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하네.’뚜벅뚜벅 걸어온 강한서는 주강운과 한현진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는 시선을 내려 주강운 손에 들린 부적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부적을 가져갔다. 강한서는 부적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게 영험한 부적이면 나중에 너도 인연을 만나게 해주는 부적 좀 써.”멈칫한 주강운이 고개를 들어 강한서와 시선을 맞췄다. 차미주는 한성우 품에 기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뭐 아주 아수라장이네. 이러다 싸우진 않겠지?’그녀는 강한서를 아직 제대로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은 싸우는 건 젊은 친구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강한서는 초등학생처럼 싸우는 것보다 더 유치한 짓을 할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역시나 강한서는 손이 미끄러졌다. 그의 손에 있었던 부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테이블에 놓였던 컵으로 떨어져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깜짝 놀라던 강한서는 얼른 손을 넣어 부적을 주우려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부적을 물속에 더 깊이 담가버렸다. 그가 컵에서 꺼냈을 때 부적은 진작 물에 잔뜩 젖어 있었고 종이에 그려진 문양도 전부 번져버렸다.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부적이 물에 젖었는데 계속 평안을 지켜줄 수 있는 거야?”주먹을 꽉 움켜쥔 주강운이 부적을 몇 초간 빤히 쳐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수신사에서는 일 년에 한 번만 치성드릴 수 있어. 많은 것을 빌면 효험이 없거든. 현진 씨는 네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루어졌잖아. 그리고 난 현진 씨의 평안을 바라는 부적을 가져왔으니 올해는 다른 부적은 받을 수 없어.”강한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흥분한 차미주가 한성우의 옷깃을 꽉 잡았다. ‘강한서를 앞에 두고 현진이에게 마음을 표현하다니. 세상에. 너무 자극적인 스토리잖아.’한현진은 강한서 손에 들린 부적을 가져오더니 장난스레 말했다. “이 부적도 미리
‘그걸 깜빡했네.’보아하니 불 난 집에 부채질하러 가긴 그른 것 같았다. 아쉬워하던 한현진은 곧 다른 문제를 떠올렸다. “내가 다치지 않았으면 혹시 무죄로 석방되는 거야?”강한서는 한현진을 쳐다보지 않은 채 덤덤하게 대답했다. “호텔에서 방금 그 기름을 청소하던 직원분이 넘어져서 다치셨대요.”한현진이 멈칫했다. “직원이... 넘어져서 다쳤다고?”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말했다. “CCTV라도 보여줘요?”한현진이 입을 삐죽였다. “그냥 해본 얘기야.”강한서는 한현진이 손에 꼭 쥐고 있는 부적을 슬쩍 보더니 입술을 짓이겼다. “제 목에 물이 묻었어요.”그 말을 들은 한현진이 얼른 그의 목을 안고 있던 손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강한서가 또 입을 열었다. “손을 바꿔서 다른 쪽에도 똑같이 물을 묻히려고 그러는 거예요?”“...”“제 주머니에 넣어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네 주머니도 젖잖아.”강한서가 말했다. “두꺼운 거 입어서 괜찮아요.”지극히 평온한 말투였다. 마치 그저 하는 말인 듯, 정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단순히 불편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한현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미 유치하게 굴었으니 또 질투하진 않겠지.’그렇게 생각한 한현진은 강한서의 말대로 부적을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차에 올라탄 강한서는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하자 한현진이 물었다. “네 동생도 데리고 갈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민 실장이 데려다줄 거예요.”“그럼 민 실장님께 우리도 데려가라고 하지, 왜 기사님까지 따로 불렀어?”강한서가 말했다. “불편해서요.”“불편할 게 뭐가 있어. 민 실장님이 우리를 처음 데리러 오는 것도 아니고.”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말했다. “민 실장은 아마 본인이 연애하는 모습을 자기 대표가 옆에 앉아 지켜보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거예요.”한현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충격적인 소식에 눈을 끔뻑거리던 한현진이 입술을 달싹이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한현진은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분노가 끓어올라 화를 내고 싶은 것이 분명했지만 기억 잃은 연기는 계속해야 했기에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그가 드디어 한 마디 내뱉었다. “제가 죽었다고 생각했다면서 왜 환생석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던 거예요?”