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예전엔 팔찌가 불편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옥석 하나 있는게 건강에도 도움되고 좋겠더라,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해도 가질수 있는게 아니라서."전 여사는 이에"이 팔찌가 40억이나 되는데 아무리 갖고싶어도 돈 주고 살사람은 몇 안될껄? 그래도 확률 높은거 아닌가?"전 여사의 수준 높은 한마디가 장안의 있는 사람들을 일깨워주었다.여사님들도 바보가 아니였다. 이 팔찌의 색갈로 보아할때 현기도사의 명성이 없었어도 시가는 적어도 40억원은 족히 될것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현기도사의 기까지 받은 상태라 가격은 적어도 60-80억은 돼보였다, 그리하여 사기만 해도 이득이 엄청났다, 게다가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건 덤이였다.하지만 지금은 신미정이 이미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기에 만약 그들이 선수친다면 필히 신미정의 노여움을 살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강씨 가문이 관리하는 사업범위가 너무 넓어서 누구하나 강씨 가문 회사와 연결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같이 추진하는 프로젝트들은 몇십억짜리가 아니였다. 팔찌 하나 때문에 신미정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신미정은 웃기만 했다, 하지만 눈빛에서 큰 확률로 자신의 것이 되리라 확신하는 자신감이 돋보였다.주시윤은 할머니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는 낮은 소리로"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세요?"강 할머니는 자비로운 목소리 입을 열었다."네가 엄청 신경많이 쓴 물건인데 안 좋을수 있겠니?"주시윤은 웃으며"저도 그냥 친구 부탁들어준거예요, 이 팔찌를 급하게 팔 곳이 필요하대서. 마침 저희가 주얼리 전시회를 열잖아요, 그래서 받은거예요. 저는 그냥 전시비만 가질려고요."유현진은 옆에서 듣고 있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이 팔찌는 당시에 안하윤이 60억에 산거였었는데 이렇게 큰 무대를 만들고 40억에 판다니, 아마도 주시윤이 중간에서 가격을 낮춘듯 했다.유현진은 이 행동의 의미를 알수없었다. 그녀가 안씨 가문을 도와 팔찌를 판다면 왜서 고의로 가격을 낮춘거지?사
말하면서 방금 유상수에게서 받은 팔찌를 건네주었다.이 팔찌도 사실은 엄청 예뻤지만 2억좌우 되는 물건을 40억에 달하는 팔찌에 비하면 초라했었다.하지만 유현진은 그런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기에 어쨌든 신미정이 그 팔찌경매에 참가하는것만은 말려야했다."어머니, 한번 차 보세요, 만약 맘에 안드시면 다른걸로 바꿔드릴게요."심미정은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유현진은 언제라도 그 팔찌를 선물해줄수 있었는데 하필 경매에 참가하려는 순간에 선물했기에, 만약 그녀가 받지 않는다면 필히 시어머니와 며느리사이에 불화설이 돌것이였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강 할머니도 있었기에 만약 며느리의 마음을 받지 않는다면 할머니도 그녀가 예절을 모르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할것이였다.그리고 그녀가 선물을 받든지 받지 않든지 유현진이 먼저 팔찌를 넘겨준후에 그녀가 경매에 참가한다면 그 누구라도 그녀가 유현진이 선물한 팔찌가 맘에 안 들어서 경매에 참가했다고 생각할것이였다.과연 유현진이 선물하자마자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며느리가 선물까지 했는데 한번 차 보거라."신미정은 할 말이 많은듯 했지만 억지로 웃으며 팔찌를 건네받았다.우연이였지만 그 팔찌의 사이즈는 딱 맞아떨어졌기에 신미정을 위해 준비한 선물같아 보였다.할머니는 칭찬했다."현진이가 보는눈이 있네, 정말 너한테 딱이구나."신미정은 불편한 웃음을 짓고는 이에 답했다."며느리의 안목은 언제나 괜찮았죠, 이 팔찌 아주 마음에 드네요."할머니뿐만아니라 옆에 있던 여사님들까지 합세했다."강 여사님, 며느리를 정말 잘 두셨네요, 이렇게 효도까지하고, 안목까지 좋아서 이 팔찌도 아주 예쁘네요.""저희집 며느리는 시집온지 5년이나 됐는데, 맨날 친정에만 보낼줄 알지 한번도 맘에 드는 선물을 받아본적이 없어요. 강 여사님은 정말로 며느리복이 많네요."......할머니는 이런 찬미의 말들에 너무나도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신미정의 미소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유현진은 알고 있었다. 그의 시어머니가 지금 얼마나 그녀를 증
강한서는 밤샘을 밥 먹듯이 하다가 두통을 앓게 된 것이다.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는 유현진이 밤샘이라면 질색했던 터라 강한서도 밤샘을 거의 안 했고, 그러면서 두통도 자연스레 사라졌다.현기도사에 대해 정인월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유현진은 그의 신앙을 존중해야 했다. 그래서 한참 후에야 한마디 했다. "할머니, 그건 저랑 상관없어요. 한서 씨가 워낙에 체질이 좋아서죠.""당연히 네 공로도 있어. 가서 한번 해보려무나."애가 타는 유현진은 계속해서 다른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저 진짜 안 돼요. 저같이 덤벙대는 성격에 저렇게 비싼 팔찌는 어울리지 않아요."정인월은 유현진의 생각을 알아챈 것 같아 계속해서 설득했다. "얘 좀 봐. 혹시 당첨되면 한서가 사주기 아까워할까 봐 그러냐? 그런 건 걱정하지도 말아. 