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은 오후에 별이를 데리러 갈 때 다른 학부모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는 여성들이 그녀를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심 유진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고 있을 무렵 가끔 심유진과 대화를 나눴던 학부모 한명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남편이 정말 잘생겼더라고요. 어쩐지 한 번도 유치원에 안 데려 오더라니. 너무 잘 생겨서 감추고 있던 거였어요?”심유진은 잠시 멈칫했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가 가리키는 남편이 허태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모른 척 하기는.”상대방이 팔꿈치로 심 유진을 툭 치며 살짝 눈을 흘겼다. “아침에 별이가 아빠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요.”심유진은 화가 나면서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해명할 겨를이 없어 그냥 웃어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의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달려 나왔다. 별이는 신유진의 품에 폭 안겼다. 평소보다 더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엄마!”별이의 목소리가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웃을 수 없었다. 별이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 허태준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자 아이 몇 명이 쭈뼛쭈뼛 곁으로 다가와서 별이에게 물었다. “별아, 너네 아빠도 내일 운동회에 와?”별이의 표정이 굳어졌다.“모르겠어. 아빠가 내일 시간이 있는지 봐야 돼.”아이들이 실망해서 흩어지고 심유진은 별이를 붙잡고 물었다.“무슨 운동회?”“가족 운동회.”별이의 대답에 심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국에 있을 때도 별이의 유치원에서는 가끔 이런 가족을 단위로 하는 활동을 조직했었다.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 감정을 더욱 돈독히 다지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심유진은 이런 활동이 싫지 않았다. 확실히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항상 일이 너무 바빴기에 매번 참석할 수 없었고 가끔 하은설이 그녀를 대신해서 참석했다. 그때마다 별이는 하은설을 엄마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다른 학부모들은 하은설과
심유진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별이가 걱정하며 물었다. “엄마, 왜 그래?” 심유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별아, 혹시 내일 운동회에 엄마만 참가하면 별이가 조금 속상할까?” “태준삼촌도 가면 안돼?” “삼촌은 별이 아빠가 아니야.” 심유진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사실대로 별이에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삼촌한테 부탁하는 건 안돼. 삼촌은 널 도와줄 의무가 없어.” 별이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엄마만 와.” 작은 목소리가 아이가 지금 매우 실망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난 안 속상해.” 심유진은 일찍 철이 든 별이를 보며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심유진은 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었기에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차에 올라타서부터 별이는 내내 저기압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있는 별이를 보면서 심유진도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그날밤, 허태준은 또 심유진네 집에 찾아왔다. 이번에 그는 빈손으로 오지도 않았고 혼자 오지도 않았다. 그는 큰 케이지를 들고 있었는데 안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잠들어 있었다. “어제 얘기한 우리 어머니가 키우시는 고양이예요.” 허태준은 케이지를 내려놓고 다시 몸을 돌렸다. “사료랑 이런저런 물품들도 챙겨 왔는데 가지고 올게요.” 별이가 신나서 허태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갈래요!” 별이는 동물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동물을 키우겠다고 심유진에게 여러 번 부탁했었지만 매번 거절당했었다. 원인은 간단했다. 애완동물은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한데 심유진과 하은설은 별이를 돌볼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삼촌, 우리 엄마는 어떻게 설득했어요?’ 허태준을 바라보는 별이의 눈빛에는 존경이 가득했다. 허태준이 웃으며 말했다. “설득한 적 없어. 별이 엄마가 먼저 키우겠다고 한 거야.” 별이
허태준은 별이처럼 긍정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별이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도 없었다. “삼촌이 일단 시도는 해볼게.” 고양이가 쓸 용품들을 가지고 올라가니 심유진은 이미 고양이들을 케이지에서 꺼내 무릎에 올려두고 쓰다듬고 있었다. 코코는 아직 심유진을 기억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고 솜이는 그 깊고 푸른 눈으로 심유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유진은 고양이들을 품에 안은채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뻔했다. 별이는 사료를 내려놓고 심유진 곁으로 가서 신기한 눈길로 고양이들을 바라보았다. “엄마, 만져봐도 돼?”별이가 물었다. 굉장히 온순한 품종인 데다가 심유진은 한동안 고양이를 키운 경험이 있으니 이 두 마리의 성격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유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별이가 기대에 찬 눈길로 손을 뻗었다. 근데 솜이에게 손을 대기도 전에 솜이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별이의 손에 상처를 냈다. 솜이는 많이 놀랐는지 심유진의 무릎에서 뛰여 내려서는 털을 곤두세우고 별이를 경계했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심유진은 얼른 코코를 내려놓고 별이를 품에 안았다. 허태준도 얼른 달려와서 일단 솜이와 코코를 다시 케이지 안에 넣었다. 상처가 깊지 않았기에 아픔이 가시자 별이도 금방 울음을 멈췄다. 비록 고양이들과 별이 모두 광견병 접종을 이미 마친 상태였지만 어쨌든 상처가 났으니 허태준은 혹시 몰라 별이를 병원에 데려갔다. 병원은 낮보다 사람이 적었지만 그래도 반시간 정도 줄을 서고 나서야 진료를 받을수 있었다. 주사를 맞을 때 별이는 또 한 번 울음을 터뜨렸다. 겨우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타자 별이는 2분도 안 돼서 심유진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허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별이 자요?” “네. 잘 시간이에요.” 허태준이 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미안해하며 말했다.“죄송해요.” “네?” 갑작스러운 사과에 심유진은 빨리 반응하지 못했다. “고양이들을 데려