강한서에게 장난을 치려던 한현진은 그 말을 물으며 눈시울까지 붉히는 강한서가 너무 속상해 보여 마음이 약해졌다. ‘기억 잃은 척하고 싶으면 계속하라고 하지 뭐. 어떤 사정이 있든 무슨 이유든, 내가 받아주면 되니까. 무사히 돌아왔고 아직도 날 좋아하고 있는데,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게 뭐 대수야? 굳이 놀리면서 힘들게 할 필요는 없잖아.’멍청한 강한서는 한현진의 말이라면 전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눈을 마주 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옆에 있는 건 싫어. 네가 없으면 그곳이 어디든, 내 곁에 누가 있든 난 똑같이 외로울 거야.”강한서가 멍하니 한현진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얀 그의 피부가 점차 빨갛게 물들었다. 목에서부터 귓불까지 점점 더. 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입만 번지르르해서는.”한현진이 웃으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강한서는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 특히 한현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그랬다. 그러니 주강운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어쩌면 진작 뭔가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오늘 밤 있었던 일 때문에 강한서의 계획이 차질이 생기지는 않았을지 걱정이었다. ‘주강운...’주강운에게는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그들을 납치했던 납치범이 하필이면 주강운 의뢰인의 전남편이었고 또 마침 그와 갈등을 빚었었다. 그리고 그 범인이 하필이면 안면인식장애가 있어 강한서를 주강운으로 착각했다. 너무 많은 우연이 겹쳤다. 모든 것이 그럴듯했지만 여전히 이상한 느낌을 떨칠 수는 없었다. 강단해가 손을 쓴 것이라면 한현진은 그 동기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한성우: [형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우리 도둑이 없이도 헛소리 안 해요. 인간 대 인간으로 조금만 더 신뢰해 주시면 안 돼요?]한현진: [죄송해요. 임신했더니 아이가 심장을 누르고 있어서 제가 요즘 소심해졌거든요. 그래서 걱정이 좀 많아요. 이해 부탁드려요.]한현진의 문자를 본 한성우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아이를 심장에 임신한 거야?’한성우: [형수님, 하시고 싶은 질문이 뭔데요?]한현진: [주강운 씨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 과정이요. 성우 씨가 아는 건 전부 알려주세요.]한성우: [???]차미주: [!!!]한성우: [형수님, 그건 왜요?]한현진: [물어보지 말아야 할 건 묻지 마시고요.]한성우: [...]한성우: [형수님, 강운이 일을 알고 싶으시면 왜 한서에게 묻지 않으시고요. 두 사람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서 알고 지낸 시간이 저보다 길어요. 강운이에 관해선 한서가 제일 잘 알아요. 차라리 한서에게 묻는 편이...]한현진: [강한서에게 물으면 제가 강운 씨를 조사하고 다니는 걸 들키잖아요.]게다가 강한서는 지금 기억을 잃은 연기 중이었으니 그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제일 중요한 건 그 자식은 물어본다고 해서 꼭 대답해 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전에도 강한서에게 물어봤었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한성우: [한서에게 숨기기까지 하시려고요??]한현진: [알려줄 거예요, 말 거예요?]차미주: [나 나갈 거야. 오늘 밤 당장.]한성우: [... 알려주면 되잖아. 사실 저도 아는 게 많지는 않아요.]한성우의 말에 따르면 고등학교 전까지만 해도 주강운은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남들과 같이 학교에 다니고 수능 준비를 했다. 제일 큰 차이점이라면 주강운의 가정 환경이 엄격하다는 것뿐이었다. 어딜 가든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만약 정해진 시간에 전화하지 않으면 그와 연락이 닿을 때까지 주변 모든 사람에게 전화했다.나중에 주강운과 강한서는 같은 대학에 입학했고 한성우는 점수가 낮아 다른 대학에 진학하면서 주강운과의
