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전부 오만방자한 강민서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특히 음성파일의 말미에서 강민서는 기름을 언급했다. 사건의 전말이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강민서는 한현진을 싫어했으니 그녀가 아름드리에서 지내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니 진작 한현진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왜 아름드리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하필 양시은 딸의 결혼식에서 손을 쓴 것일까. 어찌 되었든 악독한 인간인 것은 틀림없었다. 신미정이 재생한 녹음 파일을 들은 강민서의 얼굴은 거의 투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창백해졌다. 신미정을 바라보던 경악으로 가득하던 눈빛은 아무런 감정 없이 공허하게 변해갔다. 강한서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강민서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은 유난히 복잡하게 흔들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강민서는 뚝뚝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도 날 못 믿는 거야?”강한서가 강민서의 눈을 피하며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모님, 왜 원본 CCTV를 보여주지 않으시는 거죠? 만약 민서가 벌인 짓이라면 현진 씨보다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어야 해요. 그렇다면 현진 씨는 위층으로 올라가며 바닥에 기름칠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거고요. 하지만 현진 씨는 돌아올 때야 미끄러져 넘어졌어요. 그사이에 비상계단 쪽으로 온 사람은 없었나요? 사모님께서 보여주신 CCTV에는 다른 사람의 행적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리고 비상계단의 CCTV 영상도 없고요. 그곳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해야만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있어요.”강한서의 말에 신미정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신미정이 세운 계획은 그리 치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현진이 다치기만 하면 당황한 강한서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CCTV를 확인하자마자 강민서에게 화를 내며 따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그녀는 강한서가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물론 강민
강민서는 입술을 앙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신미정이 증거를 내놓으며 자기에게 죄를 덮어씌울 때 이미 반박할 능력을 상실했다. 잠시 신미정을 빤히 쳐다보던 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신고하죠.”순간 안색이 변한 신미정이 강한서의 옷깃을 잡았다. “오늘은 시은 씨 따님 결혼식이야. 한현진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 결혼식을 망쳐야겠니?”강한서는 신미정이 잡고 있던 옷을 조금씩 빼내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두려우세요?”신미정의 입술이 파를 떨렸다. 그녀는 여전히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왜?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뭐가 두렵겠니? 난 네가 전고현 씨 결혼식에 폐를 끼칠까 봐 걱정이란다. 장씨 가문이 어떤 집안이니? 만약 네가 이 결혼식을 망친다면 그쪽 집안에서 우리 가문을 탓하지 않겠니?”이것이 바로 신미정이 감히 이 결혼식에서 한현진에게 손을 뻗고도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정치에 몸담은 사람은 독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장씨 가문처럼 깨끗하지만은 않은 집안은 더더욱 그랬다. 지금의 한성은 새로운 제품의 출시를 앞둔 관건적인 시기였다. 강한서는 이런 타이밍에 한현진을 위해 장씨 가문과 척질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강한서의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두 볼의 근육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이 살짝 열리고,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그딴 걸 무서워할 것 같아요?”신미정이 움찔 몸을 굳혔다.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강한서의 모습에 신미정은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신미정을 보고 있는 강한서의 눈빛은 증오로 가득했다. 마치... 마치 기억을 잃기 전, 신미정이 한현진에게 약을 먹여 한현진이 불임이 되어버린 사실을 알았을 때의 모습 같았다. 신미정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조금 전까지 장담했던 모든 것이 점차 불안한 마음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강한서가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미정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양시은의 대답에 전태평이 멈칫했다.‘내 말이라면 늘 받아주던 사람이 오늘은 왜 이러는 거지?’전태평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어려운 일인 거 알아. 하지만 오늘은 우리에겐 중요한 날이야.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고. 장씨 가문에서 오늘 결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결혼식을 마치기만 하면 고현이는 우리뿐만 아니라 장씨 가문까지 등에 업게 되는 거야. 당신 처세는 늘 잘해왔잖아.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거 알아.”말을 멈추던 전태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여기까지 온 건 전부 당신과 아이들을 위해서야. 장씨 가문이 날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수 있어. 나도 이제 곧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관건적인 시점에 문제를 일으키면 안 돼.”양시은은 전태평의 말에 마음속으로 냉소 지었다. 몇 년간 지켜지지 않을 맹세를 들어온 양시은은 지금 전태평의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기어이 누르며 시선을 내리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현진 씨에게 얘기해 볼게요.”