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직 안 정했어. 그의 생일에 맞춰서 먼저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식은 양쪽 부모님이 서로 만나고 만족하면 우리 엄마가 사람을 불러서 날짜를 정해줄 거야. 우리한테 맞는 날을 고르기만 하면 돼.”한현진은 놀라서 물었다. “너희 둘 진도가 언제 이렇게 빨라졌어?”차미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개자식이 나한테 청혼할 때 내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받아 줬어. 후에 웃으면서 말하더라구. 내가 너무 급하게 받아줬다고. 좀 더 밀당했어야 한다고. 근데 그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었어. 내 머릿속엔 오직 ‘그래. 나도 결혼하는구나.’라는 생각뿐이었어. 하하.”한현진은 웃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누가 너를 자극한 거야?”“자극이라기보단...” 차미주는 입술을 삐죽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 기억나? 내가 말했던 그 큰 이모. 그 이모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나보다 두 살 많고 둘째는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우리 할머니는 그 집안을 아주 좋게 봤어.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 집에 편애가 심했지. 내가 사촌오빠랑 싸우면 그 오빠가 나를 이기지 못하고 항상 고자질을 했거든.”“그 큰 이모는 나를 볼 때마다 그런 얘기를 했어.” ‘너처럼 덩치 크고 성격도 안 좋으면 커서 누가 너랑 결혼해주냐?’ “사실 그 말이 나한텐 꽤 큰 걱정거리였어. 물론 자라면서 그 이모가 입이 가벼운 사람이란 걸 알게 됐지만 그때는 정말 결혼 못할까 봐 불안했어. 아니면 왜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겠어.”한현진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너한테 남자가 없는 게 아니라 너를 좋아했던 사람들을 네가 죄다 친구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사실 그녀가 알기로만 해도 대학 시절 차미주에게 호감을 보였던 남자는 둘이나 있었다. 첫 번째 남자가 어떻게 포기했는지는 몰라도 두 번째 남자는 차미주에게 농구 경기를 같이 보러 가자고 직접 데이트 신청까지 했었다. 차미주는 선뜻 따라갔지만 농구장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한현진이 그녀의 손등을 툭 쳤다. “그만 떠들고 가만히 서 있어 봐.” 차미주는 바로 허리를 펴고 자세를 잡았다. 한현진이 그녀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뭔가 하나가 부족한데...” 차미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한현진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조금만 기다려 봐.”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차미주가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강한서였다. 그는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고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차미주는 놀라서 물었다. “너 여기 웬일이야?” “너희 집에서는 현관문 열고 얘기하면 몇 년 받냐?” 차미주는 말문이 막혔다. 차미주는 멋쩍게 길을 비켜주며 그 귀한 분을 집 안으로 들였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눈짓에 따라 손에 든 상자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한현진이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상자를 열자 차미주는 호기심에 슬쩍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바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자 안에는 투명한 광택을 띠는 옥 팔찌가 들어 있었다. 차미주는 옥 팔찌에 대해 잘 몰랐다. 엄마가 몇 개 가지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 짙은 녹색이라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늘 옥 팔찌는 나이 든 사람이나 좋아하는 물건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팔찌는 달랐다. 맑고 투명한 빛에 가장자리엔 은은한 황금빛이 스며들어 있었고 자연광 아래에선 촉촉하게 윤기가 돌았다. 마치 물기를 머금은 꽃잎 같았다. 차미주는 눈앞에 옥 팔찌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미주야, 이리 와.” 한현진이 불렀다. 차미주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한현진은 차미주의 손목을 잡고 팔찌를 들어올렸다. 팔찌를 손목에 끼웠다. 