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요?”차설아가 걸음을 멈추고는 흥미로운 얼굴로 노인을 바라봤다.‘나 오늘 완전 계 탔네. 이런 신통한 노인에게서 선물도 받고 말이야.’노인 가게에 서 파는 물건들은 값은 물론이고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보물들이었다. 그래서 노인이 선물을 준다고 하니 차설아는 잔뜩 신이 났다.하지만 노인은 차설아에게 가게 보물이 아닌, 몸에 지니고 있던 어떤 물건을 주었다.“아가씨, 이 비단을 챙겨요. 이 비단은 언젠간 당신에게 중요한 안내를 할 거예요.”고목처럼 주름진 노인의 손에는 정교하게 만든 비단이 들려 있었다. 그는 비단을 천천히 차설아에게 건넸다.“이 비단은...”차설아는 비단 위에 그려진 도안을 보더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비단 위에 그려진 봉황과 피안꽃은 전에 할머니가 그녀에게 남긴 포대기 위의 그림과 비슷했다. 같은 사람의 작품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하지만 아쉽게도 그 화재가 있은 뒤로 포대기는 이미 새까맣게 타버렸다.차설아가 노인에게 이 비단의 출처를 물어보려던 그때, 갑자기 머리가 피투성이인 사람이 그녀에게 달려오고는 그녀의 허벅지를 안으며 말했다.“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사람들이 저를 찔러 죽이려고 해요.”도움을 청한 사람은 3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죽으면 안 돼요. 저 죽으면 제 아들이 고아가 돼요. 제발 저를 꼭 살려주세요.”차설아는 원래 이 일에 참견할 생각이 없었지만 상대도 아들을 혼자 데리고 있는 엄마라는 말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 천천히 말해봐요.”“저, 저는 골동품 시장으로 물건을 팔러 왔어요. 하지만 여기 사람들이 워낙 법도를 지키지 않잖아요. 여자 혼자 이곳으로 오니까 우습게 보였나 봐요. 바로 제 물건들을 뺏더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여인은 경계심을 높이며 품에 안고 있던 천 가방을 더 꼭 껴안았다.“이건 우리 집 가보란 말이에요. 아들이 병에 걸려 지금 돈이 절실히 필요해요. 아니면 절대
“당연히 모르지. 아니면 내가 왜 물어봤겠어?”“모르면 내가 알려주지. 우린 성심 전당포 사람이야. 영흥 부둣가까지 왔는데 설마 성심 전당포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제 좀 비켜봐.”“당신들이 성심 전당포 사람이었어?”차설아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비꼬며 말했다.“전당포가 무슨 폭력 조직이야? 조그마한 일로 사람을 때려죽이지 못해서 안달이고.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여자 한 명을 괴롭혀? 성심 전당포도 참 매너가 없네.”그 말은 사내들을 제대로 도발했다.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살기가 어린 눈으로 막대기를 들고는 차설아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우리를 모욕하면 모욕했지, 감히 우리 보스를 모욕해? 쟤한테 본때를 보여주자고.”차설아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더니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 한 번 와봐.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겠어.”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그들과 맞서 싸우려고 했다.마침 소문이 자자한 성심 전당포가 도대체 얼마나 막강한 실력을 검증할 수 시간이었다. 그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어야만 나중에 성심 전당포의 사장인 미스터 Q와 좋은 가격을 협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다 물러서지 못해?”인파 속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드럽고 점잖은 그의 목소리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들려왔는데 꽤 젊은 사람인 듯했다.이어서 청색 도포를 입고 손에 부채를 쥔 긴 머리의 잘생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책임자님!”검은 옷 사내들은 남자를 보자 예의를 갖추며 허리를 푹 숙였다.점잖고 잘생긴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내가 몇 번을 말했어. 우리 성심 전당포는 그냥 평범하게 물건을 저당으로 받고 돈을 빌려주는 가게라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야 하고 무슨 일이 있든 먼저 말로 해결할 생각부터 해야 해. 막대기들은 다 치워, 놀라시겠어.”“네!”검은 옷 사내들은 순순히 막대기를 거둬들였다.그만큼 성심 전당포에서의 이 젊은 남자의 지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차설아는 남
