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정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결혼식이 아직도 시작 안 했잖니. 예비 신부가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서 배고팠거든. 아직 식사도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그릇째로 들고 오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보기 안 좋을 것 같아 그랬어.”신미정의 대답에 강민서가 생각했다. ‘주방에서 직접 보내줄 순 없는 건가?’하지만 화목한 가족의 환상 속에 잠겨있던 강민서는 더 이상 신미정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엄마가 좋아하는 디저트로 골랐어요. 드셔보세요.”신미정이 강민서의 볼을 어루만졌다. “엄마가 널 예뻐한 보람이 있네. 역시 우리 딸이 제일 다정해.”강민서는 마음 한편을 꾹 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엄마가 이해하셔서 다행이야.’문 쪽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멈칫하던 신미정이 고개를 들었다. “민서야, 넌 연회장으로 돌아가. 곧 결혼식이 시작될 거야. 엄마는 시은 씨랑 할 얘기가 있어.”“네, 알겠어요.”방을 나서려는 강민서를 신미정이 또 불렀다. 그녀는 옆에 있던 포장된 포장 용기를 강민서에게 건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면서 포장 용기 좀 버려줘.”신미정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 예비 신부가 동쪽으로 나갈 거라 그쪽엔 사람이 많아. 부딪히지 말고.”강민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엄마.”말하며 방을 나서 곧장 동쪽 계단으로 향해 쓰레기통에 손에 들린 포장 용기를 버린 강민서는 치맛자락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돌아와 한현진과 강민서 모두 자리에 없는 것을 발견한 강한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한성우에게 물었다. “민서랑 현진이는?”차미주와 한성우는 한창 개인연금 보험금을 얼마를 내는 것이 가장 이득인지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한서의 목소리로 고개를 든 한성우가 말했다. “화장실 갔어. 너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서가 나갔고 또 잠시 후 형수님도 나갔어. 화장실에서 두 사람
화장실에서 나온 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방금 강민서가 지나갔던 곳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곧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비상계단에서 큰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층을 담당하고 있던 종업원이 깜짝 놀라 황급히 비상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곧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한현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아직 다친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강한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뛰쳐나갔다. 강민서 역시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강한서를 따라 달려갔다. 주강운은 이성을 잃은 강한서의 모습을 두 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손으로 술잔을 쓸던 그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피투성이라는 네 글자에 차미주는 진작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개자식아, 혹시... 혹시 현진—”차미주가 말을 마치지도 전에 한성우가 그런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는 장난기를 띤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계단이 높으면 얼마나 높다고 넘어져서 피가 나겠어. 그 사람이 너무 과장해서 얘기한 게 분명해.”“하지만—”“형수님이 도자기 인형도 아니고. 고작 넘어진 거로 피를 흘리겠어. 게다가 아직 우리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닌데, 어떻게 형수님이라고 확신하는 거야?”한성우가 또다시 차미주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차미주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잔뜩 긴장했었던 탓에 하마터면 한현진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뻔했다. “다친 게 누구든 일단 가보자. 듣기만 해도 무서워.”“그래, 가보자.”자리에서 일어난 한성우가 차미주와 함께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신우 부부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주강운을 힐끔 쳐다본 양지원이 말했다. “안 가보세요?”주강운이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마 제대로 볼 수 없을 거예요.”양지원이 그런 주강운을 살피며 물었다. “만약 다친 사람이 강운 씨
호텔 매니저 역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얼른 두 층을 담당하고 있던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전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강한서는 양시은에게 일단 방을 하나 달라고 부탁한 후 고여정이 한현진을 데리고 들어가 다친 곳을 체크하도록 했다. 그 모습이 신미정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는 줄곧 숨기고 있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당연히 공개하는 것을 꺼리겠지.’‘하지만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으니 제아무리 명줄이 긴 아이라고 해도 떨어지고도 남았을 거야.’그런 생각이 들자 신미정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야, 오늘은 시원 씨 따님이 결혼하는 날이야. 곧 식을 올려야 하고. 현진이도 심각해 보이지는 않고 말이야. 아마도 덤벙대는 직원이 실수로 기름통을 엎은 모양인데 이 일은 일단 잠시 미뤄두고 나중에 다시 조사하는 게 어때? 이런 일로 결혼식을 방해해서는 안 되잖니.”그 말은 순간 차미주의 성질을 건드렸다. “그게 인간이 할 말이에요? 심각해 보이지도 않는다니요. 저렇게 많은 피가 본인 것은 아니다, 이거죠? 실수로 기름을 엎은 거라면 떨어진 흔적이 있어야 해요. 하지만 바닥을 봐요. 이건 분명 누군가 일부러 기름칠한 거라고요. 심지어 꼼꼼하게 발랐다고요. 일부러 한 짓이 분명해요.”신미정은 차미주를 슥 훑어보았다. “누가 멀쩡한 바닥에 기름칠을 하겠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다른 사람은 넘어지지 않은 거야? 이 일 때문에 결혼식이 지연되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거니?”차미주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것 봐. 당신이 한 짓이지? 그러니까 조사하는 걸 원치 않는 거잖아. 그래서 그냥 묻어버리려고 하는 거고.”신미정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한 번만 더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면 당장 내쫓을 거야. 여긴 네가 함부로 날뛸 수 있는 곳이 아니야.”한성우가 잔뜩 흥분한 차미
