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 선생님.”여형민은 전화를 끊고 담임선생님의 말을 중복했다.“어머니가 나서셨으니 심유진과 별이가 억울할 일은 없을 거야.”허태준은 허 아주머니를 백 퍼센트로 믿었다.여형민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았다.“어머님 눈에 허아리는 너의 유일한 자식이야. 너희 집안에 유일한 손주라고. 하나는 몇 년째 아무 소식도 없는 전며느리가 낳은 혈연관계가 없는 아이고 하나는 보고 자란 친손녀인데 누구 편을 들어주시겠어!”허태준은 동요가 되었다. 여형민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내일 어머니가 유치원에 다녀가면 선생님한테 다시 전화해서 물어봐 봐.”“태준아, 아직 문제를 파악 못한 것 같네.”여형민은 허태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응?”허태준은 눈썹을 치켜들고 의혹스럽게 여형민을 바라보았다.“심유진은 허아리가 너랑 정소월의 아이라고 알고 있어. 네 아이가 아니라고 하지 마. 적어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허아리가 별이를 괴롭히는데 네가 밉지 않겠어?”허태준은 불안해졌다.심유진과 얽힌 일이라면 그는 늘 냉정적으로 분석하지 못했다. 뇌리에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지금 이 시각도 그의 머리는 심유진이 그를 미워한다는 생각에 잠겨 불안하고 무서워 정신을 집중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그럼 어떡해야 하는데?”그는 딱딱한 얼굴로 여형민에게 도움을 청했다.심유진 앞에 나타나 허아리가 친딸이 아니라고 얘기를 할 수는 없잖아?그렇게 하면 심유진을 되돌릴 수는 있다지만 몇 해 동안의 희생이 물거품으로 되고 만다.거의 막바지인 시점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여형민도 같은 생각이었다.“참아. 아무것도 하지 마.”그는 말했다.”일이 다 끝나면 그때 심유진한테 가서 사과를 해.”“하지만 허아리가 별이를 물었다는데...”허태준은 마음이 쓰였다.애지중지하는 아들이 그녀와 그의 아들이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나야 네 아들을 대신해서 물어 놓고 싶지. 근데 네 아들이 남자는 여자를
허 아주머니는 미리 담임선생님과 소통을 했다. 정식으로 수업을 하기 전에 담임선생님한테 허아리가 전반 친구들한테 사과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허아리는 교실 앞에 서서 아이들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미안합니다.”허아리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얼굴에는 미안한 표정이었다.“예전에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다. 어른들처럼 생각이 많지 않아 솔직하게 자신의 기분을 표현한다.반아이들은 겁에 질려 허아리를 바라보았다.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허 아주머니는 어색해졌다. 하인 더러 준비해온 간식을 나눠주게 하였다.허 아주머니는 오랜 시간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 손녀딸을 위해서 억지로 웃으면서 아이들을 달랬다.“베이비가 잘못을 인지하였고 할머니도 교육을 했어. 다 착한 어린이들이니까 베이비한테 화내지 말고 친구로 지내면 안될까?”“안 돼요!”한 남자아이가 큰 소리로 거절했다.”엄마가 그랬는데 허아리는 교양이 없댔어요. 저는 허아리랑 친구 하기 싫어요!”허 아주머니의 미소는 굳어졌다.담임선생님은 앞으로 다가가 어색하게 남자아이의 입을 막았다.“조이야,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담임선생님은 허아리가 교양이 없다는 얘기를 처음 듣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학부모들이 다가와 푸념을 할 때 다 그렇게 말했었다. 아이들은 듣고 배우는 것이 빨라 이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사적으로 얘기하는 것과 당사자 앞에서 얘기하는 것은 달랐다.담임선생님은 조심스럽게 허 아주머니의 표정을 관찰하였다. 허 아주머니가 홧김에 원장한테 가서 고소를 하면 자신이 잘릴까 봐여서였다.허아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담임선생님은 잘 알고 있었다. 허아리 아빠의 재력으로 이 유치원을 사들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래서 원장도 그의 눈치를 살피는 터였다.허 아주머니는 생각보다 냉정하셨다.우아한 귀부인은 이 분만에 부드럽고 자상한 모습으로 회복하였다.허아주머니는 조이의 앞에