하지만 양시은이 한현진에게 향하기도 전에 방에서 나온 고여정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현진 씨는 지금은 아무 이상 없어요. 오늘은 사모님 댁 결혼식이 있는 날이니 뭐든 식이 끝난 후에 다시 얘기하자고 하셨어요. 현진 씨 때문에 식을 망치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요.”고여정이 전한 말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신미정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한현진은 늘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장씨 가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주눅이 든 것이 분명했다. 차미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현진이 설마 넘어지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신미정을 처리할 기회였는데, 이렇게 봐준다고?’차미주는 얼른 고여정을 따라나섰다. “현진이가 피를 많이 흘렸었는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병원 안 가봐도 돼요?”고여정이 태연하게
“내가 널 속여?”피식 냉소를 흘리던 신미정이 갑자기 걸음을 옮겼다. 강민서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갑자기 손을 올려 강민서의 뺨을 내려쳤다. 얼마나 있는 힘을 다해 때린 것인지 강민서의 왼쪽 귀에서 순간 이명이 울렸다. 뺨을 맞은 얼굴도 조금 얼얼해졌다. 강민서는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신미정을 쳐다보았다. “엄마?”굳은 얼굴의 신미정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엄마라고 부르지 마. 강민서, 대체 누가 누굴 속였다는 거야?”“한현진이 정말 네 오빠와 싸웠어? 네 오빠가 정말 한현진을 없는 취급 하며 지냈어? 넌 정말 걔가 마시는 과일 식초에 약을 타긴 했던 거니?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네가 어떻게 날 이렇게 깜빡 속일 수가 있어? 너도 한현진 그 여우 같은 계집애한테 홀리기라도 한 거야?”강민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엄마, 그건 오빠 아이기도 해요. 엄마 손주라고요. 왜 꼭 아이를 없애려고 하시는 거예요? 한현진에 대한 원망이 그렇게도 지워지지 않으세요?”“그래서 네가 날 배신했다는 거니?”신미정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넌 네가 한현진에게 손을 쓰지 않으면 걔가 널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해? 네가 좋은 일 하나 한다고 걔들이 그동안 네가 했던 일을 다 잊을 것 같아? 현실을 똑바로 봐. 난 그냥 네가 범인인 것처럼 정황을 만들었을 뿐인데 네 오빠와 한현진, 그리고 걔네들을 좀 보렴. 누구 하나 먼저 널 의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어.”강민서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을 보며 자신이 2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유치장에서 나오며 정인월이 강민서에게 본가에서 지내라고 했을 때도 그녀는 신미정과 멀어지지 않았었다. 남들 눈에는 어떤 모습이든, 강민서에게만큼은 신미정은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귀하게 자랐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 무조건 들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강한서와는 떨어져 살았기에 강민서의 마음속에
하지만 지금, 한현진은 이미 송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심지어 그녀는 강한서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였음에도 신미정은 여전히 한현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강민서는 어느 순간 신미정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한현진이 아니라 자신의 부귀영화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임을 인지했다. 강한서가 사고를 당했을 때, 급히 그의 재산을 나누려고 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피가 물보다 진하기는 개뿔, 신미정의 눈에 강한서의 목숨은 남은 생의 호화로운 삶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강민서는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시 신미정이 굳이 자기를 키우겠다고 고집한 건 정말 딸을 떼어놓을 수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강씨 가문에게 손을 벌리기 위해 그 집 자식을 데리고 있어야 했던 것일까. 만약 정말 강민서를 사랑했다면 인간 된 도리에 어긋나는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죄를 뒤집어씌울 수가 있을까?강민서는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우린 가족이잖아. 이렇게까지 너 죽고 나 죽는 지경까지 가야 해? 오빤 말만 심하게 하지 마음은 약한 사람인거 엄마도 알잖아. 오빠가 엄마를 버릴—”신미정이 버럭 소리를 높이며 강민서의 말을 끊었다. “네 오빠는 못하겠지만 한현진은 할 수 있어. 내가 걔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였는데, 걔가 날 용서할 리가 없어. 만약 한현진이 네 오빠와 재혼한다면 나에게 더는 기회가 없어.”강민서가 놀라며 물었다. “약이라니? 그건 엄마가 한의사에게 부탁해서 지은 보—”말하던 강민서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 약, 보약이 아니었어?”신미정이 차가운 눈빛으로 강민서를 쳐다보았다. 강민서는 드디어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강한서가 왜 신미정을 집에서 쫓아냈는지, 왜 누가 설득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는지 말이다. ‘이것 때문이었어.’그 의문이 풀리자 강민서는 드디어 신미정이 왜 꼭 한현진의 아이를 유
