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신미정을 빤히 쳐다보며 바득 이를 갈았다. ‘신미정 저 마귀 할망구라면 가능하겠지.’신랑이 신부의 손을 잡고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예비부부가 주례 앞에 서서 축사를 듣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편한 사이는 아닌 듯한 모습이었고 그 앞에서 사회자 혼자 떠들고 있었다. 뻔한 말로 가득한 축사가 드디어 끝이 나고 사회자 등 뒤에 있던 대형 모니터에서는 두 사람의 브이로그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결혼식에 참석했었던 터라 이런 흔한 이벤트엔 사람들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랑과 신랑의 브이로그 영상이 재생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상의 화면은 갑자기 선정성 가득한 장면으로 바뀌었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자의 비명이 연회장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졌다. 화면 속 주인공 중 한 사람은 전태평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양시은이 아니었다. 하객들 눈에 드리웠던 졸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차미주는 얼른 휴대폰 카메라를 스크린으로 돌렸다. 한현진은 쉬지 않고 차미주의 채널에서 선물을 쐈고 그 덕에 차미주의 라이브 방송은 인기 급상승 1위에 올랐다. 화면 속 자신의 모습에 멍해졌던 전태평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누구 짓이야? 꺼! 얼른 꺼버리라고.”양시은의 호텔이었으니 동영상 재생을 책임진 사람도 당연히 양시은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전태평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결혼식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객들은 하나둘 휴대폰을 꺼내 재생 중인 동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장준의 가족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전태평은 사돈을 붙들고 해명하려했지만 상대방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장준의 부모님은 냉담한 얼굴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전태평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양시은을 붙들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은아, 얼른 방법 좀 생각해 봐. 이 영상이 유출되면 난 끝장이야.”“그래.”양시은이 씩 웃었다. “그거 잘됐네.”흠칫하던 전태평이 눈을 부라렸다. “너야? 네가 한
전태평은 피투성이가 된 입으로 왁왁 소리를 질렀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20년을 전태평과 부부로 살아온 양시은은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양시은에게 그가 불륜을 저지른 증거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불륜 이슈는 기껏해야 강등이나 정직이 전부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여론이 잠잠해지면 여전히 다시 정치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만 불륜이라는 오점이 생겼으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긴 힘들 것이다. 양시은은 뻔한 전태평의 꿍꿍이에 피식 냉소를 흘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는데, 고작 바람을 피운 영상 하나만 재생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전태평의 머리를 끄집은 채로 그의 얼굴을 스크린 가까이 가져갔다. “똑바로 봐. 넌 한 여름밤의 아름다운 꿈을 꾼 거야. 이젠 네 과거와 인사할 시간이야.”전태평은 그제야 스크린에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확인했다. 살빛으로 물들었던 영상과 사진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금 재생되고 있는 것은 양시은이 몇 개월의 시간을 이용해 모은 그동안 전태평이 받은 뇌물과 프로젝트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를 은폐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거였다. 이 정도 증거면 파직은 물론 교도소에서 남은 삶을 보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쉽게 보지 못할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쉬지 않고 사진을 찍어댔다. 역시 가족이 터뜨린 것만큼 흥미진진한 스캔들은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자 전태평은 드디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눈빛을 한 그는 온몸을 덜덜 떨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경호원이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았을 것이다. 콩깍지가 벗겨진 양시은의 눈에 전태평은 그저 멍청하고 추악할 뿐만 아니라 겁도 많은 못난 인간에 불과했다. 신미정은 양시은이 딸 결혼식에 불륜 스캔들을 터뜨리며 미친 짓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전태평을 망치면 자기는 뭐가 좋다고. 정말 멍청하긴.’하지만 신미정은 이제
“그 여자는 돈을 받고 떨어져 나간 게 아니라 계속 제 남편과 연락을 주고받았더라고요. 제가 준 200억은 두 사람이 집을 사고 그 혼외 자식을 기르는 밑거름이 되었던 거예요. 더 어이없는 건 제 남편과 그 불륜녀가 자기 아들 생일 파티를 해줄 때마다 신미정 씨는 매년 선물을 보냈다는 거예요.”“제 남편은 멍청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라 그 인간 머리로는 제 돈을 뜯어내려고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지도 못했을 거예요. 이건 전부 신미정 씨 그 똑똑한 머리를 잘 굴려 그 인간들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주신 덕분이었죠. 그래서 저 같은 멍청이가 그 인간 혼외 자식을 기를 자금을 마련해 준 거고요.”“전 신미정을 씨를 제일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신미정 씨도 절 너무 아끼는 마음에 최선을 다해 제 남편이 바람피운 증거를 감춰 제가 그 멍청한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며 헌신하게 했죠.”“그런 건 다 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인맥을 쌓기 위해 내 딸은 불구덩이에 집어넣진 말어야 했어요.”양시은은 말하며 신미정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렸다. “당신도 딸이 있잖아. 