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켜 나갔다.유현진은 밤새 집에 돌아오지 않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조식을 사 들고 들어왔는데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유현진은 신미정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통화버튼을 눌렀다.그녀가 말을 내뱉기도 전에 신미정이 따져 물었다. "유현진, 너 한서한테 장씨 아주머니를 자르라고 시켰어?"유현진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자르다니요?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한서가 장씨 아주머니를 잘랐어. 아침부터 나한테 와서 울고불고 아주 난리야. 아주머니가 뭘 잘못했다고 자르긴 잘라?"'강한서가 가정부를 잘랐다고?'유현진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니, 저 어제 병원에서 엄마 돌보느라고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모른다고? 너 때문에 한서가 장씨 아주머니한테 화풀이한 거잖아! 한서 다친 데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넌 다 죽어가는 네 엄마를 돌보러 간 거야? 네 엄마가 그렇게 된 지 몇 년째인데 돌봐서 뭐 한다고? 너 지금 누리는 것들 다 누구 건데 밖으로 맴도는 거야!"유현진은 표정이 굳어버렸다. "밖으로 맴돈다고요? 어머니 얘기로는 어머니는 강씨 가문에 시집오고 나서 부모님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셨다는 얘기죠?"유현진은 처음으로 신미정에게 말대꾸하였다. 신미정은 한참 머리가 띵해지더니 이내 노발대발하였다. "너 무슨 말버릇이야? 교양 없이!""어머님, 교양은 입에 달린 말이 아니에요. 절 낳아준 엄마조차 돌보지 않는다면 어머님이 늙었을 때 저는 더 나 몰라라 할 거 아닌가요?" 신미정이 화를 내기 전에 유현진이 계속 말했다. "그러고, 어머니 아들은 공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장씨 아주머니를 잘랐을 땐 이유가 있었을 테죠. 보나, 마나 장씨 아주머니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을 거예요. 저한테 따질 시간에 한서 씨한테 부탁하세요. 어머니 얼굴 보고 다시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말을 끝낸 유현진은
생각 밖의 전화에 유현진은 의아했다.'아빠가 왜? 그날 팔찌 사준 걸 후회하고 있나?'유현진의 인상 속의 유상수는 속이 좁은 사람이다.하현주의 말에 의하면 유상수는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었던지라 아무리 돈이 많아져도 그들 모녀와 본인한테 돈을 아꼈다.하지만 하현주는 완전히 달랐다. 돈을 벌 줄도, 쓸 줄도 아는 사람이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 보니 두 사람은 매번 돈 때문에 다투곤 했다.유상수는 돈을 헤프게 쓰는 하현주의 씀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하현주는 계산적인 유상수가 속이 좁다고 생각했다. 거래처와의 미팅이 잡혀도 혹시라도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돈 낭비를 할까 이천만 원짜리 양복 한 벌도 사 입지 않았으며 비싼 호텔을 예약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유상수가 인색하다고 말하기엔 유상수는 친척들한테는 아주 손이 컸다.유상수는 그 세대에 처음으로 작은 마을에서 대학 입학시험을 통해 큰 도시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명성을 날렸던 개천에서 난 용이다.회사가 상승세를 보일 때쯤, 이 소식은 그의 고향에 빠르게 확산하더니 얼마 안 가 사돈에 팔촌들까지 다 달라붙기 시작했다.유상수는 워낙에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상대가 입만 벌리면 뭐든지 다 들어줬기에 회사에도 친척들로 된 낙하산이 많았다.유현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다 보니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친척들에게는 인상이 깊었다. 그들은 유상수를 믿고 회사에서 여러 번 갑질을 해댔다.이렇게 밥만 축내는 사람들을 두는 데는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하현주가 산 핸드백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잔소리했다.이날 이때까지, 유상수가 유현진에게 준 값비싼 물건은 예단을 제외하고 피아노밖에 없었다. 그것도 하현주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산 것이었다.하현주는 매번 유상수가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 성격이 검소해졌다고 말했고 또 그럴 거로 생각해왔다.하지만 하현주가 사고 난 뒤, 유현진은 비로소 유상수의 행동은 그가 검소한 것이 아니라 야박하고 무정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유상수가 기꺼이 돈