차설아는 두 손을 내밀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저당할 물건이 쉽게 보이면 안 되는 거라서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장담할 수 있어요, 사장님께서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한 번 추천해 보는 건 어때요? 기분 좋으면 당신 월급도 올려줄지 누가 알아요.”장재혁은 눈앞의 여자가 흥미롭게 느껴져 눈썹을 치켜들었다. 배짱이 남다르니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설마 진짜 좋은 물건이 있는 게 아닐까?’“좋아요, 배짱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드니 저 장재혁도 한 번 도박할게요. 원래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도박을 할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하거든요. 당신을 우리 사장님께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남자는 시선을 차설아로부터 그녀의 뒤에 숨어있는 여인에게 돌리고는 웃으며 말했다.“저 여인에 대해서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고 우리에게 넘겨주세요.”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몸을 부들부들 떠는 여자를 힐끔 보더니 장재혁에게 물었다.“내가 넘겨주면 당신들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할 거예요?”“그건 말씀드릴 수 없죠. 저 여인이 먼저 성심 전당포의 규칙을 어겼거든요. 어떻게 처리할지는 성심 전당포의 규칙에 똑똑히 쓰여 있습니다.”장재혁이 말하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 여인을 보며 말했다.“연지야, 그만해. 이제 말썽을 부리지 말고 돌아가!”“싫어요!”여인은 차설아의 팔을 꼭 끌어안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빌었다.“저를 넘겨주지 마세요. 제발요. 저들은 절대 저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예요. 저는 죽으면 안 돼요, 제가 죽으면 제 아들도 살지 못하거든요... 당신 대단한 사람인 걸 알고 있어요,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차설아는 한숨을 푹 쉬더니 여인의 손가락을 자신의 팔에서 하나씩 떼며 말했다.“내가 안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요. 이 일은 당신이 잘못한 게 맞잖아요. 저 사람들의 물건을 훔쳤으니 저 사람들이 물건을 가져가려는 건 당연해요. 그리고 규칙대로 당신에게 벌 주는 것도 저들의 권력이고요. 만
“아들이 있다고 했잖아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들이 고아가 된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어요?”여인의 웃음은 더 쓸쓸해졌다.“그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아들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큰 병을 앓고 있어 돈이 필요하기에 성심 전당포의 룰을 어기고 물건을 훔친 거예요. 다만 아들이 진짜 고아로 된다고 말할 수 없죠. 아이에게 아빠가 있으니까...”“그럼 다행이네요.”차설아의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만약 이 여자에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이에게는 아빠가 있기 때문에 그리 불쌍하지는 않을 것이다.“다만 아이의 아빠가 내연녀랑 결혼했거든요. 이제 며칠 있으면 두 사람 아이가 돌이 되기 때문에 아마 제 아들을 돌볼 겨를이 없을 것 같네요.”“그게...”차설아는 다시 마음이 괴로워졌다.몇 마디 더 물어보려고 했는데 장재혁이 차가운 얼굴로 재촉했다.“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빨리 데려가!”검은 사내의 호송으로 그 여인은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어떤 결과를 맞을지, 그리고 그녀의 아들이 어떤 결과를 맞을지는 아무도 몰랐다.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원이와 달이를 떠올렸다.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의 두 아이도 저 여인의 아들처럼 운명이 위태로워질지 누가 알겠는가?“불쌍하다고 생각해요?”장재혁이 덤덤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물었다.“그냥 저분의 아이가 불쌍해서요.”“별다른 수가 없죠, 본인이 선택한 결과이니.”장재혁이 말을 이어갔다.“저 사람 이름이 연지인데 이혼한 지 3년이 넘었어요. 생활이 힘들 때는 밥도 먹지 못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제가 연지를 성심 전당포에 불러서 일을 시켰거든요. 평소에 저를 돕기도 했고, 또 워낙 보물 감정에 재능이 있어 제자로 키울까 했는데... 이런 배은망덕한 제자를 키운 줄도 몰랐네요. 너무 실망스러워요.”“혹시 너무 힘들고 별다른 방법이 없어...”“아무리 힘들어도 성심 전당포의 룰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야 해요.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믿음이거든요. 이런 일에 엄