안 들어갔다. 다시 시도했다. 또 안 들어갔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차미주의 손목은 붉게 달아올랐고 팔찌는 손목 중간쯤에서 멈춰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말을 하며 차미주를 화장실로 데려가 손에 세정제를 좀 묻히고 힘껏 팔에 끼워넣었다. 차미주는 손목을 돌리며 이 팔찌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이전에 옥이 별로라고 말한 게 너무 과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팔찌, 진짜 너무 아름다워. 말 그대로 예술이잖아.’ 그녀가 팔찌를 감탄하며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강한서가 내 손목 둘레를 재었다고 하는데, 이 팔찌는...?” 한현진이 눈을 살짝 좁히며 웃었다. “이건 너를 위한 신혼 선물이야.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미리 즐겨봐. 나한테 며칠 더 두면 내가 못 참고 껴버릴까 봐 그래.” 차미주는 그 말을 듣고 팔찌를 빼려고 했다. “너 미쳤어? 이거 얼마나 비싼데. 너 결혼할 때 내가 500만 원밖에 안 줬는데 이건 너무 과하지 않냐고.” 처음 끼울 땐 힘들었는데 이제 빼려니 더 어려웠다.한현진이 차미주를 막았다. “미주야, 그건 다르지. 그렇게 비교하면 안 돼. 내가 결혼할 때 너는 한 달 월급이 300만 원도 안 됐잖아. 그런데도 500만 원을 선물로 줬고 그 마음이 그 선물보다 훨씬 더 값지고 중요한 거야. 지금은 내가 능력이 생겨서 너 결혼할 때 더 좋은 선물을 줄 수 있게 된 거고 그건 내 마음이야. 가치가 높고 낮고로 그 마음의 소중함이 달라지지 않아.” 한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팔찌는 강한서가 고른 건 맞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너도 이걸 좋아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 마음에 들어?” 차미주가 대답했다. “좋아. 근데...” “좋으면 됐어. 앞으로도 우리 둘 다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그때 가면 팔찌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건물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너한테 줄 수 있어.” 차미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됐어. 건물은 너무 비싸. 너랑 강한서가 또 이혼하고 나한테 재산 반환을 요구하면 어떻게 해?” 한현진은 혀를 차며 이빨을 간 채 말했다. “우리 둘한테
두 사람은 모두 한성우를 관여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서로의 유전자를 탓하며 비난하기에 바빴다.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삐그덕거렸고 양측 부모님들은 아이가 생기면 나아질 거라며 두 사람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권유한 덕에 그가 태어났다.어찌저찌하여 가정은 유지해 왔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딱히 좋아지지 않았다.혼인 관계에서 두 사람은 모두 이기적으로 행동해 왔고 그 영향으로 인해 한성우는 결혼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 차미주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사실 한성우는 일찌감치 부모님에게 자신의 태도 의사를 밝혔다.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고 부잣집 딸이 아니라 평범한 아가씨라고, 만나고 싶으면 인사시킬 수는 있으나 지적하거나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그럴 거면 인사시키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화내기 전에 가버렸다.그들의 성격상 만남을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언제 인사시키겠냐고 연락이 왔고 한성우는 이를 차미주에게 알렸다.그리고 나서는 이내 또 후회가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미주가 자신의 가정 상황을 알고 나서 흔들릴까 봐 두려웠고 또 한편으로는 부모님들이 말을 함부로 할까 봐 걱정됐다.하지만 차미주가 이번 만남을 신중히 생각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이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결혼 당사자는 본인이니 다른 사람들의 말보다도 자신이 소중한 사람을 놓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차미주가 손을 씻고 씻을 때,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귓속말했다.“다 씻었어?”차미주는 간지러워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귓속말하지 마. 간지러워.”한성우는 더욱 가까이 붙으며 간지럽히듯 여보라고 불렀고 차미주는 귀가 빨개지도록 부끄러웠다.“뭐라고?”한성우는 웃으며 말했다.“나랑 결혼하면 여보 맞잖아. 여보 아니면 뭐라고 부를까? 애기? 자기야?”차미주는 얼굴이 빨개졌다.“마음대로 해.”“그럼 난 여보. 카카오톡도 여보라고 저장
