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요.”유현진은 머뭇거리며 물었다.“혹시 제 친구한테도 경찰이 방문하는 건가요?”“당연하죠. 송민영 씨의 영향력이 아주 크거든요. 경찰 측에서도 엄청 중시하고 있어요.”“그렇군요. 그럼, 전 이만 끊을게요.”유현진은 전화를 끊자마자 주강운에게 연락을 넣었다.주강운은 사무실에서 사건 자료들을 훑어보고 있었다.유현진의 연락에 그는 사건 자료를 내려놓았다.“강운 씨, 송민영 씨가 코코넛 워터 알레르기로 인한 아나필락시스 쇼크래요.”주강운은 멈칫하였다.“송민영 씨가 코코넛 알레르기라고요?’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유현진이 말했다.“저도 방금 매니저를 통해 전해 들었어요. 송민영 씨 측에서는 누군가가 일부러 커피에 코코넛 워터를 넣었다고 의심하고 있다더군요. 신고했다고 그랬으니 아마 경찰이 강운 씨도 찾아갈 거예요.”그녀는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저 때문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되셨네요.”주강운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현진 씨 탓이 아니에요. 그냥 송민영 씨가 운이 나빴을 뿐이에요. 제가 그렇게나 많은 커피를 들고 갔는데 하필이면 코코넛 워터가 들어간 커피를 마셨잖아요. 운이 나빴던 거죠.”비록 맞는 말이긴 했지만, 송민영의 무시무시한 팬덤에 그녀는 주강운에게 조심하라고 일러두었다.“부디 몸조심하세요.”주강운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답했다.“현진 씨도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제게 연락해주세요. 자신을 잘 보호하시고요.”유현진은 간단하게 대답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주강운도 휴대폰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컴퓨터 모니터엔 송민영의 데뷔 때 인터뷰 자료가 켜져 있었다.“어떤 종류의 커피를 좋아하세요?”“전 아메리카노만 마셔요.”“싫어하는 음식, 혹은 절대 안 먹는 음식이 있나요?”“고수랑 코코넛이요. 제가 코코넛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전에 코코넛 알레르기로 입원한 적도 있었어요.”기자와 송민영의 대화였다....한편 병원.송민영은 아직도 응급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송민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애초에 송민영과 계약하는 게 아니었는데. 난 팬들이 소란을 피우는 게 너무 싫어!”송가람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주먹을 꽉 쥔 채 땅을 내려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오빠.”송민준은 멈칫거리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뜻이 아니었어. 됐다. 일단 경찰 조사 결과를 기다리자.”그는 안자연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그 커피는 누가 준 거죠?”안자연이 답했다.“스타라이트 엔터의 방이진이라는 여배우님께서 주셨습니다. 하지만 커피는 방이진 씨가 사 온 것이 아니었어요. 감독님의 친구가 사 온 것이었어요.”송민준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사색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그 여자의 개가 다른 사람을 물고 뜯도록 송민영의 입원 사유를 계정에 올리세요.”안자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송민준의 수법은 사람들의 관심을 단숨에 돌리는 아주 음험한 수법이었다.그리하여 방이진은 한밤중에 매니저의 연락을 받게 되었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전화를 받게 되었다.“송민영 씨 커피 네가 준 거야?”아직 잠이 덜 깬 방이진이 답했다.“커피라니요?”“송민영 씨가 아나필락시스 쇼크래. 병원 측에서 코코넛 알레르기로 쓰러진 거래. 송민영 씨가 그날 마신 커피 속에 코코넛 워터가 들어있었다고! 드라마 제작진들이 공개한 영상에 네가 커피를 송민영 씨에게 건네주는 장면도 찍혀있었어. 지금 송민영 씨의 팬들이 난리 났고 회사로 전화가 엄청나게 오고 있어. 심지어 미필적 고의로 인한 살인으로 신고까지 당했다고!”순간 방이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요? 전 민영 언니에게 어떤 알레르기가 있는지도 몰랐다고요. 그리고 그 커피 내가 산 거 아니에요. 전 그냥 전해주기만 했다고요.”매니저는 방이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방이진은 평소에도 무명 배우나 신인 배우만 괴롭혔다. 송민영 같은 톱스타에게 아부해도 모자랄 판에 감히 위해를 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한 그녀의 행동에 매니저는 머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지만 강한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현진아.”유현진은 순간 손가락을 멈추었다.