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의 말에 사람들이 시선이 강한서에게 쏠렸다. 양진환은 2년 전에야 양지원을 집으로 데려왔다. 강한서는 한현진을 만난 후의 모든 기억을 잃었으니 양지원이 누군지 모르는 것이 맞았다. 처음엔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주강운의 말에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네. 강한서가 어떻게 양지원을 기억하는 거야?’강한서는 시선을 내린 채 말이 없었다. 마치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사람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한현진이 오히려 컵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미주를 기억하는 것까진 그렇다 쳐. 하지만 지원 씨도 기억하면서 나만 잊었다는 거야? 강한서, 너 지금 나랑 장난해?”한현진의 반응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이 반응...’‘현진이 성격이라면 뭔가 기억이 떠오른 거냐고 물어야 하는 거 아냐?’‘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전에도 한현진은 그가 차미주를 기억한다는 건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렇게 뜬금없이 화를 내는 건 전혀 그녀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고함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곧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전 양지원 씨를 기억하지 못해요. 하지만 양 대표님과는 협업하고 있는 사이에요. 대표님께서 늘 따님 자랑을 아끼지 않으셔서 얘기를 많이 전해 들었어요. 그래서 양지원 씨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는게 전부예요.”한현진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내가 바보인줄 알아? 너 진작 나랑 헤어지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억 상실이라는 핑계를 대는 거지?”미간을 찌푸린 강한서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한현진 씨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로 하죠.”한현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태도야?”강한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굳이 그렇게 생각하겠다면 저도 딱히 방법은 없죠.”‘개자식, 나쁜 남자가 할 법한 멘트는 빨리도 배웠네.’한현진이 눈시울을 붉히며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은 한성우는 한참 동안 기침을 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는 사레가 들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럼에도 차미주를 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똥개면 넌 뭐야? 개똥이? 그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로 우린 강아지 연합이야. 우리가 낳은 아이는 강아지 새끼가 되는 거지. 어때?”차미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누가 강아지 새끼라는 거야. 너나 해.”“그러니까.”한성우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낳아준 내 새끼잖아.”차미주는 한성우에게 달려들더니 그대로 그를 쥐어박았다. 두 사람의 소란에 분위기는 한껏 유쾌해졌다. 강한서는 그 틈을 타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화내지 마요, 네?”한현진은 그런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술을 짓이기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다른 사람 결혼식이라 참는 거예요.”시선을 내린 강한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간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고마워요, 한 선생님.”‘선생님...’한현진이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의 귓가에 ‘유 선생님.’하고 부르며 서로를 알아가던 예전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획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는 전혀 이상한 기색 없이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개자식, 숨기려면 제대로 숨길 것이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괜히 마음 떨리게.’“아, 맞다.”술을 한 모금 마시던 주강운이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서야, 나 오늘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아는 사람을 만났어.”강한서가 덤덤한 태도로 주강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강운이 말했다. “네 외숙모 말이야. 호정 씨. 오늘 이혼 소송 때문에 변호를 맡기러 사무실에 오셨던데 알고 있었어?”강한서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듯했다. “언제부터?”“아마도 작년 연말부터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아. 전에 전
조금의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이렇게 논리적인 사람이 어떻게 강한서의 기억 상실을 “깜빡”할 수 있는 거지?한현진이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주강운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낀 주강운이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주강운을 향해 한현진이 다정한 눈빛으로 씩 미소 지었다. 그러자 주강운의 눈초리가 마치 새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빛 역시 순간 부드러워졌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을 발견한 강한서의 눈빛은 오히려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로 한현진의 손을 꼭 잡았다. 멈칫하던 한현진은 다른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구부리더니 강한서의 손등을 가볍게 간지럽혔다. 그러자 강한서는 홱 움츠리며 손을 빼냈다. 그의 눈빛은 당황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에 한현진 쯧, 혀를 찼다. ‘겁쟁이. 기억 상실인 척 연기도 해야겠고 질투심을 숨기지는 못하겠고. 아주 죽을 맛일 거야.’그런 생각을 하며 한현진은 또다시 손을 뻗어 강한서의 허벅지를 꽉 잡았다. 쯧.‘탄탄하군.’ 