한성우가 멍때리고 있을 사이, 차미주는 그를 바닥에 제압해 버렸다.“아파 아파.”한성우는 크리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아프다고 외쳤다.그는 처음으로 차미주가 밥을 너무 잘 먹어도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밥심을 모두 자신을 제압하는 데 썼다간 언젠가는 자신의 몸이 고장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차미주는 이를 갈며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말했다.“줄게 줄게, 나를 먼저 놔줘.”강한서와 달리 한성우는 바로 투항하는 타입이었다.차미주는 한성우가 폰을 돌려주자 그제야 완전히 그를 풀어주었다.한성우는 바닥에 앉아 아픈 어깨를 문지르며 불평했다.“아가씨,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 넘어요.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질 나이라고요. 나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다가는 큰일 난다고요.”“도둑놈 잡는 게 습관 대서 그래. 그러니까 돌려달라고 할 때 줬으면 됐잖아. 핸드폰을 가지고 튀니까 직업병이 도져서 그런 거지.”차미주는 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괜히 기침 한번 했다.“정의 구현이 아니라 찔리는 것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한성우가 되묻자 차미주는 귀가 빨개지며 부정했다.“찔리긴 뭐가 찔려, 괜한 트집 잡지 마.”한성우는 어깨를 문지르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찔리는 게 없는데 왜 안 보여줘? 혹시 조준한테 미련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전번 날에도 두 사람이 통화하는 것을 들었어, 재검진 시간 예약하던데.”“헛소리하지 마, 언제 시간 되냐고 묻길래 다음 주 목요일이라고 대답한 거거든. 그날은 자신의 외래 날이 아니라고 했어. 난 그걸 알고 일부러 그날에 가려고 한 거고. 네가 괜히 오해할까 봐. 넌 내 통화를 엿들은 것도 모자라 혼자 시나리오까지 쓰고 앉아 있네. 피해망상증이 있는 거 아니야?”차미주의 말을 들은 한성우는 기분이 좋아져 가까이 붙으며 물었다.“주치의 바꿨어?”차미주가 내일 당장 원래대로 바꾸겠다고 말하자 한성우는 그녀를 껴안으며 사과했다.“여보, 내가 미안해,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방에 물건 가지러
“아니면 뭐 다른 이유라도 있을까 봐?”차미주는 물 한 모금 마시며 한성우의 눈길을 피했다.그런 그녀를 몇 초 동안 뚫어져라 보던 한성우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럼 나는 뭐라고 저장해줄까? 슈크림?”순간, 차미주는 입안에 있던 물을 푸하고 내뿜었다.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자 촉촉한 미간과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한 한성우는 관능미가 한층 더해져 매혹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턱에 고여있던 물방울이 차미주의 손에 떨어져 차미주는 저절로 손이 움츠러들었다.“크리미가 이런 뜻이었어? 도대체 그 머릿속엔 무슨 야리꾸리한 생각이 들어있는 거야?”차미주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뭐라는 거야?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생사람 잡지 마!”눈꼬리가 올라간 한성우의 눈매는 유달리 이뻤다.“오늘 어때?”“뭐라고?”차미주는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하고 있어서 한성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한성우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그녀의 귀를 깨물며 물었다.“크리미의 저력을 알고 싶지 않아?”차미주가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 한성우는 그녀를 잡아 소파에 눕혔다.차미주는 발버둥 치며 말했다.“이거 놔줘.”한성우는 그녀의 얼굴에 뽀뽀하며 말했다.“나쁜 생각은 네가 먼저 한 거잖아. 너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닌걸.”차미주는 부끄러워하며 소리쳤다.“헛소리하지 마, 난 아무 생각하지 않았다고.”“그래, 그래, 다 내 탓이야.”한성우는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 조잘조잘 말하는 차미주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차미주는 해명하려고 했으나 한성우는 기회를 주지 않고 그녀를 침대로 이끌었고 결국 차미주는 해명은 커녕 화를 낼 기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한성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팔에 끼어있던 한현진이 선물했던 팔찌가 손에 닿았다.그는 그녀의 팔을 들어 전등불에 비추자 미주는 아프다고 팔을 빼며 말했다.“망가뜨리면 안 돼. 함부로 다치지 마.”한성우는 팔찌를 만지작거