“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강한서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유현진이 머뭇거리면서 답했다.“응... 너도 안 자고 있었어?”유현진의 한 마디에 강한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그는 검지를 입에다 가져다 대며 민경하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휴게실로 들어가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마침 자려고 했어.”유현진은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응.”강한서가 물었다.“왜 갑자기 나한테 전화한 거야?”유현진이 답했다.“잘못 눌렀어.”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그는 자연스럽게 이어서 말했다.“혹시 잠이 안 와?”유현진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아니.”그녀의 대답에 강한서는 미소를 지었다.“난 잠이 잘 안 오더라.”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넌 예전에도 그랬잖아. 나이가 많아서 그래. 수면 시간과 나이는 반비례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 나이가 들수록 잠이 줄어든대.”강한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넌 매일 10시간 이상을 자는 거야? 16살처럼 보이려고?”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언제 10시간을 잤다고 그래?”강한서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이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내가 지금 너 동안이라고 칭찬해 주고 있잖아. 넌 학교 다닐 때 열독과 이해 문제를 어떻게 풀었냐?”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헛기침했다.“그 정도는 아니야. 대충 18살? 16살은 너무 어려. 아무것도 못 하잖아.”강한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확실히 16살은 너무 어리네. 그것도 못 하고.”유현진은 하마터면 침에 사레 걸릴 뻔했다. 그녀는 붉게 물든 얼굴로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었다.“그... 그거라니?”강한서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답했다.“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만 18세 이상이 되어
유현진은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강한서가 인터넷에 난 기사를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아.”그녀는 작년에 받은 악플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었다.강한서는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 잠이 안 오면 나랑 얘기하면 돼. 수면제 먹지 말고. 수면제는 몸에 안 좋아.”유현진은 가슴이 먹먹해졌고 이내 일부러 괜찮은 척하며 말했다.“수면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먹고 싶어도 사지도 못해.”“차라리 사지 못하는 게 낫네.”강한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두려워.”법정에서 본 유현진의 우울증 진단서가 매일 밤 머릿속에 떠올라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 진단서만 생각하면 그는 자신이 유현진에게 얼마나 부족한 남편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유현진이 먼저 이혼하자고 한 건 절대 충동적인 생각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점차 그에게 실망했고 차라리 홀몸으로 집을 나올지언정 더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아 했다.유현진은 돈을 좋아했지만, 돈을 받지 않았고 그의... 얼굴을 좋아했지만 그를 포기했다.그는 업무 처리 방면에서는 아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순 있었지만 유독 유현진의 일에서만큼은 실수만 했다. 그는 이혼 후에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은 시스템처럼 조목조목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그녀의 마음을 얻자면 먼저 그가 그녀에게 어떻게 대했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했다.유현진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더니 이불을 만지작거렸다.“넌 항상 겁이 많은 사람이었지. 주삿바늘 보면서 그렇게 벌벌 떠는 남자는 처음 봤거든.”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강한서는 주삿바늘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그는 그저 병원을 싫어했을 뿐이다.어느 한번은 위가 아파 참지 못할 지경이 되자 유현진이 억지로 그를 끌고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수액을 맞을 때 신입 간호사는 계속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느라 주삿바