네가 만약 당첨되면 이 할미가 너한테 선물할 테니. 혹시 당첨되지 않더라도 여기에서 네가 좋아하는 거 있으면 할머니가 사줄게. 그냥 재미 삼아 해보는 거지."유현진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는 지금 당첨되지 않을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당첨될까 봐 두려운 것인데.정인월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유현진은 현장에 있는 모든 여인의 부러움을 샀다. 강민서도 질투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여태 할머니는 강민서에서 이렇게 비싼 액세서리를 사준 적이 없었다. 일개 벼락부자 집안 딸을 할머니는 어째서 자신보다 더 잘 대해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강민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할머니, 저 팔찌는 저도 갖고 싶어요. 새언니가 싫다고 하는데, 제가 뽑으면 안 돼요?"정인월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어린 게 뭘 한다고 그러느냐. 아직 졸업도 안 했으면서. 나중에 네가 결혼하면 그때 가서 보자."강민서가 포기하지 않고 말을 덧붙이려 하자 신민정이 입을 열었다. “현진아, 가서 해봐. 만약 그 인연이 너라면 그 또한 우리 한씨 집안의 복이 아니겠니. 그럼, 팔찌는 당연히 이 시어머니가 선물해야지.”유현진의
유현진은 허약한 몸으로 강한서의 품에 기댄 채 답했다. "할머니, 저 괜찮아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구역질이......"그녀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또 다시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정인월은 마음이 조급해졌다."알았어. 알았어. 말하지 말아. 얼른! 얼른 의사 불러."주시윤이 정인월을 위로했다."이미 부르러 갔어요. 너무 급해 말아요."주시윤은 침착하게 사태에 대처했다. "강운아, 우선 이분들 모시고 휴게실로 가 있어. 조금 있으면 의사 선생님이 올 거야."주강운은 간단하게 응하고는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향해 말했다. "따라와."정인월은 걱정되어 같이 가려 했다."나도 같이 가자."이때 주시윤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우선 같이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구역질을 저렇게 심하게 하고 있고, 말도 못 하는 데다가 휴게실 공간이 크지 않아서 사람이 많아지면 공기 유통이 어려울 거예요. 더구나 이러시다가 몸이 불편해지기라도 하면 돌 볼 사람도 없어요."정인월은 그제야 냉정을 되찾았다."그 말이 맞아."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신미정에게 분부했다."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진씨한테 전화해서 병원 차 두 대를 대기시키라고 해.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바로 병원으로 이송하게."강한서가 유현진을 안고 자리를 뜨자마자 유상수가 소식을 듣고 초조한 표정으로 찾아와 물었다."사돈 할머니, 사부인, 우리 현진이 어떻게 된 겁니까?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구역질해요?"정인월은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그래도 유상수를 위로했다."사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를 불렀으니 곧 원인을 알 수 있을 거예요."사람들은 저마다 귓속말로 속삭였다."헛구역질하는 모습이 내가 입덧하던 때랑 너무 비슷한데, 혹시 임신 아닐까요?""듣고 보니 그러네요. 시집간 지 삼 년 됐으니 임신할 때도 됐죠.""임신까지 하면 큰 사모님이 아주 입이 귀에 걸리겠는데요.""아까 큰 사모님이 하는 말씀 못 들었어요? 여기에서 아무거나
전 여사가 한마디 했다."이 여사, 말수가 적으면 그만큼 실수가 줄어드는 법이에요."그러고는 이 여사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인파와 함께 멀어졌다.----휴게실에 도착한 강한서는 유현진을 소파 위에 눕혔다.힘없이 소파에 누워있는 유현진은 안색이 전보다 더 창백해져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강한서는 소파에 앉아 티슈로 유현진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이때 주강운이 따듯한 물 한 컵을 받아왔다. 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강한서에게 다가가 컵을 건넸다."한서야, 우선 물 좀 마시게 해."컵을 받아 쥔 강한서는 유현진을 힐끔 보더니 오히려 자기가 한 모금 마시고는 유현진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이때 유현진이 손바닥으로 강한서를 확 밀치고는 앉아서 그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더럽게!"'로맨스 드라마도 아니고, 입으로 물 먹여주는 게 말이 돼?'유현진의 반응 속도와 동작을 보아서는 허약한 상태가 전혀 아니다.강한서는 입 안에 넣은 물을 삼키고는 담담하게 물었다. "연기 끝났어?"유현진은 순간 목이 메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주강운을 힐끗 쳐다보더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음, 완전 연기는 아니야."그녀는 궁금해서 강한서에게 물었다."내가 그렇게 감쪽같이 연기했는데, 어떻게 안 거야?"강한서가 컵을 옆에 놓고 유현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그만한 재주로 남은 속여도 난 못 속이지."유현진......강한서는 조롱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연기해도 하필 임신 연기를 해? 의사가 오면 바로 들통나게 될 텐데."유현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대꾸했다."내가 임신인 척하고 싶어서 했어?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따로 없었으니까 그렇지. 그렇다고 쓰러지는 척해서 할머니를 놀라게 할 수는 없잖아."강한서는 유현진을 노려보면서 말했다."그럼 임신인 척한 것에 대해서는 효심이 하늘을 찌른다고 칭찬해야겠네."유현진은 다시 대꾸했다."그럴 말 할 자격 있어? 누가 제 마음대로 나 대신 대