고개를 숙여 보니 산수패의 색감이 자신의 팔찌랑 매우 흡사했고 금장식 모양도 거의 똑같았다.한성우는 웃으면서 말했다.“원료는 내가 고르고 돈은 강한서가 지불한 거야. 이백만 원으로 몇 배나 많은 원료를 산 거지. 하마터면 거기에서 못 나올 뻔했는데 강운이 데리러 와서 나왔잖아. 그때 난 산수패 하나를 만들 것만 가지고 나머지는 강한서가 다 가져갔어. 몇 년 사이 비취 가격이 많이 올라서 난 한서가 일찌감치 매도한 줄 알았더니 안 팔고 가지고 있었네. 너한테 이렇게 팔찌도 해주고 말이야.”한성우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차미주의 어깨에 살짝 입맞춤하고는 계속해서 말했다.“전에 만났던 몇몇 여자 친구한테는 아무것도 안 해주더니 너한테만 팔찌를 선물해 주는 것을 보아 강한서도 우리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이에 차미주는 찬물을 끼얹으며 말했다.“퍽이나 그러시겠어요. 내가 현진이랑 절친이니까 이렇게 귀한 선물을 해준 거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만약 너랑 헤어지면 이 팔찌 돌려 달라고 하게? 전 여자 친구들에게 선물을 안 해준 건 그냥 네가 바람둥이 기질이 있으니 자신의 투자가 헛되이 될 것이 뻔하니까 안 해준 거지. 지금 여자 친구는 나고 내가 설사 당신 아내가 되지 않더라도 자기 아이의 이모가 될 테니까 손해 볼 일이 없잖아. 안 그래?”한성우는 오목조목 말 잘하는 차미주에게 알겠으니 그만하라고 했다.“싫은데.”차미주는 자기 팔에 걸려있는 팔찌를 보며 말했다. 보면 볼수록 팔찌가 마음에 쏙 들었다.그녀는 한성우에게 물었다.“이 팔찌 얼마나 할까?”“삼사천 만 원은 할 걸.”차미주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입이 쩍 벌어졌다.“그렇게 비싸다고?”“당연한 걸 물어. 금을 값이 있어도 옥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하잖아. 아무렴 부자들이 값도 없는 돌멩이들을 가지고 노는 바보짓을 할까.”“그럼 현진은 왜 그렇게 금에 목을 매는 거야?”“걔가 금 장신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이런 옥이나 비취를 하나만 해도 몇천만 원을 몸
현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잠이 안 와. 진정이 안 됐나 봐.”“그럼 태교를 좀 듣는 건 어때?”“괜찮아.”강한서가 아나운서 톤으로 그에게 논어를 읽어주자 한현진은 순간 고등학교 때 수능을 준비하던 생각이 떠올라 오히려 더 정신이 번쩍 들었다.강한서가 물었다.“주 기사님 일을 어떻게 생각해?”한현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너무 복잡해. 처음에는 그저 그가 진짜 주혁이 아닌 것만 의심했었는데, 이제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그가 주혁이 아니라고 말하잖아.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혼란스러워. 경찰에 신고하려고 해도 명분이 없어. 가족들도 그를 의심하지 않잖아.”한성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신고를 하다고 해도 뭘 신고해야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이 주혁이 아니라고? 지문도 파괴된 이 상황에 경찰들은 그저 그와 가족들의 dna로 신분 확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복병이 바로 이 포인트에 있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를 아주 사랑하고 어쩌면 지금의 주혁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 상황이라 섣불리 신고했다가 가족들이 협조를 안 하면 일을 되려 망칠 수도 있었다.“친구한테 부탁해서 몽타주를 그릴 사람을 찾고 있어. 은서하의 묘사대로 그 사람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지 한번 알아봐야겠어. 그거라도 있으면 다른 단서들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그러는 수밖에 없지 뭐. 난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림도 잘 그리고 서예도 잘하는 사람이면 그 년대에 좋은 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렇게 흉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이야?”한현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다 본인의 선택이지 뭐.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봐서는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목숨과 명예보다도 훨씬 중요하다는 거겠지.”강한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회사에서 그 사람과 멀리하도록 해. 될수록 접촉하지 말고. 어딜 가나 꼭 원율이랑 같이 다니고.”
