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부는 어제 휴식하고 오늘 점심에야 출근했는데 그 사실을 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장씨 아주머니는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흠칫하며 눈을 피하며 말했다. "저, 사모님한테서 들었어요.""우리 엄마가 그런 것도 얘기해요?"장씨 아주머니는 말을 더듬거렸다. "사, 사모님께서 오늘 기분이 언짢으시다고 하기에 수다 좀 떨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말이 나왔어요."신미정이 아무리 유현진을 탐탁지 않아 한다 해도 집안일인데 아무렴 가정부한테까지 얘기해줄까?장씨 아주머니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유현진이 아무리 바보라도 약통을 테이블에 올려놓았을까? 그것도 며칠 전에 먹은 약을?'사건의 내막을 눈치챈 강한서는 순간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아주머니, 내일 아침에 회사로 가셔서 결제받고 더는 나오지 않으셔도 돼요."장씨 아주머니는 표정이 멍해졌다. "대표님, 저를 자르시려고요?"강한서는 쌀쌀한 눈빛으로 장씨 아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사직서 내세요. 그러면 6개월 급여는 더 드리죠. 다른 곳에 취직할 시간은 충분하실 거예요."장씨 아주머니는 강한서의 진지한 모습에 당황했다.장씨 아주머니는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저 자르시면 안 돼요. 사모님이 대표님 보살피라고 보냈는데 대표님은 저를 자르실 자격이 없어요!""자격이요?" 강한서는 어이가 없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한성그룹의 직원이에요. 내가 내 직원을 자르겠다는 데 문제있어요?"이 순간, 강한서의 표정은 유현진의 얼굴과 완전히 맞물렸다.그날 유현진도 똑같은 말을 했다.하지만 그날, 장씨 아주머니는 유현진의 위협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장씨 아주머니는 강씨 가문에서 십여 년을 일해왔고 더군다나 신미정이 보낸 사람이니 유현진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하지만 강한서는 달랐다. 강한서가 한성 그룹의 진짜 주인이니 신미정도 강한서의 덕으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강한서가 자르겠다고 결심한 이상, 아무도 장씨 아주머니를 도울 수 없다.이 순간, 장씨 아주머니는
장씨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켜 나갔다.유현진은 밤새 집에 돌아오지 않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조식을 사 들고 들어왔는데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유현진은 신미정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통화버튼을 눌렀다.그녀가 말을 내뱉기도 전에 신미정이 따져 물었다. "유현진, 너 한서한테 장씨 아주머니를 자르라고 시켰어?"유현진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자르다니요?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한서가 장씨 아주머니를 잘랐어. 아침부터 나한테 와서 울고불고 아주 난리야. 아주머니가 뭘 잘못했다고 자르긴 잘라?"'강한서가 가정부를 잘랐다고?'유현진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니, 저 어제 병원에서 엄마 돌보느라고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모른다고? 너 때문에 한서가 장씨 아주머니한테 화풀이한 거잖아! 한서 다친 데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넌 다 죽어가는 네 엄마를 돌보러 간 거야? 네 엄마가 그렇게 된 지 몇 년째인데 돌봐서 뭐 한다고? 너 지금 누리는 것들 다 누구 건데 밖으로 맴도는 거야!"유현진은 표정이 굳어버렸다. "밖으로 맴돈다고요? 어머니 얘기로는 어머니는 강씨 가문에 시집오고 나서 부모님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셨다는 얘기죠?"유현진은 처음으로 신미정에게 말대꾸하였다. 신미정은 한참 머리가 띵해지더니 이내 노발대발하였다. "너 무슨 말버릇이야? 교양 없이!""어머님, 교양은 입에 달린 말이 아니에요. 절 낳아준 엄마조차 돌보지 않는다면 어머님이 늙었을 때 저는 더 나 몰라라 할 거 아닌가요?" 신미정이 화를 내기 전에 유현진이 계속 말했다. "그러고, 어머니 아들은 공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장씨 아주머니를 잘랐을 땐 이유가 있었을 테죠. 보나, 마나 장씨 아주머니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을 거예요. 저한테 따질 시간에 한서 씨한테 부탁하세요. 어머니 얼굴 보고 다시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말을 끝낸 유현진은