허 아주머니는 실망스레 말했다.”그러길 바래야죠.”동시에 허 아주머니의 정소월에 대한 불만은 더 커져만 갔다. 그래서 심유진이 더욱 그리워졌다.“참, 반에 별이라는 아이는 새로 전학 온 아이인가요?”허 아주머니는 화제를 별이한테로 돌렸다.“네. 전학 온지 일주일도 안됩니다.”별이 얘기를 하자 담임선생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그 아이는 참 우수한 아이예요. 똑똑하고 말도 잘 듣고 다른 친구들한테도 다정하게 대해서 그를 싫어하는 아이가 없을 정도예요. 그러고보니 베이비가 별이랑 친구를 하게 하면 두 아이 사이도 풀어지고 다른 아이들도 베이비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사실 허 아주머니는 별이를 예뻐하지 않았다. 심유진과 다른 남자의 아이이니 마음이 불편했다.담임선생님이 칭찬을 하니 허 아주머니의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베이비랑 선명한 대비가 되어 허아주머니도 난처해진 것 같았다.허 아주머니는 생각했다. 심유진이 허태준의 아이를 가졌다면 별이와 같지 않을까 하고.하지만...에휴! 허 아주머니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허아리는 변했다.삼반 모든 학생 및 선생님이 발견한 사실이다.일주일동안 베이비는 다른 친구를 때리지도 않고 장난감도 뺏지 않았으며 다른 친구의 얼굴에 침을 뱉지도 않고 다른 친구들의 집이 가난하다고 조롱하지도 않았다.베이비는 별이와 붙어있기 시작했다. 맛있는 것과 재밌는 것을 다 별이에게 주고 대외적으로 별이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선언까지 했다.하지만 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별이는 허아리가 짜증이 났다.별이는 허아리가 옆에 앉는 것도 싫고 자신의 팔을 안는 것도 싫었으며 억지로 이상한 물건을 주는 것도 싫었고 베이비와 친구하는 것도 싫었다.별이는 가끔 생각한다. 허아리가 별이한테 잘 보이려 하는 행동은 자신과 친구를 하고 싶은 것 때문만이 아닐 것이라고.별이는 고민을 심유진한테 얘기했다.심유진도 별이가 허아리와 가깝게 지내는 게 탐탁치 않았다.“그럼 무시하면 돼. 아무것도 받지 말고.”심유
토요일.유치원은 수업을 하지 않는 날이다.별이는 호텔의 키즈 파크가 싫증이 났다. 심유진은 별이의 작은 책가방에 영어 그림책과 태블릿을 넣어줬다. 별이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보내게 할 예정이다.꼭대기층 사무실에 들어가니 심유진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을 느꼈다.별이를 유치원에 보내느라 심유진은 매일 아침 마지막으로 출근한 사람이 되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지 오늘처럼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았었다.심유진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를 켜고 문서를 키면서 켕긴 듯한 표정을 하였다.심유진은 지나치게 엄격한 리더가 아니었다.업무 시간만 아니라면 직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핸드폰을 하던 상관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9시도 되지 않았다.그래서 친절하게 물었다.”무슨 얘기중이었어요?”직원은 조심스레 심유진의 눈치를 보았다. 심유진이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책임을 물으려고 묻는 것인지를 판단하려고 했다.심유진의 시선은 그들의 겁을 먹은 얼굴을 지나 자신의 비서 방연에게로 떨어졌다.방연은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오늘 >제작팀이 저희 호텔에 입주를 해서 다들 들떠 있습니다.”제작팀이 입주하는 것쯤은 객실 매니저가 보고를 해서 알고 있었다.요몇 년래 심유진은 모든 시간을 일과 아이를 키우는데 써서 연예뉴스는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그래서 심유진은 이 사람들이 왜 그토록 흥분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방림은 심유진을 잘 알기에 설명을 했다.”>의 남자주인공은 작년에 핫했던 이정이고 여자주인공은 95년 후에 태어난 화아정이예요. 사람은 지금 모두 인기가 높고 많은 직원들이 그 두 람 팬이예요.”심유진은 직원들이 덕질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덕질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손님한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세요. 입주 체험에 영향 되지 않게요.”심유지는 귀띔을 했다.이 거래는 호텔이