양시은이 쯧 혀를 찼다. “우리 사이에 제가 현진 씨에게서 돈을 왜 받겠어요. 계약금 없이 식장 예약해 드릴 수도 있어요. 현진 씨가 저희 호텔이 마음에 드신다면요. 이젠 배가 제법 나와서 더는 숨기기 어려울 것 같아요.”“전엔 강 대표님이 기억을 잃어서 다들 두 집안의 연은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했지만 현진 씨가 임신을 했으니 얘기가 다르잖아요. 결혼은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가 있는 한 송씨 가문은 강 대표님의 힘이 되어줄 수 있어요.”“강 대표님은 지금 강단해 대표님과 치열한 권력 다툼 중이잖아요.”양시은이 말하며 한현진의 배를 쳐다보았다.“전 그 인간들이 강 대표님과 송씨 가문의 동맹을 파괴하기 위해 현진 씨 배속의 아이를 노리고 있을까봐, 그게 걱정이에요. 이렇게 숨기기보단 차라리 공개를 해 버리는 게 어때요. 그러면 그 인간들도 대놓고 손을 쓰지는 못할 거예요.”한현진이 떠보듯 물었다.“언니 혹시 뭐 들으신 거 있으세요?”양시은이 대답했다.“요즘 송민희 씨가 저희 쪽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어요. 아들에게 좋은 짝을 소개해주려는 것 같던데 명문가의 딸만 고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 댁 아드님이 워낙 소문이 많잖아요.”“강현우 무능력한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위엔 강 대표님처럼 능력 있는 사촌 형이 있으니 강현우와 결혼하면 한성 그룹 후계자는 꿈도 못 꿀 텐데, 누가 그런 집안과 연을 맺고 싶어 하겠어요.”“강단해 대표님도 이 권력 다툼에서 언젠가는 질게 뻔한데 한성을 위해 30여 년을 바치신 분이 그렇게 쉽게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겠어요?”“만약 저라면 힘을 실어줄 뒷배를 찾지 못한 상황에 절대 상대방이 다른 가문과 힘을 합쳐 절 내쫓을 기회는 주지 않을 거예요.”아이는 두 집안을 이어줄 근원이었다. 만약 강한서가 한현진을 지키지 못해 아이를 잃게 된다면 동맹은커녕 그 일로 사이가 틀어져 원수가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현진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송씨 가문의 도움이 없다고 해서 강한서가 강단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젊었을 때 그저 잠깐 알고 지낸 적이 있었어요. 홍혜림 씨는 결혼 전에 일러스트레이터였어요. 홍혜림 씨의 선배가 당시 서화계에서 꽤 인지도가 있었어요. 이름이... 박안수.”“박안수는 서해금의 전남편이예요. 홍혜림 씨와 서해금은 그 반안수라는 분 때문에 서로 알게 된 사이였고요. 홍혜림 씨가 아마 서해금의 과거에 관해 잘 알고 있을 거예요.”“박안수...”그 이름을 중얼거리던 한현진이 갑자기 말했다. “송가람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겠네요. 전남편 집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거예요?”양시은이 말했다. “사람이 있어야 신경도 쓰죠. 그 전남편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해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이라고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전부인데 남동생은 지능 장애가 있는 것 같았어요.”“형이 사고로 세상을 뜬 후 집을 뛰쳐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요. 여동생도 결혼했다고 하던데... 저도 전부 전해들은 얘기라 아마 홍혜림 씨에게 직접 물어야할 거예요.”한현진이 말했다. “전남편이 예술 종사자일 줄은 몰랐네요.”양시은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부자가 많잖아요. 돈도 없이 어떻게 예술을 배워줘요. 설마하니 서해금이 박안수 씨 재능에 반했겠어요? 웃기지도 않는 얘기죠.”‘부자? 정말 부자였다면 그때 서해금은 왜 깔린느에 그 정도밖에 투자하지 못했던 거야? 부자였다면 왜 몇 년 동안 최문희의 병수발을 들었던 거야? 설마 아빠 외모와 재능에 반했다는 거야?’서해금은 송가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이루고자하는 목적이 있었다. 한아람의 출산 당일 일어난 사건의 모든 단서는 전부 서해금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서해금은 조심성이 많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송가람은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심지어 공범의 신분 역시 오리무중이었다. 서해금과 그런 짓을 꾸밀 수 있
양시은이 말하며 풉,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가 이젠 성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니면 그 개자식 대신 양육비까지 지불할 뻔 했다니까요. 면회가 되면 제일 먼저 그 소식부터 알려주려고요.”“너무하시네요.”감탄하듯 말하던 한현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전태평 씨가 만약 최고 형량을 받는다면 아마 70세 전에는 나오지 못할 거예요. 전씨 가문에서는 대가 끊는 걸 지켜보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면 전태평 씨 부모님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이 없잖아요.”양시은은 순간 한현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전태평의 부모님과 가족 모두 그 모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양시은을 속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줄곧 가스라이팅을 해왔었다. 전태평이 구속된 후 조급해진 그들은 양시은의 호텔이나 집에 들이닥치며 그녀가 돈을 써서라도 전태평을 꺼내주길 바랐다. ‘그렇게 손자가 좋으면 손자를 기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양시은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괜찮은 곳으로 지낼 곳 알아봐줘요. 기사님도 한 분 보내주고요. 부족한 게 있으면 뭐든 해줘요.”