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의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었다.임양운도 만종문의 후배들과 함께 축배를 올렸다.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심청하는 물론 다른 관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축배를 올려야 한다.임양운은 혼인을 주최한 안만수에게 먼저 술을 따랐다.그는 술을 들이켜고 안만수는 살짝 맛만 본 덕에 체면이 한껏 세워졌다.한편, 송석석은 만종문 사람들의 행동에 눈시울이 붉어졌다.오늘의 주인공은 북명왕이 맞다.하지만 이 자리는 영원히 송석석을 위한 자리라고 낙인 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명문가에게는 없는 규칙이지만 무술인들을 향해 비난을 하는 사람은 없다.게다가 임양운은 권력층 집안 출신이 아닌가.심청하까지 같은 소속이기 때문에 체면을 감히 구길 수 없었다.한편, 장공주와 가의 군주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잠시 표정을 바꾸어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곧이어 장공주가 기회를 틈타 혜 태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혜 태비, 본궁은 태비의 훗날이 걱정됩니다. 저렇게 기가 센 며느리를 들이셨으니 말입니다.자칫 말이라도 잘못하시면 같이 차도 못 마시게 되실 겁니다.이후에는 항상 조심 하셔야 하겠습니다.”혜 태비는 마음이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오늘의 북명황실은 모두에게 주목받고 있다. 게다가 송석석의 혼수와 넓은 인맥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그녀는 오늘의 복이 자신이 아니라 북명활실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장공주의 시비 한 번에 마음이 더 복잡 해졌다.어쩌면 훗날에 며느리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신이 며느리였을 적에는 불효는 감히 생각한 적도 없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당시 시절대로 엄격할 수는 없다. 그저 송석석이 뒤에서 자신을 해 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혜 태비는 자신의 상황을 어느 정도 깨달은 표정이다.그녀는 모두의 총애를 받으면서 살아왔었다. 후궁에서는 다른 공주에게 보호를 받은 탓에 고생을 한 적이 없다.만약 송석석이 교묘한 술책을 부린다면 크게 당할
옆에 있던 가의 군주가 웃어 보였다.“모친, 이러시면 안됩니다.만약 송석석이 태비를 탓하면 어찌합니까.태비는 못하십니다.”두 모녀는 혜 태비를 손에 가지고 놀았다.‘단순함’ 은 자극을 제일 참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곧바로 혜 태비의 대답이 들려왔다.“그저 동주 몇 알 아닙니까. 정녕 그것 때문에 화를 내겠습니까.”그녀는 여전히 송석석의 배경을 무서워하고 있다.하지만 체면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오고 말았다.곧바로 혜 태비는 고 씨 유모를 데리고 편청으로 향했다.편쳥 주위로 혼수를 지키는 사람은 고작 세명에 불과했다.게다가 자리에는 대부분 부유층의 사람들이다.술만 마시기 바쁠 뿐, 도둑질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혼수 옆으로는 염선생이 정해 둔 호위들이 서있다. 호위들은 혜 태비를 보고 인사를 건네었다.혜 태비는 손을 뒤로하고 방 안 혼수를 둘러보았다.하지만 발 들일 틈도 없이 가득 차있는 바람에 움직 일 수가 없었다.동주는 사각에 위치하여 있었다.매 진주마다 반짝 빛이 났다.동주의 광택은 일반 진주와 비교가 안될 정도다. “저 사각의 동주들을 다 합치면 200근이 되지 않겠나.나는 단 한 번도 이러한 동주를 본 적이 없어.”혜 태비는 다시 보아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씨 유모는 장공주의 속셈을 눈치채고 그녀를 말렸다.“태비 마마.마마 같으신 분이 이러한 짓을 하시면 안 되옵니다.며느리의 혼수를 가져갔다는 사실이 퍼지면 마마의 명성에도 좋지 않습니다.”혜 태비는 고 씨 유모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당연하지.내가 그런 일을 하겠느냐”고 씨 유모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그녀는 태비가 그들의 말에 속았을 까봐 근심이 들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유모가 하거라.내가 널 데리고 온 목적이 무엇이겠냐.”고 씨 유모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뭐가 무서운 것이냐. 진짜 큰일이 생기면 내가 유모를 챙겨 주면 되지 않은가.”그녀는 뒤를 돌아 잠시 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은 왕야의 기쁜 날이다.