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하가 입술을 짓이겼다. 강민서는 예쁘고 집안이 좋은 데다 민경하보다 몇 살이나 어리기도 했다. 정인월이 유일한 손녀를 그에게 소개했으니 고윤은 기쁘면서도 황송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행여나 강민서를 홀대하는 일이 생길까 걱정이었다. “엄마, 민서 씨 마음에 들어요?”민경하가 물었다. 고윤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얘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민서가 좋은지, 네가 너에게 물어야지.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난 민서랑 한 번 만나본 게 전부라 그 아이에 대해 잘 모르잖아. 하지만 엄만 네 안목을 믿어. 너만 좋다면 엄마는 민서를 딸처럼 생각할 거야.”민경하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허리를 숙여 고윤을 안았다. “만나볼게요.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저희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자란 사람이라, 잘 안될 수도 있어요.”고윤이 민경하의 등을 두드리더니 물건을 건넸다. “운전 조심해서 해.”“네.”——차미주와 한성우는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는 한현진을 발견한 차미주는 바로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내가 눈이 삐었나 봐. 피투성이인 채로 뭘 먹고 있는 현진이를 봤어.”한성우가 그런 차미주를 잡았다. “안 삐었어. 나도 봤어. 뭐 먹고 있는 거.”몸을 돌린 차미주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했다.“너 죽고 싶은 거야? 지금 이 타이밍에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한현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안 되겠어.”차미주가 물었다. “과다 출혈하면 배가 고파?”“...”한성우가 쓰레기통에서 피범벅인 주머니를 꺼냈다. “형수님, 피 주머니를 너무 큰 걸 사용하신 거 아니세요? 넘어졌을 뿐인데 동맥파열 된 것 같은 수준이잖아요.”한성우의 말에 차미주가 어리둥절해졌다. 한현진이 창피한 듯 대답했다. “그거 제가 만든 거예요. 재료가 한정적이라 조금만 짜낼 생각이었는데 힘을 주니까 구멍이 크게 뚫려버렸어요. 막을 수 없으니 어쩌겠어요.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데 연기
아무리 강민서가 배신했다고 하더라도 신미정은 그녀의 엄마였다. 그러니 강민서가 한현진에게 신미정의 모든 속셈을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강민서가 얘기하지 않으니 혼자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신미정의 목적은 아이를 없애는 것이니 그녀가 손을 쓸 수 있는 수단은 고작해야 그 몇 가지였다. 몰래 약을 먹이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 하지만 신미정은 한현진에게 한약을 먹일 때도 그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게 움직였다. 그러니 약을 타는 그런 뻔한 방법은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넘어지게 하는 건 한현진은 진작 미끄럼 방지 장비와 함께 피 주머니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오늘 밤 신미정이 가만히 있는다면 그만이었지만 만약 자신에게 손을 댄다면 넘어지지 않았어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한현진은 생각했다. 조금 전 신부 대기실에서 신미정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 양시은을 보며 한현진은 그녀가 뭔가를 눈치채고 일부러 두 사람 사이에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하며 신미정의 경계심을 늦추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역시 그녀의 추측대로 양시은은 화장실에 있는 한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신미정이 비상계단에 손을 쓰라고 지시했으니 조금 이따 내려올 때 다른 쪽 계단을 이용하라고 했다. 양시은이 호텔 리모델링을 진행할 때 다른 가문의 사모님들도 현장에 있었다. 당시 그녀는 비상계단의 CCTV는 딸 결혼식이 끝난 후 전부 같이 바꿀 것이라며 비상계단 쪽의 등이 어두우니 될수록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신미정은 갑자기 그녀에게 생뚱맞게 비상계단의 CCTV에 관해 물었다. 양시은은 그저 신미정이 지난번에 해준 말을 깜빡했다고만 생각하고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신부 대기실에 있던 신미정은 갑자기 아직도 설치하지 않았냐며 또CCTV 얘기를 꺼냈다. 계속 CCTV를 신경 쓰는 신미정을 보며 양시은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양시은은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푼수데기 같은 신미정이 나쁜 일을 꾸미고 있다
한현진이 냉소적으로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저 자랑하기 위해서 강한서가 수영을 못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다른 애와 시합을 시켜서 물에 빠지게 했던 사람이야. 그런 인간이 무슨 짓을 못 하겠어.”호기심에 가득 찬 한성우가 물었다. “방금 왜 한서에게 신고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직 오늘 밤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주인공이 가버리면 재미없잖아요.”한성우가 놀라며 물었다. “또 뭘 하려고요?”한현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뭘 하려는 게 아니라, 지은 죄가 있으니 업보를 받는 거죠.”말하며 한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척해야 해서 아쉽네. 아니면 정말 현장에서 내 눈으로 보고 싶은데.”차미주가 말했다. “그거야 쉽지. 내가 현장에서 라이브 방송을 켤게.”차미주의 말에 한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구야, 그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야.”입을 열려던 한성우가 고개를 들자 언제 왔는지 강한서가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하려던 말을 삼킨 한성우가 차미주를 재촉했다. “얼른 가자. 먼저 가서 구경부터 하러 가.”차미주는 한성우에게 밀려 입구에 도착했다. 강한서를 지나칠 때 차미주는 한성우를 뿌리쳤다. “강한서, 너도 네 엄마 꼬락서니 봤지? 모질게 굴 자신 없어서 계속 편들 생각이라면 다신 현진이 찾아오지 마. 현진이가 아무리 널 좋아해도 쟤도 살아야지.”한성우가 얼른 차미주를 잡아당겼다. “취해서 헛소리하는 거야.”“헛소리는 네가 하는 거고.”차미주는 소리를 지르며 한성우 품에 안긴 채 끌려 나갔다. 한현진은 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마주 보았다. 조금 전 비상계단에서 한현진을 품에 안았던 탓에 그의 몸에도 “피”가 묻어있었다. 특히 안에 입은 셔츠에도 군데군데 핏자국이 선명했다. 심지어 얼굴에도 옅게 빨간 흔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사람을 유혹하는 매혹적인 눈매를 가지고 있는 데다 눈가까지 빨개져 있으니 차도남스러운 매력이 더 짙어진 듯했다. 한현진은 뜬금없이 한 단