깜짝 놀란 강한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행동이 컸던지 테이블도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순간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한현진이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왜 갑자기 일어나는 거야?”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짓이기던 강한서는 결국 하려던 말은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그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화장실 다녀올게요.”‘허벅지 좀 만졌다고 바로 화장실을 가?’‘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한현진의 기분이 퍽 좋아졌다.강한서가 자리를 비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 한 명이 강민서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강민서도 곧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났다. 심심했던 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차미주의 손금을 봐주는 한성우를 쳐다보았다. “자기야, 자기 사업운은 처음엔 옅다가 중간부터 깊어졌어. 그리고 결혼운과 이어져서야 깊어진 거거든. 그러니까 자기는 결혼하고 난 후에야 사
“안타깝게도 우리 세대엔 아마 60살이 되어서야 퇴직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가 되면 난 퇴직금을 타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 같은데 그럼 국민연금도 그동안 지불했던 보험금의 일부만 돌려받을 수 있잖아. 힘들게 몇십 년을 일했는데 난 퇴직 연금이든 뭐든 받아보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가게 생겼으니 생각만 해도 너무 아깝잖아.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차라리 그 중간쯤인 35살 후에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면 40살 정도에 아이를 낳고 아이가 20살 정도가 되어서 대학에 가면 나도 퇴직할 거고. 그때쯤이면 손주를 볼 기력도 없어서 봐줄 것도 없겠지. 퇴직금이 있으니 그럭저럭 생활이 가능하니까 60살 전에 죽는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나머지 퇴직금이 유산으로 넘어갈 테니 아깝진 않잖아.”한성우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 퇴직금을 꼭 받아야 하는 거야?”“그럼. 퇴직금이 없으면 내가 나중에 일을 못 하게 되면 난 무슨 돈으로 살아.”차미주의 말에 한성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더러 45살이 되어서야 아빠가 되라고?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45살이면 나이가 너무 많긴 해.”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45살에 아이를 낳을 순 있어?”“당연히 힘들겠지. 45살이면 거의 반백이야. 우리 15년 정도 앞당기면 어때?”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하던 차미주가 말했다. “45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아이를 낳자고 하는 건 확실히 좀 무리야, 그렇지? 하지만 네가 난 결혼해야 흥한다며. 그럼 우리 이러자. 네가 45살이 되면 내가 일단 너랑 결혼할게. 그리고 내가 성공하면 우린 이혼하는 거야. 내가 젊고 몸 좋은 남자 만나서 아이를 낳으면 다시 재혼해. 그럼 넌 아내, 아들 돈까지 다 가질 수 있잖아. 어때?”그 말에 당황한 한성우가 멍해졌다. ‘그럴 수도 있는 거야?’한성우는 갑자기 차미주를 꽉 끌어안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도둑아. 난 돈 필요 없어. 난 그냥 너랑 결혼하고 싶어. 30살이든 40살이든 아니면 50살이든 난 너와 결혼할
위층으로 올라간 한현진은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강민서의 모습을 발견했다. 화장실이 급했던 터라 그녀는 강민서의 모습을 더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았다. 한편, 물건을 들고 있던 강민서는 한참이 지나도 신미정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수시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불안한 예감이 서서히 엄습하기 시작했다. ‘날 불러내 오더니 설마 한현진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양시은과 신미정은 가까운 사이였으니 만약 결혼식에서 한현진에게 손을 쓸 생각이라면 양시은이 신미정을 도와줘야 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강민서는 더 이상 가만히 신미정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방을 나서려 몸을 돌린 강민서가 문을 열자 때마침 들어오려던 신미정과 마주했다. 나가려는 강민서를 본 신미정이 멈칫하더니 강민서의 훑어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아니에요.”강민서가 한발 물러서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라고 부르시고는 계속 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 생겨서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잠시 말이 없던 강민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전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자리에 앉은 신미정이 강민서에게 앉으라며 손짓했다. “뭐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아름드리에서 꽤 오랫동안 지냈는데 일은 어느 정도 진행됐어? 지난번에 식초에 약을 탔다고 했잖니. 한현진이 꽤 오래 마셨을 텐데 별다른 증상은 없어?”강민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식은땀이 흐르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현진이 너무 경계심이 많아요. 한 번 맛을 보더니 맛이 이상하다면서 다시는 마시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신미정이 보기엔 강민서의 태도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예전처럼 거짓말만 하면 긴장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신미정의 표정 역시 점점 더 차분해져 갔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신미정이 말했다. “됐어. 전엔 내가 복수에 눈이 멀었어. 강씨