그리고 심유진은 기억하고 있다. 16층에 머무른 손님들은 거의 전부 >제작팀 사람들이라는 것을.심유진은 안내데스크로 가서 시스템의 기록을 찾아보게 하였다.1623번 방은 틀림없이 >제작팀이 주문한 몇십 개 방중의 하나이다.방의 안배는 제작팀이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1623호에 입주한 손님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1623번 방은 스위트 룸이었다. 그래서 그 방에 입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몇몇 주연 외에 제작팀 내 지위가 있는 사람뿐이었다.만약 >의 제작팀이라면...심유진은 마음이 무거워났다. 바로 안내데스크의 무전기로 청소부한테 무전을 걸었다.”오늘 어느 분이 1623번 방을 청소했나요? 어떤 손님이 묵었는지 아시나요?”몇 분 후 누군가 대답했다.”제가 했습니다. 어떤 여배우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분을 모릅니다.”여배우다. 제작팀이 아니다.심유진의 마음은 반쯤 놓였다.그녀는 경비한테 분부했다.”그 남자가 또 다른 방에 들어가면 저한테 바로 통지를 주세요.”심유진이 두려운 것은 여배우가 중간에서 다리를 놔주는 작용을 하는 것이었다.다행히 심유진이 잠들기 전까지 보안처의 전화는 없었다.이튿날 호텔에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상대방은 이렇게 알려주었다.”그 남자는 온밤1623번 방에 있다가 오전8시가 되어서야 나갔습니다.”심유진은 얼떨결에 불륜을 마주친 꼴이 되었다.하지만 그녀와 큰 상관이 없었으니 더이상 손을 대지 않기로 했다.**저녁 여덟 시쯤 심유진은 탕비실에 가서 커피를 따랐다.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몇몇 직원이 일층로비에서 누군가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아홉 시가 되어 떠날 때 심유진은 로비에서 홀 매니저를 만났다. 그래서 무심코 물었다.”저녁에 누가 소란을 피웠다면서요?”홀 매니저의 표정은 복잡했다.”네. 꽤 크게 피우던데요. 간신히 마무리했습니다.”“무슨 일이예요?”심유진은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저희 호텔에 불만이 있는
심연희가 소란을 피운 후 허태서는 다시는 킹호텔에 오지 않았다.하지만 며칠이 안 지나서 각 매체에서 허태서와 아정의 스캔들에 대해 폭로를 했다. 사진은 같은 사진이었고 폭로한 시간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사진은 몰래 찍은 것 같았으며 각도는 옆면이나 뒷면이었다. 전체 화면은 모호하였고 배경도 어두워 두사람의 희미한 윤곽만 볼 수 있었다.측면이 폭로된 사진은 허태서와 아정이라는것을 얼핏 구분할 수 있었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각 매체에서는 두사람의 고화질 정면사진을 대비사진으로 넣었다.여러 사진으로 스토리를 추리해낼 수 있었다. 허태서는 차를 몰고 아정이 퇴근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데려오고 두 사람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으며 허태서의 모 부동산에 가서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허태서는 차로 아정을 제작팀이 묵고 있는 킹호텔로 데려다 주었다.아정은 유명세를 타는 기간이었다. 데뷔를 해서부터 청순 가련한 이미지로 활동을 했지만 갑자기 유부남과 불륜스캔들이 떠 이미지에 타격이 심했다.그리고 사진도 빼도 박도 못했으니 회사와 팬들도 어쩔 수 없어 침묵하고 있었다.허태서는 늘 소문의 중심에 있었다. 정소월과 이혼할 당시 허태준과 정소월의 “불륜”때문에 소문이 자자했고 심연희와 결혼을 하면서 허태준이 총알에 맞아 혼미를 한 사건때문에 이목을 끌었었다.이러한 일들은 가십거리에 관심이 있는 네티즌이라면 다 알았다.인터넷에 허태서와 아정을 “상간남녀”라고 욕하는 소리도 많았다. 그들은 아정의 트위터에 욕을 했고 이로 인해 아정이도 댓글창을 닫았다. 그러자 그들은 YT그룹 트위터계정에 욕을 했다. 관리원도 댓글을 삭제하느라 팔이 아팠다. 그들은 또 >공식계정에 찾아가 욕을 해 아정이를 보이콧했다. 그리고 아정이를 >에서 하차 하라고 요구를 했다.이 소식들을 접하자 심유진의 평온한 마음에는 파장이 일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이 아정때문에 무산이 되면 제작팀이 떠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호텔의 1시즌 매출
