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누구랑 결혼하던 정씨네 가문과 심씨네 가문의 혼인이 성사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왜 정현우는 이미 자신과 혼인이 결성된 듯 행동하는 것일까? 아까 서재에서 정현철은 분명 정연우와의 결혼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말이다.정현철이 고개를 돌려 정현우를 노려보며 호통쳤다.“닥쳐!”정현철이 허태준에게 말했다.“당연히 연우지. 부모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자식이 몇이나 되겠나. 이미 이 혼사는 나와 유진이네 이모랑 이모부가 다 동의한 일일세. 유진이도 원하고 있고...”“아니요.”심유진이 정현철의 말을 끊었다.“그건 이미 지난 일이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죠.”심유진이 웃으며 허태준의 어깨에 기댔다.“태준 씨가 20억이나 준다잖아요? 그쪽에서는 10억도 할부로 주겠다고 하시고...”정현철이 얼굴이 벌게져서는 심훈과 사영은을 재촉했다.“이 일을 어떻게 할 건데!”“연우 씨랑 결혼해야 돼 넌.”사영은이 말했다. 심유진이 정연우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심연희는 허태준을 넘볼 수가 없었다. 사영은은 꼭 심연희의 앞길을 잘 다져주고 싶었다. 반대로 심유진은 어디 가서 죽든말든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심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훈은 사영은과 심연희가 세운 계획에 대해 모르고 있었지만 그도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다. 허태준의 20억은 큰돈이긴 하지만 자신에게는 한 푼도 차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씨네 집안이 10억을 전부 심유진에게 준다 해도 적어도 결혼 후 두 회사가 합작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 수입이 늘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래요, 그럼.”심유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더 큰 요구를 제기했을 뿐이었다.“그럼 20억보다 더 큰돈을 주세요. 일시불로요.”“심유진, 까불지 마.”사영은이 경고했다.“이건 결혼을 하는 거지 몸을 파는 게 아니야.”심유진이 비웃었다.“제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강제로 하는 게 몸을 파는 거 아닌가요?”“어차피 팔리게 될 거라면 공평하게 경쟁하죠? 가격을 높이 부르는 사람한테 가는 걸로.”심유진
정현철은 끝내 더 높은 가격을 부르지 못했다. 그리고 심훈과 사영은이 붙잡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떠나기 전 정현우는 아쉬워하며 심유진을 바라봤다. 집 문을 나서자마자 정현우가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40억밖에 안 되잖아요... 저번에 영화 찍을 때 사민영 씨한테는 60억이나 줬으면서...”“60억을 준 만큼 몇십억을 번 사람이야. 심유진은 그게 가능해?”정현철이 단호하게 말했다.“이제 이 결혼은 꿈도 꾸지 마. 더 좋은 여자 하나 찾아줄 테니까.”“그런데 전 심유진이 좋아요!”정현우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심유진이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싫어요.”“그럼 네가 직접 40억을 벌어다 주던가! 하여튼 난 1전 한 푼도 그 여자한테 쓰고 싶지 않다.”정현철의 입장이 매우 단호했다.“다른 사람한테 장가가던가 아니면 한평생 가지 말던가 네가 선택해.”“아빠!”정현우가 정현철의 손을 잡고 애원하려 했으나 정현철이 그 손은 뿌리쳤다.“아빠라고 부르지 마! 난 너처럼 못난 아들 둔 적 없다.”정현철은 유비의 부축하에 차에 올라 차 문을 쾅 닫았다. 같이 올라타려던 정현우는 하마터면 문에 부딪힐 뻔했다. 정현우가 비굴한 모습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현우야.”정현철의 부름에 운전을 하고 있던 정연우가 고개를 돌렸다.“네?”“방금 허 씨라고 하던 그 남자에 대해 알아봐. 뭐 하는 사람인지.”정현철의 눈에 독기가 어려있었다.“감히 나한테 맞서? 본때를 보여줘야겠어.”그 시각 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잡으며 이만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한 걸음 떼자마자 사영은이 그 앞을 막아섰다.“이 결혼 난 반대야.”사영은의 태도가 결연해 보였다. 허태준은 그런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이건 저랑 유진 씨 사이의 일입니다.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고요.”허태준이 사영은을 피해 지나가려는데 사영은이 또다시 심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감히 허태준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어 모든 화를 심유진에게 풀었다.“나 화나