한현진: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운 씨에게 첫사랑이 있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야. 강운 씨와 살 것도 아닌데.]차미주: [그럼 왜 강한서 몰래 주 변호사님에 관해 묻는 거야?]문자를 작성하던 한현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문자를 다시 하나하나 지웠다. [강한서가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주 변호사님을 미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할 거라고 했단 말이야. 하지만 난 주 변호사님보다는 너희가 우리 아이의 미성년후견인이 되어줬으면 좋겠거든. 그러니 강운 씨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강한서가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핑계를 댈 수 있지. 내 아이의 미성년후견인은 너희 두 사람만이 될 수 있어.]차미주: [!!! 감히 내 양딸을 뺏으려고 해? 한성우, 찌라시 좀 퍼뜨려봐!]한성우는 말문이 턱 막혔다. ‘한현진 이 여자는 정말 능글맞고 간사하기까지 하다니까.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잘 속여?’그는 한현진이 주강운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이 절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만일을 대비해 아이의 미성년후견인을 미리 지정하는 것은 강한서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한현진의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한현진처럼 수단이 좋은 여자를 강한서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이의 미성년후견인은 물론, 성을 한씨로 하겠다고 해도 사랑에 눈이 먼 강한서는 어쩌면 바로 그러자며 승낙할 수도 있었다. ‘우리 단순하고 착한 도둑이가 어쩌다 이렇게 심보가 고약한 여자와 절친이 된 거지?’하지만 그가 차미주를 속였을 때 찾아와 경고하던 한현진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비록 두 사람은 상반된 성격을 가졌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 분명했다. 차미주: [개자식, 우리 양딸을 잃게 생겼는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한성우는 얼른 음성 통화를 연결했다. 차에서 별안간 한현진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른 휴대폰을 꺼버렸다. 한현진의 조건반사에 강한서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휴대폰으로
“그래요...”강한서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이었다. “전 줄곧 비밀번호를 설정한 사람이 저에게 뭔가를 암시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한현진은 순간 그녀가 비밀번호를 설정할 때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강한서를 떠올렸다. ‘설마, 그때부터 이 비밀번호가 그런 뜻인 줄 알았던 거야?’어쩐지 그날, 새벽까지 한현진을 괴롭히던 강한서는 거의 잠들고 있는 그녀에게 앞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얘기하라고 했었다. 그 말의 의미를 몰라 한현진은 한동안 꽤 답답해하기도 했었다. ‘직접 얘기하라는 게 그런 의미였다니!’‘젠장.’복잡한 표정을 짓던 한현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상상력이 풍부하네.”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한현진의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은 강한서의 눈빛에 즐거움이 스쳤다. 하지만 자신에게 들킬까 봐 숨기던 한현진의 모습을 떠올린 강한서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달콤한 말로 마음을 녹이더니 이젠 그를 피해 전화를 받으려고 했다. ‘대체 누구 전화길래 저렇게까지 뜨끔해하는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으로 힐끔 시선을 돌리자 한현진은 조용히 휴대폰을 핸드백에 넣었다. 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끝내 숨기시겠다?’‘그래, 대체 어떤 놈이 내 여자를 건드리는지 꼭 확인하고 말겠어.’한현진을 아름드리로 데려다준 강한서는 곧 다시 집을 나섰다. 신미정은 절대 얌전히 잘못을 인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쯤 구원 투수를 데려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돌아가 확인해야 했다. 강한서가 집을 나서자마자 한현진은 안방으로 달려가 그룹 통화를 연결했다. 세 사람의 그룹 통화가 곧 연결되었다. 한성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제가 그룹 통화를 몇 번이나 보냈는데 왜 계속 끊으셨어요?”한현진이 말했다. “미안해요. 강한서가 옆에서 있어서 못 받겠더라고요.”한성우가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저희는 그냥 평소처럼 수다 떠는 거잖아요. 바람이라도 피는 것처럼 왜 그래요?”한현진이 쇼츠를
