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저한테 준다고요?”차설아는 갑자기 멍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미스터 Q는 뒤돌아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싫은가요?”“아니요, 아니요. 당연히 좋죠. 너무 좋아요!”차설아는 그 ‘목동답설도’를 보고, 또 몰래 남자를 쳐다보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진짜 가져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비록 방금 그녀는 그림을 갖고 싶다는 뜻을 담아 말하긴 했지만, 남자가 시원시원하게 바로 내어줄 줄은 몰랐다.“좋아한다면 안 될 것도 없죠!”미스터 Q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그저 한 폭의 그림일 뿐, 전당포에는 다른 작품도 많아요.”“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차설아는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당장이라도 돈줄 미스터 Q에게 차도 대접하고, 다리와 어깨도 주물러 주며 시중을 들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가 쓰고 있는 가면까지 매력적으로 보였다.역시, 세상에서 가장 큰 매력은 재력이다!차설아는 갑자기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설마, 미스터 Q가 하늘이 내려준 나의 운명의 짝? 만약 그렇다면, 말도 안 돼... 성도윤이 내가 자기 원수와 함께한다는 걸 알게 되면 무덤에서 감았던 눈을 번쩍 뜨겠어!’“무슨 생각 해요?”차설아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미스터 Q가 묵묵히 자신을 지켜봤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여자의 다이나믹한 표정에 남자는 호기심이 생겼다.“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시탐하듯 물었다.“저기,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말하세요.”“혹시 지금, 만나는 분이 있나요? 결혼하셨나요? 아이는 있나요?”차설아는 종래로 남의 사생활에 대해 의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하지만 미스터 Q는 자신에게 이상할 정도로 관대해서 ‘의도가 불순’하다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미친 성진이 그랬듯이 말이다.그래서 차설아는 미스터 Q가 자신의 좋은 인연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당신...”미스터 Q는 차설아의 말을 소화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러고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상상력이 참 풍부하네요.”“그럼 제 말이 틀렸나요?”차설아는 말을 마치고 한 걸음 한 걸음 남자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에 얹었다.미스터 Q는 눈썹을 찡그리며 큰 손으로 막았다.“이게 뭐 하는 짓이죠?”“긴장하지 마세요. 그냥 저를 보면 심장이 빨리 뛰는지 확인하려는 거예요.”차설아는 고개를 쳐들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남자는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곧 입꼬리를 올리더니 긴 팔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자신의 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그럼 좀 더 가까이 있어야 잘 느껴지죠.”차설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마치 미꾸라지처럼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당황하지 마요. 제가 당신을 잡아먹나요?”남자는 오히려 차설아를 향해 다가서며 웃었다.“제가 그쪽 전남편의 원수이니, 적의 적은 친구라면서요? 우리가 가까이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죠.”“안 돼요!”차설아는 즉시 손으로 X자 모양을 했다.‘역시, 이 남자는 분명 나한테 딴마음이 있어. 여자의 예감은 늘 정확하단 말이야.’아쉽게도 지금의 차설아는 오로지 사업에만 집중하고 싶었고 남자는 안중에도 없었다.“전 지금 연애에 관심이 없어요. 단념하는 게 좋을 거예요.”남자를 보는 그녀의 예쁜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미스터 Q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안심하세요. 전 당신의 섬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니.”“진심이길 바랄게요.”차설아는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믿지 않았다. ‘오해하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너무 깊이 빠져들면 나만 손해야!’미스터 Q는 개인 비행기를 갖고 있었고, 항로를 신청한 후 가장 빠른 속도로 해바라기 섬으로 출발했다.원래 개인 비행기의 소파는 붙어 있었지만, 차설아는 남자와 거리를 두려고 일부러 그와 1미터 떨어져 있었다.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즉시 이어폰을 끼고 방해하지 말라는 뜻을
