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철은 노기등등하여 집에 돌아왔다.“도련님은?” 그는 하인에게 물었다.하인은 난감한 기색을 하고 있었다.“도련님은… 아침 일찍 나가셔서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정현철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는 식탁 위의 재떨이를 땅에 집어 던졌다.“전화해서 당장 들어오라고 해!”“네, 주인님!” 하인은 재빨리 달아났다.유비가 소리를 듣고 계단에서 내려왔다.“왜 그래요?” 그녀는 정현철을 안고 입을 맞췄다. “누가 또 당신을 화나게 했을까?”“누구겠어!”품에 안긴 여인도 그의 화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그 새끼가 진짜 이번에는 날 망하게 했어!”유비는 기뻤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 몸이 상하면 어떡해요? 조금 있다 연우가 들어오면 잘 얘기해 보세요. 또 싸우지 말고.”“회사가 망하게 생겼는데 잘 얘기해?” 정현철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화를 건 하인이 돌아오자 정현철은 소리 높여 물었다.“언제 온대?”하인이 급하게 대답했다.“도련님 금방 돌아오신다고 합니다.”정현철은 소파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유비는 냉큼 정현철에게 붙어서 물었다.“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는데요? 왜 망하게 생겼나요?”정현철은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그 새끼가 돌아오면 말하지!”정연우의 “금방”은 두 시간 후였다.중간에 정현철은 사람을 시켜 전화를 여러 번 했다.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인내심은 곧 바닥이 났다.“왜 이렇게 급하게 부르셨어요?” 정연우는 술이 떡이 되어 돌아왔다. 몸에는 술 냄새와 여인의 분 냄새, 향수 냄새가 났다.정현철은 보다 못해 쏜살같이 가서 정연우의 뺨을 후려갈겼다.정연우는 뺨을 잡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정현철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더 무거워 났다.“물어볼 낯짝이 있어?” 장현철은 욕설을 퍼부었다.“네가 심유진을 얻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허태준의 심기를 건드렸겠냐? 지금 라임의 직원들이 전부 CY에 스카우트되게 생겼어! 프로
유비가 답장했다. “말해보세요.”**정현철은 정연우를 데리고 아침 일찍 대구에 왔다. 하지만 보안 직원한테 잡혔다.“죄송합니다만 방문객 신청 없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정현철은 방문객 신청이 뭔지도 몰랐다.그는 화를 가라앉히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보안 직원에게 얘기했다.“허 대표한테 전해주세요. 라임 엔터의 정현철이 만나 뵙겠다고.”보안 직원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우리는 총재처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허 대표님을 만나시려면 직접 얘기하세요.”정현철은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보안 직원한테 이런 대접을 받다니.하지만 CY 구역에서 그는 화낼 수 없었다.정연우가 옆에서 핸드폰을 잡고 무엇인지 놀고 있자 정현철은 화가 나 정연우의 뒤통수를 쳤다.정연우는 아파서 소리 질렀다.“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나야말로 묻고 싶다! 내가 여기서 사정을 하는데 너는 핸드폰을 놀고 있어?!”정현철은 그의 핸드폰을 낚아채려 했으나 정연우는 큰 몸집으로 힘겹게 피했다.“핸드폰을 놀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는 강력하게 반박했다. “심연희한테 문자를 하는 중이에요!”“심연희?” 그 이름을 듣자 정현철은 멈췄다. “걔한테 왜 문자를 보내는 거냐? 심씨한테 덜 당한 것 같으냐?”라임 엔터가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심씨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심씨 일가는 아직 이용할 가치가 있어 직접 뭐라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모든 불만을 정연우한테 쏟아내는 것이다.“모르셨어요? 심연희도 여기에 다녀요! 방문객 신청을 해달라고 할수 있잖아요!”정연우는 신이 났다.정현철은 심연희가 CY에서 일하는 것을 몰랐다. 정연우의 말을 듣자 그가 반신반의하면서 물었다. “심연희가 여기에서 일을 한다고?”그는 심연희의 학력이나 업무 경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CY와 같은 큰 회사에서는 탑급 인재들만 뽑기 때문에 심연희가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상상이 안 갔다.“아버지, 사람을 너무 얕보지 마세요