"할아버지가 아직 작은 고모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모부와는 말할 기회도 거의 없어요. 그러다 보니 잘 알지도 못하고요."이제 와 보니 주강운의 작은 고모부는 가족의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더 알아낼 수 있는 정보도 없었다."이 상황에 지금 그런 거 물을 때야?"주강운에 대한 유현진의 부드러운 태도를 보자 강한서는 열받았다. "조금 있다가 의사 선생님이 도착할 텐데, 어떻게 대처할 거야?"그러자 유현진이 말했다."뭘 어떻게 대처해? 내가 임신했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다 사람들의 상상이잖아. 의사 선생님이 오면 그냥 음식 잘못 먹어서 탈 났다고 하면 되지.""의사 선생님이 바본 줄 알아?""안 되면 돈으로라도 입막음하면 되지."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어디서 튀어나온 가치관이지?'그러자 주강운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조금 있다가 오게 될 의사는 제 친구예요. 제가 미리 말하면 알아서 입을 맞출 거예요."유현진은 환하게 눈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강운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강한서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인월과 그 일행은 휴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휴게실에서 나왔다.유상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의사가 답했다."큰 문제 아니에요. 식중독 증상인 것 같은데, 그렇게 심한 거 아니에요."의사의 말이 떨어지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수상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정인월은 멍해졌다. 정인월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유상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식중독이요? 임신 아니고요?""임신이 아니에요. 맥을 짚어 보았는데 임신은 아니었어요. 만약 믿기 어려우시면 병원에 가셔서 한번 검사해 보세요."주씨 가문의 전문의가 이걸 잘못 진단할 리가 없다.정인월은 실망에 찬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안부를 묻는 걸 잊지 않았다."식중독은 괜찮은 거예요? 건강에는 크게 영향이 없고요?""큰 문제는 아
----여러 사람이 휴게실에 들어섰을 때, 유현진은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있었다. 유현진은 인기척에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애썼다.그러자 정인월이 얼른 말렸다."얘야, 앉을 필요 없으니까 누워 있어.""할머니~"정인월은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어때? 지금 좀 괜찮아졌어?""여전히 구역질이 나기는 하는데, 아까보다는 좋아졌어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괜찮아. 난 또......"정인월은 하려던 말을 끊고 잠깐 멈칫하다가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됐다. 우선 몸부터 잘 추스르렴."정인월이 유현진과 작은 소리고 대화하고 있을 때, 신미정의 휴대폰에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문자를 읽던 신미정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정인월에게 다가가 말했다."어머님, 우리 우선 현진이를 집에 바래다줄까요? 여기 행사도 거의 끝날 시간이고 어머님도 너무 오래 서 계셨잖아요. 집에 돌아가 푹 쉬셔야죠."정인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강한서에게 분부했다."현진이를 내 차에 태워. 차에 침대가 있으니 누워 가면 조금 편할 거야."주시윤은 행사 주체자로서 안부를 몇 마디 묻고는 주강운에게 자신을 대신해 사람들을 배웅하라고 하였다.정인월은 연세가 있는 데다가 다리가 안 좋아서 그의 전용차는 엄청 편하게 설계되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이를 편히 누릴 수가 없었다.정인월이 다정한 어투로 관심을 해줄 때마다 유현진의 죄책감은 더해졌다. 그래서 그는 정인월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에 정인월이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면서 물었다."현진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사탕 한 알 먹어보렴. 그럼, 덜 힘들 수도 있어. 이 맛이 별로면 여기 매실이랑 진피 맛도 있어. 어떤 맛으로 줄까?"이때 진씨가 운전석에서 말을 건넸다."큰 사모님, 작은 사모님께서 임신하신 게 아니라서 신맛 나는 사탕은 큰 도움이 안 될 거예요. 그 앞에 박하맛 사탕이 있을 텐데, 그거 먹으면