그 여자는 줄곧 전태평의 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계속 전태평의 부모님을 부추겨 양시은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 한현진의 말에 양시은은 전엔 생각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왜 굳이 내 손을 더럽혀? 개들끼리 물어뜯으라고 해. 내 손에 피 묻히지 않는게 상책이지.’전화를 끊은 양시은이 한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송가람이 신미정에게 속아 돈을 빌려준 것도 현진 씨가 유도한 거죠?”한현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돈 때문에 저도 마음이 아파요. 누가 뭐라든 우리 집안 돈이잖아요.”양시은의 눈빛이 한현진을 향한 존경으로 가득 찼다. “송가람이 열 명이 있어도 현진 씨에겐 상대가 안 될 거예요. 하지만 서해금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녜요.”한현진이 시선을 올리며 물었다. “언니는 그분에 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양시은이 한
양시은은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한현진에게 강한서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 대표님 12살 쯤 되었을 때 일이예요. 신미정은 강 대표님에게 야외 생존에 관련한 학원을 등록해줬었어요. 하지만 승인을 받은 학원이 아니었고 선생님과 스텝들도 전문가가 아니었어요. 그 탓에 산에서 내려와서야 낙오된 학생이 있다는 걸 발견했죠.”“강 대표님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집안은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때의 전 막 신미정과 안면을 튼 사이라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강 대표님을 찾는 일에 뛰어들었죠. 깊은 산은 아니었지만 나무가 무성했고 날도 빨리 어두워져 수색이 어려웠어요.”“하지만 다행이도 산에 오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강 대표님을 발견했어요. 당시의 강 대표님은 발을 다쳐 걸을 수도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 신미정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달려가 안아주지도, 위로하지도 않더니 날 잡더니 그러더라고요.”“부르지 마요. 겪어봐야 잘못한 걸 알죠.”“그렇게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무력함과 공포에 떠는 강 대표님을 한 시간 반 가까이 지켜봤어요. 그러다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에 신미정이 강 대표님 앞에 나타났죠.”“그땐 신미정이 왜 그렇게 아들을 대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나중에 알게 됐죠. 그건 아들을 조련하고 있다는 걸. 강 대표님이 제일 나약한 순간에 나타나 본인을 향한 의지와 순종을 극대화하려고 했던 거예요.”“회장님께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단한 대표님이 돌아가신 후 강 대표님을 바로 곁으로 데리고 오셨어요.”“회장님 덕분이 아니었다면 썩은 사상으로 가득한 신미정이 강 대표님처럼 훌륭한 아들을 뒀을 리가 없어요.”말을 마친 양시은이 한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진 씨 덕분에 강 대표님이 알게 된 거예요. 진심을 자길 위한다는 게 어떤 건지. 그러다보면 언젠가 신미정의 조련에서 벗어나게 되겠죠. 아들이 자기 통제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무섭지 않았을까요?”“신미정 그 여자에게 진심이라는 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쌍둥이라니!]그 글귀를 본 한현진 역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는 이처럼 기분을 밖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행복 가득한 웃음 밑에는 전과는 다른 펜으로 쓴 글이 있었다. 아마 나중에 따로 더 적어둔 글 같았다. [뭘 좋아해! 얼마나 고생인데!]강한서는 산부인과에 다녀올 때마다 아이의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 노트 작성을 시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노트엔 한현진의 변화로 가득 했다. 한현진의 입덧이 심해질수록 그의 기분도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한현진은 그동안 부질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임신한 한현진을 신경 쓰고 있었다. 욕실 문이 열리자 한현진이 얼른 노트를 덮어 서랍에 넣었다. 강한서가 머리의 물기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침대 맡에 기대앉은 한현진을 본 그가 침대로 걸어왔다. “안 자?”“자려고.”한현진이 웃었다. “너랑 같이.”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머리만 말리고 바로 올게.”“응.”몇 분 후, 강한서가 돌아오자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던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와 강한서의 품에 기댔다. “강민서 약혼식에 정말 어머님 안 부를 거야?”“오면 다들 불편하기만 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엄마는 민서를 본인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해. 민서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자라면서 말을 잘 듣던 아니었어. 그런 애가 엄마 의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으니 절대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민서는 엄마를 닮아 도도해 보이지만 사실은 겁이 많고 주견도 없는 애야. 엄마가 와서 민서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걔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이라고 할까봐 걱정이야, 난.”“그럼 아까 민서가 어머님을 모시고 싶다고 대답하면 어떡하려고 그랬어.”강한서가 말했다.