생각 밖의 전화에 유현진은 의아했다.'아빠가 왜? 그날 팔찌 사준 걸 후회하고 있나?'유현진의 인상 속의 유상수는 속이 좁은 사람이다.하현주의 말에 의하면 유상수는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었던지라 아무리 돈이 많아져도 그들 모녀와 본인한테 돈을 아꼈다.하지만 하현주는 완전히 달랐다. 돈을 벌 줄도, 쓸 줄도 아는 사람이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 보니 두 사람은 매번 돈 때문에 다투곤 했다.유상수는 돈을 헤프게 쓰는 하현주의 씀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하현주는 계산적인 유상수가 속이 좁다고 생각했다. 거래처와의 미팅이 잡혀도 혹시라도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돈 낭비를 할까 이천만 원짜리 양복 한 벌도 사 입지 않았으며 비싼 호텔을 예약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유상수가 인색하다고 말하기엔 유상수는 친척들한테는 아주 손이 컸다.유상수는 그 세대에 처음으로 작은 마을에서 대학 입학시험을 통해 큰 도시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명성을 날렸던 개천에서 난 용이다.회사가 상승세를 보일 때쯤, 이 소식은 그의 고향에 빠르게 확산하더니 얼마 안 가 사돈에 팔촌들까지 다 달라붙기 시작했다.유상수는 워낙에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상대가 입만 벌리면 뭐든지 다 들어줬기에 회사에도 친척들로 된 낙하산이 많았다.유현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다 보니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친척들에게는 인상이 깊었다. 그들은 유상수를 믿고 회사에서 여러 번 갑질을 해댔다.이렇게 밥만 축내는 사람들을 두는 데는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하현주가 산 핸드백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잔소리했다.이날 이때까지, 유상수가 유현진에게 준 값비싼 물건은 예단을 제외하고 피아노밖에 없었다. 그것도 하현주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산 것이었다.하현주는 매번 유상수가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 성격이 검소해졌다고 말했고 또 그럴 거로 생각해왔다.하지만 하현주가 사고 난 뒤, 유현진은 비로소 유상수의 행동은 그가 검소한 것이 아니라 야박하고 무정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유상수가 기꺼이 돈
"만두는 손맛이야. 아빠 기억으로는 너 우리 집 만두가 제일 맛있다 그랬어."유현진은 입술을 오므리고는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아빠.""가족끼리 고맙긴." 유상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요즘 아빠 마음이 좀 그래. 그깟 트러플을 누가 먹었으면 먹은 거지 가족끼리 그럴 거 뭐 있다고. 내가 왜 너한테..." 유상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말했다. "그날 병원에서 나오면서 사실 아차 했어. 그런데 부모가 되어서 자식한테 사과하려니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더라고. 그날 너에게 준 팔찌에 이 아빠의 미안한 마음도 들어있어. 속상한 거 있으면 말해도 돼. 널 원망하지 않아."몇 년 전이었으면 유현진은 분명 이런 말에 흔들렸을 것이다.하현주가 사고 나기 전, 그녀는 항상 유현진에게 유상수가 좋은 아빠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유현진에게는 유상수가 좋은 아빠라는 환상이 존재했었다.하지만 하현주가 그렇게 되고 난 뒤 유상수의 매정한 행동은 유현진의 마음속의 아빠를 완전히 파괴했다.유상수는 이기적이고 매몰찬 사람이다. 매번 좋은 아빠인 척을 할 때마다 꼭 목적이 따라왔다.유현진은 속으로 그런 유상수를 비웃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뭐. 아빠도 가족을 위해 그랬잖아요.""그렇게 생각하니 고맙다." 유상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현아가 한성 그룹에 출근하게 되었는데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을 테니 한서한테 잘 돌봐주라고 해."순간 유현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다른데 출근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한성으로 출근해요?""원래 직장은 승진할 공간도 없고 해서, 마침 한성에서 채용 공고가 떴더라고. 그래서 면접 봤는데 통과했어. 오늘부터 출근이야. 그래서 다들 모여서 축하라도 해줄까 하다가 너 건강도 안 좋고 해서 그만뒀어. 다음날에 모이지 뭐."유현진은 믿어지지 않았다.'한성 그룹에 취직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석사 학위는 기본이고 본과 졸업생이라도 명문
