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이 시선을 심유진의 손목 쪽으로 돌렸다. 심유진은 그제야 정현우가 잡았던 곳에 빨갛게 자국이 남았다는 걸 발견했다. 피부가 하얀 심유진이었기에 그 흔적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허태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가 심유진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그 사람이 이렇게 만든 거야?”“네.”심유진은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허태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아파?”자신을 바라보는 허태준의 그 깊은 눈동자에 빠져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심유진은 허태준 앞에서 저도 모르게 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깜짝 놀랐다. 그의 앞에서는 조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허태준은 심유진을 소파에 앉히고는 구급상자를 가져와 손목에 연고를 발라줬다. 그리고 그제야 여형민의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정연우가 다른 사람을 불었어. 정현철이 아니야.”“그 사람 말을 믿어?”여형민은 믿지 않았다.“잠시만요.”심유진은 이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정연우요? 정현우가 아니라?”그 두 형제는 차이가 컸기에 그 누구라도 한번 보면 헷갈릴 수가 없었다.“당신이 오늘 만난 사람이 진짜 정연우야. 정현철의 친아들이고.”허태준이 차근차근 설명했다.“정현철은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이니까 아들이 너무 멍청하면 비웃음을 당할까 봐 두려웠겠지. 그래서 조카랑 아들의 신분을 바꾼 거야.”심유진은 그제야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집에 갔을 때 정연우, 아니 정현우가 자신에게 자기 집안에는 비밀이 많다고 했었는데 어쩌면 이 사실이 그 비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심유진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허태준은 여형민의 말에 계속 대답했다.“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딱 보면 알아.”그런 복잡한 가정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허태준은 아버지를 따라 해외에 가서 전문가에게 인간의 미세한 표정으로부터 감정을 읽는 방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여형민도 그 사실이 떠올랐다.“그럼 정연우가 밝힌 사람은 누군데?”허
아리라고 하니 대상이 더욱 명확해졌다. 회사 컴퓨터를 쓴 이유는 아마 발각될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아리 회사 내부에서 정연우와 관계가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으니 말이다.“경찰들이 심연희를 찾아갔나요?”“찾아갔는데 심연희가 부인했대. 정연우가 자길 음해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그 계정을 심연희가 썼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으니 경찰 측에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심연희의 이번 계획은 매우 철저했다. 정연우는 심연희와의 채팅기록을 증거로 제출하려 했으나 아무리 찾아도 휴대폰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말로는 심연희가 보낸 사람에게 카메라를 받은 이후로 한 번도 휴대폰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경찰은 호텔의 모든 cctv를 돌려보며 정연우의 진술에 따라 그 사람을 찾았으나 마스크에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단서는 끊겨버리고 말았다.하지만 유일한 좋은 소식은 정연우의 성폭행미수가 인정되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거나 술기운에 그랬다거나 같은 변명으로는 그 죄를 씻을 수 없었다. 정씨네 집안에서 아무리 훌륭한 변호사를 찾아도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감형을 받는 것밖에 없었다.이미 밤이 깊은 데다가 심유진은 오늘 있었던 일로 꽤나 놀란 상황이니 여형민이 가고 나서 심유진은 크게 하품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허태준이 따뜻한 우유 한잔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마시고 자.”딱 마시기 좋은 온도의 우유를 건네받으며 심유진은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우유 한컵을 말끔히 비웠다. 허태준이 컵을 가지고 나가고 심유진은 5분도 안 돼서 잠이 들었다. 허태준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심유진이 단잠에 빠진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자리를 떴다. 우유에 넣은 수면제 반 알이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허태준은 거실에 앉아 여형민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여형민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웃옷은 미처 입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척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들 허태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여형민은 허태준이 뭔가를 결심하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그런데 왜 내가 연락해? 전화번호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네 약혼녀잖아. 싫으면 말고, 보름이나 미룰 필요도 없고 좋지 뭐.”여형민이 반응할 틈도 없이 허태준은 전화를 끊었다. 여형민은 화가 났지만 겨우 진정하고 나은희에게 연락했다.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심유진은 총지배인에게 불려 갔다. 지배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사무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유진은 바짝 긴장해서 사무실에 들어섰다.“어제 일은 들었어요.”지배인이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다.“억울한 일을 당했으니까 보상을 받는 건 맞죠. 저도 지지해요. 그런데...”멈칫하는 모습이 매우 난감해 보였다.“유진 씨도 호텔 매니저인 데다가 제가 다음 지배인으로 배양하고 싶은 후배니까 제 말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전 유진 씨가 호텔 입장도 조금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라임 엔터는 우리 호텔이랑 몇 년간 합작했었고 많은 수익을 안겨줬으니까...”