"만두는 손맛이야. 아빠 기억으로는 너 우리 집 만두가 제일 맛있다 그랬어."유현진은 입술을 오므리고는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아빠.""가족끼리 고맙긴." 유상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요즘 아빠 마음이 좀 그래. 그깟 트러플을 누가 먹었으면 먹은 거지 가족끼리 그럴 거 뭐 있다고. 내가 왜 너한테..." 유상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말했다. "그날 병원에서 나오면서 사실 아차 했어. 그런데 부모가 되어서 자식한테 사과하려니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더라고. 그날 너에게 준 팔찌에 이 아빠의 미안한 마음도 들어있어. 속상한 거 있으면 말해도 돼. 널 원망하지 않아."몇 년 전이었으면 유현진은 분명 이런 말에 흔들렸을 것이다.하현주가 사고 나기 전, 그녀는 항상 유현진에게 유상수가 좋은 아빠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유현진에게는 유상수가 좋은 아빠라는 환상이 존재했었다.하지만 하현주가 그렇게 되고 난 뒤 유상수의 매정한 행동은 유현진의 마음속의 아빠를 완전히 파괴했다.유상수는 이기적이고 매몰찬 사람이다. 매번 좋은 아빠인 척을 할 때마다 꼭 목적이 따라왔다.유현진은 속으로 그런 유상수를 비웃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뭐. 아빠도 가족을 위해 그랬잖아요.""그렇게 생각하니 고맙다." 유상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현아가 한성 그룹에 출근하게 되었는데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을 테니 한서한테 잘 돌봐주라고 해."순간 유현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다른데 출근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한성으로 출근해요?""원래 직장은 승진할 공간도 없고 해서, 마침 한성에서 채용 공고가 떴더라고. 그래서 면접 봤는데 통과했어. 오늘부터 출근이야. 그래서 다들 모여서 축하라도 해줄까 하다가 너 건강도 안 좋고 해서 그만뒀어. 다음날에 모이지 뭐."유현진은 믿어지지 않았다.'한성 그룹에 취직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석사 학위는 기본이고 본과 졸업생이라도 명문
유상수는 유현진의 말투에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따뜻하게 말했다. "아빠한테 딸은 너 하나뿐이야. 앞으로 유씨 집안의 주인도 당연히 너고. 현아가 한성 그룹에서 발만 잘 부치면 내가 없어도 네 손발이 되어줄 거야.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통화를 종료한 유현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유현아의 실력으로 어떻게 한성에 들어온 걸까?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손을 쓴 것 같았다.하지만 강한서는 워낙에 유씨 가문 사람들에게 호감이 없다 보니 유현아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방식은 강한서의 스타일이 아니다.강한서는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다. 2년 전, 한성 그룹에서 거래처를 물색하던 중에 강한서의 외삼촌이 신미정을 통해 한성 그룹과 손잡길 바랐다. 강한서의 외삼촌은 3개월이면 자질 검증을 끝낼 수 있다고 거듭 보증했지만 강한서는 결국 거절했다.엄마인 신미정도, 외삼촌도 통하지 않는데 유현아에게 통할 일은 더더욱 없다.유현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얻지 못해 결국 민경하에게 연락했다.같은 시각 민경하는 사무실에서 강한서에게 업무 보고 중이었다. 강한서는 아침 일찍 회사로 나왔다.민경하는 강한서가 휴가를 낸 두 주 동안 편한 잠을 잘 줄 알았는데 강한서가 이렇게나 빨리 회사로 복귀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마도 그의 팔자인가 보다.민경하가 한창 신세 한탄을 하는 도중에 휴대폰이 울렸다.강한서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민경하는 미안한 마음에 신속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머리를 숙여 휴대폰을 확인한 순간,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헛기침하더니 강한서를 향해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한테 온 연락이에요. 대표님을 찾으시는 것 같은데요."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옆에 놓인 자기의 휴대폰을 힐끔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어제 유현진이 외출한 뒤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강한서에게 전화는커녕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유현진은 강한서가 연락이 되지 않을 때만 민경하에게 연락했었다. 하지만 지금, 강한서에게 한 통의 연락도 없이 바로 민경하에게 연락했다
