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한 공기가 들어와 집안의 온도는 내려갔다. 기름진 냄새도 조금 빠졌다.여형민은 결벽이 없었다.하지만 결벽이 없다 해도 다른 사람이 먹다 남은 쓰레기를 치우기 싫었다.친한 친구면 모를까 하필이면 그가 혐오하는 정소월이었다.“안치워.”그는 쇼파에 털썩 앉고는 편안하게 말했다.“정소월 보고 직접 치우라고 해.”허태준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강요하지는 않았다.정소월은 옷만 갈아입는다고 했는데 그녀가 안방에서 나올 때는 머리도 말렸고 화장도 완성 었다.여형민은 그녀가 왜 한시간 반이나 나오지 않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었다.무장을 마치자 정소월은 아까 보다 더 진정되었고 더 자신이 있어졌다.하지만 탁자위의 쓰레기를 보자 그녀는 또 당황했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빠른 속도로 쓰레기를 처리하고 쓰레기통에 버렸다.다른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시름을 놓고 허태준의 옆에 앉았다.“태준씨!”그녀는 애교를 부리면서 불렀다. 말투에는 탓하는 기색이 있었다.”이제 오면 미리 전화라도 줘요! 치우기라도 하게요! 아니면 창피하잖아요!”허태준은 담담히 대답했다.“그래.”정소월의 시선은 여형민한테 갔다.“변호사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그녀는 웃으면서 물었다.여형민은 대답했다.”여 변호사입니다.”친절하지도 차지도 않았다.정소월은 “네.”하고 오른손으로 자연스럽게 허태준의 다리에 놓여진 왼손을 잡았다.”태준씨한테서 들었어요. 여 변호사님은 이혼전문 변호사라면서요. 패한 적 한번도 없었다구요?”여형민은 맞잡은 두 손을 적나라하게 바라보았다. 욕이 나올 뻔한것을 참았다.이 여자는 담도 크지!하지만...그는 슬쩍 허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연한 척하는 얼굴을 보니 흐뭇해졌다.뿌리는 대로 거둔다더니 속이 다 후련했다!“허대표님이 과찬을 해주셨네요.”여형민은 손사레를 쳤다.”진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운이 좋게 이긴 사례가 좀 많긴 하죠.”“그렇다니 다행이네요.”정소월은 시름을 놓은 것 같았다.”솔직히 제 상황
정소월은 허태준이 닫은 문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두 손은 주먹을 쥐었고 이빨이 부서질 듯 꽉 깨물었다.여형민은 그녀의 이런 행동을 보았다. 하지만 얼굴은 평온한 척하고 아무것도 못본 척하였다.“정 아가씨. 허 대표님이 아가씨께서 심한 가정폭력을 당했다고 하던데요?”그는 화제를 계속하려고 했다.“네.”허태준이 가자마자 정소월이 여형민에 대한 태도는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말할 때는 여형민을 쳐다보지도 않았다.여형민은 그녀의 행동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불편했으나 정소월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에 받아들이도록 했다.그는 생각했다. 정소월이 언젠가 그와 허태준이 제일 친한 친구라는 것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전 변호사한테 제출했던 자료를 저한테도 주시겠어요?”여형민은 물었다.“지금은 저도 없는데요.”정소월은 바로 거절을 했다.”자료가 필요하시면 허 대표님을 찾으세요.”그리고는 여형민이 무슨 반응을 하건 일어나서 손님을 보냈다.”여 변호사님, 제가 지금 피곤해서 그러는데 다른 일이 없으시면 먼저 나가주세요. 이혼에 관해서 나중에 시간을 잡아 얘기하도록 하죠.”프로 변호사다운 이미지가 아니었으면 여형민은 바로 반박을 했을 것이다.피곤해?매일 하는 것도 없이 소파에 누워 티비나 보고 배달이나 시켜 먹는 사람이 피곤하면 얼마나 피곤하다고?그는 마음속으로 욕을 했지만 얼굴에는 딱 좋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그래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그는 명함을 식탁위에 올려놓았다.”정 아가씨께서 이혼에 관해 얘기하고 싶거든 저한테 전화로 예약을 해주시면 됩니다.”“네.”정소월은 대충 얼버무렸다.여형민이 떠나려고 하는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딱 애기 고양이 목소리였다.갑자기 그는 허태준의 집에서 본 그 랙돌 고양이가 생각났다.“아가씨도 고양이를 기르시나요?”그는 놀라웠다.“네.”정소월은 이마를 찌푸렸다. 거실을 한바퀴 돌아보아도 고양이의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하지만 고
