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아까 문 앞에서 한복을 입은 채 서 있던 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책임자님, 사장님 오늘 밤 돌아오셨어요. 하지만 많이 바쁘신 건 사실이에요.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면 절대 부르지 말라고 하셨어요.”“그래? 정말 잘됐네.”장재혁은 두 눈을 반짝이더니 또 물었다.“그럼 사장님 지금 어디에 있어? 무슨 일로 바쁘신데? 설마 또 무슨 보물을 찾은 거야?”“그게, 사장님 지금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계신 것 같아요.”현이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요리?”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장재혁을 보며 말했다.“사장님이 겨우 이런 일로 매일을 바쁘게 보내고 계시나요?”“그게...”장재혁도 이상하다 싶어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아마 아주 진귀한 가마를 찾은 거 아닐까요?”“...”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이곳으로 오기 전에 그녀는 성심 전장포가 온갖 악마를 모아놓은 지옥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이상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고, 심지어 자정 살인마라고 불리는 미스터 Q는 한밤중에... 요리를 하고 있었다.“그래도 계시니 다행이에요. 제가 대신 가서 상황을 전해줄게요. 먼저 현이랑 홀에서 기다리고 계세요.”“그래요.”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이와 홀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장재혁이 주방으로 향했는데 멀리서부터 뚝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분노가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젠장, 소고기는 왜 이렇게 질긴 거야. 반나절이나 볶았는데 돌처럼 굳어졌잖아.”뚝딱거리는 소리 외에도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멀리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탄 냄새까지 났다.장재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 혹시... 불을 끄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요?”이어서 ‘쿵’ 소리와 함께 우람한 몸집의 남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뒤집개까지 떨궜다.그는 고개를 돌렸는데 가면 아래의 완벽에 가까운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누가 너보고 들어오래? 너 때문에 소고기 다 망쳤잖아.”장재혁은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진작 들어왔는데 사장
차설아는 거실에 앉아 벽에 걸린 산수화를 올려다보았다.공교롭게도, 그녀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오도자의 작품이었다.아쉽게도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목동만가도’는 화재로 타버렸다. 이 그림은 ‘목동만가도’의 자매작인 ‘목동답설도’로 보였다. 아버지가 생전에 여러 미술관을 돌아다녔지만 아쉽게도 찾지 못한 작품이었다.그런데 차설아가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이것 또한 인연일까?“그림을 좋아하세요?”뒤에서 한 줄기의 싸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설아는 흠칫 놀랐고, 왠지 낯익은 느낌에 바로 몸을 돌렸다.건장한 남자는 올 블랙 패션이었고, 정성스럽게 만든 것 같은 얼굴의 검은 깃털 가면은 그의 신비로운 느낌을 더했다. 입꼬리의 차가운 미소는 위세를 부리지 않아도 무서운 느낌을 주었다. 역시나 자정 살인마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미스터 Q, 안녕하세요.”차설아는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남자에게 손을 내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남자는 차가운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을 흘겨보았을 뿐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물었다.“아주 소중한 물건을 저당하려고 저까지 불렀다고 하죠?”“맞아요.”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하지만 제가 저당하려는 이 진귀한 물건은 골동품도, 보물도 아니고 법에 어긋나는 물건도 아니에요.”“네?”남자의 깊은 눈에는 흥미가 차오르더니 물었다.“그럼 말씀해보시죠.”“개인 섬을 저당하려고요. 동남아시아에 있는 지리적 위치도 좋고, 지금까지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무릉도원이에요...”여기까지 말한 차설아는 슬픈 표정을 짓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제가 막다른 골목에 처하지 않았다면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전을 내놓지도 않았을 거예요.”“막다른 골목이요?”남자는 이 섬보다 차설아의 현황에 대해 더 궁금해하는 듯했다.“맞아요, 돈이 필요하거든요.”차설아는 많은 것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고, 씁쓸하게 웃더니 말했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반년 안에 전 섬을 다시 찾을 거예요.”그녀의 사업
