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흠칫하더니 벌떡 몸을 돌리며 말했다. "뭐라고?"강민서는 그런 그녀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유씨 집안은 정말 흡혈귀 같은 존재야. 그러니까 한 가족이겠지. 둘째 작은어머니라는 사람이 너나 네 증조할아버지보다 훨씬 솔직하더라고."말을 끝낸 강민서는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저녁에 어디서 만난다고? 또 노을이야? 알았어. 이따 봐…"유현진은 멀어져가는 강민서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강한서는 특별히 간호인을 고용해 어르신을 돌보았다.유현진은 병실에 있다가 촬영장에 볼일이 있다면서 먼저 자리를 떠났다.강한서는 병상 옆에 앉아 어르신에게 귤을 발라 드렸다.어르신은 식욕이 없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돌아가. 현진이 오늘 기분 안 좋아 보이던데 일찍 가서 같이 있어 줘."유현진이 자기를 바라보던 눈빛을 떠올리니 강한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이것만 드시면 갈게요."어르신은 이내 강한서가 발라 준 귤을 입에 넣으며 강한서에게 얼른 가라고 손을 저었다. "어서 가, 어서 가. 나 잘 거야."강한서는 간호인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병원을 나섰다.차에서 대기하던 민경하가 강한서를 보자마자 물었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법역' 촬영장."민경하는 이내 차를 돌려 출발했다.촬영장으로 가는 길에서 강한서는 주머니에서 통장을 꺼냈다. 바로 어르신이 준 것이다.어르신은 유현진에게 주는 예단이라고 했다.어르신은 유현진이 많이 가지고 들어가야 시댁에서 만만하게 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같이 있은 지 며칠도 안 되는 사이에 어르신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강한서는 감시카메라에 찍힌 강민서의 말이 떠올라 통장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강민서의 신용카드를 포함한 모든 카드 정지시켜요. 그리고 회사 재무팀에 정기 배당을 제외하고 두 사람에게 일전 한 푼 주지 말라고 알리세요."민경하는 깜짝 놀랐다.두 사람이란 강민서와 신미정이었다.두 사람은 처음에 회사
몇몇 사람이 차에 올라타 문을 닫더니 이내 차가 출발했다.송민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송가람에게 말했다. "나 여기 급한 일 생겼으니 이따가 전화할게. 먼저 끊는다."전화를 끊고 송민준은 다급히 박해서에게 말했다. "앞에 차 따라가. 눈치 못 채게 너무 바싹 따라붙지 말고."박해서는 시동을 걸고 검은색 밴을 따라갔다.검은색 밴은 아주 조심성 있게 CCTV를 피해서 작은 길로 들어갔다.박해서는 이 길에 대해 아주 익숙했는지라 다른 길로 에돌아 작은 길의 길 어구로 바로 갔다.하지만 길 어구에서 한참 기다렸지만 하얀색 밴만 지나갔을 뿐 검은색 밴은 보이지 않았다.박해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 길은 1킬로미터도 안 되고 중간에 빠져나갈 길도 없어서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어요."송민준은 흠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를 따돌린 거네.""어떻게…" 박해서도 흠칫했다. "설마 아까 하얀색 밴 말씀하시는 거예요?"이 길은 고작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너비다. 그런데 하얀색 밴만 나왔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중간에서 차를 바꾼 것이 틀림없다.박해서는 놀라웠다. "눈치 못 채게 거리 유지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요?"송민준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뭔가 알아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조심스러웠던 것일 수도 있어. 꽤 총명하네.""대표님, 어떻게 할까요?"하얀색 밴은 이미 떠난 지 오래라 지금 따라가기에는 늦었다.송민준은 의자를 툭툭 치더니 입을 열었다. "CCTV가 없는 길이 어느 쪽이지?""서쪽 길에 CCTV 없어요.""그럼 그쪽으로 가."같은 시각, 혼미 상태의 강민서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눈앞은 무언가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입은 테이프로 막혀 있었으며 손발은 꽁꽁 묶여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강민서는 점점 더 커지는 두려움에 온 힘을 다해 바둥거렸지만 입도 가려져 있어서 거친 숨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유현진은 무표정으로 그녀 앞에 서서
그녀는 눈을 찌푸리고 손으로 불빛을 가렸다.차는 이내 전조등을 껐다. 벤틀리 한 대가 그녀의 앞에 차를 세우더니 차창을 내렸다. 차 안에서 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현진 씨. 여기서 보네요."유현진은 멈칫하더니 경계심을 드러내며 입술을 오므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 대표님."송민준은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시간에 혼자 여기서 걷고 있었어요?""차가 고장 나서 택시 기다리고 있었어요." 유현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여기 택시 없는데. 타세요, 태워다 드릴게요.""사양할게요. 저 콜택시 불렀어요."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한서한테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할까요? 이 시간에 여자 혼자는 위험해요. 봤는데 모르는 척하기도 그렇고."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 "한서는 야근 중이에요." 유현진은 멈칫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송 대표님이 저 좀 태워주세요."차에 탄 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얼굴색이 창백했으며 손가락에는 핏줄이 생생하게 보였다.밖은 추웠고 그녀는 다소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송민준이 말했다. "해서야, 히터 틀어."유현진은 머리를 돌려 고맙다고 인사했다.송민준은 조용히 그녀를 훑어보다가 시선을 그녀의 귀에 있는 점에서 멈추었다.유현진은 송민준의 눈길을 느꼈는지 뒤돌아보았다.송민준은 이내 물 한 병을 넘겨주며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현진 씨, 물 마실래요?"송민준은 여전히 자연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착각했다고 생각했다.유현진은 물을 받지 않고 말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송민준은 그녀의 긴장한 표정을 알아챈 듯 말했다. "아름드리 펜션으로 가."유현진이 말했다. "아름드리 펜션 말고 병원으로 갈게요."송민준은 그녀를 훑어보며 물었다. "현진 씨 어디 아파요?""아니요." 유현진은 멈칫하다가 다시 말했다. "가족이 병원에 있어서요."송민준은 더는 묻지 않고 박해서에게 병원으로 가라고 말했다.병원에