허태준은 회의를 마치고 비서한테서 정현철 부자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예상 속의 일이다—사실 예상했던 것보다 며칠이 늦었다.지금 라임 엔터의 중요한 스태프들이 이미 스카우트되어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삼류 영상제작회사 꼴이 날 것이다.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그가 원하는 것은 정씨 집안이 끝장나는 것이다.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앞으로 라임 엔터의 사람들이 오면 보안 직원보고 내쫓으라고 해.”허태준이 싸늘하게 분부했다.비서는 공경하게 “네.”하고 대답했다.**심유진은 호텔 로비에서 정현철과 정현우가 체크인을 하는 것을 봤을 때 잘못 본 줄 알았다.그녀는 그들이 발견하지 못하게 구석에 서서 한참을 관찰했다. 그들이 올라간 후 안내데스크와 확인까지 했다.“아까 그 두 사람… 저희 호텔에 묵는 건가요?”“네. 디럭스방 두 방을 예약하셨어요!” 소미는 쯧쯧거렸다. “방 하나면 둘이 충분히 묵을 수 있다고 했는데 기어코 두 방을 예약하더라고요!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은 저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걸요.”심유진은 이것이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 허태준과 여형민 두 사람도 각각 두 방에 묵었기 때문이다.그녀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얼마 동안 묵는다던가요?”“이틀이요.”소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방 번호는요?”소미는 연이은 방 번호를 불렀다.심유진은 기억하고 이 두 번호의 방은 피해야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저녁 여덟 시, 심유진은 정리를 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고객이 컴플레인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매니저를 만나야겠다고 했다.어시스턴트가 부른 방 번호는 마침 정 씨 부자가 묵은 그중 한 방이었다.심유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전화 너머에 분부했다.“부매니저를 부르세요. 오늘 저녁 당직을 설 거예요. 저는 곧 갈 겁니다.”심연희는 저번에 정씨가에게 심유진의 직업을 소개해 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도 그녀가 로열호텔객실부 매니저
트집을 잡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어찌 됐든 맞서야 했다.**심유진은 벨을 눌렀다. 문을 연 것은 정현우였다.“어이구. 심 매니저가 오셨네요? 이미 퇴근하지 않으셨나요?”정현우는 술 냄새를 풍겼고 녹두 같은 두 눈에는 음탕한 기색이 엿보였다.아무리 혐오해도 이 시각 그는 호텔에 묵는 고객이었기에 심유진은 직업적인 미소를 띠고 조곤조곤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퇴근을 했지만 호텔의 모토가 ‘고객 지상’이라서요. 정현우 씨가 저를 만나겠다고 하니 돌아와야지요.”“허허.”정현우는 차갑게 웃으면서 갑자기 트림을 했다.삽시간에 술 냄새가 풍겨 심유진은 이마를 찌푸렸다.심유진의 어시스턴트는 참지 못하고 손으로 코를 막았다.“왜, 냄새나?”정현우는 웃음을 거두고 심유진의 어시스턴트를 노려보았다.어시스턴트는 손을 내저으면서 대답했다.“아닙니다!”“이리 와봐!”정현우는 명령했다.어시스턴트는 앞으로 다가갔다.“더 가까이!”“좀 더 가까이!”마침내 정현우의 코앞에 멈춰 섰다.그녀의 몸은 굳어있었으며 공포에 질려 몸이 떨렸다.정현우는 입을 하 벌려 숨을 내쉬었다.어시스턴트는 가만히 있었지만 눈시울이 붉어졌다.심유진은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티 나지 않게 어시스턴트를 뒤로 잡아당기고는 화제를 돌렸다.“정현우 씨. 불만 사항은 이미 접수되었습니다.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해 드릴게요. 하나는 다른 방으로 옮겨드리는 겁니다. 룸 타입은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만족하실 때까지요. 만약 모든 룸에 전부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비용을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또한 맘에 드시는 호텔로 안배를 해드릴 겁니다. 비용 또한 저희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두 가지 방안 다 맘에 안 들어.”정현우는 팔을 들어 팔짱을 끼려 하였으나 배가 크고 몸집이 크며 팔이 짧아 가까스로 손바닥을 가슴에 모았다—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그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 한 손으로 방문을 짚고 심유진한테 말했다.“심 매니저님, 제 방으로