차설아는 미스터 Q를 데리고 해바라기 섬의 한복판, 즉 그녀와 아이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곳으로 향했다.그들은 해바라기 꽃밭을 지나야 했다.이 꽃밭의 해바라기들은 줄기마다 쭉쭉 뻗어 사람의 키에 버금가는 높이로 자라 있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두 사람은 꽃밭을 앞뒤로 걸어갔고, 따스한 햇볕이 꽃 사이를 뚫고 그들의 머리카락과 어깨에 떨어졌다. 청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화면이었다.꽃밭의 끝에는 귀여운 모자를 쓰고 노란 치마를 입은 달이가 보였다. 녀석은 작은 호미를 손에 들고 허리를 굽힌 채 진흙탕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민이 이모는 옆에서 작은 선풍기를 들고 아이에게 바람을 쐬며 걱정했다.“달이 아가씨, 날이 밝았고 기온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어요. 더위를 먹기 전에 얼른 돌아가세요!”“민이 이모 먼저 돌아가세요, 저는 오늘 반드시 이 빈터에 해바라기 꽃을 다 심을 거예요. 그러면 엄마와 오빠가 돌아올 거예요...”“이 넓은 땅에 꽃을 다 심으려면 저녁까지 심어야 한다고요. 민이 이모 말 들어요. 빨리 돌아가세요.”민이 이모는 아이가 더워서 탈이 날까 봐 저도 모르게 말투가 엄해졌다.차설아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이를 맡긴 이상, 민이 이모는 항상 최선을 다해 보살폈고 한 치의 착오도 용납하지 않았다.“참, 걱정하지 마세요. 달이는 금방 심을 수 있어요...”달이는 발그레한 얼굴을 쳐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갑자기 녀석의 눈이 번쩍 빛나더니 민이 이모의 곁을 ‘휙’ 지나서 나비처럼 쏜살같이 달려갔다.“엄마! 엄마! 드디어 돌아오셨어요!”눈썰미가 좋은 달이는 꽃밭에서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차설아를 단번에 발견했다.차설아도 당연히 달이를 발견했고,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달이야, 엄마의 보물 달이. 너무 보고 싶었어!”그녀는 팔을 벌려 달이를 와락 끌어안았고, 새빨갛게 물든 작은 볼에 대고 마구 뽀뽀를 했다.이 탱글탱글한 촉감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볼이었다.“엄마, 달이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왜 이
차설아는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표정이었다.만약 해바라기 섬을 사러 온 사람이라고 한다면 달이는 손에 든 호미를 들고 당장 쫓아낼지도 모른다.“엄마가 해안에서 새로 사귄 친구야.”차설아는 어쩔 수 없었는데 이렇게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엄마 친구였어요?”달이는 차설아의 품에서 내려와 미스터 Q의 앞에 다가가더니, 귀여운 얼굴을 쳐들고 배시시 웃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안녕하세요, 엄마 친구는 곧 달이 친구예요. 해바라기 섬에 오신 걸 환영해요.”미스터 Q의 딱딱하던 입꼬리에는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차갑던 마음이 달이에 의해 녹은 것이 분명했다.그는 허리를 굽혀 작은 달이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안녕, 꼬마야. 나는 네 엄마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네 오빠의 친구이기도 해. 앞으로 우리 네 사람 아주 즐겁게 지내게 될 거야.”“좋아요!”달이는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말했다.“우리 엄마는 친구가 별로 없어요. 특히 남성 친구는 더더욱. 지난 4년 동안 경수 아빠와 경윤이 이모, 두 친구밖에 없었어요. 저도 엄마가 좀 외롭다고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금 엄마에게 새 친구가 생겼다니. 앞으로 우리 엄마 잘 부탁드립니다!”“경수 아빠?”미스터 Q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그럼 그분이 네 엄마의 남편이야?”“그건 아니에요!”달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우리 엄마는 지금 싱글이에요. 경수 아빠는 저희 친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명목상 아버지...”“콜록!”차설아는 이마를 짚고 가볍게 기침을 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됐어, 달아. 그만 말해. 그저 평범한 친구에게 엄마의 모든 사정을 다 말해줄 필요는 없어.”달이는 천사와도 같은 아이였다. 아무런 경각심도 없는 천사 달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다 말하는 경향이 있어 차설아를 난처하게 만들었다.미스터 Q 입가의 미소가 더 짙어지더니 손바닥으로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 섬은 아주 아름답더구나. 아저씨에게 섬 구경 좀
“이모, 뭘 걱정하고 계시는지 편히 말씀하세요.”차설아가 묻자, 민이 이모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아가씨도 알다시피 두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해바라기 섬에서 자랐고 바깥세상을 접한 적이 없어요. 원이 도련님은 워낙 똑똑하고 경계심도 많아서 남에게 쉽게 속지 않겠죠. 하지만 달이 아가씨는 걱정이에요. 천사 같은 아가씨가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어떡해요...”“무엇보다 달이 아가씨는 타고난 체질 때문에 호흡기가 약해요. 공기 질에 대한 요구가 아주 높죠. 공기가 이렇게 좋은 해바라기 섬에서도 자주 앓는데 이곳을 떠나면 더 큰 일이잖아요?”차설아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러게요. 저도 그 부분이 걱정되긴 했어요. 하지만 달이를 계속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울 수는 없어요. 바깥세상도 경험해야 해요. 해안에서 최대한 환경이 좋은 곳으로 찾아볼게요.” “해안에서 환경이 가장 좋은 곳이라면, 두 지역의 식물 피복률이 가장 높죠. 하나는 차씨 저택의 별장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성가 저택이 있는 안양구예요.”