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독하게 굴 수 있어!”말을 잇던 양시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깜빡했네. 당신 딸도 당신 눈엔 그다지 가치가 있는 건 아니었지. 본인이 며느리를 다치게 하고는 그걸 딸에게 누명을 씌웠잖아. 신미정 씨, 정말 비상계단에 CCTV가 없다고 생각해? 강씨 가문으로 돌아가 계속 사모님 행세를 하고 싶었어. 꿈 깨는 게 좋을 거야.”양시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영상은 CCTV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비상계단에서 신미정은 기름통을 들고 계단 하나하나 기름을 바르고 있었다.또 다른 화면 역시 비상계단이었다. 강민서는 그녀가 말한 대로 봉투를 들고 비상계단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전화를 받은 강민서는 그제야 비상계단을 나섰다. 그 영상에 현장에 있던 하객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잔뜩 흥분한 차미주가 말했다. “양시은 씨 완전 나이스 샷. 어쩐지 이런 5성급 호텔
멈칫한 강민서가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강한서는 강민서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전부 어머니 자업자득이야. 누구도 도울 수 없어.”누가 뭐라고 하든 강민서는 신미정 손에서 자란 아이였다. 한때는 신미정이 금이야 옥이야 아끼던 딸이었다. 비록 오늘 신미정이 한현진을 해친 죄를 강민서에게 뒤집어씌웠지만 강민서는 그럼에도 신미정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강민서는 강한서에게 도와달라고 사정해 보고 싶었다. 죗값을 치를 땐 치르더라도 사적으로 해결할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강민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한성우가 말했다. “민서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 생각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일어나서 아주머니를 도우면 너희 집안도 이 일에 연루되는 거야. 설사 나중에 너희 집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도 그사이 겪게 될 여론의 풍파는 절대 가볍지 않을 거야.”한성우의 말에 강민서가 망설였다. 차미주도 옆에서 거들었다. “인간이 왜 그래요? 왜 따뜻하게 굴어야 할 땐 모질게 굴고, 독해져야 할 땐 성모 마리아라도 되는 듯 구는 거예요? 아까 저 여자가 죄를 뒤집어씌운 거로는 부족했어요? 정말 감옥에라도 처넣었어야 정신 차릴 거예요?”너무 직설적인 차미주의 말에 강민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위를 둘러본 강민서는 누구도 나서서 신미정을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미정은 사모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인기와 명성은 별개였다. 다들 신미정을 떠받드는 건 그녀가 일 처리가 빠르고 인지상정이 바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녀가 강씨 가문의 며느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신미정과 티타임을 즐기던 사람 중 다만 어떤 한 가지라도 신미정보다 나은 부분이 있는 사람은 그녀에게 은근히 눈치를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줄곧 안하무인에 콧대 높게 지내온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면
신미정이 불효자식이라며 강민서를 욕하려는데 양시은이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전태평 개 같은 자식! 내가 몇 년 동안 뒷바라지하며 길을 닦아주지 않았다면 그 멍청한 머리로 오늘 그 자리까지 올라갔을 것 같아?”“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야.”양시은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수십 년을 데리고 있은 당신보다 손주며느리인 한현진 씨를 더 신뢰하시는 건 그분은 진작 당신이 돈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아무짝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걸 아셨기 때문이야. 그런 당신이 강씨 가문을 손에 넣고 안주인이 되고 싶다고? 꿈 깨!”더 이상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강민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빠, 나 화장실 다녀올게.”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 도착했겠지?’바로 그때,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단상에서 벌어지고 있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드디어 일단락되었다. 경찰은 다가와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경찰을 본 신미정은 구세주라도 본 듯 양시은에게서 떨어지자마자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는 경찰에게 양시은의 행위는 고의 상해라며 고소할 것이니 당장 잡아가라며 소리 질렀다. “고의 상해?”양시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린 분명 쌍방 폭행이야.”말하며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려 방금 신미정에 의해 긁힌 팔뚝의 상처를 경찰에게 보여주었다. “형사님, 철저하게 조사해 주세요.”신미정이 버럭 화를 냈다. “이 미친 X이. 네가 먼저 때렸잖아.”양시은이 또 손을 올리려 하자 순간 놀란 신미정이 얼른 경찰 뒤로 몸을 숨겼다. 평소의 재벌 사모님다운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경찰이 두 사람을 막으며 말했다. “저희 앞에서 손을 싸우려고 하시다니, 간도 크시네요.”제일 앞에 서 있던 경찰이 현장을 쓱 살피더니 생각했다. ‘어쩐지 신고자가 몇 명 데리고 출동하라고 하더라니. 현장이 이 지경이니 평소처럼 출동했다면 두 명으로는 어림도 없었겠네.’두 명의 젊은 경찰은 현장 질서를 유지하며 사건과 무관