마지막 한 계단을 내려왔을 때 위층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엄마!”심연희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언니 빨리 와봐. 엄마가 쓰러졌어.”하지만 이런 말에 당할 심유진이 아니었다.“쓰러졌으면 구급차를 불러야지. 난 왜 불러?”심훈이 1층에 있는 고용인들에게 명령했다.“유진이 못 가게 막아!”여러 명이 심유진에게 달려들었지만 허태준이 다 밀쳐냈다. 다들 벽에 부딪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더 이상 누구도 그들의 앞길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심유진은 허태준의 에스코트하에 안전하게 집을 빠져나왔다.“신분증은 챙겼어?”허태준이 물었다.“네.”심유진이 바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언제든지 도망가기 위해 매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심유진은 신분증부터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다.“다른 일이 없으면 지금 당장 공항으로 가서 가장 빨리 뜨는 비행기로 대구에 가자.”“좋아요.”심유진이 바라던 바였다. 집을 나서니 이제야 불안에 떨던 마음이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심유진은 그제야 허태준에게 물었다.“그런데 여긴 어떻게 왔어요?”아까 비록 대답을 듣긴 했지만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솔직하게 얘기해 주세요.”허태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아까 말한 그대로야.”심유진은 믿지 않았다. 아무리 연락이 안 돼서 걱정된다 하더라도 대구에서부터 여기까지 올 필요까지는 없었다. 심유진은 자신들의 관계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안 믿으면 말고.”허태준은 심유진은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그나저나...”허태준이 심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집안사람들이랑은 죽어도 연락하지 않겠다더니 경주까지는 왜 왔어?”“새아빠한테 강제로 끌려온 거예요.”심유진은 심훈이 했던 모든 일을 사실대로 허태준에게 털어놓았다.“엄마가 자궁암 말기니까 집에 와보라고 했어요. 근데 다 절 강제로 결혼시키기 위해 설치한 덫인 거 같아요. 아마 저희 엄마는 건강하실걸요.”사영은은 확실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가 저번에 대구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다시 대구로 돌아오니 심유진은 방금 전까지 있었던 그 복잡한 일들이 다 잊히는 기분이었다.여형민이 차를 몰고 공항에 데리러 왔다. 여형민이 심유진을 보자마자 물었다.“괜찮아요?”“네.”여형민이 한시름 놓은 듯 한숨을 쉬었다.“그럼 됐어요. 이틀 동안 연락도 안 되고 집에 가봐도 없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다행히 태준이가 유진 씨네 호텔 대표님이랑 연락이 돼서 경주로 돌아갔다는 걸 알게 됐어요.”“휴대폰이 꺼져있어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네요. 근데 오늘 미팅이 있어서 태준이랑 같이 못 가게 됐어요. 미안하게 됐네요.”심유진이 손을 저었다.“뭐가 미안해요, 괜찮아요.”그저 친구 사이에 이렇게 걱정해 준 것만 해도 심유진은 너무 고마웠다. 심유진은 허태준을 힐끗 쳐다봤다. 아까 했던 얘기들이 다 사실일 줄은 몰랐다.“혹시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심유진이 여형민에게 물었다.“곧 주대영 씨 재판이 열릴 거예요. 그때 가서 미리 월차 쓰세요.”“네.”차량이 시내로 진입했다. 집과 가까운 쇼핑몰 근처를 지날 때 심유진이 갑자기 말했다.“차 좀 세워주세요.”“왜요?”“휴대폰을 새로 사야 돼요.”심유진의 휴대폰은 심훈한테 있었다. 급히 나오다 보니 그걸 찾아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다행히 휴대폰에 중요한 내용들을 저장해 놓는 편이 아니다 보니 심훈이 비밀번호를 풀어도 얻을 정보가 없을 것이다.“저도 같이 가요. 일이 끝나면 저녁도 먹고요.”여형민이 상가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주차할 곳을 찾고 있는데 그의 눈에 익숙한 차가 보였다.“어?”하지만 차 번호를 자세히 보고 나서야 여형민은 시선을 돌렸다.“아... 아니네.”“뭐가 아니에요?”심유진이 물었다.“저 스포츠카 말이에요. 전 또 태준이 차인 줄 알았어요.”심유진도 그 차를 바라봤다. 확실히 허태준의 차와 똑같게 생긴 모습이었다. 허태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저 차를 타는 사람이 뭐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까.”여
