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과 양시은을 번갈아 보던 신미정이 입을 열었다. “한현진, 오늘은 시은 씨 따님이 혼사가 있는 날이니 괜히 여기서 재수 없게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분명 네가 박스를 놓친 거잖아. 물건을 손님께 전달하기도 전에 망가졌으니 이건 너희 잘못이야. 돈 몇 푼 때문에 다른 사람 결혼식 망치지 마. 그 죗값은 네가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꾹 분노를 삭이고 있던 차미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헛소리 좀 그만하시죠. 아까 현진이가 박스를 건넬 때 분명 아줌마를 등지고 있었어요. 대체 어디에 눈이 붙어서 현진이가 떨어뜨리는 걸 봤다는 거예요? 돈 몇 푼이요? 저런 팔찌쯤이야 물론 아줌마한테는 푼돈이겠죠. 아줌마가 그동안 강한서에게서 뜯어낸 돈이야말로 큰돈이죠.”신미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넌 뭐야? 뭔데 여기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난—”내가 네 애비다. 차미주가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한현진이 먼저 입을 열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편을 들고 싶으시면 돈이라도 대신 내주시면서 편 드시죠. 저희 가게 상품은 모두 직원들이 피땀 흘려 만든 거예요. 오늘 잔금을 결제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신부 대기실에서 못 나가요.”말하며 고개를 돌린 한현진이 차미주에게 말했다. “미주야, 물건을 가지고 돈을 지불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신고해. 경찰이 와서 처리하라고 하지 뭐.”양시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현진 씨, 미쳤어요? 우리 딸 결혼식에 신고라뇨?”한현진이 냉소 지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전 그저 잔금을 받으러 왔을 뿐이에요. 잔금을 못 주신다고 하니 당연히 신고해야죠.”차미주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걸었다. 결혼식 당일 경찰이 들이닥쳐 창피한 상황이 펼쳐질까 두려웠던 것인지 바득 이를 간 양시은이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만해요. 재수가 없어서 그런 셈 치죠. 얼마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8000만 원이요.”양시은이 굳은 얼굴로 한현진에게 계좌 이체를 하더니 비꼬며 입
차미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 그건 인간도 아닌 거 아냐? 사모님이 예전에 자기한테 얼마나 잘했는데.”“전 의원님도 시은 언니께 잘 해줬어.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실 사람 속은 모른다잖아.”“시은 언니는 남편과 딸들에게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어. 신미정은 완벽했던 시은 언니의 결혼 생활에 스크래치를 냈어. 그러니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용서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절대 다시 신미정과 손잡을 일은 없어.”멈칫하던 한현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아까 들어갈 때 못 봤어?”차미주도 한현진을 따라 목소리를 낮췄다. “뭘?”“언니 따님 눈시울이 붉어 있었어. 아마 울었었던 것 같아. 언니도 그랬고. 이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신미정이 없어서 장씨 가문이 얼마나 명문가임을 말하고 있었지만 언니가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지.”차미주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딸이 결혼하는데 안 우는 엄마가 어딨어? 장가가는 쪽이나 안 울지.”차미주의 말에 한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말 하자면 길어. 아무튼 난 시은 언니가 오늘 이런 소란을 피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만약 한현진이 눈꼴 사나웠던 거라면 이런 일을 꾸밀 필요는 없었다. 둘째 딸에게 자기를 공손히 모셔 오라고 시켜놓고 대기실에 도착하니 신미정 앞에서 그런 소란을 피웠다는 건 어쩐지 신미정에서 시그널을 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시은 언니가 혹시 신미정의 속셈을 눈치챈 건가?’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한현진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결혼식은 저녁 7시 10분에 시작되었다. 장씨 가문에서 일부로 용하다는 역술가를 찾아 받아온 시간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제 6시밖에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장준의 어머니는 모 그룹의 회장이었다. 아버지 쪽의 친척들은 대부분 공무원이었다. 뿌리가 깊고 인맥이 넓은 가문이라 청첩장을 돌린 손님들만 해도 88개의 테이블에 앉혀야
주강운의 말에 사람들이 시선이 강한서에게 쏠렸다. 양진환은 2년 전에야 양지원을 집으로 데려왔다. 강한서는 한현진을 만난 후의 모든 기억을 잃었으니 양지원이 누군지 모르는 것이 맞았다. 처음엔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주강운의 말에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네. 강한서가 어떻게 양지원을 기억하는 거야?’강한서는 시선을 내린 채 말이 없었다. 마치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사람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한현진이 오히려 컵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미주를 기억하는 것까진 그렇다 쳐. 하지만 지원 씨도 기억하면서 나만 잊었다는 거야? 강한서, 너 지금 나랑 장난해?”한현진의 반응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이 반응...’‘현진이 성격이라면 뭔가 기억이 떠오른 거냐고 물어야 하는 거 아냐?’‘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전에도 한현진은 그가 차미주를 기억한다는 건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렇게 뜬금없이 화를 내는 건 전혀 그녀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고함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곧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전 양지원 씨를 기억하지 못해요. 하지만 양 대표님과는 협업하고 있는 사이에요. 대표님께서 늘 따님 자랑을 아끼지 않으셔서 얘기를 많이 전해 들었어요. 그래서 양지원 씨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는게 전부예요.”한현진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내가 바보인줄 알아? 