강민서는 오늘 새벽 환경미화원에게 발견됐다. 발견 당시 입가에는 온통 피범벅이었으며 혼미 상태로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사람들은 경찰서에 신고하고 그녀를 병원에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소지품에서 휴대폰과 주민등록증을 발견하고 신미정에게 연락했다.병원에 도착한 신미정은 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지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강민서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고 입속에는 아직도 돌덩어리를 감싼 천 뭉치가 있었다. 얼굴이 부어있어 스스로 입을 벌려 뱉을 수가 없었다.의사는 수술 가위로 그녀 입안의 천을 조금씩 베어가면서 돌덩어리를 꺼냈다. 그제야 그녀의 상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강민서의 입 속은 온통 미세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치명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도 다치지 않았지만, 촘촘한 상처들은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였다.구강 내부는 피부와 달리 점막이라 타액이 부단히 분비되기 때문에 상처가 아무는 데 시간을 훨씬 더 소요한다. 강민서의 상처로 보았을 때 아마 그녀는 약 반 달간 말을 하기도 힘들뿐더러 음식을 먹기도 힘들 것이다.음식 섭취는 구강으로부터 시작되며 만약 구강 내부의 상처에 음식이 닿으면 통증은 더 격해질 것이 뻔하다.그녀의 주치의는 크고 작은 외상을 많이 보았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창자가 나온 환자는 많이 봐왔지만, 얼굴만 집중 공격당한 환자는 처음 본다.그렇다고 상처가 심한 것도 아니지만 가히 모욕적이고 괴로울 것이다.신미정은 강민서가 고통스럽다는 듯이 신음을 내는 소리에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나왔다."대체 누구 짓이야!"강민서는 뻥진 얼굴로 입술을 오므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경찰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환자 상태는 어때요? 상황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강민서가 머리를 끄덕이자 신미정은 눈물을 닦고 빨간 눈을 하고 말했다. "들어오세요."강민서는 입을 벌릴 수 없었다. 그래서 경찰이 묻는 말에 대답은 휴대폰으로 타자를 한 뒤에 보여주었다.경찰은 어젯밤의 일을 상세하게 물었다.강민서는 그저 화장실로 갔고 누군가 입을 막
강한서는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 "잘못했으면 반성할 줄 알아야지 술 마시러 가? 엄마가 오냐오냐하니까 이런 일 생긴 거 아냐!"신미정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강한서! 너도 내가 키웠거든!"경찰은 두 사람의 싸움에 얼떨떨해서 말했다. "유현진이 누구죠?"신미정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머리를 돌려 경찰에게 어제 일을 말했다. "어제 일로 앙심을 품은 게 틀림없어요. 그래서 사람을 보내 민서를 이렇게 만들었을 거예요. 민서는 누구랑 원한을 살 아이가 아니에요. 그런데 하필 어제 일이 생겼으니 유현진밖에 없어요."경찰은 신미정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어디 있죠?""같이 가요."강한서는 앞을 막아서서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 "이따가 내가 직접 데리고 갈게요. 지금 병간호 중이에요."경찰은 강한서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며 말했다. "강한서 씨, 우리는 절차대로 움직이는 것뿐이에요. 혐의가 없으면 절대 오래 걸리지 않아요. 몇 가지 질문만 하는데 별거 아니지 않나요?"신미정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앞장서 어르신의 병실로 향했다.강한서는 얼굴을 굳힌 채로 병실에서 나와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CCTV에는 얼굴이 잡히지 않았어요. 인근 술집도 모두 10시 좌우의 CCTV는 조작된 상태예요. 경찰 측에서는 목격자들을 상대로 조사중이며 아직 다른 소식은 없어요.""누가 조작한 건지 알 수 있어요?""아니요, 책임자는 휴가 신청을 하고 고향에 갔다네요.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해요."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요.""알겠어요."______"조금만 더 드세요." 유현진이 나지막한 소리로 어르신을 달래고 있었다."이따가 먹을게." 어르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 간병인도 있는데 넌 집에서 좀 쉬려무나. 왜 아침부터 왔어?"유현진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습관 돼서 그래요. 7시만 지나면 잠이 안 오더라고요."어르신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어제 강한서 그놈이랑