“이모, 제가 이번에 돌아가 보니, 차씨 저택의 별장 지역이 글쎄 쓰레기 처리 구역으로 지정되었더라고요. 곧 쓰레기 철거장으로 건설된대요...”“뭐라고요?”민이 이모는 놀랍고도 분노했다.“감히 누가 그 땅에 손을 대요? 어르신과 사모님께서 직접 고르신 땅이에요. 차씨 가문의 명맥과 직결되어있는 귀한 땅을 쓰레기 철거장으로 만든다니요! 어르신이 저세상에서 노하실 거예요.”“이모,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제가 잘 처리할 거예요. 차씨 가문은 해바라기 섬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추억을 담고 있어요. 두 곳 모두 제가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한편, 달이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미스터 Q의 손을 잡고 그들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아저씨,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성처럼 생겼죠? 엄마가 저는 성의 공주이고 오빠는 왕자라고 했어요...”미스터 Q는 집을 둘러보았다. 곳곳마다 아늑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였다.조개껍데기로 만든 풍령
달이는 흥미진진하게 카드를 나눠주었다. 이것은 예전에 그들이 즐겼던 게임이었다. 매번 이 게임을 할 때마다 차설아와 원이만 이기고 달이와 민이 이모는 졌었다.‘이번에는 가면 아저씨가 있으니 꼭 이겨봐야지!’차설아는 미스터 Q에게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아 양해를 구했다.“유치하긴 하지만 아이가 좋아해요. 오신 김에 아이랑 좀 놀아주세요, 부탁드려요!”미스터 Q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달이는 곧 카드를 나눠주었고, 세 사람은 카드를 펼쳤다. 흑백 조커는 미스터 Q에게, 컬러 조커는 달이에게 돌아갔다.“와, 이겼어요! 제가 이겼어요!”달이는 처음 이겨서 기뻐서 펄쩍 뛰며 미스터 Q를 한바탕 들볶을 태세였다.하지만 미스터 Q는 손님이고, 또 그들의 ‘돈줄’이라 차설아는 달이에게 일침을 가했다.“달아, 아저씨는 손님이셔.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면 안 돼.”“엄마, 안심하세요. 달이는 절대 손님을 난처하게 하지 않아요.”“그럼 아저씨와 진실 게임을 할 거야, 아니면 왕 게임을 할 거야?”“음... 왕 게임?”“좋아, 난 다 괜찮아.”미스터 Q는 오히려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달이는 미스터 Q를 빤히 쳐다보더니 반짝이는 큰 눈을 깜박거리고 깃털 가면을 가리키며 말했다.“아저씨, 그 가면을 벗어주면 안 돼요?”남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설아가 더 긴장하여 얼른 제지했다.“이건 안 돼. 다른 거로 바꿔.”미스터 Q의 가면은 금기이며, 그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되면 죽는다고 전에 배경수가 말했었다.비록 현재까지는 사람을 죽이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변태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차설아는 감히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정상적으로 보이는 변태가 왕왕 더 무서운 법이다!“하지만 이건 룰이에요. 만약 아저씨께서 룰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아야 해요.”달이는 두 손을 허리에 집고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다.미스터 Q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벌을 받지. 어떤 벌을 줄 건데?”“에이, 재미없어.”달이는 실망하여
“그건...”달이는 차설아를 한번 쳐다보더니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차설아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게임 룰은 지켜야 해.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져.”미스터 Q는 짙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엄숙한 말투로 달이에게 경고했다.차설아도 흥미를 느끼고 웃으며 달이를 꼬드겼다.“무슨 비밀이 있는지 엄마에게 말해봐. 엄청 궁금한데?”“그럼 제가 말할 테니, 엄마 절대 화내면 안 돼요.”달이는 눈을 껌벅이며 차설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엄마 화 안 낼게. 사람은 누구나 비밀이 있어. 엄마도 있는걸?”차설아는 자신이 비교적 개방적인 엄마라고 생각했다. 법을 지키는 선에서 아이들에게 독특한 생각이 있다면, 그녀는 무조건 지지하는 편이었다.“좋아요, 그럼 달이가 말할게요.”달이는 심호흡을 하고 부드럽고 작은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잡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사실 오빠와 저는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비록 아버지가 없어도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엄마는 계속 말씀하셨지만, 저와 오빠는 만약 아버지가 있다면 더 행복할 것 같아요.”“그래서 말인데요. 저와 오빠에게 아버지를 찾아주면 안 되나요?”차설아는 바로 멍해졌고, 입가에 맴돌던 부드러운 미소도 굳어졌다.달이는 상황을 보고 바로 말을 바꾸었다.“엄마, 장난이에요. 저와 오빠는 아버지가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엄마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화도 내지 마시고요.”“아니야, 내가 왜 우리 달이에게 화를 내겠어. 그저...”차설아는 멈칫하더니 조금 슬퍼졌다.“그저 달이와 오빠가 모두 아버지를 원하는 줄 몰랐어!”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라는 빈자리에 익숙했고, 그들에게 그림책이나 동화 이야기를 들려주면 최대한 아버지 캐릭터를 제외하곤 했다.그래서 아이들은 ‘부성애’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알고 보니,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필요 없는 것이 아니었다. 두 아이가 입