강민서는 어제 그가 먹고 휴지통에 버렸던 피임약 통을 들고 있었다.'어제 아줌마가 청소했을 텐데, 어째서 약통이 아직도 쓰레기통에 있는 거지?'유현진이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신미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강민서의 손에서 약통을 건네받은 후 설명서를 훑어보는 신미정의 안색은 점점 더 굳어졌다."현진아, 이게 뭐니? 왜 이런 게 네 방에 있어?"유현진은 이번에 연기가 아니라 너무 놀라서 안색이 창백해졌다.정인월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다가가서 물었다."왜? 이게 뭔데?"신미정이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어머님, 이거 피임약이에요. 어째서 여태껏 소식이 없나 했더니 얘네 피임하고 있었어요."정인월이 깜짝 놀랐다."피임?"정인월은 약통을 보다가 다시 유현진한테 시선을 돌리더니 결국은 강한서를 향해 물었다."한서야, 네가 현진이한테 이 약을 먹으라고 한 거냐?"이 말에 강민서는 불만을 터뜨렸다."일이 이렇게 됐는데도 할머니는 여전히 새언니 편만 드네요. 새언니가 거절했으면 오빠가 어떻게 억지로 먹여요?"정인월은 지팡이로 바닥을 몇 번 두드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넌 입 닥쳐! 누가 너더러 말하라고 했어?"강민서는 화가 났지만 더는 아무 말도 못했다.유현진의 죄책감은 한층 더 깊어졌다. 이 순간에도 할머니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꽉 잡고 강한서가 대답하기 전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 한서 씨는 몰라요. 제가 먹은 거예요."이 말에 정인월은 끝내 실망하고 말았다. 정인월은 애써 화를 참으면서 물었다."왜 그랬어?""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유현진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정인월과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그녀는 자신을 향해 실망으로 가득 찬 눈길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정인월은 유현진을 혼내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그녀를 지켜보다가 가볍게 한마디 하고 돌아섰다."다들 집에 돌아가자."신미정은 유현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한마디 뱉었다. "너희들 정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
진윤은 6분 차이로 강한서에게 패배했다. 그가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강한서는 이미 안정적인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진윤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 했다. 강한서가 다가가 그런 진윤을 일으켜 세웠다. “서서 쉬다가 나중에 앉아.”말하며 물뚜껑을 따 진윤에게 건넸다. “천천히 마셔.”진윤은 이 상황이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강한서를 얕보고 경기에 진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챙겨주는 강한서를 보며 자신이 너무 유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몰아쉬며 강한서가 내민 물을 받은 진윤은 아무 말 없이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또 물을 한 병 가져다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넌 괜찮아?”강한서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비록 꾸준히 러닝을 하고 있었지만 하프 마라톤을 뛴 건 오랜만이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진윤을 쳐다보았다. 충격이 꽤 컸는지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아이는 풀이 죽은 얼굴로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실망이 안겨왔다. 진윤은 심지어 주호를 앞에 두고도 대화를 나눌 의욕조차 찾지 못했다. “가자. 쉬다가 같이 밥이나 먹어.”진윤이 시선을 올렸다. “이겼다고 저랑 축하라도 하시게요?”강한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 회장님 소개해줄게.”멈칫한 진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가 졌잖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졌으니까 팀에 입단할 수는 없지만 소개는 받을 수 있잖아.”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소개받고 싶지 않은 거야?”“아뇨!”다급하게 대답하던 진윤이 곧 쑥스러운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뭐야... 형님 그 나이에 체력이 아직도 좋으시네요. 제가 졌어요. 인정해요. 형님이 이기셨어요.”진윤의 말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그 나이라니?”곧 불혹의 나이라고 대답하려던 진윤은 강한서 뒤에서 눈짓을 보내는 한현진의 모습에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아부했다.