허태준은 항상 그를 차갑게 대했었지만 이번에는 의외로 먼저 말을 걸었다.“휴가 때 경주에 가지 않은 건가요?”정재하는 허태준의 이런 모습이 적응되지 않아 웃음마저 경직됐다.“아니요, 일이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허태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물었다.“아리 쪽 두 bj들한테 아진 광고를 따내 줬다면서요.”정재하의 얼굴이 붉어졌다.“마침 아진에서 모델을 찾고 있었는데 그 bj들이랑 아는 사이라서 추천해 줬을 뿐이에요. 진짜 될 줄은 몰랐네요.”허태준이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다른 말이었다. 허태준이 조사해 본 데 따르면 정재하는 태하 그룹의 상당한 금액의 자금을 계약금으로 지불하여 이 광고를 따냈다. 하지만 허태준은 그의 거짓말을 이 자리에서 공개해 버릴 생각은 없었다. 광고비중에 4할은 회사의 몫이다. 즉 정재하는 지금 자신에게 돈을 부단히 입금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태준에게는 굉장한 이득이었다.“심연희 씨랑 결혼하게 되면 축의금은 두둑하게 낼게요. 감사 인사는 확실히 해야죠.” 허태준이 웃었다. 정재하는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그나저나 회사 일이 바쁘긴 하겠지만 여자친구랑도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연희 씨 부모님이 자궁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대요. 남은 날이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재하 씨가 옆에 있어 주길 원할 거예요.”정재하가 깜짝 놀라 물었다.“언제 진단을 받으신 거예요?”그는 종래로 심연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몰랐어요? 연희 씨 아버님께서 이 일로 대구까지 찾아와서 유진 씨를 집으로 데려갔었는데요.”“맞아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의도가 뭔지는 몰랐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대표님이랑 저랑 방금 막 경주에서 돌아오는 길이예요.”정재하가 굉장히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알려줘서 고마워요. 저도 바로 경주로 가봐야겠어요.”정재하가 차 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스포츠카가 소리를 냈다.“저 차가 재하씨 꺼예요?”여형민이 물었다.“네.
”네?”심유진이 놀라서 물었다.“제가 그 집에 왜 가요?”허태준은 질문과 맞지 않는 답을 했다.“내일은 혼인신고 하러 가자.”“네? 뭘 한다고요?”심유진은 그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혼인신고.”허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나빠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 심유진의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한 통 들어왔다. 확인해 보니 40억이 카드에 송금되었다고 은행에서 보낸 메시지였다.심유진은 0이 몇 개나 붙어있는지 한참을 세고 나서야 얼마인지가 계산됐다.“40억...”심유진은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 했다.“전 그저 정현철 씨가 포기했으면 해서 40억이라고 한 건데...”심유진은 이 돈을 정말 받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사실 허태준과 결혼할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돈만 받으면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나?”허태준은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 이 말을 했는지, 그녀가 진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아니면...”허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목소리를 낮췄다.“정말 정연우에게 시집가고 싶었던 건가?”“아니요!”심유진이 빠르게 부정했다. 정연우와 결혼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나. 겨우 벗어난 집안을 자기 발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잘 생각해. 정연우가 아니어도 그쪽에서는 다른 사람을 또 찾을 거야. 당신이 결혼을 해야 이 지긋지긋한 굴레가 끝날 거라고.”심유진도 허태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허태준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크지도 않았다. 그저 이런 재벌 집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조금 두려웠을 뿐이었다.사영은이 바로 그 실례이기도 했다. 심유진은 심훈의 부모님이 사영은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던 여신이 집안에서는 하인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어쩌면 그로 인해 사영은도 점점 더 예민해지면서 작은 일에도 크게 화내는 사람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심유진은 사영은처럼 끔찍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결혼은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잖아요.”심유