유상수는 유현진의 말투에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따뜻하게 말했다. "아빠한테 딸은 너 하나뿐이야. 앞으로 유씨 집안의 주인도 당연히 너고. 현아가 한성 그룹에서 발만 잘 부치면 내가 없어도 네 손발이 되어줄 거야.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통화를 종료한 유현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유현아의 실력으로 어떻게 한성에 들어온 걸까?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손을 쓴 것 같았다.하지만 강한서는 워낙에 유씨 가문 사람들에게 호감이 없다 보니 유현아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방식은 강한서의 스타일이 아니다.강한서는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다. 2년 전, 한성 그룹에서 거래처를 물색하던 중에 강한서의 외삼촌이 신미정을 통해 한성 그룹과 손잡길 바랐다. 강한서의 외삼촌은 3개월이면 자질 검증을 끝낼 수 있다고 거듭 보증했지만 강한서는 결국 거절했다.엄마인 신미정도, 외삼촌도 통하지 않는데 유현아에게 통할 일은 더더욱 없다.유현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얻지 못해 결국 민경하에게 연락했다.같은 시각 민경하는 사무실에서 강한서에게 업무 보고 중이었다. 강한서는 아침 일찍 회사로 나왔다.민경하는 강한서가 휴가를 낸 두 주 동안 편한 잠을 잘 줄 알았는데 강한서가 이렇게나 빨리 회사로 복귀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마도 그의 팔자인가 보다.민경하가 한창 신세 한탄을 하는 도중에 휴대폰이 울렸다.강한서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민경하는 미안한 마음에 신속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머리를 숙여 휴대폰을 확인한 순간,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헛기침하더니 강한서를 향해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한테 온 연락이에요. 대표님을 찾으시는 것 같은데요."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옆에 놓인 자기의 휴대폰을 힐끔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어제 유현진이 외출한 뒤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강한서에게 전화는커녕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유현진은 강한서가 연락이 되지 않을 때만 민경하에게 연락했었다. 하지만 지금, 강한서에게 한 통의 연락도 없이 바로 민경하에게 연락했다
'첫사랑이 약 발라줘서 빨리 낫기라도 한 거야?"유현진의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들로 꽉 찼지만 묻지 않았다. 전화기 저편에서 강한서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바꿔 달래요? 멋대로 행동할 거에요?"유현진......민경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 신경 쓰지 마세요. 대표님이 사모님에게 화내는 게 아니라 아침부터 안색이 좋지 않으셨어요. 열도 좀 나는 것 같아요. 모시고 병원에 가려 했는데 굳이 일 다 보시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요. 지금은 또 다친 곳이 아프셔서 화가 올라오는 것 같아요. 사모님 다른 일 없으시면 회사 한 번 들러주세요. 대표님이 약을 두고 오셨다네요.""뭔 쓸데없는 소리예요?" 강한서의 한마디는 유현진의 얼마 남지 않은 미안한 마음까지도 사라지게 했다.유현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대표님 말투로 봐서는 아픈 곳이 전혀 없어 보이네요. 좋아졌으니 출근했겠죠. 대표님이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정말 아프다고 해도 여자들이 약 발라줬을 테니 난 빠지려고요. 대표님이 날 보면 안 아픈 데도 아플 테니까."민경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현진은 통화를 종료했다.민경하는 멍한 표정으로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강한서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그는 헛기침하고는 유현진을 위해 한마디 했다. "사모님도 마침 화나는 일이 있나 봐요."강한서가 쌀쌀한 눈빛으로 민경하를 쏘아보자 민경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이때,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민경하는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머님께서 전화 주셨네요."워낙 기분이 좋지 않았던 강한서는 신미정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말을 듣고 더 불쾌한 마음에 차갑게 말했다. "받지 마세요."민경하는 이내 벨 소리를 끄고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강한서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수미 씨 사직서는 아직이에요?"장수미는 장씨 아주머니의 본명이다.신미정이 이른 시간에 연락해 온 건 무조건 이 일 때문이다. 강한서가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 그의 입지는 확고했다."인사팀에서