유현진은 몸을 일으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미정은 분노한 얼굴로 유현진의 팔을 잡으며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했다. "네 짓이지? 네가 사람 시켜 민서 그렇게 만들었지? 너 맞지?"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가 왜요?""너 시치미 뗄래?" 신미정은 강민서의 피투성이 된 얼굴을 생각하며 유현진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높이 휘둘렀다.어르신은 두 눈을 부릅뜨고 침대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유현진은 이미 한 대 맞을 각오를 했지만 이내 누군가 신미정의 손목을 낚아채며 옆으로 당겼다. 신미정의 손은 강한서의 턱을 가격했다.강한서의 턱은 신미정의 날카로운 손톱에 긁혀 생채기가 났다.유현진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강한서를 바라보며 주먹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강한서는 턱을 만져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신미정을 보며 말했다. "속 시원해? 나가서 얘기해!"신미정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강한서가 유현진을 대신해 맞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그저 소란을 피우는 자기를 막아섰어도 이렇게까지 화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경찰도 다급히 상황을 종료하려고 그들을 말렸다. "사모님, 흥분하지 마세요. 우선 조사부터 할게요." 경찰은 머리를 돌려 유현진에게 물었다. "유현진 씨, 어제 납치 폭력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관해 유현진 씨에게 물을 말이 있어요. 나가서 얘기 좀 하실까요?"어르신은 '납치 폭력'이라는 말에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납치 폭행? 잘못 알고 온 거 아니세요?"경찰은 어르신이 아마도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고 또 발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강민서 사건의 경위를 말해주었다.어르신은 그 말에 즉각 입을 열었다. "우리 현진이는 절대 아니에요. 어제저녁에 날 돌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경찰은 또 다른 알리바이에 눈썹을 치켜올렸다."유현진 씨가 범인이라는 말이 아니고요. 사태 파악하는 중이에요.""그러면 여기서
경찰이 아무 소득이 없이 나가려고 하니 신미정은 다급해 났다. "취조도 안 하고 사람도 안 잡고 이렇게 그냥 가는 거예요?""사모님. 급한 마음은 알겠는데요, 사건 해결이라는 게 혐의가 있다고 해서 바로 체포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새로운 단서가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게요."신미정은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어 막 말을 뱉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경찰은 이내 얼굴색이 확 변하며 말했다. "사모님, 말씀 가려 하시죠!"신미정은 유현진을 노려보더니 씩씩거리며 병실을 나갔다.유현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죄송해요. 우리 어머니가 성격이 급하셔서 그렇지 악의는 없어요. 제가 두 분 바래다 드릴게요."경찰은 유현진이 신미정이 말하는 그런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더군다나 돌덩어리를 입에 쑤셔 넣고 뺨을 때리는 행동은 보통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기는 힘든 일이다.엘리베이터에서 한 경찰이 말했다. "나 생각났어. 아까 그 여성분 '법역' 1화에서 나오는 여주인공 아니야?"또 다른 경찰은 흠칫하더니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검색했다. 정말 여배우가 맞았다."배우니까… 연기도 잘하겠지?""내가 보기엔 피해자 엄마라는 사람이 더 연기를 잘하더구먼. 밖에서는 참하다고 소문났던데 어딜 봐서 참해? 설사 정말 그 집 며느리가 한 짓이라 해도 난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집안 어르신이 저렇게 다쳐서 누워있는데 가만히 있겠어?""야, 너 경찰관이야. 이해는 무슨."…...어르신은 처음 받아보는 꽃다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유현진이 들어왔을 때, 어르신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송민준에게 꽃의 이름을 하나하나 묻고 있었다.송민준도 인내심 있게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강한서는 보이지 않았다. 강민서에게 간 듯했지만 유현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송민준이라고? 한서 놈 친구야?""저 현진 씨 친구이기도 해요. 현진 씨가 내 동생 생명의 은인이라 내가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요."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어요. 이미 다 처리했었거든요." 박해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설마 강 대표님이 의심이라도 하셨어요?"송민준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강한서가 바보도 아니고, 내가 현진 씨 알리바이를 제공해 줬는데 의심 안 하겠어? 강민서에게 사고가 났으니 강한서도 제일 먼저 CCTV부터 확인하려고 했을 거야."박해서가 말했다. "강 대표님이 CCTV 확인하러 간 게 아니고요, 우리처럼 없애려고 간 거예요."송민준은 멈칫하며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 말 확실해?""확실해요."송민준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거 점점 재밌어진단 말이야.""대표님, 가게 앞의 CCTV는 해결하기 쉽지만 위성카메라는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만약 강 대표님께서 계속 이 일을 캐신다면 유현진 씨가 일을 벌인 장소에 우리 차가 있었다는 것도 다 아시게 될 거예요.""괜찮아." 송민준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관했을 뿐.유현진을 병원까지 태워다 준 후 두 사람은 다시 원래 길을 따라 사건 발생지로 돌아갔다.강민서는 정신을 차린 뒤 폐기 공장에서 뛰쳐나왔고 비틀거리며 오가는 차를 세우려고 했다.송민준은 쌀쌀하게 보기만 했을 뿐, 차를 세우지 않았다.송민준이 돌아간 원인은 단 하나, 강민서가 얼마나 다쳤는지 궁금해서였다. 만약 심각하지 않으면 심각하게 만들려고 했다.강민서는 송가람을 화장실에 가두어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뻔했다. 그러니 송민준은 강민서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송민준이 송가람을 얼마나 아끼는지 박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박해서는 송가람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 송가람은 워낙에 몸이 약하다 보니 또래 아이들보다 많이 왜소했다. 항상 아파 보이는 모습에 몇몇 아이들은 송가람을 괴롭히기도 했다.그녀의 물을 버리는가 하면 그녀의 숙제를 찢어버리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으며 가방에 벌레를 잡아넣기도 했다.이렇게