심유진은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하기 싫었다.“그냥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신지 직접적으로 얘기해 주세요.”지배인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많이 미안한지 눈도 못 마주치는 모습이었다.“정 대표님이 아침부터 찾아오셔서 유진 씨랑 합의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대요. 유진 씨가 소송을 취소하면요.”“거액이 얼마 정도인데요?”심유진은 조금 흥미가 생겼다. 저번에 20억은 절대 안 줬었는데 자기 아들 일에는 얼마를 들일 건지 궁금했다.지배인은 이 물음에 조금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전 잘 모르겠어요. 대표님이랑 얘기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심유진은 그 길로 정현철을 찾아갔다.“가격은 마음대로 불러.”정현철이 시원하게 말했다.“100억으로 하죠.”심유진은 여형민에게서 CY 그룹이
심유진은 지배인에게 잘릴 각오를 하고 정현철의 방을 떠났다. 그녀는 두려울 게 없었다. 정현철은 심유진이 직장을 잃게 만들 수는 있으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심유진의 능력으로 이쪽 영역에서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오후 내내 지배인 쪽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정현철이 지배인에게 말을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지배인이 이 사실을 듣고도 가만히 있기로 한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뭐가 됐던 심유진은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퇴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유진은 제로의 전화를 받았다.“언니, 오늘 시간 있어? 같이 야식 먹을래?”제로가 먼저 밥 먹자고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심유진도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주소 찍어줘.”제로가 고른 곳은 한 훠궈집이었다. 국물이 맑은 것이 조금 싱거워 보이기까지 했다.“요즘 여드름이 너무 많이 나서 좀 싱겁게 먹으려고.”제로가 해석했다.“알레르기 때문인가? 병원은 가봤어?”“아니.”제로가 입을 삐죽거렸다.“화가 나는데 풀 방법이 없으니까 여드름이 올라오나 봐.”“무슨 일 있어?”제로는 게임할 때 빼고는 매우 감정 기복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 정도로 화가 나있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다 그 신인 bj 두 명 때문이야. 열받아 진짜.”제로가 소고기를 크게 집어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신인 bj라고 하면 심연희가 데리고 다니는 애들이었다.“그 둘이 내 실적을 초과한 다음부터 계속 내 앞에서 자랑해대잖아. 아니 그럴 시간 있으면 게임이나 더 연습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못하면서 무슨 낯짝으로 방송을 하는 거지?”심유진이 제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게임방송을 하는데 게임 실력이 가장 중요하지. 심연희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애들이야.”“근데 지금 지원을 빵빵하게 받고 있어. 다 뺏어갔다고.”제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게의 열기 때문인지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알수 없었다
아리는 이번 시합을 라이브로 송출하는 회사였기에 만약 주최 측에 부탁한다면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이율 언니가 물어봤는데 참가인원이 제한되어 있는 데다가 이미 현장 배치가 끝나서 한 명 더 추가하기는 힘들대.”제로는 한숨을 쉬더니 큼지막한 소고기를 심유진 접시 위에 올려줬다.“언니, 많이 먹어. 배 터지게 먹고 그냥 다 잊어버리자.”심유진은 제로와 두 시간가량 식사를 함께 했다. 나올 때는 너무 배가 불러 걷기도 힘들었다.“심연희 아냐?”제로가 심유진의 옷소매를 잡으며 놀라서 물었다. 제로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심연희가 한 남자와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서 남자 얼굴이 제대로 안보였지만 정재하가 아닌 건 확실했다.“뭔가 낯이 익은데...”제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떠올리려고 애썼다. 심유진의 차에 올라타서야 제로는 허벅지를 치며 흥분해서 말했다.“기억났어! 아쿠아 라이브 사람이야! 예전에 날 스카우트 해가려고 찾아왔었는데 거절했거든.”아쿠아 라이브는 유일하게 아리 라이브와 실력을 겨룰만한 회사였다. 국내의 유명한 bj들은 전부 이 두 회사에 모인 거나 다름없었다. 아쿠아의 직원이 심연희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저쪽에서 먼저 심연희를 데려가려고 하는 건지 심연희가 주동적으로 회사를 옮기려고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잠시만... 만약 심연희가 회사를 옮기면 그 bj 둘도 따라갈 거잖아.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가는 거라면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야!”제로는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안 되겠어, 이율 언니한테 얘기해서 우에 반영해라고 말해야지.”심유진이 제로를 말렸다.“이율한테 얘기하는 건 상관없는데 일단 회사 고위층 임원들을 찾아가지는 마. 연희는 그냥 밥 한 끼 먹었을 뿐이고 정말 회사를 옮기는지는 알 수 없잖아. 만약 먼저 얘기했는데 회사를 옮긴 게 아니라면 네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그럼 경기는...”제로는 아직도 경
“저 오늘 심연희 만났어요.”심유진은 내내 이 일을 얘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심연희가 정말로 회사를 옮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아리 측에서도 준비를 해두는 게 맞았다. 그렇지 않으면 시합에 참가하는 기회만 날리는 거니까. 하지만 허태준은 심유진의 뜻을 오해한 것 같았다.“왜? 또 와서 귀찮게 굴었어?”허태준의 눈빛이 매서웠다.“아니요. 그냥 길에서 마주쳤는데 연희는 절 못 봤어요.”그 말에 허태준의 표정도 많이 풀렸다.“그리고?”“아쿠아 라이브의 직원이랑 식사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예전에 제로를 스카우트 해가려고 했던 사람이래요.”심유진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허태준이 말을 이었다.“그래서 그 사람이 심연희도 데려가려는 것 같다고?”심유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태준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이직하는 걸 막아야 할 만큼 심연희가 아리에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하지만 지금 데리고 있는 bj 두 명도 같이 데려갈 수도 있잖아요.”