「나도 몰라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왼손엔 삼성폰을 들고~」「오른손엔 아이폰을 들어야지~」「3대 통신사 다 가입할 거지~」「매일매일 바꿔서 써야지~」「오늘은 벤츠 말고 BMW 타야지~」「할 일 없을 땐 마사지 받고 랍스터 먹어야지...」유현진과 강한서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이 먼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게 자장가라고?”강한서는 입술을 살짝 씹었다.“나도 처음 들어봤어.”한성우가 그에게 자장가라며 보내줬던 음성 파일을 그는 줄곧 열어보지 않았었다.그는 애초에 한성우를 믿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도대체 뭘 보낸 거야!’유현진은 한성우의 취향을 떠올렸다. 어쩌면 정말로 이 노래가 그에게 수면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걸 강한서에게 보냈다는 건 그를 잠들게 만들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유현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너 때문에 정신이 더 또렷해졌어. 끊을 거야.”강한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강한서는 휴대폰을 붙잡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분위기 엄청 좋았는데! 한성우 이 자식 때문에!’한편 게임 테스트를 하고 있던 한성우는 재채기했다.그가 일어나서 차를 마시려고 할 때 누군가가 벨을 눌렀다.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배달 음식을 들고 있는 차미주였다.“네 배달인 것 같은데, 주소 잘 못 적은 거 아니야?”한성우가 웃으면서 말했다.“일부러 내가 사는 곳까지 들키지 않으려고 적은 거지.”차미주의 입가가 떨려왔다.“그래서 우리 집 주소를 적은 거라고?”“에이, 다 같은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지.”그는 배달 음식을 받아 들고 물었다.“같이 먹을래?”차미주는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풍기는 생선구이의 냄새에 그녀의 배에선 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다.마침 한성우가 물어보니 그녀는 헛기침해 대며 말했다.“밤에 먹으면 살쪄.”만약 다정하고 눈치가 있는 남자라면 이런 상황에 분명 “무슨 다이어트를 하냐, 넌 하나
한성우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나도 음식들이 아까워.”차미주는 그렇게 못 이기는 척하며 한성우의 집으로 들어갔다.남안거리에서만 파는 생선구이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생선구이 가게는 회사와 아주 가까웠고 매번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그녀는 풍겨오는 냄새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회사 단체 소풍 갈 때마다 몇 번이나 그곳에 가자고 말해보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생선의 비린내 때문에 꺼렸다. 게다가 그 생선구이 가게는 배달이 잘되지 않았고 예약할 수 있는 룸도 없었기에 매번 거절당했다.회사 단체 소풍에서 차미주만이 즐겁게 노는 것이 아닌 먹는 것에 더욱 신경을 썼다.이런 이유로 그녀의 회사는 비록 생선구이 가게 근처에 있었지만 몇 번 가서 먹어보지 못했다.그랬기에 그녀는 아주 배부르게 먹었다.그녀는 생선구이를 먹은 후 쓰레기들을 치워주면서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잠깐만 기다려.”한성우가 그녀를 불러세웠다.“게임 테스트 좀 해줘.”차미주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거절할게.”“무료로 한정판 캐릭터 의상을 줄게.”차미주는 발걸음을 멈추었다.“몇 개 줄 건데?”한성우가 그녀를 흘겨보면서 말했다.“하나.”차미주가 일부러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에이, 하나는 너무 적지.”한성우는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는 차미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그냥 가라.”차미주는 할 말을 잃었다.‘응? 더 추가해 주는 거 아니었어?’그녀가 천천히 걸어가도 한성우는 그녀를 불러세우지 않았다.차미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이웃끼리 돕고 살아야 한댔으니까 하나로 퉁 쳐.”한성우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안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차미주가 말했다.“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고 하잖아.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지.”그녀는 바로 쓰레기봉투를 내려놓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한성우는 게임 테스트를 그녀에게 보내주고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어젯밤 강한서와의 전화 통화로 유현진은 아주 깊은 잠을