“넘버 S 오일이 저장되어 있던 곳은 잠겨 있었어요. 잠금장치가 있었으니 기사님은 오일을 건드릴 수 없었어야 해요. 하지만 기사님이 오일을 꺼낼 수 있었다는 건 그 당시엔 잠겨있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장실의 규정에 관해선 전혀 모르고 계세요. 책임자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상황에 업무 중 실수로 오일을 깨뜨린 건 고의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러니 이 일에 관한 책임을 논한다면 두 사람이 똑같이 감당해야 해요.”“하지만 주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의 제조에 성공했고 이 일은 사실상 저희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진 않았어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퇴사 처리는 너무 심한 처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 오늘 내린 이 징계를 전례로 따른다면 업무 중 실수를 저질렀을 때 해고 당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숨겨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상황을 피면할 수 있을 거예요. 처벌이라는 건 실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아닌 수단이잖아요.”서해금이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송가람이 냉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예쁘게 포장하건 기사님을 감싸주려고 그러는 거죠?”한현진이 쿨하게 인정했다. “내 사람은 당연히 내가 감싸야죠. 송 팀장님도 홍혜림 씨에게 실수를 하셨지만 그저 감봉을 조금 당한게 전부였잖아요.”그 말은 송가람뿐만 아니라 서해금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주혁이 해고를 당할 땐 당하더라도 한현진은 부하 직원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줄곧 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3개월 감봉, 보너스 삭감. 이 정도면 되겠니?”조금 더 말다툼을 해야 할 것이라는 한현진의 예상과는 달리 서해금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서해금을 힐끗 훑어보던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죠.”송가람이 불퉁하게 말했다. “이 처벌은 너무 가볍잖아요.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고작 이정도 처벌로 넘어간다면 앞으로 다른 직원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한현진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회
멈칫하던 한현진이 홱 고개를 돌렸다. 입을 연 사람은 다름이 아닌 한현진의 운전기사인 주혁이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한현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주혁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깡마르고 잔뜩 움츠러든 그는 이곳의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여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표님, 오일은 제가 깨뜨린 거예요. 오늘 안에서 청소를 하다 그만 실수로 떨어뜨렸어요. 이곳엔 값비싼 물건들만 저장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서워... 무서워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말하며 그는 한현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여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죄했다. “죄송해요.”미간을 찌푸린 한현진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회사엔 청소 도우미를 따로 고용하고 있는데 왜 기사님이 청소하신 거예요?”주혁이 고개를 숙이고 차마 한현진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제가 신청했어요. 시급으로 15000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이라도 해주려고...”주혁이 청소를 하게 된 이유를 들은 한현진은 화조차도 낼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송가람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한 대표님이 고르고 고른 사람이 고작 이 정도였어요? 넘버 S 오일을 얼마나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실수로 깨뜨려요? 오일을 깨뜨리고 무서워서 감히 인정을 못 한 게 아니라 어쩌면 애초부터 손버릇이 나쁜 사람인 걸지도 몰라요. 청소를 핑계로 훔치려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깨뜨린 거죠.”당황하던 주혁이 창백해진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눈빛엔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소매에 감춰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 그저 먼지를 닦으려고 오일병을 꺼낸 거였어요. 하지