심유진은 허태준에게 화가 나지 않았고 솜이가 밉지도 않았다. “근데요.” 심유진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따님한테 심리상담을 권유해 보는 건 어때요?” 솜이는 코코보다 훨씬 까불기는 했지만 절대 함부로 사람에게 상처를 내는 고양이는 아니었다. 만약 그랬으면 허태준이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유진은 솜이의 이런 이상행동이 허아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유진은 코코와 솜이의 털이 듬성듬성 빠진 곳이 생겼다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가 일부러 잡아 뜯은 것 같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허아리 빼고 없었다. 유치원에서 다른 친구를 괴롭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그냥 집에서 너무 곱게 키워서 밖에서도 그 버릇이 나오는 줄로만 알았는데 만약 동물을 학대한 거라면 그건 심리상의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허태준은 심유진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허태준은 허아리가 이미 정소월 때문에 망가져버렸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미 틀어진 성격을 고치기는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허태준은 허아리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허아리는 정소월과 허태서의 아이였다. 하지만 심유진 앞에서 허아리에 대해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면 심유진이 부정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었다. 허태준도 그 물음에 진지하게 답했다. “할아버지 장례가 끝나면 어머니랑 의논해 봐야겠어요.” “아, 맞다!” 어쩌다 보니 심각해진 분위기하에 허태준이 화제를 돌렸다. “별이가 내일 유치원에서 가족 운동회를 한다던데...” 말을 채 듣지 않고도 심유진은 그 뒤의 말을 맞출 수 있었다. “같이 가달래요?” 허태준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고개를 젓지도 않은 채 눈빛으로 모든 걸 설명했다. 별이가 다치지만 않았다면 심유진은 별이를 깨워서 호되게 혼을 냈을 것이다. 심유진은 허태준을 계속 여기에 있게 하는 것이 맞는 선택인지 고민됐다. “자
허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유진이 한번 마음먹으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허태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 얘기를 꺼낼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저 심유진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살짝 테스트해 본 것뿐이었다. 이로부터 심유진은 여전히 예전과 다름없이 자신에게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예전보다 더 심유진에게 믿음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은 척하는 건 그냥 단기적인 수단일 뿐 심유진의 마음을 완전히 얻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심유진의 생명안전과 비교하면 이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는 심유진 집 앞에서 멈췄다 허태준은 먼저 차에서 내려 잠든 별이를 안았다. 별이는 비몽사몽 정신없는 와중에 허태준 얼굴을 희미하게 봤다. “아빠…” 별이가 잠결에 허태준을 아빠라고 부르며 그 품을 파고들었다. 비록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고요한 밤 그 목소리는 허태준과 심유진 귀에 들어갔다. 허태준은 심유진을 힐끗 쳐다봤다. 차에서 내리던 심유진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표정도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허태준은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는 무슨 말을 하던지 분위기만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 허태준은 별이를 침대에 눕혔다. 근데 별이를 안은 손을 풀자마자 별이의 팔이 허태준의 목을 더 꽉 감았다. 별이가 울먹이며 잠꼬대를 했다. “아빠, 가지 마.” 허태준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등 뒤에서 심유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심유진도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별이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별이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삶이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심유진은 지금 이대로 만족스러웠기에 변화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심유진은 조금 이기적으로 굴어야 할지 아이를 위해 희생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허태준이 몸을 돌려
심유진은 중립을 지키며 객관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유일하게 생각나는 사람은 허태준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면서도 인생 경험이 풍부한 육윤엽이었다. 가족운동회 때문에 유치원 등교시간은 한 시간 늦춰졌다. 허태준은 심유진에게 편하게 출근하라고 하면서 자신이 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심유진은 조금 망설였다. 허태준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심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허태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데려다주고 저는 바로 갈게요.” 심유진은 조금 놀라면서도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고마워요.” 심유진이 고개를 숙였다. 웃음도 매우 어색했다. 심유진은 호텔로 가지 않고 병원에 갔다. 육윤엽이 오늘 퇴원을 하기에 이유가 뭐가 됐던 어차피 가봐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육윤엽은 일찍 일어났기에 심유진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복으로 갈아입고 짐정리도 다한 상태였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심유진이 들어오자마자 육윤엽은 일어나서 그녀를 맞이했다. 