신미정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결혼식이 아직도 시작 안 했잖니. 예비 신부가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서 배고팠거든. 아직 식사도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그릇째로 들고 오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보기 안 좋을 것 같아 그랬어.”신미정의 대답에 강민서가 생각했다. ‘주방에서 직접 보내줄 순 없는 건가?’하지만 화목한 가족의 환상 속에 잠겨있던 강민서는 더 이상 신미정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엄마가 좋아하는 디저트로 골랐어요. 드셔보세요.”신미정이 강민서의 볼을 어루만졌다. “엄마가 널 예뻐한 보람이 있네. 역시 우리 딸이 제일 다정해.”강민서는 마음 한편을 꾹 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엄마가 이해하셔서 다행이야.’문 쪽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멈칫하던 신미정이 고개를 들었다. “민서야, 넌 연회장으로 돌아가. 곧 결혼식이 시작될 거야. 엄마는 시은 씨랑 할 얘기가 있어.”“네, 알겠어요.”방을 나서려는 강민서를 신미정이 또 불렀다. 그녀는 옆에 있던 포장된 포장 용기를 강민서에게 건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면서 포장 용기 좀 버려줘.”신미정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 예비 신부가 동쪽으로 나갈 거라 그쪽엔 사람이 많아. 부딪히지 말고.”강민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엄마.”말하며 방을 나서 곧장 동쪽 계단으로 향해 쓰레기통에 손에 들린 포장 용기를 버린 강민서는 치맛자락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돌아와 한현진과 강민서 모두 자리에 없는 것을 발견한 강한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한성우에게 물었다. “민서랑 현진이는?”차미주와 한성우는 한창 개인연금 보험금을 얼마를 내는 것이 가장 이득인지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한서의 목소리로 고개를 든 한성우가 말했다. “화장실 갔어. 너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서가 나갔고 또 잠시 후 형수님도 나갔어. 화장실에서 두 사람
화장실에서 나온 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방금 강민서가 지나갔던 곳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곧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비상계단에서 큰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층을 담당하고 있던 종업원이 깜짝 놀라 황급히 비상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곧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한현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아직 다친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강한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뛰쳐나갔다. 강민서 역시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강한서를 따라 달려갔다. 주강운은 이성을 잃은 강한서의 모습을 두 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손으로 술잔을 쓸던 그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피투성이라는 네 글자에 차미주는 진작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개자식아, 혹시... 혹시 현진—”차미주가 말을 마치지도 전에 한성우가 그런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는 장난기를 띤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계단이 높으면 얼마나 높다고 넘어져서 피가 나겠어. 그 사람이 너무 과장해서 얘기한 게 분명해.”“하지만—”“형수님이 도자기 인형도 아니고. 고작 넘어진 거로 피를 흘리겠어. 게다가 아직 우리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닌데, 어떻게 형수님이라고 확신하는 거야?”한성우가 또다시 차미주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차미주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잔뜩 긴장했었던 탓에 하마터면 한현진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뻔했다. “다친 게 누구든 일단 가보자. 듣기만 해도 무서워.”“그래, 가보자.”자리에서 일어난 한성우가 차미주와 함께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신우 부부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주강운을 힐끔 쳐다본 양지원이 말했다. “안 가보세요?”주강운이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마 제대로 볼 수 없을 거예요.”양지원이 그런 주강운을 살피며 물었다. “만약 다친 사람이 강운 씨
호텔 매니저 역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얼른 두 층을 담당하고 있던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전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강한서는 양시은에게 일단 방을 하나 달라고 부탁한 후 고여정이 한현진을 데리고 들어가 다친 곳을 체크하도록 했다. 그 모습이 신미정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는 줄곧 숨기고 있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당연히 공개하는 것을 꺼리겠지.’‘하지만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으니 제아무리 명줄이 긴 아이라고 해도 떨어지고도 남았을 거야.’그런 생각이 들자 신미정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야, 오늘은 시원 씨 따님이 결혼하는 날이야. 곧 식을 올려야 하고. 현진이도 심각해 보이지는 않고 말이야. 아마도 덤벙대는 직원이 실수로 기름통을 엎은 모양인데 이 일은 일단 잠시 미뤄두고 나중에 다시 조사하는 게 어때? 이런 일로 결혼식을 방해해서는 안 되잖니.”그 말은 순간 차미주의 성질을 건드렸다. “그게 인간이 할 말이에요? 심각해 보이지도 않는다니요. 저렇게 많은 피가 본인 것은 아니다, 이거죠? 실수로 기름을 엎은 거라면 떨어진 흔적이 있어야 해요. 하지만 바닥을 봐요. 이건 분명 누군가 일부러 기름칠한 거라고요. 심지어 꼼꼼하게 발랐다고요. 일부러 한 짓이 분명해요.”신미정은 차미주를 슥 훑어보았다. “누가 멀쩡한 바닥에 기름칠을 하겠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다른 사람은 넘어지지 않은 거야? 이 일 때문에 결혼식이 지연되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거니?”차미주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것 봐. 당신이 한 짓이지? 그러니까 조사하는 걸 원치 않는 거잖아. 그래서 그냥 묻어버리려고 하는 거고.”신미정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한 번만 더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면 당장 내쫓을 거야. 여긴 네가 함부로 날뛸 수 있는 곳이 아니야.”한성우가 잔뜩 흥분한 차미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