시선을 내리고 노트를 작성하던 강한서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는 계속 펜을 끄적이며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넌 참석했으면 좋겠어?”잠시 침묵하던 강민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 하지만 굳이 오겠다고 하면 우리도 못 말리겠지.”강한서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싫으면 못 오게 하면 돼. 넌 걱정 말고 약혼식 준비나 해. 전화든 뭐든,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게.”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강민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민경하를 보내고 샤워를 마친 한현진이 침대에 누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지루함을 느낀 그녀가 강한서가 자는 곳으로 옮겨가 그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을 뒤적였다. 한현진이 임신한 후 강한서의 머리맡에 늘 놓여있던 전공 관련 서적들은 어느 샌가 출산과 육아 관련 책으로 바뀌어 있었다. 강한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많은 일에 무관심하지만 한 번 꽂힌 건 끝장을 보는 타입이었다. 그는 책과 관련 자료를 읽어볼 뿐만 아니라 그의 휴대폰 속 알고리즘 역시 전부 출산 육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머리맡에 놓은 책은 이미 절반 정도를 읽은 상태였다. 심지어 어떤 곳엔 표기까지 해두었다. 그는 혼자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물론 틈만 나면 한현진에게도 배워주려고 했다. 물론 한현진 역시 차근차근 알아보며 배우고 있었지만 진심을 담아 열심히 노력하는 강한서의 모습이 좋았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한 가지라도 더 임신과 출산 과정에 참여하기를 자랐다. 아이와 엄마는 자연적으로 이어진 관계였지만 아빠라는 존재는 늘 노력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강한서는 한현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빠가 된다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손을 들어 서랍에서 펜을 꺼낸 한현진은 강한서가 표기해둔 틀린 부분을 수정했다. 서랍 속에는 노트가 하나 있었고 그 가운데 펜이 꼽혀있었다. 펜을 꺼내며 노트 내용을 힐끔 쳐다본 한현진이 멈칫했다. [131일. 어제와 다름없이 토는 하지 않았다. 입덧이 잦아들었지만 눈물이 많아졌
지금의 강한서는 한현진의 산후우울증에 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한현진은 늘 다른 사람을 통해 재미를 찾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쓸데없는 고민은 사절했다. 강민서가 드레스 자락을 들고 두 사람 앞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이건 어때?”길게 늘어진 드레스자락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대답했다. “청소도 되고 좋네.”강민서는 강한서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강한서가 말했다. “드레스로 무대를 쓸어도 되겠어.”강민서: ...“오빠가 뭘 알아.”한현진이 강한서를 쳐내며 칭찬했다. “예뻐. 잘 어울려. 하지만 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는 아닌 것 같아. 약혼식은 주로 친구를 초대해 넌 민 실장님과 인사를 다녀야 할 텐데 드레스가 너무 길면 움직이기 불편할 거야.”강민서는 순간 강한서가 한현진에겐 과분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자신은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하늘의 뜻도 거슬러 강한서를 선택해준 한현진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저렇게 독침만 내뱉는 입으로는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야.’“그럼 좀 짧은 거로 입어?”강민서는 아예 강한서를 무시한 채 한현진의 의견을 물었다. “너무 짧은 것도 안 돼. 그래도 무릎은 넘기는 게 좋아. 너무 복잡한 스타일의 드레스도 필요 없어. 단정하고 움직이기 편하고 컬러는 화이트나 아이보리 계열이면 돼.”강민서는 정인월이 보내준 드레스 중 몇 가지를 골라 수도 없는 피팅을 거쳐 한현진과 강한서가 만장일치도 예쁘다고 해준 아이보리 컬러의 드레스로 결정했다. 그 드레스를 본 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입만 안 열면 단아한 부잣집 딸내미 같아.”그 말을 들은 강민서는 더 이상 강한서의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후, 민경하가 도착했다. 엔진 소리가 들리자 강한서가 부를 필요도 없이 강민서가 먼저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강한서는 불만 가득한 말투로 한현진에게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땐 저렇게 반갑게 맞아준 적이 없어.”한현진이 그런 강한서