그의 질문은 허태준을 난처하게 만들었다.허태준은 곰곰이 생각하고 확실치 않게 대답했다.”아닐...걸? 나랑 있을 때는 한번도 발작한 것을 본적이 없는데.”“근데 아까는...”여형민은 들은 것을 전부 허태준한테 얘기해줬다.“그러니까... 고양이를 찾았다고?”“응.”여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양이를 좋아하지도 않아 보이던데. 찾으면서 욕을 하고. 아주 미친 듯이, 정신이 분열된 것 마냥.”여형민의 말이 떨어지기도 바쁘게 허태준은 차에서 내렸다.“야! 어딜 가?”여형민도 금방 맨 안전벨트를 풀고 급히 따라갔다.허태준은 또다시 정소월의 거처로 왔다.정소월은 이미 고양이를 찾았다. 허태준이 들어갔을 때 그녀는 한손으로 초코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얼굴에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웃음이 띄어 있었다.초코는 고통스레 울부짖었다. 소리는 더없이 처량했고 잘린 네 다리는 허공에서 발길질을 했다.허태준의 호흡은 한순간 멈췄다. 그 짧은 일초동안 심장도 무서워 움직임을 까먹은 것 같았다.이성이 충동을 제쳤다.그는 현관으로 돌아와 금방 들어온 척하면서 정소월의 이름을 불렀다.”소월아?”정소월의 몸은 흠칫했다. 신속히 고양이를 품에 안고 공포스런 표정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태준씨?”그녀의 놀람은 연기가 아니었다.”회사로 간다면서요. 왜 또 왔어요?”“여 변호사가 대구에서 와서 아직 경주의 길이 익숙치 않은 게 생각나서 다시 데리러 왔어.”허태준은 여형민을 핑계로 삼았다. 그는 집안을 바라보고 물었다.”여 변호사는?” “여 변호사는 금방 갔어요!”정소월은 멋쩍게 웃었다.”아직 멀리 못 갔을 거예요. 전화라도 해보시죠?”이때 허태준의 뒤에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헐떡이며 올라온 여형민이 들어왔다.집안의 두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여형민은 금방 도착해서 무슨 상황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의 눈을 바라봤다.“여 변호사님?”허태준은 눈을 크게 뜨고 경악스런 표정을 극대화로 표시했다.”제가
허태준이 걸어가 초코를 안았다.정소월은 긴장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초코가 많이 보고 싶어 했나 봐.”초코의 어색한 모습에 적절한 핑계를 찾으려 했다.“그런가 봐.”허태준은 초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거짓말은 눈치채지 못한 듯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정소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허태준의 품에 안겨 인형처럼 고분고분 해진 초코는 솜털같이 보들보들한 머리로 그의 손바닥에 비벼댔다. 울음소리도 평소와 같았고 애교를 부리는 듯했다.허태준은 고양이를 안고 소파에 다시 앉았고 정소월도 그 뒤를 따라갔다.여형민은 두 사람과 잘 모르는 사이였기에 눈치 없이 끼어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한쪽에 조용히 앉아 허태준이 일을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나쁜 놈!”정소월은 허태준의 어깨에 기댄 채 검지를 내밀어 초코를 꾸짖기라도 하는 듯 이마를 콕 찔렀다.그녀가 손을 거두기도 전에 초코가 발톱을 드러냈다.그러자 정소월은 처량한 비명소리를 질렀다.“악!”그녀의 손은 재빨리 움츠러들었고 허태준이 머리를 숙여 보니 그녀의 손등에는 긁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초코의 품종은 랙돌 품종이었기에 천성적으로 애교가 많고 사람을 잘 따랐다. 사람과 놀기 좋아했지만 장난기 많은 도메스틱 고양이처럼 사람을 할퀴거나 물지는 않았다.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허태준은 가슴이 철렁했다.그는 평소 초코에게 심한 장난도 많이 쳤지만 늘 그에게 달라붙었고 마치 앙심을 품지 않는 것 같았다.그래서 가끔 초코가 너무 둔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초코가 정소월을 이렇게 대한다는 건...이틀 동안 정소월이 초코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허태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태준아...”정소월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그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그의 다리에 엎드려 경계하는 초코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허테준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관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