심유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별이를 품에 안고 최대한 빨리 유치원에서 나와 차에 올랐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병원에 도착해서 소아과로 예약을 했다. 언제나 사람이 많은 병원인만큼 소아과 역시 사람으로 가득했다. 별이는 어릴 때부터 잘 아프지 않는 건강한 아이였다. 아파봤자 며칠 동안 약만 먹으면 낫는 가벼운 감기 정도였기에 병원에 간 적도 몇 번 없었고 병원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의 초조함 역시 겪어본 적이 없었다. 자기가 아픈 거면 모를까 아이가 아프니 심유진은 더욱 초조해져서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초라도 늦으면 별이의 병이 더 심각해질 것만 같았다. 심유진은 계단을 마주하고 있는 자리에 앉아 오고 가는 환자들을 살펴보며 자기 차례가 오기를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진료실로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모두가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에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렸다. 그때 한 사람이 심유진의 눈길을 끌었다. 분명 여름인데 긴팔 긴바지에 외투를 걸치고 모자와 마스크까지 착용한 채 아주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체형으로 봐서는 여성일 것 같았다. 그 여성은 목을 움츠린 채 바닥만 쳐다보며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기에 심유진이 앉은자리에서 그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눈만 밖에 내놓은 상태였지만 심유진은 그 여성이 심연희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유진은 심연희가 자신을 알아볼까 봐 얼른 고개를 숙이고 별이의 얼굴도 가렸다. 하지만 심연희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심연희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별이가 진찰받을 순서가 왔다. 사실 의사의 시선에서는 수두가 그렇게 심각한 병이 아니었기에 2분도 안 되는 사이에 진찰은 끝이 났고 약을 처방받고 나서 집에 갈 수 있었다. 심유진은 별이를 안은 채 겨우 집까지 도착했다. 옷을 벗기고 샤워를 시키려는데 아까보다 몸에 수
별이를 돌보기 위해 심유진은 본사에 휴가를 몰아서 신청했다. 수두는 심각한 병은 아니지만 굉장히 힘든 병이다. 다행히도 별이가 가려워도 긁지 않고 잘 참아주었다. 심유진은 별이가 잠이 들면 온밤 그 옆을 지켰다. 야근에 익숙해져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며칠을 이어서 밤을 새우니 결국 몸에 무리가 왔다. 심유진은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져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아파트 주민들 대부분이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직장인들이라 점심때는 동네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심유진은 이 장면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에 안심했다. 근데 그때 갑자기 검은색 남성 구두가 시야가 들어왔다. 심유진은 다급히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떨어트린 물건들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괜찮아요?” 심유진이 행동을 멈췄다. 이 세상이 갑자기 정지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리 쪽에 시선이 갔을 때쯤 그 사람의 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그 손을 봐서는 아마 몇 년 동안 해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심유진은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겁쟁이처럼 숨기도 싫었다. 심유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덤덤한 척 고개를 들었다. 허태준은 6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르다 못해 뼈만 남은 것 같은 앙상한 몸에 펑퍼짐한 옷을 걸쳤고 양 볼도 움푹 파여 들어간 상태였다. 만약 그 날카로운 눈매가 여전하지 않았다면 심유진은 못 알아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심유진은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허태준은 심유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 허태준이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바닥이 더러워요, 잡고 일어나세요.” 심유진은 그 손을 2초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자신과 선을 긋는 그 모습에 허태준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비꼈다. 심유진은 겨우 몸을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