한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아냐, 이건 무효야. 방금 그건 우연이야. 다시 해. 이번엔 나중에 움직이게 한 사람이 강민서 약혼식 비용 전부 내는 거야.”씩 입꼬리를 올린 강한서가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좋아. 누가 먼저 할까?”“나!”한현진이 말하며 딸기가 담긴 그릇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가들아, 엄마야. 엄마가 이야기 들려줄까?”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뱃가죽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처럼 격렬한 반응은 아니었다. 마치 의심스럽다는 듯 잔잔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태동은 한현진을 흥분시키기엔 충분했다. “봐봐. 이것 보라고.”자신감이 하락한 강한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내 목소리 톤으로 말하면 어떡해? 이건 부정행위잖아.”그렇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연 한현진은 강한서의 목소리로 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현진은 단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게 왜 부정행위야. 네가 본인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규정한 건 아니잖아. 이런 건 특기를 발휘했다고 하는 거야.”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걸 꼼수를 부렸다고 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내가 이겼어.”“너 그건 내 노동성과를 표절한 거야.”“내가 이겼어.”“아이들 마음까지 속인 거라고. 태어나지도 않은 애들한테 인간의 사악함을 느끼게 했어.”“내가 이겼어.”강한서는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반항했다. “나 아직 도전 안 했어. 아직 진 거 아냐.”한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강 대표님, 게임 룰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셨나봐요. 전 먼저 움직이게 한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어요. 제가 이미 먼저 움직이게 했잖아요. 강 대표님이 도전했든 안 했든, 그건 중요한게 아녜요.”“어차피 네가 1등은 아니라는 거지.”“...”강한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언어유희로 룰에 함정을 파놓은 거야?”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전화를 끊은 전연이 눈을 비볐다. “휴대폰 소리에 깼어요. 미안해요, 오빠. 오래 기다리셨죠? 바로 깨우지 그랬어요.”심원이 말했다. “그리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데요. 안 그래도 깨우려던 참이었는데 깼네요.”말하며 시동을 끈 심원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요, 밥 먹어요.”전연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심원의 뒤를 따랐다. 밖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전연이 가방을 머리를 위로 올려 비를 막으려던 그때, 심원이 우산을 들고 나타나 전연에게 씌웠다. 심원은 흔히들 말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직 몇 번 만난 사이는 아니었지만 심원은 당연하다는 듯 전연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고 우산 밖으로 비쭉 튀어나와 비를 맞고 어깨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제쪽으로 걸어요. 물웅덩이 조심하고요.”전연이 갑자기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모든 여자에게 다 이렇게 다정해요?”멈칫한 심원이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다 자신이 물러선 그 한 걸음 때문에 전연이 비를 맞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또 얼른 전연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심원은 그렇게 온전히 비를 맞으며 말 한 마디를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말을 더듬던 심원이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미안해요...”전연이 우산 손잡이를 잡고 심원에게 다가갔다. 심원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뒤에 주차된 차 때문에 더는 물러설 곳 없이 전연과 차 사이에 갇혀버렸다. 전연이 우산을 높게 들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가렸다. 고개를 들어 심원을 쳐다본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오빠가 우산 들어요. 키가 커서 이렇게 들고 있으면 팔이 너무 아파요.”“아, 네.”번뜩 정신을 차린 심원이 얼른 우산을 건네받았다. 전연이 심원을 향해 웃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오빠. 전 오빠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도울 거예요.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오빠가 자신을 의심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오빠는 사격 실력도 엄청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