한현진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강한서가 쉬고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너 나 못 믿는 거지?”움찔한 한현진이 시선을 내렸다. 강한서는 한현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너무도 쉽게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를 알아차렸다. 만약 강민서가 초조함 때문에 미리 한현진 앞에서 불안을 드러내지 않아 한현진이 신미정의 동기를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어쩌면 강한서는 정말 피바다에 쓰러져 있는 한현진을 보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은 임신이 쉽지 않은 몸 상태였기에 어쩌면 이번이 그들이 부모가 될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신미정은 본인의 의기심 때문에 그 기회마저도 빼앗아 가려 했다. 만약 오늘 사고가 생겨 아이를 잃었다면 그녀는 그것을 없던 것으로 하고 강한서와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사 강한서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고 그 역시 자신만큼이나 힘들다는 걸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현진이 자신의 계획을 강한서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신미정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녀의 덜미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만약 자신이 미리 강한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게 된다면 그가 괜히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웠다. 그랬기에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그 선택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욱신, 마음이 아파졌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강한서, 난 감히 도박을 걸 수 없었어. 그래서도 안 됐고. 난 우리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길 바라. 누구든 우리 아이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은 전부, 없애버릴 거야. 난 내 옆에 그 어떤 불안 요소도 남겨두고 싶지 않아.”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꽉 잡고 물었다. “그래서 네 마음속에 난 남아있는 거지?”주먹을 꽉 그러쥔 한현진이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그 사람은 네 어머니야. 사람은 늘 핏줄에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니까.”강한서가 고개를 숙이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아, 내가 아무리 마음이 여려도 너와 우리 아이를 해치려 했어. 네 마음속에 난, 사리
한현진의 말이 이해되지 않은 강한서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니까 우리, 정을 키우기 위해 조금 진도를 빼야 하지 않겠어?”한현진은 진지한 태도로 강한서와 상의했다. 아랫입술을 핥으며 강한서가 말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한현진이 강한서의 입술에 시선을 두며 중얼거렸다. “일단 몸 정부터 쌓아야지.”“네?”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강한서가 되물었다. 그녀는 곧 몸을 일으켜 강한서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까치발을 든 한현진이 그의 입술에 입 맞췄다. 흠칫, 놀라던 강한서가 무의식적으로 한현진의 허리를 감쌌다. 한현진은 눈을 감고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혼신을 다해 강한서를 탐했다. 강한서가 방에 들어선 순간, 얼굴 여기저기 피를 묻힌 섹시한 모습을 봤을 때부터 한현진은 진작 이렇게 그를 덮치고 싶었다. 한현진이 굶주린 탓이 아니었다. 매혹적인 강한서의 두 눈이 너무너무 그녀를 홀리고 있는 탓이었다. 주강운의 멜로 눈깔은 저 사람은 날 좋아한다는 강력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면 강한서의 섹시한 눈을 보면 유혹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눈가에 묻은 가짜 피 때문에 아련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마치 그의 눈이 한현진의 손을 잡고 직접 함정을 향해 뛰어드는 것 같았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눈은 외모지상주의인 한현진에겐 도무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최선을 다해 기억상실 설정을 이어가고 있는 강한서는 한현진이 어떻게 다가와도 절대 그 키스를 받아주지 않았다. 한현진이 입을 벌려 그의 혀를 꽉 깨물었다. 생생한 통증에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한서를 놓아준 한현진의 호흡이 거칠었다. “그렇게 나무처럼 딱딱하게 굴면서 나랑 어떻게 마음을 나누겠다는 거야?”강한서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기억을 잃은 연기를 계속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능숙하지 않아서요.”“...”한현진은 순간 그가 기억 상실 설정을 이어가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유혹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현진
차미주는 한성우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전태평과 양시은은 함께 앉아 있었고 전태평 옆에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왼쪽에는 양시은과 같은 색의 옷을 입은 중년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평범한 몸매에 외모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기품 있는 분위기가 한눈에 봐도 공무원임이 분명했다. 중년 남자는 신랑과 매우 닮았고 그 역시도 정치인 특유의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차미주의 어머니가 집에 걸어둔 단체 사진 속 정치인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조용하고 고귀한 기품에 근엄한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남자와 얘기를 주고받는 전태평은 자기도 모르고 허리를 숙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마에 노비라는 두 글자까지 써 붙이고 머리를 조아릴 행세였다. 차미주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저 테이블이 왜?”한성우가 차미주의 볼을 꼬집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자기야, 자기는 너무 순진해. 