'첫사랑이 약 발라줘서 빨리 낫기라도 한 거야?"유현진의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들로 꽉 찼지만 묻지 않았다. 전화기 저편에서 강한서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바꿔 달래요? 멋대로 행동할 거에요?"유현진......민경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 신경 쓰지 마세요. 대표님이 사모님에게 화내는 게 아니라 아침부터 안색이 좋지 않으셨어요. 열도 좀 나는 것 같아요. 모시고 병원에 가려 했는데 굳이 일 다 보시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요. 지금은 또 다친 곳이 아프셔서 화가 올라오는 것 같아요. 사모님 다른 일 없으시면 회사 한 번 들러주세요. 대표님이 약을 두고 오셨다네요.""뭔 쓸데없는 소리예요?" 강한서의 한마디는 유현진의 얼마 남지 않은 미안한 마음까지도 사라지게 했다.유현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대표님 말투로 봐서는 아픈 곳이 전혀 없어 보이네요. 좋아졌으니 출근했겠죠. 대표님이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정말 아프다고 해도 여자들이 약 발라줬을 테니 난 빠지려고요. 대표님이 날 보면 안 아픈 데도 아플 테니까."민경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현진은 통화를 종료했다.민경하는 멍한 표정으로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강한서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그는 헛기침하고는 유현진을 위해 한마디 했다. "사모님도 마침 화나는 일이 있나 봐요."강한서가 쌀쌀한 눈빛으로 민경하를 쏘아보자 민경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이때,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민경하는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머님께서 전화 주셨네요."워낙 기분이 좋지 않았던 강한서는 신미정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말을 듣고 더 불쾌한 마음에 차갑게 말했다. "받지 마세요."민경하는 이내 벨 소리를 끄고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강한서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수미 씨 사직서는 아직이에요?"장수미는 장씨 아주머니의 본명이다.신미정이 이른 시간에 연락해 온 건 무조건 이 일 때문이다. 강한서가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 그의 입지는 확고했다."인사팀에서
그녀는 당연히 듣기 싫은 욕지거리들을 보냈을 줄로만 알고 혹시나 사건에 도움이 될까 주강운에게 넘기려고 캡처 준비를 하려고 확인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멈칫했다.송민영의 매니저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그녀에게 '보이스'에 출연하길 권했다.'보이스' 출연 거절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갠톡이 날라오다니, 소식이 빠르긴 정말 빠르다.유현진은 계속 아래로 보았다. 그쪽의 말로 인하면 그녀가 페이스북에서 '정상에서'의 배역을 스틸당했다는 글을 올린 뒤 네티즌들은 송민영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지만, 이 또한 송민영 본인의 뜻이 아니었으니 송민영도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고 했다.'비밀의 연인'의 흥행 또한 두 사람이 합작한 결과이며 양측 모두에게 큰 의미가 있으므로 지나간 일은 뒤로하고 이번 예능 방송에 출연하길 바랐다.방송이 나갈 때는 제작직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태그해 그녀의 인지도를 올리는 한편 두 사람의 불화설도 잠재우고 또 본인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윈윈이었다.하지만 부탁이라고 하기엔 미안한 감정 하나 들어있지 않는 오만한 말투였다.송민영의 매니저가 맞는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상대는 아마 유현진이 송민영의 덕을 보는 일이니,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유현진은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다시 신중하게 생각하고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송민영 씨의 호의에 감사드려요. 제작진의 섭외를 받았을 때 송민영 씨와 함께 같은 방송에 출연한다는 소식에 기대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개인적인 사유로 이번 방송 녹화에는 함께하지 못하겠네요. 죄송하게 됐어요. 송민영 씨는 전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기에 저도 부러운 건 사실이지만 제가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 보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에는 부족해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송민영 씨의 호의를 거절할게요. 그럼, 녹화 잘하시길 바랄게요."문자를 보내고 얼마 안 지나 상대에게서 답장이 왔다."얘기하세요. 얼마면 출연하실 건가요?"유현진은 차갑게 웃었다. '연기조차