그녀가 팔을 내미는 모습에 초코는 노려보더니 등을 세우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깜짝 놀란 정소월은 곧바로 손을 뗐다.“경호원도 있잖아, 무서워하지 마.”허태준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위로를 했다.여형민이 손을 들어 시계를 보더니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허 대표, 난 1시 반에 고객이랑 화상 통화가 있어. 먼저 호텔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알겠어.”허태준이 곧바로 대답했다.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정소월에게 말했다.“먼저 가볼게. 병원에 갔다 오면 전화 줘.”정소월은 마지못해 대답했다.“알겠어.”차에 앉자마자 허태준은 초코를 여형민의 다리에 올려놓았다.깜짝 놀란 여형민은 몸을 뒤로했고 두 팔은 위로 올려졌다.“뒷자리에 내려놓으면 안 돼?”그는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허태준은 그런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코웃음을 쳤다.“못난 놈!”그러더니 말을 이었다.“얘는 아주 둔한 고양이야, 사람을 함부로 할퀴지 않는다고.”“거짓말하지 마!”여형민은 눈을 부릅뜨더니 큰소리로 비난했다.“내가 장님인 줄 알아? 방금 정소월 씨를 할퀴는 걸 똑똑히 봤는데!”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초코는 머리를 들더니 그를 향해 울음소리를 냈다. 짙은 파란색 눈에는 온통 멍한 눈빛이었고 마치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여형민은 무서워서 숨을 참은 채 고개를 숙여 초코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초코는 얌전했다.초코는 자신의 발을 핥더니 그의 다리 위에 몸을 웅크린 채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잠들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그는 허태준에게 물었다.“말했잖아, 아무나 공격하지 않는다고.”허태준은 앞만 보며 담담하게 운전했다.“그럼 정소월 씨는 왜 공격한 거야?”얼마 전의 장면을 생각하면 여형민은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무서웠다.“그건 정소월한테 물어봐.”허태준의 눈에는 차가운 눈빛이 스쳤다.“근데 말이야...”여형민은 초코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이 고양이 너희 고양이랑 같은 품종이지? 근데 솔직히 말해서 너희
그 시각, 심유진은 새로 들인 새끼 고양이와 친해지려고 시도하고 있었다.어젯밤 허태준의 반응 때문에 그녀는 놀랐었고 그녀는 자신이 정말 고양이에게 너무 차갑게 대한 건 아닌지 반성까지 했다.그녀가 초코를 위해 샀던 고양이 사료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한 봉지를 뜯어 새끼 고양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조금씩 먹였다.고양이의 감기는 많이 나아진 것 같다. 어젯밤 아파서 아무것도 먹지 않던 녀석이 이젠 한 입에 작은 비스킷 하나씩, 두세 번 씹고는 배 안으로 삼켰다.다 먹고 나면 머리를 들어 초롱초롱하게 심유진을 바라보았고 더 달라는 눈치였다.심유진은 웃으며 고양이의 코를 콕콕 건드렸고 고양이도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애교를 부리며 몸을 비볐다.아기 고양이의 부드러운 울음소리는 심유진의 마음을 녹였다.그녀는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주고는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미안해.”그동안 신경 쓰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저녁 무렵 허태준과 여형민이 돌아왔다.저녁 준비를 하던 심유진은 인기척에 거실로 나갔고 여형민의 품에 안겨 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집에 있던 “초코”는 꼬리를 높이 세운 채 허태준의 발을 둘러싸고 빙빙 맴돌았다.“이 고양이는 뭐예요?”심유진은 어제 정소월이 고양이 집에 고양이를 맡기던 모습을 떠올렸다. 혹시... 이틀 만에 초코가 귀찮아져서 태준 씨에게 다시 데려가라고 한 건가?“유진 씨가 전에 키우던 초코예요.”여형민이 대답했다.심유진의 얼굴에 이내 밝은 미소가 지어졌다.그녀는 재빨리 휠체어를 밀어 여형민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서 초코를 받아 안고는 얼굴을 잡고 뽀뽀를 퍼부었다.허태준은 곁눈질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 모두 바라보았고 마음이 찡해졌다. 그러더니 몸을 숙여 다른 고양이를 안고는 위로하는 듯 만져주었다.그러다 심유진이 이내 그의 곁에 다가와 초코를 들어 두 마리 고양이가 마주 보도록 할 줄이야.“코코야!”허태준이 새로 산 새끼 고양이에게 심유진이 지어준 이름이었다.“언니가 돌아왔어!”그녀의 두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없이 멀쩡하던 고양이가 정소월과 이틀 지낸 후 다리가 부러지다니.그녀는 정소월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허태준도 모르는 일이었다.심유진의 비난의 눈빛을 보며 그는 슬프면서도 약간 화가 났다.그를 정소월과 한편으로 엮다니.정소월이 저지른 모든 나쁜 일에 그의 몫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그렇게 쳐다보지 마.”그가 차갑게 말했다.“고양이 일은 소월이한테 물어보고 만족스러운 대답을 줄 거니까.”