지금 심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힘껏 고개를 돌리며 술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 입술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는 이현이 문을 급하게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문 여세요! 아니면 신고할 거예요!”하지만 정현우는 못 들은 척하며 전혀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심유진의 외투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단추들이 다 뜯겨 바닥에 굴러다녔다. 심유진의 가슴이 훤히 노출되었고 정현우는 그 모습을 음흉한 눈길로 바라봤다.“이건 성폭행이에요.”심유진은 떨지 않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를 썼다.“지금 그만두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칠게요. 책임을 묻지 않을게요.”“성폭행?”정현우는 오히려 당당하게 맞받아쳤다.“미래에 내 아내가 될 사람인데 이게 왜 성폭행이지?”“전 이미 결혼했어요!”심유진은 결혼반지를 끼고 오지 않은 것이 매우 후회됐다.“전 그쪽이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에요. 미래 아내도 아니고요!”정현우는 심유진의 말을 믿지 않았다.“내가 없는데 무슨 결혼을 해?”정현우가 고개를 숙여 그녀와 입을 맞췄다.당황, 두려움...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심유진에게 한꺼번에 밀려왔다. 허태준의 차가운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심유진은 오늘 이 일을 허태준이 알기라도 할가봐 두려웠다.심유진이 온 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했으나 정현우에게 그 정도 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유진은 이현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현은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그때 밖에서 열쇠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현우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낮게 거친 말을 내뱉더니 방문의 자물쇠를 잠갔다. 이 기회에 심유진은 힘껏 정현우의 어깨를 깨물었다.정현우는 얇은 잠옷을 입고 있었기에 온 힘을 다해서 물어버리는 심유진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풀었다. 심유진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배 쪽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솜뭉치처럼 정현우에게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이 일격으로 정현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심유진을
시간만 충분히 번다면 이현이 무조건 사람들을 데리고 자신을 구하러 와줄 것이다. 과연 몇 분 지나지 않아 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심 매니저님, 안에 계세요?”이현이 침실의 문을 두드렸다.“저 여기 있어요!”심유진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정현우는 구세주의 등장에 당황하다가 결국 먼저 심유진을 덮치기로 결심한 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정현우가 손잡이를 놓는 순간 심유진이 먼저 빠르게 달려들어 방 문을 열었고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신속히 방으로 진입했다.이현은 울면서 심유진을 껴안았다.“매니저님, 괜찮으세요?”심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아직도 자신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정현우를 쳐다봤다. 경호원들이 정현우의 앞길을 막아준덕에 심유진은 재빨리 침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선생님, 잠시 대기해 주시죠.”경호원들이 막고 있는데도 정현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다 비켜!”정현우는 어떻게든 그들을 밀치려 했으나 다들 꿈쩍도 하지 않았다.“나 이 호텔 vip손님이야! 내가 신고하면 너네 다 사직서 내야 돼!”정현우가 악을 쓰며 말했지만 경호원들은 표정 변화도 없었다. 심유진이 이현에게 물었다.“신고는 했어요?”“네.”이현이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제야 이현의 눈에 형편없이 뜯긴 심유진의 옷이 보였다. 이현은 급히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심유진에게 덮어줬다.“매니저님, 빨리 이거 입으세요.”“고마워요.”심유진과 이현이 미처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소란스러움을 느낀 정현철이 상황을 확인하러 왔다. 그도 심유진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싶었지만 금세 시선을 경호원들에게로 돌렸다.“무슨 일이지?”정현철은 경호원들에게 막혀있는 정현우와 눈이 마주쳤다.“아빠, 나 갇혔어. 빨리 얘네 좀 치워줘.”정현철은 본능적으로 자기 아들이 또 사고를 쳤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경호원들에게 호통쳤다.“빨리 비켜! 아니면 당장 지배인 부를 거야!”이런 스위트룸을 예약한 손님들은 보통 신분이 평범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현철