송민준은 매주 서너 번씩 주승관을 찾아왔다. 말도 많고 멍청한 데다 시끄럽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매번 재미없는 얘기만 늘어놓다 마지막은 꼭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내 동생도 이렇게 컸으면 세은이만큼 귀여웠을 거예요.”그 후 여동생이 아파서 송민준은 두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주승관은 주세은과 함께 송민준을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그의 여동생인 송가람을 만났다. 송민준의 말과 달리 주세은은 그의 여동생이 귀엽기는커녕 오히려 멍청하다고 느꼈다. 송민준과 비슷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주세은과 주승관을 배웅하며 송민준은 주세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장난스레 말했다. “양심도 없는 꼬맹아. 의사에겐 오빠라고 하면서 우리 알고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오빠라고 안 불러?”주세은이 대답했다. “멍청하니까요.”그 말에 송민주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마치 못 들을 충격적인 말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세은은 자신이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멍청한 거 맞잖아. 6개월 동안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하나 따지 못하다니. 대체 뭘 배운 거야.’주세은의 말에 자극을 받은 송민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면 날 오빠라고 부를 거야?”주세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 인간이 어떻게 나보다 똑똑하겠어? 아빠가 가르쳐준 건 이젠 나도 거꾸로 외울 수 있는 수준인데도 아직 기억하지 못하잖아.’송민준이 말했다. “그럼 내가 문제 낼게. 네가 정답을 맞힐 수 있으면 난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는 걸 인정할게. 하지만 만약 네가 틀리면 앞으론 날 볼 때마다 얌전히 오빠라고 불러.”주세은이 송민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송민준이 말했다. “내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을까?”“...”“모르겠어?”빨갛게 얼굴을 붉히던 주세은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있는데요?”송민준이 씩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내 머리에 붙어 있는 만큼.”“...”자신에게 농락당해 얼굴이
송가람은 약 올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나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진 씨는 뭔데 뿌듯해하는 거예요. 현진 씨가 제조한 것도 아니잖아요.”한현진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세은이는 제가 특례로 입사시킨 천재잖아요. 제가 왜 뿌듯하면 안 되는 거예요?”말하며 한현진은 서해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 대표님,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했으니 이젠 억울하게 오일을 깨뜨렸다는 누명을 쓴 일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그리고 서하 씨의 보너스 삭감이 정말 규정에 따란 이행된 건지, 아니면 누군가 그걸 빌미로 사적인 화풀이를 하려고 한 건지 회사 감사위원회에 조사를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한현진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향이 비슷하긴 하지만 사용 여부에 대해선 테스트를 진행해 봐야 해.”한현진이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일단 오일을 깨뜨린 일부터 조사하시죠.”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해금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님, 경찰이 도착했어요. 누군가 회사의 재물손괴가 있었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고 신고를 해 조사하러 왔다고 하네요.”서해금이 휙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아무래도 경찰에게 맡기는 편이 효율적인 것 같아서요. 값비싼 물건인 만큼 만에 하나 범인을 색출하지 못한다면 저희가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잖아요. 제가 소유하고 있는 지분이 제일 많으니 손실을 제일 많이 보는 것도 저예요. 그러니 저도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린 거예요. 이해하시죠?”서해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현진은 지금의 서해금은 어쩌면 옆에 놓은 물을 자신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현진은 성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해금이 손을 움직이는 순간 성월의 등 뒤로 숨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서해금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신고까지 한 거냐며 난리를 피우는 송가람과 달리 서해금은 몸을 일으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곧 아무
[한 대표님이요...]채팅방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물었다. [한 대표님, 돈을 이렇게 많이 거셨다가 지면 어쩌시려고요.]한현진이 대답했다. [한 번 걸어보는 거죠. 돈방석에 앉게 될지도 모르잖아요.]그리고 채팅방은 곧 [대표님, 쿨하시네요.]라는 문자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몇십 명의 사람들이 실패에 베팅했다. 심지어 돈을 더 거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딜러가 또 말했다. [송 팀장님께 실패에 2000만 원을 거셨어요.]멈칫한 한현진은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은 마치 한현진이 자신을 쳐다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은 송가람이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말했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미소를 짓던 한현진이 입 모양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며 물었다. “사기당한 40억은 돌려받았어요?”송가람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버럭 화를 내려던 송가람은 자신을 쳐다보는 서해금의 시선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세은은 매번 제조해 낸 오일의 향에 따라 원료의 비율을 조절했다. 1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10가지가 넘는 샘플을 만들어냈지만 넘버 S 오일에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직 없었다. 