그녀는 당연히 듣기 싫은 욕지거리들을 보냈을 줄로만 알고 혹시나 사건에 도움이 될까 주강운에게 넘기려고 캡처 준비를 하려고 확인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멈칫했다.송민영의 매니저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그녀에게 '보이스'에 출연하길 권했다.'보이스' 출연 거절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갠톡이 날라오다니, 소식이 빠르긴 정말 빠르다.유현진은 계속 아래로 보았다. 그쪽의 말로 인하면 그녀가 페이스북에서 '정상에서'의 배역을 스틸당했다는 글을 올린 뒤 네티즌들은 송민영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지만, 이 또한 송민영 본인의 뜻이 아니었으니 송민영도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고 했다.'비밀의 연인'의 흥행 또한 두 사람이 합작한 결과이며 양측 모두에게 큰 의미가 있으므로 지나간 일은 뒤로하고 이번 예능 방송에 출연하길 바랐다.방송이 나갈 때는 제작직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태그해 그녀의 인지도를 올리는 한편 두 사람의 불화설도 잠재우고 또 본인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윈윈이었다.하지만 부탁이라고 하기엔 미안한 감정 하나 들어있지 않는 오만한 말투였다.송민영의 매니저가 맞는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상대는 아마 유현진이 송민영의 덕을 보는 일이니,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유현진은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다시 신중하게 생각하고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송민영 씨의 호의에 감사드려요. 제작진의 섭외를 받았을 때 송민영 씨와 함께 같은 방송에 출연한다는 소식에 기대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개인적인 사유로 이번 방송 녹화에는 함께하지 못하겠네요. 죄송하게 됐어요. 송민영 씨는 전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기에 저도 부러운 건 사실이지만 제가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 보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에는 부족해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송민영 씨의 호의를 거절할게요. 그럼, 녹화 잘하시길 바랄게요."문자를 보내고 얼마 안 지나 상대에게서 답장이 왔다."얘기하세요. 얼마면 출연하실 건가요?"유현진은 차갑게 웃었다. '연기조차
'좋게 말해서 안 들으면 나도 어쩔 수 없지!'________유현진이 페이스북을 끄자마자 민경하에게서 연락이 왔다.'한밤중에 기분 나쁘게 왜 다들 연락하고 난리야?'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민경하의 연락을 무시했다.그녀는 민경하가 귀찮은 것이 아니라 강한서와 연관 된 말이 듣기 싫었을 뿐이다. 그녀는 강한서와 엮이기 싫었다.유현진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민경하는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보다 못한 간병인이 말했다. "현진 씨, 전화 받아봐요. 혹시라도 급한 일이면 어떡해요?""급한 일은 무슨."유현진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결국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대표님 체온이 39도까지 올라갔어요. 집에 해열제 있어요?"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39도까지 올라갔는데 해열제가 뭔 도움이 되겠어요! 얼른 병원부터 데려가요!""대표님이 안 간다고 고집부리시니 저도 어쩔 수 없어요. 해열제라도 드시고 열 내려야죠. 게다가 아주머니까지 자르셔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저도 잘 몰라서 사모님한테 연락드리는 거예요."'열이 펄펄 나는데도 병원에 안 간다니 강한서 미쳤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강한서의 아버지도 처음에 고열에 시달리다 병원에 간 뒤로 병세가 심해져 세상을 떠났다. 아마 그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강한서는 열만 나면 투정이 많아지고 약도 먹기 싫어하고 병원은 더더욱 가기 싫다며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그러니 유현진은 민경하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급히 말했다. "아래층 거실 테이블 서랍에 약상자가 있어요. 거기 보면 해열제 있을 거예요. 일단 하나 먹여보고 반 시간 뒤에도 열이 내려 안 가면 끌어서라도 병원 가세요!"민경하는 간결한 대답을 끝으로 급히 전화를 끊었다.유현진은 다른데 신경 팔 틈이 없이 병실에서 쉴 새 없이 갔다 왔다 하며 불안해했다.강한서가 마지막으로 열이 난건 작년이었다.때는 가을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갑자기 날씨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