심유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제발 그러길 바라요.”의사는 초코의 다리를 치료해 주었지만 집에 보내지는 않았다.“일단 입원해서 지켜보도록 하죠. 주인이 간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치료된 다리가 다시 부러질 겁니다.”그는 깁스를 하고 있는 심유진의 다리를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이 점은 여러분도 잘 아실 거고요.”초코를 병원에 두는 게 마음이 쓰였던 심유진은 병원에서 한참이나 초코의 곁을 지키다 허태준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심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허태준도 입을 다물고 있어서 차 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어색했다.여형민은 심유진을 위로했다.“의사선생님께서 초코의 다리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심유진은 초코가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그저 이번 일이 마음에 걸릴 뿐.집에 돌아가자마자 허태준은 심유진 앞에서 정소월에게 전화를 걸었다.“태준아!”정소월의 느끼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허태준은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초코 다리가 부러졌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알아?”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정소월은 당황했다.시간이 30초 정도 지나서야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초코의 다리가 부러졌다고? 난 몰랐는데! 어느 다리가 부러진 거야? 심각하대?”“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졌어, 조금 심각하다네.”허태준이 대답했다.정소월은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어제 내 방 창문에서 뛰어내릴 때 다친 건가 봐... 어제 밤새 본 적이 없어서 다리를 다친 줄도 몰랐어...
“심유진 씨, 제 탓을 하려면 제 탓만 하세요, 태준이한테 뭐라 하지 말고요!”정소월이 조급해하며 말했다.“태준이는 이번 일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화가 난다면 저한테만 화내세요!”그녀에게 화를 내라고?심유진은 막돼먹은 여자처럼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초코에게 사과하라고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허태준은 여전히 그녀를 믿고 감싸주고 그녀 편을 들며 심유진이 “질투녀”라는 타이틀을 갖게 할 텐데.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심유진의 분노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신 남은 건 깊은 허탈감과 무력감이었다.“저 피곤해요.”그녀가 말했다.“이제 그만 자야 할 것 같아요.”심유진은 자리를 떴지만 허태준의 전화는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정소월이 그에게 묻는다.“태준아, 나 믿어?”팽팽하고 떨리는 목소리였고 그녀의 목소리는 많이 긴장된 것 같았다.허태준의 눈빛이 흐려졌고 안색도 더욱 어두워졌다.“당연히 믿지.”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첼로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옆에 앉아있던 여형민은 입을 삐죽거리며 미리 정소월을 대신해 안타까워했다.이어 정소월은 허태준에게 사탕 발린 말을 한바탕했고 허태준이 피곤하다는 말을 해서야 그녀는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여형민이 몇 번 ‘쯧쯧’하더니 허태준에게 물었다.“내일 유진 씨랑 이혼하려고 그래?”허태준은 그를 한 번 째려보고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그 뒤로 며칠 동안 허태준과 여형민 두 사람은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는 저녁 늦게 돌아왔다. 심유진도 허 아주머니에게서 운전기사를 빌려 매일 비가 오든지 막론하고 코코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 초코의 곁을 지켰고 그러다 보면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허택양은 어디서 소식을 들은 건지 동물 병원에서 몇 번이나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다. 매일 그녀에게 허태준과 정소월의 최근 진도를 알려주며 그녀에게 빨리 이혼하고 고생에서 벗어나라고 말했다.심유진은 평소처럼 그를 무시했고 그저 매일 병원 사무실로 달려가 초코가 언제 퇴원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