“하지만 간민혜와 함께 있는 강운이는 누가 봐도 행복해 보였어요. 하지만 간민혜의 집안 배경 때문에 강운이네 집에서는 절대 두 사람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우리도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강운이가 얘길 꺼내지 않으니 우리도 아무 말 하지 않았죠. 어쩌면 강운이가 가족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져도 여전히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그러니 강운이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은 저희도 약속이나 한 듯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죠. 그 사실을 아는 건 가깝게 지내는 그 몇 명뿐이었어요.”“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없잖아요. 강운이네 집에서도 곧 그 사실을 알게 됐고 강운이에게 간민혜와 연락을 끊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어요. 강운이는 당연히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고 그러니 집안 어른들이 간민혜를 찾아갔어요. 그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간민혜가 집을 나서기만 해도 강운이네 가족이 찾아왔으니까요.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던 때라 그걸 견딜 수 없었던 건지 어느 날 갑자기 강운이에게 헤어지자는 문자를 보내고 사라졌어요.”얘기를 듣던 차미주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사라져? 태주 대학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며? 입시도 포기한 거야?”“응.”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바로 그게 이상한 부분이야. 간민혜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어. 헤어진다고 하더라도 대학원 준비는 마쳤어야 하잖아. 하지만 이상하게도 간민혜는 헤어지자는 문자를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땐 이미 성적도 나왔고 심지어 간민혜는 필기시험 1등이라 면접을 망치지만 않는다면 합격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간민혜는 면접 장소에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죠. 그 부분은 정말 너무 이상해요.”“강운이는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찾아다녔어요. 찾아볼 만한 곳은 전부 찾아봤지만 아무리 애써도 간민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어요. 전에 사용하던 모든 연락처를 전부 말소해 버렸더라고요. 마치 증발해 버린 것처럼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강운 씨네 집안에서 그
잠시 말이 없던 한현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뒷부분 얘기는 성우 씨 상상이라는 거예요?”“상상이라고 할 수는 없죠. 대충 맞는 사실이기도 하니까요. 간민혜는 가족이 별로 없었어요. 사망 후 장례식도 한서가 치러준 거니까요. 그때 저도 장례식에 갔었는데 빈소가 제 시험지보다 더 깨끗했어요. 간민혜의 남편이 정말 자기 아내를 사랑했다면 어떻게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겠어요?”잠시 생각하던 한성우가 말했다. “전 당시 간민혜가 사라진 게 강운이네 집안과 어느 정도는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교통사고도 강운이와 관련되어 있었지만 해리성 장애가 있었잖아요. 강운이네 집안에서는 절대 강운이에게 그런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겠죠. 그래서 그 사고는 결국 덮어졌어요. 그러니 강운이가 그 기억을 잃은 건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라요.”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운은 좋네. 본인은 기억을 못 하니 그만이겠지만 그 여자는 주 변호사님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 전생에 대체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거야? 현진아, 나중에 강한서랑 아무리 같이 못 살겠어도 절대 주 변호사님 같은 사람은 만나지 마. 본인도 문제지만 집안도 문제야.”줄곧 말이 없던 한현진은 차미주의 부름에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한현진이 갑자기 물었다. “간민혜 씨와 주 변호사님 사이에 아이가 있어요?”“네?”한성우가 멍해졌다. “없을 거예요. 한서에게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으시는 거예요?”“그게 아니라...”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주 변호사님이 다급하게 간민혜 씨를 데리고 한주를 떠나려고 하신 게 혹시 그분이 임신하셔서 집안에서 간민혜 씨를 해칠까 봐 그런 건 아닐까 해서요.”그 말에 한성우가 웃어버렸다. “그럴 리가요. 만약 간민혜가 임신했다면 어쩌면 강운이네 집에서 허락했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간민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절대 자기 집안 씨를 밖에 내버려둘 분들이 아니시거든요.”말하며 한성우가 또 목소리를 낮췄다. “강운이 아버지와 둘째 삼촌 두 분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