차설아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으니 어쩔 수 없이 먼저 남자를 따라가야 했다.장재혁의 안내하에 그녀는 순조롭게 영흥 부둣가를 지나 하류의 가장 중심에 있는, 그 유명한 성심 전당포에 도착했다.“여기가 바로 성심 전당포에요? 그냥 그래 보이는데요?”차설아는 전당포 문밖에 서서 현판에 새겨진 큰 글자를 바라보고는 냉정한 평가를 했다.전당포의 외관은 그저 평범해 보였다. 악명이 높은 성심 전당포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는데 오히려 고풍스럽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이런 평범한 곳에 그렇게 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고, 또 그렇게 많은 외부의 사람들을 겁에 질리도록 만들다니.장재혁이 고개를 돌리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그렇죠? 성심 전당포는 원래 아주 평범한 곳이랍니다. 자꾸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무섭게 들리고 느껴지는 거죠. 외부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무서운 곳이 전혀 아니에요. 결국 물건을 거래하는 장소일 뿐인데요.”“그렇긴 하지만 합법적이고 불법적이고 가치가 있는 물건은 모두 내놓을 수 있다면서요? 사람 목숨까지 저당할 수 있는 곳이니 무섭게 들리고 느껴질 만도 하죠.”성심 전당포 안에서는 모든 법도가 무시된다는 게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만약 어떤 사람이 진귀한 물건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한다면 성심 전당포에서 그의 물건이 마음에 들고 받으려고 한 이상 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우리 성심 전당포를 무슨 지옥처럼 무서운 곳으로 만들고 있네요. 사실 사장님 말씀대로 우리 성심 전당포는 지옥이 아닌 자선 기구죠.”“네?”“생각해 봐요, 당신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가장 아끼는 물건을 이곳에 맡기면 저희가 돈을 지불해 급한 불을 꺼주잖아요. 나중에 다시 재기하고 능력과 돈이 된다면 충분히 아끼는 물건을 되찾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보물을 되찾을 능력을 계속 갖추지 못한다면 그 보물을 위해 잠재력도 끌어낼 수 없다는 뜻인데 그만큼 그 보물을 아끼지 않는다는 걸 말해주죠. 그런데 어떻게
이때, 아까 문 앞에서 한복을 입은 채 서 있던 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책임자님, 사장님 오늘 밤 돌아오셨어요. 하지만 많이 바쁘신 건 사실이에요.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면 절대 부르지 말라고 하셨어요.”“그래? 정말 잘됐네.”장재혁은 두 눈을 반짝이더니 또 물었다.“그럼 사장님 지금 어디에 있어? 무슨 일로 바쁘신데? 설마 또 무슨 보물을 찾은 거야?”“그게, 사장님 지금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계신 것 같아요.”현이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요리?”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장재혁을 보며 말했다.“사장님이 겨우 이런 일로 매일을 바쁘게 보내고 계시나요?”“그게...”장재혁도 이상하다 싶어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아마 아주 진귀한 가마를 찾은 거 아닐까요?”“...”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이곳으로 오기 전에 그녀는 성심 전장포가 온갖 악마를 모아놓은 지옥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이상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고, 심지어 자정 살인마라고 불리는 미스터 Q는 한밤중에... 요리를 하고 있었다.“그래도 계시니 다행이에요. 제가 대신 가서 상황을 전해줄게요. 먼저 현이랑 홀에서 기다리고 계세요.”“그래요.”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이와 홀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장재혁이 주방으로 향했는데 멀리서부터 뚝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분노가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젠장, 소고기는 왜 이렇게 질긴 거야. 반나절이나 볶았는데 돌처럼 굳어졌잖아.”뚝딱거리는 소리 외에도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멀리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탄 냄새까지 났다.장재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 혹시... 불을 끄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요?”이어서 ‘쿵’ 소리와 함께 우람한 몸집의 남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뒤집개까지 떨궜다.그는 고개를 돌렸는데 가면 아래의 완벽에 가까운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누가 너보고 들어오래? 너 때문에 소고기 다 망쳤잖아.”장재혁은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진작 들어왔는데 사장