“그 둘은...”허태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정재하가 돈을 하도 많이 때려박아서 실적이 높은 거야. 그 둘의 팬을 다 합쳐도 제로한테는 상대도 안돼.”“하지만 제로가 나가야 하는 경기를 그 둘이 나간대요.”심유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다. 허태준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결국 이게 본론이었구나.”속마음을 들키자 심유진은 조금 당황했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제로가 경기에 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거지?”심유진은 사실 도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못했다. 이런 일로 허태준을 귀찮게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아니요.”“그냥 심연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봐 달라는 거예요. 만약 정말 회사를 옮긴다면 경기에 참가하는 명액은 다시 뺏아와야 하잖아요. 아니면 회사의 손해니까.”“어쨌든 제로를 위해서네.”허태준이 작게 웃었으나 금세 다시 차가운 얼굴을 했다.“일단 알겠어. 심연희는 사람을 붙여서 지켜볼게. 그
허태준의 뜨거운 체온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저는... 그러니까...”심유진은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심유진.”허태준이 침착함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나 꽤 괜찮은 남자야.”심유진은 그 말에 갑자기 전에 허태준의 목에 보였던 립스틱 자국과 진하게 풍겼던 향수 냄새가 떠올랐다. 그걸 생각하니 좀 전의 수줍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조금 화가 났다.“밖에서 따로 만나는 여자도 있으시잖아요.”허태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입꼬리를 올렸다.“질투하는 거야 지금?”“누가 질투를 해요!”심유진은 속마음을 들켜서인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심유진은 잡혔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아무튼 필요하면 그 여성분이나 찾아가세요. 저희는 그냥 동맹관계일 뿐이니까.”혹시 허태준이 다시 잡기라도 할까 봐 심유진은 이 말을 끝으로 신속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허태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건 모르지.”정말 심유진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한마디였다.다음날 아침, 심유진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에서 나왔다. 허태준이 깔끔한 셔츠에 넥타이까지 하고는 꽃무늬 앞치마를 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보였다.“아침 했으니까 먹고 가.”허태준의 미소와 목소리가 너무 따뜻했다. 심유진은 자신이 잠이 덜 깼나 싶어서 허벅지도 꼬집어 보고 눈도 비벼봤으니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심유진이 여전히 멍하니 서있자 허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식탁에 앉혔다.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가 예쁘게 놓여있었다.허태준도 앞치마를 벗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 이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신혼부부 같았다. 심유진은 적응이 되지 않아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경기 참가 자격은 확보했어. 오늘 제로 씨한테 통지할 거야.”허태준은 이 상황에 매우 자연스럽게 어울려져서는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즐겼다. 심유진은 허태준이 이렇게 빨리 일을 처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마...”감사인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심유진은 말을 삼켰다.“
출근할 때 심유진은 허태준이 아침을 포장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형민 꺼야.”허태준이 해석했다. 심유진을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허태준은 여형민에게 문자를 보냈다.“이따가 내 사무실로 잠깐 와. 아침 좀 챙겨 왔으니까.”여형민이 빠르게 답장했다.“오늘 태양이 서쪽에서 솟았나?”허태준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싫으면 말고.”허태준은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져두고 시동을 걸었다. 가는 길에 휴대폰 알람음이 하도 울려서 허태준은 문자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아니야.”“잘못했어.”“대표님, 죄송합니다.”“정말 천사세요.”“이미 사무실에서 대기 중입니다.”“제 인생의 롤모델이십니다.”“안전 운전하십시오~ 사랑합니다~”허태준은 그 문자를 보고 아침에 먹은걸 전부 토해낼 뻔했다. 여형민은 정말로 사무실에서 허태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아침밥을 기다렸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역시 대표님밖에 없습니다.”여형민은 몇 입만에 샌드위치를 해치우고는 커피를 마시면서 감탄했다.“근데 오늘 기분이 좋은가 봐? 내 아침도 챙겨주고.”“그럭저럭.”허태준은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렇게 허태준을 즐겁게 만들수 있는 일이라면 심유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여형민은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왜, 스킨십이라도 했어?”“아니.”“근데 네 말이 맞을 때도 있더라.”“에라이!”여형민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맞을 때도 있더라? 그냥 내가 한 말이 항상 다 맞았는데 네가 안 들었을 뿐이야. 내가 항상 말했지. 여자는 부드럽게, 다정하게 대해줘야 한다고. 근데 네가 하는 행동을 봐. 맨날 정색해서는 독한 말로 사람 힘들게 하고. 이쯤 되면 그냥 멀어지고 싶은 거 아니야?”허태준은 정곡을 찔렸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지나서야 허태준이 입을 열었다.“네가 말한 것처럼 나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아.”여형민은 전에 몰래카메라의 영상을 보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내 생각에는 유진 씨도 널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