양시은은 곧바로 같은 층에 있던 작은 연회장으로 가 그곳에 있던 프로젝터로 당시 CCTV 화면을 재생했다. CCTV는 비상계단과 가까운 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동영상 재생과 함께 몇 사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전의 장면이 재생될 때, 강민서가 손에 포장 용기를 든 채 연회장에서 나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화면은 곧 위층의 비상계단 입구로 바뀌었고 바로 그곳에서 나오는 강민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래층에서 들어와 위층으로 나가기까지 강민서는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그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너무도 수상한 타이밍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강민서에게로 향했다. 강민서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 신미정이 줬었던 똑같은 포장 용기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돌려 신미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신미정은 강민서를 쳐다보지 않았고 다만 미간을 찌푸린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마치 CCTV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긴장된 모습이었다. 비상계단에서 나온 강민서는 곧장 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나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여전히 그 포장 용기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왔을 때의 비상계단으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다른 쪽 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강민서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한현진이 곧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강민서가 올라왔었던 비상계단으로 내려갔고 잠시 후 CCTV에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이 울렸다...CCTV를 확인한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려 강민서를 쳐다보았다. 강민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심문하듯 노려보는 강한서의 눈을 마주치며 당황한 듯 말했다. “오빠, 나 아니야. 정말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런 짓 한 적 없어...”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너 비상계단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뭐 했어?”“사람 기다렸어.”강민서가 말을 더듬었다. “
신미정의 말에 강민서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신미정을 바라보는 강민서의 눈빛엔 충격과 당혹감이 가득했다. 강민서가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엄... 엄마,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신미정은 짐짓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 “네가 현진이를 싫어하는 건 엄마도 알아. 평소에 아무리 내 앞에서 현진이 욕을 많이 했어도 난 그저 네가 어린아이처럼 이르는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정말 고현 씨 결혼식에서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어. 내가 널 너무 오냐오냐 키웠더니 네가 결국은 선을 넘는구나. 현진이가 무사하다면 다행이지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우리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니.”강민서는 창백해진 얼굴로 멍하니 신미정을 바라보았다. 신미정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강민서를 차가운 지옥으로 끌어내려 뼛속까지 사무치게 했다. 남이 보내는 의심과 경멸이 가득한 시선보다 더 강민서를 소름 돋게 하는 건 바로 신미정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주를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한현진을 상대하지 않겠다며 우리 가족도 화목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 한현진은 계단에서 넘어졌고 증거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신미정은 누구보다 빨리 모든 의심의 화살을 강민서에게 겨냥했다. 신미정은 단 한 번도 한현진 배 속의 아이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강민서를 불러내온 것 역시 그저 한현진의 “유산”을 모두 그녀의 탓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강민서는 도무지 신미정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신미정은 그녀의 엄마였으니까. 신미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주를 죽이는 것은 물론 아무런 주저함 없이 그 모든 죄를 강민서에게 덮어씌웠다. “지난번에 유치장에 들어간 것으론 부족했나 봐요.”“평생을 기고만장하게만 살았으니 옳고 그름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뭐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죠. 무슨 짓을 하든 어차피 집안에서 다 감싸줄 텐데요.”“그건 옛날에나 그랬죠. 그