허태준이 쐐기를 박았다.“우리 둘이 결혼한 사실은 가족들 말고 다른 그 누구도 모르게 할 거야. 만약 우리 가족들이 마음에 안 든다면 언제든지 취소해도 좋아.”심유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원래대로라면 구청이 문을 닫는 날일 테지만 허태준은 어떻게 사람을 찾았는지 구청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가 혼인신고서를 작성했다.심유진은 나름 경험이 있었지만 허태준은 하도 긴장해서 표정이 너무 어색해 사진도 한참을 찍었다. 허태준은 같이 찍은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심유진은 그저 허태준이 신기해서 그런다고 생각할 뿐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제가 운전할게요. 사진에 푹 빠지신 거 같은데.”“그래.”허태준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들킨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차에 올라탄 후 사진을 찍어 여형민에게 자랑까지 했다.“축하해. 소원 이뤘네.”허태준은 가만히 심유진의 눈치를 보면서 답장했다.“응.”“저녁 같이 먹을래?”여형민이 물었다.“아니.”허태준이 휴대폰을 꽉 잡았다. 심장이 너무 뛰어 잠시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다른 일정이 있어.”여형민이 음흉하게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그를 놀렸다. 허태준은 해명하기도 귀찮아 그냥 휴대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엘리베이터에 오른 후 심유진은 19층을 누른 다음 허태준을 대신해 20층도 눌렀다. 하지만 허태준이 20층 버튼을 취소해 버렸다. 심유진이 고개를 들어 허태준을 쳐다봤다.“이사.”“네? 무슨 이사요?”허태준이 혼인신고서를 들어 보였다.“이제 결혼했는데 같이 살아야지.”“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요. 자희가 같이 살지 않아도 가족들은 모르잖아요.”한층에 한집밖에 없었기에 다른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지 않는 이상 심유진이 몇 층에서 내리는지도 모를 것이다.“심연희도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거 몰라? 찾아오면 어떡하려고.”심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골치 아픈 일이긴 했다.“우리 집으로 이사 오면
심유진은 결국 허태준의 집으로 이사했다. 원래 짐이 많지 않았기에 금방 이사를 마칠 수 있었다. 허태준도 더 이상 선을 넘지 않고 심유진에게 거실 옆의 빈방을 내어줬다.정리를 마치자마자 심유진은 혼인신고서를 꺼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더니 서재로 가서 허태준을 찾았다.“저랑 사진 한 장만 찍어줄 수 있어요?”허태준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으나 그 말을 듣고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허태준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어떤 사진?”“음...”심유진이 머뭇거렸다.“그러니까... 다정해 보이는 사진?”심유진의 얼굴이 빨개지는 게 보였다.“그래.”허태준이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심유진 옆에 섰다.“얼마나 다정하게?”허태준은 심유진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어...”심유진이 다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메마른 입술만 만지작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머리를 맞대는 정도?”“그럼 거실에 나가서 찍자.”허태준이 성큼성큼 거실로 나갔고 심유진이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심유진은 자기가 먼저 머리를 맞대자고 했음에도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심유진이 휴대폰을 들었고 두 사람이 같은 화면에 들어왔다. 심유진과 허태준의 머리가 10만 리는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이게 맞댄 거야?”허태준이 흥미로워하며 말했다. 심유진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아니면 그냥 이렇게 찍을까요?”“이렇게 찍으면 누가 부부라고 믿을 것 같아?”허태준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 심유진은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아니에요, 안 찍을래요.”심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허태준이 그녀의 허리를 덥석 잡고는 품에 안았다. 허태준이 심유진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뺏어 높이 들었다.허태준이 턱을 심유진의 머리에 올려놓은 채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심유진은 그의 가슴에 기댄 채 그의 심장 소리와 싱그러운 체향을 맡으며 저도 모르게 두근거림을 느꼈다.“웃어.”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그제야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