신미정을 제압해 연행하려는데 검사가 걸어들어왔다. 현장으로 들어오는 검사를 보며 경찰들도 순간 멍해졌다. ‘새해부터 사건을 뺏으려는 거야?’검사와 얘기를 나눈 형사는 그제야 그들은 전태평의 일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틀 전, 양시은은 이미 전태평의 뇌물수수와 관련한 범죄 증거를 검찰에 제출했었다. 이틀 사이 검찰에서는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전태평의 사건에 매달렸다. 양시은이 제출한 증거가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검찰은 바로 전태평을 체포했다. 검사를 본 전태평은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이 두려움에 떨었다. 겁에 질려 꼬리를 바싹 내린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 멍청이는 다리가 떨려 제대로 걷지도 못해 검사와 그의 동료 두 명이 그를 둘러업고 조사실로 향했다. 양시은 곁을 지나치던 전태평은 드디어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시은아, 여보. 여보 살려줘. 나 감옥 못 가. 어머니 연세도 있으시고 고은이도 이제 막 대학 들어갔잖아. 내가 감옥에 가면 우리 애들은 어떡해. 전부 그 여자가 날 유혹한 탓이야. 그 여자가 임신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시은아, 시은아 나 좀 도와줘. 내가 앞으론 뭐든 네 말만 들을게. 시은아, 제발 부탁이야...”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 비서 실장으로 승진해 의기양양하던 사람이 이젠 양시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일말의 자존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양시은은 그 누구보다 평온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남자의 진면모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양시은은 콩깍지를 벗고 현실을 직시했다. 전태평이 불륜을 저지르고도 양시은과 이혼하지 않은 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당시 그의 처지에 양시은은 최선책이었을 뿐이었다. 내조를 잘할 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외조에도 애썼다. 그는 높은 곳에 올라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질 땐 아무런 미련도 없이 양시은을 버릴 생각이었다. 장씨 가문에서 정
멈칫, 행동을 멈췄던 차미주가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주 변호사님, 오셨어요?”한현진은 한입 베어 물던 사과를 한성우에게 던져 버리고는 얼른 다시 침대에 누워 허약한 척 연기했다. 그 모습에 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 ‘연기력은 정말 흠잡을 데 없네.’그는 사과는 접시 위에 올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강운아, 안 갔어?”주강운이 걸어들어오며 침대에 누워 병약한 모습의 한현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 씨 좀 보려고 왔어. 너희는 왜 현진 씨를 병원으로 모시지 않는 거야?”?“우리가 안 데려가는 게 아니라 여정 씨가 큰 문제는 없다고 해서 일단 지켜보는 중이야.”주강운은 말없이 침대맡으로 걸어가 나지막이 한현진을 불렀다. “현진 씨, 다친 덴 좀 어때요? 제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요.”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여정 씨가 그저 찰과상이라고 했어요. 집에서 쉬면서 상처에 물 안 들어가게 조심하면 된대요. 너무 걱정되면 내일 가서 감사받으면 돼요.”잠시 말을 멈춘 한현진이 더 그럴듯하게 거짓말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마침 내일 한서가 재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라 같이 가면 돼요.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안 가려고요.”주강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머리와 다리에 감긴 붕대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한현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주 변호사님, 여정 씨 실력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주강운이 입술을 짓이겼다. 한 번 구겨진 그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아주머니는 왜 그렇게까지 하신 걸까요? 현진 씨를 다치게 한 거로도 부족해 민서까지. 대체 동기가 뭐였을까요?”“그거야 당연히—”격분한 차미주가 막 입을 열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엉덩이를 꽉 움켜주었고 곧 그녀의 입에서는 돼지 멱 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미주는 빨개진 얼굴로 한성우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개자식, 이게 무슨 변태 같은 짓이야!”한성우가 무심하게 바지의 먼지를
한현진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하네.’뚜벅뚜벅 걸어온 강한서는 주강운과 한현진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는 시선을 내려 주강운 손에 들린 부적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부적을 가져갔다. 강한서는 부적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게 영험한 부적이면 나중에 너도 인연을 만나게 해주는 부적 좀 써.”멈칫한 주강운이 고개를 들어 강한서와 시선을 맞췄다. 차미주는 한성우 품에 기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뭐 아주 아수라장이네. 이러다 싸우진 않겠지?’그녀는 강한서를 아직 제대로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은 싸우는 건 젊은 친구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강한서는 초등학생처럼 싸우는 것보다 더 유치한 짓을 할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역시나 강한서는 손이 미끄러졌다. 그의 손에 있었던 부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테이블에 놓였던 컵으로 떨어져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깜짝 놀라던 강한서는 얼른 손을 넣어 부적을 주우려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부적을 물속에 더 깊이 담가버렸다. 그가 컵에서 꺼냈을 때 부적은 진작 물에 잔뜩 젖어 있었고 종이에 그려진 문양도 전부 번져버렸다.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부적이 물에 젖었는데 계속 평안을 지켜줄 수 있는 거야?”주먹을 꽉 움켜쥔 주강운이 부적을 몇 초간 빤히 쳐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수신사에서는 일 년에 한 번만 치성드릴 수 있어. 많은 것을 빌면 효험이 없거든. 현진 씨는 네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루어졌잖아. 그리고 난 현진 씨의 평안을 바라는 부적을 가져왔으니 올해는 다른 부적은 받을 수 없어.”강한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흥분한 차미주가 한성우의 옷깃을 꽉 잡았다. ‘강한서를 앞에 두고 현진이에게 마음을 표현하다니. 세상에. 너무 자극적인 스토리잖아.’한현진은 강한서 손에 들린 부적을 가져오더니 장난스레 말했다. “이 부적도 미리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