재생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전부 오만방자한 강민서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특히 음성파일의 말미에서 강민서는 기름을 언급했다. 사건의 전말이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강민서는 한현진을 싫어했으니 그녀가 아름드리에서 지내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니 진작 한현진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왜 아름드리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하필 양시은 딸의 결혼식에서 손을 쓴 것일까. 어찌 되었든 악독한 인간인 것은 틀림없었다. 신미정이 재생한 녹음 파일을 들은 강민서의 얼굴은 거의 투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창백해졌다. 신미정을 바라보던 경악으로 가득하던 눈빛은 아무런 감정 없이 공허하게 변해갔다. 강한서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강민서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은 유난히 복잡하게 흔들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강민서는 뚝뚝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도 날 못 믿는 거야?”강한서가 강민서의 눈을 피하며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모님, 왜 원본 CCTV를 보여주지 않으시는 거죠? 만약 민서가 벌인 짓이라면 현진 씨보다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어야 해요. 그렇다면 현진 씨는 위층으로 올라가며 바닥에 기름칠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거고요. 하지만 현진 씨는 돌아올 때야 미끄러져 넘어졌어요. 그사이에 비상계단 쪽으로 온 사람은 없었나요? 사모님께서 보여주신 CCTV에는 다른 사람의 행적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리고 비상계단의 CCTV 영상도 없고요. 그곳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해야만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있어요.”강한서의 말에 신미정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신미정이 세운 계획은 그리 치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현진이 다치기만 하면 당황한 강한서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CCTV를 확인하자마자 강민서에게 화를 내며 따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그녀는 강한서가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물론 강민
강민서는 입술을 앙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신미정이 증거를 내놓으며 자기에게 죄를 덮어씌울 때 이미 반박할 능력을 상실했다. 잠시 신미정을 빤히 쳐다보던 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신고하죠.”순간 안색이 변한 신미정이 강한서의 옷깃을 잡았다. “오늘은 시은 씨 따님 결혼식이야. 한현진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 결혼식을 망쳐야겠니?”강한서는 신미정이 잡고 있던 옷을 조금씩 빼내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두려우세요?”신미정의 입술이 파를 떨렸다. 그녀는 여전히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왜?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뭐가 두렵겠니? 난 네가 전고현 씨 결혼식에 폐를 끼칠까 봐 걱정이란다. 장씨 가문이 어떤 집안이니? 만약 네가 이 결혼식을 망친다면 그쪽 집안에서 우리 가문을 탓하지 않겠니?”이것이 바로 신미정이 감히 이 결혼식에서 한현진에게 손을 뻗고도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정치에 몸담은 사람은 독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장씨 가문처럼 깨끗하지만은 않은 집안은 더더욱 그랬다. 지금의 한성은 새로운 제품의 출시를 앞둔 관건적인 시기였다. 강한서는 이런 타이밍에 한현진을 위해 장씨 가문과 척질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강한서의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두 볼의 근육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이 살짝 열리고,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그딴 걸 무서워할 것 같아요?”신미정이 움찔 몸을 굳혔다.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강한서의 모습에 신미정은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신미정을 보고 있는 강한서의 눈빛은 증오로 가득했다. 마치... 마치 기억을 잃기 전, 신미정이 한현진에게 약을 먹여 한현진이 불임이 되어버린 사실을 알았을 때의 모습 같았다. 신미정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조금 전까지 장담했던 모든 것이 점차 불안한 마음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강한서가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미정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양시은의 대답에 전태평이 멈칫했다.‘내 말이라면 늘 받아주던 사람이 오늘은 왜 이러는 거지?’전태평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어려운 일인 거 알아. 하지만 오늘은 우리에겐 중요한 날이야.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고. 장씨 가문에서 오늘 결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결혼식을 마치기만 하면 고현이는 우리뿐만 아니라 장씨 가문까지 등에 업게 되는 거야. 당신 처세는 늘 잘해왔잖아.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거 알아.”말을 멈추던 전태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여기까지 온 건 전부 당신과 아이들을 위해서야. 장씨 가문이 날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수 있어. 나도 이제 곧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관건적인 시점에 문제를 일으키면 안 돼.”양시은은 전태평의 말에 마음속으로 냉소 지었다. 몇 년간 지켜지지 않을 맹세를 들어온 양시은은 지금 전태평의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기어이 누르며 시선을 내리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현진 씨에게 얘기해 볼게요.”하지만 양시은이 한현진에게 향하기도 전에 방에서 나온 고여정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현진 씨는 지금은 아무 이상 없어요. 오늘은 사모님 댁 결혼식이 있는 날이니 뭐든 식이 끝난 후에 다시 얘기하자고 하셨어요. 현진 씨 때문에 식을 망치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요.”고여정이 전한 말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신미정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한현진은 늘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장씨 가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주눅이 든 것이 분명했다. 차미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현진이 설마 넘어지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신미정을 처리할 기회였는데, 이렇게 봐준다고?’차미주는 얼른 고여정을 따라나섰다. “현진이가 피를 많이 흘렸었는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병원 안 가봐도 돼요?”고여정이 태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