“특수한 상황이요?”“네! 화내지 말고 들으세요!”차설아는 ‘돈줄’에게 미움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가면을 가리키며 말했다.“그 얼굴은 성씨 가문의 둘째 아들과 싸우다가 망가졌다면서요? 그때부터 줄곧 가면을 쓰기 시작했고. 당신의 얼굴을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룰까지 내세웠잖아요. 하지만 혼자 많이 힘들었죠? 안심하세요. 해바라기 섬에서는 가면을 벗어도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어때요, 미스터 Q에게 안성맞춤이죠?”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차설아는 남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계속 말을 이었다.“그리고, 미스터 Q는 성도윤과 원수사이죠? 저도 그 인간이랑 상극이에요. 이 점만 본다면 우리는 같은 편에 서야 하니,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왜냐하면 성대 그룹을 상대하기 위해 이 자금이 필요한 거니까요.”“성대 그룹을 상대한다? 당신이?”미스터 Q의 입꼬리는 차설아에 대한 경멸이 가득했다.“안 믿어요? 시간이 지나면 곧 알게 될 거예요. 아니면 저도 이 섬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할 용기가 없겠죠!”차설아는 당연히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성도윤을 미워하나요?”남자는 호기심에 물었다.차설아는 흠칫 놀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미워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미...”그녀를 구하기 위해 성도윤이 죽었으니, 아무리 큰 원한이라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아직 성씨 가문에서 성도윤의 죽음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으니, 차설아도 더 이상 언급할 수 없었다.지금 소문이 떠들썩하니 미스터 Q도 이미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맞네요, 다들 성도윤이 죽었다고 하던데, 죽은 사람과 따질 필요는 없죠.”미스터 Q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물었다.“이 섬은 제가 받죠. 하지만 2조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가봐야겠어요.”차설아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어차피 그녀도 마침 민이 이모와 달이를 데리러 가려 했다.“그럼 바로 출발
“네? 저한테 준다고요?”차설아는 갑자기 멍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미스터 Q는 뒤돌아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싫은가요?”“아니요, 아니요. 당연히 좋죠. 너무 좋아요!”차설아는 그 ‘목동답설도’를 보고, 또 몰래 남자를 쳐다보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진짜 가져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비록 방금 그녀는 그림을 갖고 싶다는 뜻을 담아 말하긴 했지만, 남자가 시원시원하게 바로 내어줄 줄은 몰랐다.“좋아한다면 안 될 것도 없죠!”미스터 Q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그저 한 폭의 그림일 뿐, 전당포에는 다른 작품도 많아요.”“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차설아는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당장이라도 돈줄 미스터 Q에게 차도 대접하고, 다리와 어깨도 주물러 주며 시중을 들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가 쓰고 있는 가면까지 매력적으로 보였다.역시, 세상에서 가장 큰 매력은 재력이다!차설아는 갑자기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설마, 미스터 Q가 하늘이 내려준 나의 운명의 짝? 만약 그렇다면, 말도 안 돼... 성도윤이 내가 자기 원수와 함께한다는 걸 알게 되면 무덤에서 감았던 눈을 번쩍 뜨겠어!’“무슨 생각 해요?”차설아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미스터 Q가 묵묵히 자신을 지켜봤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여자의 다이나믹한 표정에 남자는 호기심이 생겼다.“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시탐하듯 물었다.“저기,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말하세요.”“혹시 지금, 만나는 분이 있나요? 결혼하셨나요? 아이는 있나요?”