차설아는 거실에 앉아 벽에 걸린 산수화를 올려다보았다.공교롭게도, 그녀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오도자의 작품이었다.아쉽게도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목동만가도’는 화재로 타버렸다. 이 그림은 ‘목동만가도’의 자매작인 ‘목동답설도’로 보였다. 아버지가 생전에 여러 미술관을 돌아다녔지만 아쉽게도 찾지 못한 작품이었다.그런데 차설아가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이것 또한 인연일까?“그림을 좋아하세요?”뒤에서 한 줄기의 싸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설아는 흠칫 놀랐고, 왠지 낯익은 느낌에 바로 몸을 돌렸다.건장한 남자는 올 블랙 패션이었고, 정성스럽게 만든 것 같은 얼굴의 검은 깃털 가면은 그의 신비로운 느낌을 더했다. 입꼬리의 차가운 미소는 위세를 부리지 않아도 무서운 느낌을 주었다. 역시나 자정 살인마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미스터 Q, 안녕하세요.”차설아는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남자에게 손을 내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남자는 차가운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을 흘겨보았을 뿐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물었다.“아주 소중한 물건을 저당하려고 저까지 불렀다고 하죠?”“맞아요.”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하지만 제가 저당하려는 이 진귀한 물건은 골동품도, 보물도 아니고 법에 어긋나는 물건도 아니에요.”“네?”남자의 깊은 눈에는 흥미가 차오르더니 물었다.“그럼 말씀해보시죠.”“개인 섬을 저당하려고요. 동남아시아에 있는 지리적 위치도 좋고, 지금까지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무릉도원이에요...”여기까지 말한 차설아는 슬픈 표정을 짓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제가 막다른 골목에 처하지 않았다면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전을 내놓지도 않았을 거예요.”“막다른 골목이요?”남자는 이 섬보다 차설아의 현황에 대해 더 궁금해하는 듯했다.“맞아요, 돈이 필요하거든요.”차설아는 많은 것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고, 씁쓸하게 웃더니 말했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반년 안에 전 섬을 다시 찾을 거예요.”그녀의 사업
“특수한 상황이요?”“네! 화내지 말고 들으세요!”차설아는 ‘돈줄’에게 미움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가면을 가리키며 말했다.“그 얼굴은 성씨 가문의 둘째 아들과 싸우다가 망가졌다면서요? 그때부터 줄곧 가면을 쓰기 시작했고. 당신의 얼굴을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룰까지 내세웠잖아요. 하지만 혼자 많이 힘들었죠? 안심하세요. 해바라기 섬에서는 가면을 벗어도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어때요, 미스터 Q에게 안성맞춤이죠?”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차설아는 남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계속 말을 이었다.“그리고, 미스터 Q는 성도윤과 원수사이죠? 저도 그 인간이랑 상극이에요. 이 점만 본다면 우리는 같은 편에 서야 하니,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왜냐하면 성대 그룹을 상대하기 위해 이 자금이 필요한 거니까요.”“성대 그룹을 상대한다? 당신이?”미스터 Q의 입꼬리는 차설아에 대한 경멸이 가득했다.“안 믿어요? 시간이 지나면 곧 알게 될 거예요. 아니면 저도 이 섬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할 용기가 없겠죠!”차설아는 당연히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성도윤을 미워하나요?”남자는 호기심에 물었다.차설아는 흠칫 놀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미워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미...”그녀를 구하기 위해 성도윤이 죽었으니, 아무리 큰 원한이라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아직 성씨 가문에서 성도윤의 죽음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으니, 차설아도 더 이상 언급할 수 없었다.지금 소문이 떠들썩하니 미스터 Q도 이미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맞네요, 다들 성도윤이 죽었다고 하던데, 죽은 사람과 따질 필요는 없죠.”미스터 Q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물었다.“이 섬은 제가 받죠. 하지만 2조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가봐야겠어요.”차설아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어차피 그녀도 마침 민이 이모와 달이를 데리러 가려 했다.“그럼 바로 출발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