서해금은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주세은이 시도한 비율은 서해금의 제조 방안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던 샘플과 비슷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오일의 비율을 조절했다. 그러니 주세은이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리가 없었다. 현장에서 제조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전교 일 등인 척하는 전교 꼴찌를 지켜보는 기분이네요. 대체 제가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죠?”넘버 S의 성분 분석에 참여했던 사람이 말했다. “세은 씨가 정확한 오일을 고르긴 했어요. 정말 천재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저 우연일 뿐이었네요.”“한 대표님께서 성공에 2000만 원이나 거셨던데 그 돈이
주세은이 제조에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한 송가람은 벌써 냉소적인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꽤 전문가답네요. 현진 씨는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하려면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요?”한현진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늦어서 2시간이요. 세은이가 그랬잖아요. 청력에 문제 있어요?”송가람이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2시간 안에 성공한다면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회사는 불필요한 사람을 키워줄 이유가 없거든요.”한현진이 냉담한 태도로 받아쳤다. “줄곧 필요 없는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었잖아요.”멈칫하던 송가람은 그제야 한현진이 말 한 필요 없는 사람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송가람이 한현진을 반박하려는데 서해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보려거든 조용히 해. 시끄럽게 굴 사람은 나가.”‘얘는 철이 안 들어! 하필 지금 여기서 한현진과 설전을 벌여야겠어?’송가람이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녀는 주세은이 창피를 당하기만을 기다렸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주세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제조에 성공해도 걱정, 실패해도 걱정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제조에 성공해 너무 일찍 실력을 드러낸다면 서해금의 경계 대상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대부분은 주세은이 우스운 꼴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낙하산으로 들어온 어린 꼬맹이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것이라 믿지 않았다. “차라리 잘못을 인정하는 게 나을 텐데요.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서 제조에 실패하면 얼마나 창피해요.”“오일을 제조하겠다는 건 핑계고 그저 나대고 싶은 것 같아요. 오늘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전 회사에 저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지금 어린 친구들은 너무 허황한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니까요.”...그나마 눈치를 보며 말을 내뱉는 현장의 사람들과 다르게 단체 채
물론 서해금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꼬맹이에게 그 오일을 제조할 만한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넘버 S 오일은 한아람이 세상을 뜨기 전 제조해 낸 것이었다. 당시엔 오일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해금도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회사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해금은 그 오일을 제조하기 위해 수많은 조향사들과 수천 가지가 넘는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녀는 심지어 화학성분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그 어떤 조합으로도 한아람이 만든 오일을 재현할 수 없었다. 서해금이 재현해 낸 오일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을 때도 딱 2%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2%의 부족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향수의 향기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서해금은 넘버 S 오일을 장기 보관할 방법을 연구해 최대한 오일의 휘발을 감소해야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노력으로도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오일을 주세은이 향만 맡고 제조에 성공한다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본인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면 당연히 기회를 줘야 했다. 어차피 서해금은 애초부터 주세은의 입사를 반대했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그 눈은 보기만 해도 심기가 불편했다. 이 기회에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던 서해금이 말했다. “그럼 너에게 하루의 시간을 줄게.”“아뇨.”주세은이 말했다. “만약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최대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에 주세은을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허풍을 떠는 인간을 보는 눈빛이 아닌 바보를 보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주세운이 두 시간 사이 오일을 제조해 낸다면 그건 회사의 모든 조향사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었다. 한현진은 스르륵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세은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건 어때?”‘만약 제조에 실패해 서해금이 이 기회를 빌려 회사에서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오빠에겐 뭐라고