차설아는 종래로 남의 사생활에 대해 의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하지만 미스터 Q는 자신에게 이상할 정도로 관대해서 ‘의도가 불순’하다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미친 성진이 그랬듯이 말이다.그래서 차설아는 미스터 Q가 자신의 좋은 인연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당신...”미스터 Q는 차설아의 말을 소화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러고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상상력이 참 풍부하네요.”“그럼 제 말이 틀렸나요?”차설아는 말을 마치고 한 걸음 한 걸음 남자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에 얹었다.미스터 Q는 눈썹을 찡그리며 큰 손으로 막았다.“이게 뭐 하는 짓이죠?”“긴장하지 마세요. 그냥 저를 보면 심장이 빨리 뛰는지 확인하려는 거예요.”차설아는 고개를 쳐들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남자는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곧 입꼬리를 올리더니 긴 팔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자신의 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그럼 좀 더 가까이 있어야 잘 느껴지죠.”차설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마치 미꾸라지처럼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당황하지 마요. 제가 당신을 잡아먹나요?”남자는 오히려 차설아를 향해 다가서며 웃었다.“제가 그쪽 전남편의 원수이니, 적의 적은 친구라면서요? 우리가 가까이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죠.”“안 돼요!”차설아는 즉시 손으로 X자 모양을 했다.‘역시, 이 남자는 분명 나한테 딴마음이 있어. 여자의 예감은 늘 정확하단 말이야.’아쉽게도 지금의 차설아는 오로지 사업에만 집중하고 싶었고 남자는 안중에도 없었다.“전 지금 연애에 관심이 없어요. 단념하는 게 좋을 거예요.”남자를 보는 그녀의 예쁜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미스터 Q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안심하세요. 전 당신의 섬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니.”“진심이길 바랄게요.”차설아는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믿지 않았다. ‘오해하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너무 깊이 빠져들면 나만 손해야!’미스터 Q는 개인 비행기를 갖고 있었고, 항로를 신청한 후 가장 빠른 속도로 해바라기 섬으로 출발했다.원래 개인 비행기의 소파는 붙어 있었지만, 차설아는 남자와 거리를 두려고 일부러 그와 1미터 떨어져 있었다.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즉시 이어폰을 끼고 방해하지 말라는 뜻을
차설아는 미스터 Q를 데리고 해바라기 섬의 한복판, 즉 그녀와 아이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곳으로 향했다.그들은 해바라기 꽃밭을 지나야 했다.이 꽃밭의 해바라기들은 줄기마다 쭉쭉 뻗어 사람의 키에 버금가는 높이로 자라 있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두 사람은 꽃밭을 앞뒤로 걸어갔고, 따스한 햇볕이 꽃 사이를 뚫고 그들의 머리카락과 어깨에 떨어졌다. 청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화면이었다.꽃밭의 끝에는 귀여운 모자를 쓰고 노란 치마를 입은 달이가 보였다. 녀석은 작은 호미를 손에 들고 허리를 굽힌 채 진흙탕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민이 이모는 옆에서 작은 선풍기를 들고 아이에게 바람을 쐬며 걱정했다.“달이 아가씨, 날이 밝았고 기온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어요. 더위를 먹기 전에 얼른 돌아가세요!”“민이 이모 먼저 돌아가세요, 저는 오늘 반드시 이 빈터에 해바라기 꽃을 다 심을 거예요. 그러면 엄마와 오빠가 돌아올 거예요...”“이 넓은 땅에 꽃을 다 심으려면 저녁까지 심어야 한다고요. 민이 이모 말 들어요. 빨리 돌아가세요.”민이 이모는 아이가 더워서 탈이 날까 봐 저도 모르게 말투가 엄해졌다.차설아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이를 맡긴 이상, 민이 이모는 항상 최선을 다해 보살폈고 한 치의 착오도 용납하지 않았다.“참, 걱정하지 마세요. 달이는 금방 심을 수 있어요...”달이는 발그레한 얼굴을 쳐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갑자기 녀석의 눈이 번쩍 빛나더니 민이 이모의 곁을 ‘휙’ 지나서 나비처럼 쏜살같이 달려갔다.“엄마! 엄마! 드디어 돌아오셨어요!”눈썰미가 좋은 달이는 꽃밭에서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차설아를 단번에 발견했다.차설아도 당연히 달이를 발견했고,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달이야, 엄마의 보물 달이. 너무 보고 싶었어!”그녀는 팔을 벌려 달이를 와락 끌어안았고, 새빨갛게 물든 작은 볼에 대고 마구 뽀뽀를 했다.이 탱글탱글한 촉감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볼이었다.“엄마, 달이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왜 이