심유진이 어제 오겠다고 미리 얘기를 했을 때부터 육윤엽은 그녀를 기다렸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호텔에 출근했다가 다시 올 테니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왔다. “고민이 있는데 잠시 얘기 좀 나눠도 될까요?” 육윤엽의 표정이 금방 진지해졌다. “뭔데요? 심각한 일이에요?” 심유진은 육윤엽이 오해했다는 걸 알고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조금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말씀 좀 여쭐 수 있을까 해서요.” 육윤엽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군요. 말씀해보세요.” “뭐냐면요...” 심유진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떻게 얘기를 꺼낼지 여러 번 연습했는데 막상 얘기하려니 여전히 힘들었다. “저에게 아들이 있다는 거 아시죠?” 심유진은 겨우 말문을 뗐다. 육윤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계획에 없던 아이거든요. 어릴
심유진은 한 번도 친아빠를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첫 순간부터 사영은은 심훈과 같이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사영은이 얘기하던 아빠의 모습밖에 없었다. 무능한 놈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신체가 왜소하고 꾀를 부릴 줄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벙어리라고 했으니 말수가 적거나 내성적인 사람일 수도 있고 돈도 못 벌고 여자 돈만 쓰는 촌놈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옷차림이 소박하거나 깔끔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심유진 기억 속에 아빠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심유진은 사영은의 말들이 정확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심유진은 사영은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허영심과 권력욕이 넘치는 사람이니 만약 친아빠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결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사영은이 이렇게 된 것은 그 실패한 혼인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뭐가 됐던 심유진이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했다. 사영은은 여러 번 심유진에게 친아빠는 이미 가루가 되어 바다에 뿌려졌다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여전히 어느 날 아빠가 짠하고 나타나서 이 지옥 같은 집에서 자신을 구출해 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런 희망이 심유진을 그 긴 세월 동안 버티게 만들었고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었다. 자신이 이런 고통들을 겪었기에 심유진은 별이에게 최대한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아빠의 사랑까지도 자신이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린 아이에게 아빠의 자리란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그래서 별이의 소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전 저희 엄마를 많이 원망해요.” 심유진이 말했다. “만약 그때 제 생각을 조금 더 신경 써줬더라면 제가 지금 더 행복할 수도 있었을텐데.”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육윤엽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실 그는 이미 상상이 갔다.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던 사영은이 딸을 잘 챙겼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심유진에게 직접 들으니 마음이 갈기갈기
심유진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네?” 육윤엽은 그 시선을 피하며 또다시 물었다. “그럼 아빠는요?” 심유진이 멈칫하더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엄마 말로는 아빠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대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그게 평생 아쉬웠어요. 그래서 우리 아들도 저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육윤엽은 또 심장에 고통이 밀려왔다. 심유진에게 내가 바로 친아빠라고 알리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자신을 미워하기라도 할까 봐,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우정을 빌미로 만날 수도 없을까 봐 걱정됐다. “아빠가 그리워요?” “어릴 때는 그랬어요. 특히 슬플 때는 좀 보고 싶더라고요.” 심유진이 예전을 추억했다. 그때의 고통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제는 옅은 그리움만이 남아있었다. “이젠 생각 안 해요. 생각해도 소용이 없잖아요.” “그럼 아빠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받아줄 거예요?” “돌아가신 분인데 제 앞에 나타난다면 그건 귀신이지 않을까요?” 심유진은 육윤엽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채 농담을 던졌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놀라서 울지도 모르겠네요.” “돌아가신 게 아니라면요?” 육윤엽이 심유진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심유진이 멈칫했다. “혹시 뭔가 알고 계시는 거예요?” 심유진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전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육윤엽은 끝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심유진은 왠지 이상한 육윤엽의 태도를 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마침 이때 김욱이 들어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육윤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퇴원수속 다 끝났어요.” 김욱이 육윤엽의 캐리어를 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 것 같아요.” “그래.” 육윤엽은 얼른 일어나 앞장섰다. “이만 가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심유진은 김욱도 옆에 있었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호텔에 두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