한현진은 한참을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그날의 일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강한서는 본인 덕에 한현진이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줄곧 월급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었던 건 주최 측에서 한현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꽤 단순한 생각이었다. 모터쇼라는 큰 활동에 주최 측에서 안내 요원까지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알바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건 그들의 관심 밖의 얘기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강한서였어... 강한서가...’“강한서 그 자식, 마음을 꼭꼭 숨기기도 했네. 이미 그때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던 거네요.”감탄하는 주한과 달리 한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님, 강한서가 절 도와줬을 땐 아무런 사심도 없었을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날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저든 아니든, 한서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당시 강한서는 한현진을 부르지도, 인사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한현진이 다시 그 얘기를 꺼냈지만 그는 여전히 솔직한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 일을 핑계로 점수를 더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도운 건 절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조한이 웃으며 말했다. “사심이 있었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쨌든 두 사람 인연은 삼심할 매가 쇠줄로 꽉 묶어놓은 것 같네요. 인연이 깊어도 너무 깊어.”한현진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만약 한현진이 죽은 그 태아와 바뀌지 않았다면 그녀와 강한서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사이였을 것이다. 바뀌었어도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늘이 이어준 인연이 틀림없었다. 진윤은 빠른 속도로 첫 바퀴를 완주했다. 강한서는 진윤과 2km정도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바퀴부터 진윤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지만 강한서는 여전
조한이 선글라스를 벗자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으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땐 선배라고 부르더니 졸업하니까 회장님이야?”강한서가 한현진을 향해 설명했다. “대학원 선배님이셔. 같은 지도교수님이었거든.”한현진이 조한의 비위에 맞게 대답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역시, 제수씨가 한서보다 낫네.”한현진과 인사 몇 마디를 나눈 조한이 강한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나이가 몇인데 어린애랑 따지고 그래?”강한서가 말했다. “선배보다는 어려요. 제 아내는 아직도 대학생 같다고 하던데요.”조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제수씨가 아이 달래듯 잘 하나봐.”한현진: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도 도착했다. 강한서가 승부를 인정하지 않을까 걱정된 그는 증인이 되어줄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던 진윤은 한현진을 보더니 곧바로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조한을 발견하고는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윤은 그제야 강한서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날 뉴벨리 팀에 추천해줄 수 있나봐.’조한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진윤을 응원했다. “청년, 저 자식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내가 팀장 자리도 고민해볼게요.”한현진도 진윤을 향해 말했다. “파이팅! 결승점에서 기다릴게요.”두 사람의 응원에 후끈 달아오른 진윤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진윤에게 한현진과 조한은 그야말로 우주대스타였다. 그러니 그들의 응원은 그에게 흥분제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경기에서 진다는 것은 자신의 우상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시작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자 진윤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 나이라 그런지 폭발력이 대단했다. 그는 곧 강한서와 차이를 벌리며 앞서나갔다. 강한서는 진윤의 속도를 따라 빨리 달리지 않고 꾸준히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현진은 망원경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