너 진작 나랑 헤어지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억 상실이라는 핑계를 대는 거지?”미간을 찌푸린 강한서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한현진 씨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로 하죠.”한현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태도야?”강한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굳이 그렇게 생각하겠다면 저도 딱히 방법은 없죠.”‘개자식, 나쁜 남자가 할 법한 멘트는 빨리도 배웠네.’한현진이 눈시울을 붉히며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은 한성우는 한참 동안 기침을 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는 사레가 들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럼에도 차미주를 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똥개면 넌 뭐야? 개똥이? 그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로 우린 강아지 연합이야. 우리가 낳은 아이는 강아지 새끼가 되는 거지. 어때?”차미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누가 강아지 새끼라는 거야. 너나 해.”“그러니까.”한성우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낳아준 내 새끼잖아.”차미주는 한성우에게 달려들더니 그대로 그를 쥐어박았다. 두 사람의 소란에 분위기는 한껏 유쾌해졌다. 강한서는 그 틈을 타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화내지 마요, 네?”한현진은 그런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술을 짓이기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다른 사람 결혼식이라 참는 거예요.”시선을 내린 강한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간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고마워요, 한 선생님.”‘선생님...’한현진이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의 귓가에 ‘유 선생님.’하고 부르며 서로를 알아가던 예전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획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는 전혀 이상한 기색 없이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개자식, 숨기려면 제대로 숨길 것이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괜히 마음 떨리게.’“아, 맞다.”술을 한 모금 마시던 주강운이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서야, 나 오늘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아는 사람을 만났어.”강한서가 덤덤한 태도로 주강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강운이 말했다. “네 외숙모 말이야. 호정 씨. 오늘 이혼 소송 때문에 변호를 맡기러 사무실에 오셨던데 알고 있었어?”강한서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듯했다. “언제부터?”“아마도 작년 연말부터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아. 전에 전
조금의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이렇게 논리적인 사람이 어떻게 강한서의 기억 상실을 “깜빡”할 수 있는 거지?한현진이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주강운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낀 주강운이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주강운을 향해 한현진이 다정한 눈빛으로 씩 미소 지었다. 그러자 주강운의 눈초리가 마치 새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빛 역시 순간 부드러워졌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을 발견한 강한서의 눈빛은 오히려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로 한현진의 손을 꼭 잡았다. 멈칫하던 한현진은 다른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구부리더니 강한서의 손등을 가볍게 간지럽혔다. 그러자 강한서는 홱 움츠리며 손을 빼냈다. 그의 눈빛은 당황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에 한현진 쯧, 혀를 찼다. ‘겁쟁이. 기억 상실인 척 연기도 해야겠고 질투심을 숨기지는 못하겠고. 아주 죽을 맛일 거야.’그런 생각을 하며 한현진은 또다시 손을 뻗어 강한서의 허벅지를 꽉 잡았다. 쯧.‘탄탄하군.’ 깜짝 놀란 강한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행동이 컸던지 테이블도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순간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한현진이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왜 갑자기 일어나는 거야?”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짓이기던 강한서는 결국 하려던 말은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그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화장실 다녀올게요.”‘허벅지 좀 만졌다고 바로 화장실을 가?’‘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한현진의 기분이 퍽 좋아졌다.강한서가 자리를 비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 한 명이 강민서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강민서도 곧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났다. 심심했던 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차미주의 손금을 봐주는 한성우를 쳐다보았다. “자기야, 자기 사업운은 처음엔 옅다가 중간부터 깊어졌어. 그리고 결혼운과 이어져서야 깊어진 거거든. 그러니까 자기는 결혼하고 난 후에야 사