'좋게 말해서 안 들으면 나도 어쩔 수 없지!'________유현진이 페이스북을 끄자마자 민경하에게서 연락이 왔다.'한밤중에 기분 나쁘게 왜 다들 연락하고 난리야?'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민경하의 연락을 무시했다.그녀는 민경하가 귀찮은 것이 아니라 강한서와 연관 된 말이 듣기 싫었을 뿐이다. 그녀는 강한서와 엮이기 싫었다.유현진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민경하는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보다 못한 간병인이 말했다. "현진 씨, 전화 받아봐요. 혹시라도 급한 일이면 어떡해요?""급한 일은 무슨."유현진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결국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대표님 체온이 39도까지 올라갔어요. 집에 해열제 있어요?"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39도까지 올라갔는데 해열제가 뭔 도움이 되겠어요! 얼른 병원부터 데려가요!""대표님이 안 간다고 고집부리시니 저도 어쩔 수 없어요. 해열제라도 드시고 열 내려야죠. 게다가 아주머니까지 자르셔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저도 잘 몰라서 사모님한테 연락드리는 거예요."'열이 펄펄 나는데도 병원에 안 간다니 강한서 미쳤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강한서의 아버지도 처음에 고열에 시달리다 병원에 간 뒤로 병세가 심해져 세상을 떠났다. 아마 그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강한서는 열만 나면 투정이 많아지고 약도 먹기 싫어하고 병원은 더더욱 가기 싫다며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그러니 유현진은 민경하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급히 말했다. "아래층 거실 테이블 서랍에 약상자가 있어요. 거기 보면 해열제 있을 거예요. 일단 하나 먹여보고 반 시간 뒤에도 열이 내려 안 가면 끌어서라도 병원 가세요!"민경하는 간결한 대답을 끝으로 급히 전화를 끊었다.유현진은 다른데 신경 팔 틈이 없이 병실에서 쉴 새 없이 갔다 왔다 하며 불안해했다.강한서가 마지막으로 열이 난건 작년이었다.때는 가을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갑자기 날씨
유현진은 마음이 식어버렸다. 그녀는 그때부터 마음속에 강한서에 대한 화를 심었었다.강한서가 자기와 결혼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과 강한서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유현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린 유현진은 자신감이 가득해 결혼도 했으니 강한서도 마음속의 사람을 내보내고 자기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강한서의 마음에는 늘 다른 여자가 있었고 유현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38도가 조금 넘었을 때도 인사불성이었는데 이번에는 더 심하니 저번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을 게 뻔하다. 아마도 상처가 덧나면서 염증으로 인한 발열 증세일 것이다.아무리 강한서를 원망한다 해도 그녀는 강한서가 아프길 원하지 않았다.잠깐의 생각을 마친 그녀는 간병인과 인사를 나누고 병원을 나섰다.전화를 끊고 민경하는 이내 해열제를 찾았다. 민경하는 물 한 컵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강한서는 침대에 누워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민경하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일단 약부터 드세요. 사모님이 그러는데 약 드시고 반 시간 뒤에 다시 체온을 재 보아서 열이 내리기 시작하면 병원에 안 가도 된대요."강한서는 힘겹게 눈을 뜨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전화하라고 그랬어요?"분명 화를 내는데 열이 나서 그런지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민경하가 말했다. "해열제를 찾지 못해서요. 열이 이렇게나 나시는데."강한서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뭐래요?""그러니까... 약 꼭 드시게 하라고 그랬어요. 많이 걱정하시더라고요."강한서는 민경하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강한서는 한참 침묵하다가 차갑게 말했다. "나가보세요.""대표님, 약부터 드세요."강한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라고요!"민경하도 더는 말을 안 하고 해열제를 놓은 뒤 거실에서 나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