차설아는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표정이었다.만약 해바라기 섬을 사러 온 사람이라고 한다면 달이는 손에 든 호미를 들고 당장 쫓아낼지도 모른다.“엄마가 해안에서 새로 사귄 친구야.”차설아는 어쩔 수 없었는데 이렇게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엄마 친구였어요?”달이는 차설아의 품에서 내려와 미스터 Q의 앞에 다가가더니, 귀여운 얼굴을 쳐들고 배시시 웃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안녕하세요, 엄마 친구는 곧 달이 친구예요. 해바라기 섬에 오신 걸 환영해요.”미스터 Q의 딱딱하던 입꼬리에는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차갑던 마음이 달이에 의해 녹은 것이 분명했다.그는 허리를 굽혀 작은 달이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안녕, 꼬마야. 나는 네 엄마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네 오빠의 친구이기도 해. 앞으로 우리 네 사람 아주 즐겁게 지내게 될 거야.”“좋아요!”달이는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말했다.“우리 엄마는 친구가 별로 없어요. 특히 남성 친구는 더더욱. 지난 4년 동안 경수 아빠와 경윤이 이모, 두 친구밖에 없었어요. 저도 엄마가 좀 외롭다고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금 엄마에게 새 친구가 생겼다니. 앞으로 우리 엄마 잘 부탁드립니다!”“경수 아빠?”미스터 Q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그럼 그분이 네 엄마의 남편이야?”“그건 아니에요!”달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우리 엄마는 지금 싱글이에요. 경수 아빠는 저희 친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명목상 아버지...”“콜록!”차설아는 이마를 짚고 가볍게 기침을 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됐어, 달아. 그만 말해. 그저 평범한 친구에게 엄마의 모든 사정을 다 말해줄 필요는 없어.”달이는 천사와도 같은 아이였다. 아무런 경각심도 없는 천사 달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다 말하는 경향이 있어 차설아를 난처하게 만들었다.미스터 Q 입가의 미소가 더 짙어지더니 손바닥으로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 섬은 아주 아름답더구나. 아저씨에게 섬 구경 좀
“이모, 뭘 걱정하고 계시는지 편히 말씀하세요.”차설아가 묻자, 민이 이모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아가씨도 알다시피 두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해바라기 섬에서 자랐고 바깥세상을 접한 적이 없어요. 원이 도련님은 워낙 똑똑하고 경계심도 많아서 남에게 쉽게 속지 않겠죠. 하지만 달이 아가씨는 걱정이에요. 천사 같은 아가씨가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어떡해요...”“무엇보다 달이 아가씨는 타고난 체질 때문에 호흡기가 약해요. 공기 질에 대한 요구가 아주 높죠. 공기가 이렇게 좋은 해바라기 섬에서도 자주 앓는데 이곳을 떠나면 더 큰 일이잖아요?”차설아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러게요. 저도 그 부분이 걱정되긴 했어요. 하지만 달이를 계속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울 수는 없어요. 바깥세상도 경험해야 해요. 해안에서 최대한 환경이 좋은 곳으로 찾아볼게요.” “해안에서 환경이 가장 좋은 곳이라면, 두 지역의 식물 피복률이 가장 높죠. 하나는 차씨 저택의 별장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성가 저택이 있는 안양구예요.”“이모, 제가 이번에 돌아가 보니, 차씨 저택의 별장 지역이 글쎄 쓰레기 처리 구역으로 지정되었더라고요. 곧 쓰레기 철거장으로 건설된대요...”“뭐라고요?”민이 이모는 놀랍고도 분노했다.“감히 누가 그 땅에 손을 대요? 어르신과 사모님께서 직접 고르신 땅이에요. 차씨 가문의 명맥과 직결되어있는 귀한 땅을 쓰레기 철거장으로 만든다니요! 어르신이 저세상에서 노하실 거예요.”“이모,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제가 잘 처리할 거예요. 차씨 가문은 해바라기 섬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추억을 담고 있어요. 두 곳 모두 제가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한편, 달이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미스터 Q의 손을 잡고 그들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아저씨,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성처럼 생겼죠? 엄마가 저는 성의 공주이고 오빠는 왕자라고 했어요...”미스터 Q는 집을 둘러보았다. 곳곳마다 아늑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였다.조개껍데기로 만든 풍령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