“안타깝게도 우리 세대엔 아마 60살이 되어서야 퇴직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가 되면 난 퇴직금을 타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 같은데 그럼 국민연금도 그동안 지불했던 보험금의 일부만 돌려받을 수 있잖아. 힘들게 몇십 년을 일했는데 난 퇴직 연금이든 뭐든 받아보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가게 생겼으니 생각만 해도 너무 아깝잖아.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차라리 그 중간쯤인 35살 후에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면 40살 정도에 아이를 낳고 아이가 20살 정도가 되어서 대학에 가면 나도 퇴직할 거고. 그때쯤이면 손주를 볼 기력도 없어서 봐줄 것도 없겠지. 퇴직금이 있으니 그럭저럭 생활이 가능하니까 60살 전에 죽는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나머지 퇴직금이 유산으로 넘어갈 테니 아깝진 않잖아.”한성우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 퇴직금을 꼭 받아야 하는 거야?”“그럼. 퇴직금이 없으면 내가 나중에 일을 못 하게 되면 난 무슨 돈으로 살아.”차미주의 말에 한성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더러 45살이 되어서야 아빠가 되라고?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45살이면 나이가 너무 많긴 해.”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45살에 아이를 낳을 순 있어?”“당연히 힘들겠지. 45살이면 거의 반백이야. 우리 15년 정도 앞당기면 어때?”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하던 차미주가 말했다. “45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아이를 낳자고 하는 건 확실히 좀 무리야, 그렇지? 하지만 네가 난 결혼해야 흥한다며. 그럼 우리 이러자. 네가 45살이 되면 내가 일단 너랑 결혼할게. 그리고 내가 성공하면 우린 이혼하는 거야. 내가 젊고 몸 좋은 남자 만나서 아이를 낳으면 다시 재혼해. 그럼 넌 아내, 아들 돈까지 다 가질 수 있잖아. 어때?”그 말에 당황한 한성우가 멍해졌다. ‘그럴 수도 있는 거야?’한성우는 갑자기 차미주를 꽉 끌어안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도둑아. 난 돈 필요 없어. 난 그냥 너랑 결혼하고 싶어. 30살이든 40살이든 아니면 50살이든 난 너와 결혼할
위층으로 올라간 한현진은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강민서의 모습을 발견했다. 화장실이 급했던 터라 그녀는 강민서의 모습을 더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았다. 한편, 물건을 들고 있던 강민서는 한참이 지나도 신미정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수시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불안한 예감이 서서히 엄습하기 시작했다. ‘날 불러내 오더니 설마 한현진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양시은과 신미정은 가까운 사이였으니 만약 결혼식에서 한현진에게 손을 쓸 생각이라면 양시은이 신미정을 도와줘야 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강민서는 더 이상 가만히 신미정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방을 나서려 몸을 돌린 강민서가 문을 열자 때마침 들어오려던 신미정과 마주했다. 나가려는 강민서를 본 신미정이 멈칫하더니 강민서의 훑어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아니에요.”강민서가 한발 물러서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라고 부르시고는 계속 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 생겨서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잠시 말이 없던 강민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전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자리에 앉은 신미정이 강민서에게 앉으라며 손짓했다. “뭐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아름드리에서 꽤 오랫동안 지냈는데 일은 어느 정도 진행됐어? 지난번에 식초에 약을 탔다고 했잖니. 한현진이 꽤 오래 마셨을 텐데 별다른 증상은 없어?”강민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식은땀이 흐르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현진이 너무 경계심이 많아요. 한 번 맛을 보더니 맛이 이상하다면서 다시는 마시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신미정이 보기엔 강민서의 태도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예전처럼 거짓말만 하면 긴장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신미정의 표정 역시 점점 더 차분해져 갔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신미정이 말했다. “됐어. 전엔 내가 복수에 눈이 멀었어. 강씨
신미정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결혼식이 아직도 시작 안 했잖니. 예비 신부가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서 배고팠거든. 아직 식사도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그릇째로 들고 오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보기 안 좋을 것 같아 그랬어.”신미정의 대답에 강민서가 생각했다. ‘주방에서 직접 보내줄 순 없는 건가?’하지만 화목한 가족의 환상 속에 잠겨있던 강민서는 더 이상 신미정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엄마가 좋아하는 디저트로 골랐어요. 드셔보세요.”신미정이 강민서의 볼을 어루만졌다. “엄마가 널 예뻐한 보람이 있네. 역시 우리 딸이 제일 다정해.”강민서는 마음 한편을 꾹 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엄마가 이해하셔서 다행이야.’문 쪽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멈칫하던 신미정이 고개를 들었다. “민서야, 넌 연회장으로 돌아가. 곧 결혼식이 시작될 거야. 엄마는 시은 씨랑 할 얘기가 있어.”“네, 알겠어요.”방을 나서려는 강민서를 신미정이 또 불렀다. 그녀는 옆에 있던 포장된 포장 용기를 강민서에게 건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면서 포장 용기 좀 버려줘.”신미정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 예비 신부가 동쪽으로 나갈 거라 그쪽엔 사람이 많아. 부딪히지 말고.”강민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엄마.”말하며 방을 나서 곧장 동쪽 계단으로 향해 쓰레기통에 손에 들린 포장 용기를 버린 강민서는 치맛자락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돌아와 한현진과 강민서 모두 자리에 없는 것을 발견한 강한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한성우에게 물었다. “민서랑 현진이는?”차미주와 한성우는 한창 개인연금 보험금을 얼마를 내는 것이 가장 이득인지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한서의 목소리로 고개를 든 한성우가 말했다. “화장실 갔어. 너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서가 나갔고 또 잠시 후 형수님도 나갔어. 화장실에서 두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