“죄송해요.”심유진은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제가 원하는 배상은 아마 해주지 못하실 거예요.”만약 정현우가 술김에 벌인 짓이라면 심유진은 호텔을 위해서 협의하에 이 일을 마무리 지었을지도 모른다. 라임 엔터는 여러 번 호텔과 합작을 했었던 회사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심유진은 정현우의 거실에서 소형 몰래카메라를 발견했다. 외형이 평범한 USB와 똑같았기에 다년간 호텔에서 일하며 이런 소형카메라를 많이 접촉해 본 심유진이 아니었더라면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심유진은 그 카메라를 발견하고 식은땀이 쫙 났다. 그녀는 그제야 이 모든 게 정현우가 계획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약점으로 잡고 훗날 무슨 일을 벌렸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정현철은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는 상태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는 아마 바로 총지배인을 불렀을 것이다. 자신의 회사가 이 호텔에 꽤나 많은 수익을 안겨줬으니 총지배인이라면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이 일을 덮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정현철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심유진의 뒤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라임 엔터를 나락으로 보낼 수 있는 허태준이었다. 평생을 바쳐서 세운 회사를 이렇게 쉽게 무너뜨릴 순 없었다.사고만 치고 속만 썩이는 아들이라도 정현우는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쩌면 자식이 하나라도 더 있었더라면 이렇게 아들을 지키기 위해 갖은 치욕을 견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빨리 튀어와!”정현철이 정현우를 향해 소리 질렀다.“아빠...”정현우는 술기운에 어질어질하기는 했어도 이 순간만은 위험을 감지했다. 경호원들은 그제야 자리를 피해 줬다. 정현철이 재빨리 정현우에게 달려가 뺨을 세게 때렸다. 사정없는 손길에 정현우의 얼굴에 붉은 손자국이 진하게 남아버렸다.“누가 네 아빠야. 네 아빠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 오늘 내가 그 아빠를 대신해서 똑똑히 교육해 주마.”다른 사람 앞에서 정현철은 절대 정현우가 자신의 친아들임을 밝히지
“사과해”정현철이 명령했다. 아까 그 난리를 겪은 정현우는 이미 얼굴이 눈물로 범벅진 상태로 더 이상 반항할 엄두를 못 냈다.“죄송합니다.”심유진은 이 사과에서 성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심 매니저, 이 자식을 때리던 욕하던 마음대로 해.”정현철이 말했다. 하지만 심유진은 정현철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에 잠깐 만났을 때의 기억에 의하면 정현철은 자신이 잘못해도 전혀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다.“됐어요.”심유진이 거절했다. 정현우 같은 사람은 아무리 욕하고 때려도 소용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유진이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뭐 하려고?”정현철이 물었지만 심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경호원들에게 부탁했다.“저 두 분 좀 막아주세요. 이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심유진은 방문을 닫고 소형 카메라를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었다. 만약 정현철이거나 정현우가 이 모습을 봤다면 절대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카메라를 확보하고 나가봤더니 정현우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었고 정현철은 그런 정현우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살려주세요.”정현우가 애걸복걸했지만 정현철은 심유진을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더 큰 목소리로 호통쳤다.“나한테 사과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 심 매니저가 다쳤잖아! 그냥 감옥에 가서 평생 썩으면서 다시 태어나.”심유진은 정현철의 말들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화를 풀어주기 위한 사탕 발린 소리일 뿐이었다. 심유진은 그들을 못 본 체 하고는 이현을 데리고 방을 나왔다. 정현철이 쫓아갔으나 금세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심유진이 카메라를 경찰에게 넘긴 지 반시간이 지나서야 경찰들이 현장으로 출동했다. 카메라는 줄곧 켜져 있는 상태였기에 모든 상황이 녹화가 되어있었다. 사건의 경과는 굳이 심유진이 직접 설명하지 않아도 그 영상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현우가 아무리 범행을 부인하더라도 증거가 확실하니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