그러자 옆에 있던 달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엄마, 아버지도 할 수 있고 엄마도 할 수 있지만, 아버지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기는 해요.”“뭐?”차설아와 미스터 Q는 모두 녀석을 쳐다보며 큰 호기심을 보였다.“바로 비행기죠!”“아버지는 분명 엄마보다 더 높이 들 거예요. 아버지의 높은 어깨에 앉아보고 싶어요!”녀석의 말에 차설아는 반박할 힘이 없었고 죄책감에 빠졌다.확실히 남녀 사이에는 체격 차이가 존재했으니, 남자의 듬직함이 아이들에게 더 큰 안정감을 줄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아저씨가 비행기 태워줄게.”미스터 Q는 갑자기 허리를 굽히고, 긴 팔을 내밀더니 달이를 가볍게 자신의 넓은 어깨에 올려놓았다.“와, 아주 높아요! 바다 전체가 다 보여요!”녀석은 깔깔 웃으며 손으로 남자의 목을 잡고 은방울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더 높이, 아저씨, 더 높이!”이 모습은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더 따뜻하고 화목해 보였다. 차설아는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달이는 매일 즐겁고 유쾌하게 보냈지만, 이렇게 격양된 고함을 지르고 마음껏 웃음을 터뜨리는 건 처음이었다.어쩌면, 그녀는 두 아이에게 아버지를 찾아주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자신의 배우자를 찾는 건 쉬웠지만, 아이의 아버지를 찾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우선, 그녀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기에 미혼 남성은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불공평한 일이니 말이다.그리고, 그녀는 다른 사람의 새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또 많은 남성을 배제해야 했다.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그 어떤 남자도 기꺼이 남의 아이를 키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런 사람이 설령 있다고 해도, 차설아는 상대방을 좋아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것 같았다.최종 결론은... 너무 어렵다!민이 이모는 밥을 차려놓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
“그렇다니까?”서은아는 이를 꽉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바로 차설아한테로 갔어. 강아지처럼 따라붙더라고. 난 성도윤 얼굴조차 못 봤다니까? 진짜 한심하기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바보인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렇게 화내면서 극단적인 제안을 할 이유도 없잖아.”“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차설아는 어떤 반응이었어?”성진은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며 계속해서 물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감정을 감추려 해도 자신이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어떤 반응이겠어? 당연히 좋아하겠지. 가족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잖아.”서은아는 어이없어하며 성진이 뻔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불만을 쏟아내듯 말을 이어갔다.“두 사람은 처음부터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맞긴 하지만 결국 두 사람 사이를 더 깊이 이어준 셈이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바보였던 거야. 어쩌면 우리가 해온 일들도 그들을 돕는 역할밖에 못 했던 거지. 우리는 그저 한낱 도구였을 뿐이라고!”서은아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단순히 속상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진의 질투심을 자극해 성도윤과 차설아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었다.“그렇다고?”성진의 눈빛 속에는 점점 더 강한 분노와 불만이 차올랐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본때를 보여줘야지.”“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네가 말한 거잖아.”성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었다.“성도윤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빈털터리로 만들자며?”“그래, 좋아! 또다시 동맹을 맺게 됐네. 솔직히 너라는 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 하나는 잘하니까 말이야. 너랑 손잡는 게 제일 마음이 놓이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서은아는 기분 좋게 말했다.“너도 만만치 않지.”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사랑해서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