장준 쟤 아빠가 신부를 보는 눈빛을 봐봐.”흠칫하던 차미주가 다시 그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차미주도 드디어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중년 남자가 신부를 바라보는 눈빛은 절대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품을 빤히 살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신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곳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차미주는 순간 어릴 적 본가에서 돼지를 키우던 양식장 사장님들이 돼지우리의 임신한 돼지를 바라보던 눈빛이 신부를 쳐다보는 남자의 눈빛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잘 크고는 있는지, 잘 먹고는 있는지 튼실한 새끼 돼지를 낳을 수는 있을지 관찰하던 그 눈빛...순간 불쾌한 기분이 차미주를 사로잡아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한성우가 차미주에게 물었다. 차미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신부를 보는 눈빛이 왠지 불쾌하게 느껴져.”한성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불쾌한 게 당연하지. 자기 아들을 낳아줄 사람인데, 어울릴만한 사람인지 살펴보고 싶겠지.”차미주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차미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신미정을 빤히 쳐다보며 바득 이를 갈았다. ‘신미정 저 마귀 할망구라면 가능하겠지.’신랑이 신부의 손을 잡고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예비부부가 주례 앞에 서서 축사를 듣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편한 사이는 아닌 듯한 모습이었고 그 앞에서 사회자 혼자 떠들고 있었다. 뻔한 말로 가득한 축사가 드디어 끝이 나고 사회자 등 뒤에 있던 대형 모니터에서는 두 사람의 브이로그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결혼식에 참석했었던 터라 이런 흔한 이벤트엔 사람들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랑과 신랑의 브이로그 영상이 재생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상의 화면은 갑자기 선정성 가득한 장면으로 바뀌었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자의 비명이 연회장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졌다. 화면 속 주인공 중 한 사람은 전태평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양시은이 아니었다. 하객들 눈에 드리웠던 졸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차미주는 얼른 휴대폰 카메라를 스크린으로 돌렸다. 한현진은 쉬지 않고 차미주의 채널에서 선물을 쐈고 그 덕에 차미주의 라이브 방송은 인기 급상승 1위에 올랐다. 화면 속 자신의 모습에 멍해졌던 전태평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누구 짓이야? 꺼! 얼른 꺼버리라고.”양시은의 호텔이었으니 동영상 재생을 책임진 사람도 당연히 양시은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전태평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결혼식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객들은 하나둘 휴대폰을 꺼내 재생 중인 동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장준의 가족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전태평은 사돈을 붙들고 해명하려했지만 상대방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장준의 부모님은 냉담한 얼굴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전태평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양시은을 붙들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은아, 얼른 방법 좀 생각해 봐. 이 영상이 유출되면 난 끝장이야.”“그래.”양시은이 씩 웃었다. “그거 잘됐네.”흠칫하던 전태평이 눈을 부라렸다. “너야? 네가 한
전태평은 피투성이가 된 입으로 왁왁 소리를 질렀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20년을 전태평과 부부로 살아온 양시은은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양시은에게 그가 불륜을 저지른 증거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불륜 이슈는 기껏해야 강등이나 정직이 전부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여론이 잠잠해지면 여전히 다시 정치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만 불륜이라는 오점이 생겼으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긴 힘들 것이다. 양시은은 뻔한 전태평의 꿍꿍이에 피식 냉소를 흘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는데, 고작 바람을 피운 영상 하나만 재생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전태평의 머리를 끄집은 채로 그의 얼굴을 스크린 가까이 가져갔다. “똑바로 봐. 넌 한 여름밤의 아름다운 꿈을 꾼 거야. 이젠 네 과거와 인사할 시간이야.”전태평은 그제야 스크린에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확인했다. 살빛으로 물들었던 영상과 사진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금 재생되고 있는 것은 양시은이 몇 개월의 시간을 이용해 모은 그동안 전태평이 받은 뇌물과 프로젝트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를 은폐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거였다. 이 정도 증거면 파직은 물론 교도소에서 남은 삶을 보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쉽게 보지 못할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쉬지 않고 사진을 찍어댔다. 역시 가족이 터뜨린 것만큼 흥미진진한 스캔들은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자 전태평은 드디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눈빛을 한 그는 온몸을 덜덜 떨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경호원이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았을 것이다. 콩깍지가 벗겨진 양시은의 눈에 전태평은 그저 멍청하고 추악할 뿐만 아니라 겁도 많은 못난 인간에 불과했다. 신미정은 양시은이 딸 결혼식에 불륜 스캔들을 터뜨리며 미친 짓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전태평을 망치면 자기는 뭐가 좋다고. 정말 멍청하긴.’하지만 신미정은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