유현진은 사실대로 말했다.“어젯밤에 삭제해 버렸거든요.”“그럼 다시 다운해서 확인해 봐요. 이건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요.”유현진은 간단한 응답을 한 후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했다.페이스북을 열고 들어가자 실검이 보였다.「JC 반사 시스템.」그녀는 그 키워드를 누르고 들어갔다. 사이버수사대 계정엔 그녀가 전에 “법역”에서 맡은, 인터넷 사기를 당하고 자살 시도를 하는 여대생 장면을 잘라 “2번째 콜라보, 기대해 주세요.”라는 글과 함께 유현진을 태그했다.한성 그룹의 공식 계정에서도 그 게시글을 리트윗하면서 “맞습니다. 저희가 ‘스폰’한 배우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벤츠에 올라타는 유현진의 사진을 올렸다.이는 그동안 유현진이 스폰서에게 스폰을 받았다는 소문에 대한 직접적인 입장을 밝힌 것과 다름없었다.사람들에게 유현진이 숙소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스폰서에게 소폰을 받으러 간 것이 아닌 콜라보 건에 대해 상의하러 갔다는 것으로 알리는 것과 같았다.곧이어 인맥이 넓은 “법역” 제작진도 공식 계정으로 유현진이 예전에 눈 속에서 연탄을 나르는 사진을 올렸다. 그러고는 “법역”이 단기간에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게 된 건 출연료도 받지 않고 출연해 준 유현진의 덕분이라면서 “법역” 제작진도 그녀를 아주 좋게 보고 있었다고 했다.그래서 홍보대사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작진은 얼른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그 기사를 이곳저곳 돌렸다.요컨대 반사 시스템의 출시는 사이버안전을 추진하는 데 아주 중요한 돌파구가 될 것이었기에 다른 계정주들도 얼른 기사를 올렸다.그 짧은 시간 안에 여론도 확 뒤집혔다.“공식 계정의 말을 믿어보죠. 설마 사이버수사대에서 뒤가 구린 사람을 홍보대사로 쓰진 않을 거 아니에요.”“전 사실 유현진 씨를 아주 좋아해요. 목소리도 언제 들어도 듣기 좋더라고요.”“사실 유현진 씨가 피한 것도 본능에 의한 행동이잖아요. 전 정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유현진 씨를 물어뜯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니까요. 그 사람들은 혹시
연구에 미친 금욕적인 공대 출신 남자와 연예계 매혹적인 보이스의 성우 만남.극도로 반대 성향인 두 사람이 함께하니 의외로 잘 어울렸다.강한서는 평소에도 기자회견에 참여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대부분 사진은 마치 태주대 세미나 같은 그저 업무와 관련된 단체 사진들뿐이었다.사람들은 온갖 기사들을 뒤져서 강한서의 단체 사진을 모아 “법역”에 출연했던 유현진의 사진과 같이 합성해 버렸다.그렇게 합성해 놓고 보니 두 사람은 아주 잘 어울렸다. 정장을 입은 강한서의 금욕적이고 섹시한 모습은 마치 유현진이 주도권을 갖고 그의 셔츠를 벗겨버릴 것만 같았다.매혹적이고 고혹적인 유현진이 주도적인 성향이 더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이내 두 사람에겐 그렇게 찐한 커플이라는 커플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유현진의 이름과 강한서의 이름을 하나씩 따와서 찐한 커플로 불리게 된 것이었다.비록 유현진은 팬이 적었지만, 대부분은 이성적인 팬들이었고 그 팬들이 댓글을 남겼다.“강 대표님께선 이미 가정이 있으신 분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남매사이로 봐주시면 고맙겠네요.”“그래도... 전 정말 이 커플 응원하고 싶네요!”“저도요... 하지만 현진 언니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포기할래요. 괜히 현진 언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합성된 사진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던 강한서는 다정한 남매사이로 보는 팬들에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그는 얼른 휴대폰을 들고 “찐한 커플”을 지지하는 글을 리트윗할 생각이었지만 민경하가 황급히 그를 말렸다.“대표님, 올리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정말 그 글을 올리신다면 사람들은 사모님을 불륜녀라고 오해할 겁니다. 아직 대중들에겐 대표님은 이미 결혼하신 걸로 알려져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한서는 얼굴 가득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다정한 남매사이로 몰아가는 팬들에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민경하가 그런 그를 보며 위안했다.“남매사이도 좋잖아요. 대놓고 사모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