의 목소리는 룸 안에 퍼졌다. 은근 질투하는 것 같았다.“누가 나은희를 좋아한대!”여형민은 발칵 뒤집힌 듯했다. 술잔을 탁자에 쾅 하고 놓고 허태준한테 경고했다.“제멋대로 상상하지 마!”하지만 그의 반짝이는 눈과 피날 것 같이 빨갛게 물든 귀는 그의 마음을 폭로하였다.“나도 눈이 있어서 볼 수 있어.”허태준은 피식하더니 금세 정색했다.“나한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여형민의 몸은 흠칫했다.허태준의 말은 바늘처럼 그의 몸을 찔러댔다. 그의 모든 기를 방출한 것 같았다.술을 마시자 그는 용기를 얻었다. 자존심 또한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은 게 아니라...내 마음을 아직 잘 모르겠어.”여형민은 솔직하게 말했다.그는 나은희한테 아직 증오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그녀가 하찮은 수법으로 그를 해치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게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증오했던 마음도 함께 보낸 오랜 시간 동안 점점 옅어만 갔다. 이윽고 무언가 다른,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여형민은 이게 무슨 감정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그는 단지 나은희가 자신을 오해할 때 화가 나고 슬퍼지고 무서워졌다는 감정을 느낄 뿐이다. 나은희가 이혼 얘기를 꺼낼 때 그의 몸속 모든 세포가 반항을 하는 것 같았다.“그게 좋아하는 거야.”허태준은 결론을 내려줬다.다만 이런 좋아하는 마음은 아직 그가 나은희에 대한 습관적인 반감에 가려져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여형민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허태준한테 정곡을 찔리자 그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소화해야만 했다.“좋아한다면 잘해줘.”허태준은 말렸다.“쓸데없는 자존심은 버리고. 마누라가 떠나면 후회하게 될 거야.”“너처럼?”여형민은 곁눈질로 허태준을 보면서 장난스레 웃었다.“나는 너랑 달라.”허태준은 당당했다.“심유진은 날 좋아하지 않아.”그는 그녀를 조사했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얼마나 차갑고 매정하게 대했는지를 잘 알았
무슨 일?“무슨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다.”허태준은 자신을 비웃었다.그래야 그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심유진은 하필 입을 꾹 다물고만 있어 허태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허태준은 또 짜증이 났다.“술이나 줘.”그는 긴 팔을 내밀면서 술잔을 가지려 했다. 여형민은 뒤로 숨으면서 술잔 안의 술을 흘렸다. 두 사람의 옷은 술에 젖었다.질척한 옷감이 피부에 닿자 차가워났다. 허태준은 이마를 찌푸렸다.그는 옷을 벗어 던지고 웨이터를 불렀다.“새것으로 부탁해요.”오늘의 웨이터는 새로 온 사람이었다. 매니저의 귀띔하에 허태준을 기억했지만 여형민은 몰랐다. 이 시각 룸안에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을 한 두 사람을 보자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되니 허태준은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그는 양팔을 안고 여형민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무료했다.여형민은 잘못을 인지하고 더 까불지 않았다.“옷은 내가 빨아줄게.”웨이터는 나가자마자 다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여형민의 빨아주겠다는 말을 듣고 그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웨이터의 머릿속에는 피 끓는 드라마가 스쳐 지나갔다.허태준은 차갑게 웨이터를 바라보았다. 웨이터는 몸을 흠칫했다.그는 미소를 띠면서 물었다.“허대표님, 옷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나요?”허태준은 사이즈를 얘기하였고 웨이터는 받아적었다. 그리고 급히 떠났다.옷이 더러워지자 허태준은 계속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결산하고 웨이터가 보내온 새 옷을 들고 떠나려 했다.여형민은 금세 따라붙었다.“나도 데려다주지?”그는 예쁘게 웃었다.두 사람은 모두 술을 마셨기에 운전을 할 수 없었다. 허태준은 데리러 올 기사가 있었지만 여형민은 없었다.웨이터는 문밖에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 사람은 너무 주동적인 게 아닐까?더 놀라운 것은 허태준이 거절하지 않은 것이다.**경주의 상류층에는 금세 CY 허대표가 게이라는
코를 찌르는 향수냄새에 허태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허태준은 그녀를 밀어내면서 말했다. “꺼져.” 여자들을 옆에 끼고 좋아하던 다른 사람들도 허태준의 목소리에 숨을 죽였다. 대표는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내 기억 좀 봐.” 그는 아가씨들을 내보내고 직원을 불러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 크고 마른 체형의 젊은 남자들이 들어왔다. 20대 정도 돼보였는데 값싼 정장을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한 모습이 무척 느끼했다. 그들은 아까 들어온 여자들처럼 허태준에게 들러붙었다. 허태준은 예상도 못하고 있다가 그들이 자신에게 달라붙고 나서야 화가 나서 몸을 일으켰다. 허태준은 주변사람들의 만류에도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왔다. 허태준은 화장실부터 갔다. 그는 수도꼭지를 틀고 아까 남자들이 입을 맞춘 얼굴을 벅벅 씻어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아까의 그 구역질 나는 상황을 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지만 허태준은 얼굴을 씻느라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대표님?” 놀란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세요?” 허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김욱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허태준이 급히 피했다. 그는 휴지를 뽑아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언제 귀국하셨어요?” 허태준이 침착한 척하며 김욱에게 물었다. 하지만 심장은 계속 거세게 뛰고 있었다. 긴장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주머니에 꽂은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제요.” 김욱이 손을 씻으며 대답했다. “비약회사와의 합작을 논하려고 들어왔어요.” 비약은 무역회사였는데 CY 그룹과도 합작한 적이 있었기에 허태준도 낯설지 않았다. “그렇군요.” 허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유진의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유진의 일에 관해서 허태준은 직접 들은 사실만 믿을 수 있었다. 직접 들은 것이 없다면 그는 계속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욱이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