강민서 머릿속에 있는 이상한 가치관은 전부 신미정의 공로였다. 신미정은 그 모든 것이 강민서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책에서 이르길,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 한 수 앞을 내다보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신미정은 비슷한 집안의 여자를 강한서와 결혼시켜 그가 한성의 대표 자리에 오르는 것에 힘을 보태게 할 생각뿐이었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이익 관계는 결혼 생활이 파탄 나는 순간 그 힘도 잃게 되어 강한서는 더 이상이 회사에서 입지를 굳히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고민해 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시댁에서 강민서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든든히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만약 남자 쪽에서 강민서의 배경을 보고 그녀와 결혼하려는 것이라면 그 관계에 사랑이 있을 리는 없었다. 신미정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강한서와 강민서의 미래를 위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늘 자기의 앞날뿐이었다. 깊은숨을 내쉰 강민서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절 위한 거 맞아요?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강씨 가문의 모든 걸 누리고 싶으신 게 아니고요? 한성의 사모님으로서의 재부와 명예를 누리고 싶으신 건 아니냐고요.”“나쁜 X.”신미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강민서의 뺨을 내리쳤다. “강민서. 내가 너에게 퍼부은 돈이 얼만데. 지나가는 개도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알 거야. 넌 그걸 몰라서 나에게 그런 소릴 하는 거니? 여우에게 홀려 눈이 멀어서는 한현진과 손잡고 날 속이다니. 너 같은 걸 기르느니, 차라리 개를 키우는 게 나았겠어.”“넌 계속 그렇게 진흙탕에서 뒹굴어 봐. 내가 없이 누가 널 사람 취급이나 해주나 한 번 보라고.”신미정이 말을 멈추고 냉소를 지었다. “넌 네가 이런다고 걔들이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해? 네가 한현진을 강현우 방으로 유인했다는 것 하나로도 한현진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송씨 가문에서 널 용서하지 않을 거고.”말을 마친 신미정은 더 이상 강민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성큼성큼 자리를
민경하가 입술을 짓이겼다. 강민서는 예쁘고 집안이 좋은 데다 민경하보다 몇 살이나 어리기도 했다. 정인월이 유일한 손녀를 그에게 소개했으니 고윤은 기쁘면서도 황송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행여나 강민서를 홀대하는 일이 생길까 걱정이었다. “엄마, 민서 씨 마음에 들어요?”민경하가 물었다. 고윤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얘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민서가 좋은지, 네가 너에게 물어야지.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난 민서랑 한 번 만나본 게 전부라 그 아이에 대해 잘 모르잖아. 하지만 엄만 네 안목을 믿어. 너만 좋다면 엄마는 민서를 딸처럼 생각할 거야.”민경하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허리를 숙여 고윤을 안았다. “만나볼게요.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저희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자란 사람이라, 잘 안될 수도 있어요.”고윤이 민경하의 등을 두드리더니 물건을 건넸다. “운전 조심해서 해.”“네.”——차미주와 한성우는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는 한현진을 발견한 차미주는 바로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내가 눈이 삐었나 봐. 피투성이인 채로 뭘 먹고 있는 현진이를 봤어.”한성우가 그런 차미주를 잡았다. “안 삐었어. 나도 봤어. 뭐 먹고 있는 거.”몸을 돌린 차미주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했다.“너 죽고 싶은 거야? 지금 이 타이밍에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한현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안 되겠어.”차미주가 물었다. “과다 출혈하면 배가 고파?”“...”한성우가 쓰레기통에서 피범벅인 주머니를 꺼냈다. “형수님, 피 주머니를 너무 큰 걸 사용하신 거 아니세요? 넘어졌을 뿐인데 동맥파열 된 것 같은 수준이잖아요.”한성우의 말에 차미주가 어리둥절해졌다. 한현진이 창피한 듯 대답했다. “그거 제가 만든 거예요. 재료가 한정적이라 조금만 짜낼 생각이었는데 힘을 주니까 구멍이 크게 뚫려버렸어요. 막을 수 없으니 어쩌겠어요.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데 연기
아무리 강민서가 배신했다고 하더라도 신미정은 그녀의 엄마였다. 그러니 강민서가 한현진에게 신미정의 모든 속셈을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강민서가 얘기하지 않으니 혼자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신미정의 목적은 아이를 없애는 것이니 그녀가 손을 쓸 수 있는 수단은 고작해야 그 몇 가지였다. 몰래 약을 먹이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 하지만 신미정은 한현진에게 한약을 먹일 때도 그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게 움직였다. 그러니 약을 타는 그런 뻔한 방법은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넘어지게 하는 건 한현진은 진작 미끄럼 방지 장비와 함께 피 주머니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오늘 밤 신미정이 가만히 있는다면 그만이었지만 만약 자신에게 손을 댄다면 넘어지지 않았어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한현진은 생각했다. 조금 전 신부 대기실에서 신미정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 양시은을 보며 한현진은 그녀가 뭔가를 눈치채고 일부러 두 사람 사이에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하며 신미정의 경계심을 늦추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역시 그녀의 추측대로 양시은은 화장실에 있는 한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신미정이 비상계단에 손을 쓰라고 지시했으니 조금 이따 내려올 때 다른 쪽 계단을 이용하라고 했다. 양시은이 호텔 리모델링을 진행할 때 다른 가문의 사모님들도 현장에 있었다. 당시 그녀는 비상계단의 CCTV는 딸 결혼식이 끝난 후 전부 같이 바꿀 것이라며 비상계단 쪽의 등이 어두우니 될수록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신미정은 갑자기 그녀에게 생뚱맞게 비상계단의 CCTV에 관해 물었다. 양시은은 그저 신미정이 지난번에 해준 말을 깜빡했다고만 생각하고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신부 대기실에 있던 신미정은 갑자기 아직도 설치하지 않았냐며 또CCTV 얘기를 꺼냈다. 계속 CCTV를 신경 쓰는 신미정을 보며 양시은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양시은은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푼수데기 같은 신미정이 나쁜 일을 꾸미고 있다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