주세은의 말 한마디에 현장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물론 한현진도 멍해졌다. ‘어린애가 이런 말을 당당하게도 하네.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서해금도 지금까지 한 병밖에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아끼던데.’만약 오일의 제조는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그저 단순히 마케팅을 위해 서해금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 이상 오일의 제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의 많은 조향사들은 넘버 S 오일을 본 적이 있었다. 만약 정말 마케팅에 불과하다면 진작 들켰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경쟁자로 가득한 이 업계에 이런 비밀로 캐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말 제조가 어려운 오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껏해야 배상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세은은 말을 내뱉었고 만약 서해금이 정말 주세은에게 제조를 맡긴 후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한현진은 정말 주세은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MZ는 왜 이렇게 무모한 거야?’지금 주세은에 대한 한현진의 평가는 그나마 무난한 편이었다. 주위에 몰려 구경 중이던 직원들은 한현진보다 훨씬 직설적인 얘기를 꺼냈다. “음식 양념장이라도 만드는 건 줄 아나 봐.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깔린느가 지금껏 향수 업계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어? 진작 라이벌 회사에 뺏겼을 거야.”“서 대표님도 본인이 제조하셨지만 다시 똑같은 오일을 만들지는 못하셨어요. 이제 갓 졸업한 어린 꼬맹이가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예요?”“하룻밤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잖아요.”“만약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제 손에 지지겠어요.”송가람의 얼굴에 은은한 멸시가 감돌았다. 아마도 주세은이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본인이 직접 불구덩이에 뛰어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현진은 마치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온 학부모 같았다.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사
한현진은 말하며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전 주주의 신분으로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니도 세은이와 마찬가지로 모두 임원인 누군가의 연줄로 입사하게 된 거고요. 언니가 이런 방식으로 저와 세은이를 제약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똑같은 방식으로 언니와 서 대표님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송가람은 논리정연하면서도 은근히 비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한현진의 그 한마디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묵직한 한 방이 되었다. 낄린느의 창시자에 대해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입사한 직원이 알고 있는 회사의 대표는 서해금이 전부였다. 깔린느의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도 서해금을 깔린느의 창시자인 듯 추앙하고 있었다. 예전의 파트너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였다. 경력 2, 30년 이상의 고참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깔린느가 모든 위기를 헤치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전부 서해금의 공로로 알고 있었다. 설사 한현진이 회사의 대표로 취임했어도 다들 서해금이 옛정을 생각해 파트너였던 사람의 딸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월이든 송가람이든 한현진의 얘기만 나오면 은연중에 그런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급되지조차 않던 창시자인 한아람은 애초부터 깔린느의 최대 주주였고 심지어 그녀는 90%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깔린느의 창업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10%밖에 되지 않는 서해금의 투자금이 부족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서해금은 그저 적은 투자금을 들여 깔린느와 파트너쉽을 맺고 다른 사람이 심은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는 얘기였다. 자수성가, 커리어우먼, 비즈니스 천재, 조향 천재라는 타이틀은 그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아람 덕에 누린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과 더불어 “주세은이 문제를 일으키면 한현진이 모든 책임을 진다”던 송가람의 말을 곱씹어 본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은 의미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