무슨 일이든 뒤로 미루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하지만 염구진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혜 태비는 왜 도둑질을 했을까.왜 며느리의 혼수를 가져다 남에게 주었을까.’어떻게 단순한 태비에게서 똑똑한 왕야가 나왔는지 놀라울 정도다.한편, 송석석은 술을 딱 한 잔 마시고 사여묵과 함께 신방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사람들이 신랑을 쉽게 놔 줄리가 없었다.결국 그녀를 데려다 주고 다시 방에서 나왔다.송석석은 신방으로 가는 길 내내 잡았던 손을 떠올렸다.아직도 손에는 따뜻한 온도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그제야 떨림은 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아무리 통제하려고 해도 사여묵의 따뜻한 눈빛에 빠져들곤 했다.곧이어 양 마마가 방으로 들어왔다.보주와 다른 하녀들에게 밥을 먹으라고 불렀다.결혼 피로연에는 하인들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하원에서만 식사가 가능했다.하녀들은 줄곧 송석석만 따라다니느라 배가 고픈 건 사실이다.하지만 그들은 송석석부터 걱정하기 시작했다.“마마님, 이 한 상은 아씨부터 먼저 드시라고 해도 됩니까?”양 마마가 답했다.“이미 사람을 불러 면을 만들라고 시켰네. 아가씨께서는 면으로 조금 배를 채우시고, 왕야께서 손님 대접을 끝내면 같이 식사를 올리겠습니다.왕야께서도 지금까지 술만 드시고 식사는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송석석이 고개를 들었다.“그래도 왕야에게 뭐라도 좀 먹여야 하는 게 아닌가.”양 마마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가씨, 언제부터 왕야를 챙기셨습니까?”순간, 송석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짓궂은 장난하지 말게나.빈속에 술만 먹으면 당연히 몸에 무리 가지 않겠나.”곧이어 양 마마가 하인들을 잠시 내보내고 방 문을 닫았다.‘이제 아가씨에게 알려 주어야 할 때가 됐구나.’원래라면 하루 밤 지나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왕야에게 마음이 가는 모습을 보자 감출 필요가 없어졌다.양 마마가 의자를 가져
양 마마가 송석석에게 연고를 발라 주면서 미간을 떨구었다.눈 밑으로 그녀의 슬픔이 깃들었다.“돌아오셔서 선을 본다고 하셨을 때, 얼마나 많은 도련님이 찾아왔는지 기억하십니까.””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네.”“네. 하지만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그때는 아가씨께서 매산에서 돌아오시기 전이었습니다.”양 마마는 연고를 바른 손을 계속 어루만졌다.그리고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그때는 후작 나리..국공대감님과 도련님들의 부고를 받았던 날입니다.장군이 사라져 결국 북명왕이 남강의 대원수가 되었지요.”송석석이 자신의 손을 어루만졌다.곧이어 속눈썹이 점점 촉촉 해졌다.“이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그녀는 아직까지 부모와 형제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려왔다.“제 말 끝까지 들어 주셔야 합니다.”양 마마가 눈물을 머금었다.오늘 처럼 기쁜 날에는 무슨 일이든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북명왕이 병사들과 함께 성을 나가기 하루 전날 밤.제 기억으로는 새벽이었습니다. 북명왕이 방문한다는 말에 마님께서 옷을 갈아입고 마중을 하셨습니다.”송석석은 잠시 멈칫하고는 무언가를 떠올렸다.곧이어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목소리가 떨렸다.“그 늦은 시간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양 마마는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북명왕은 단검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 하시 길, 국공 대감과 도련님들을 죽인 군사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져오신 단검을 신물로 드리고는 아가씨와 결혼을 약조 하셨습니다.”사실 눈치를 채고 있었다. 하지만 양 마마에게 듣자 깜짝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가 나에게 혼인을 요구했단 말인가.’“모친은 반대하셨지?”물으면서도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이어서 양 마마가 대답했다.“마님께서는 허락하셨습니다.”송석석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허락했다면 왜 전북망을 받아들이신 거야?”양 마마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북명왕을 허락한 이유는 그분이 마음 놓고 전투에
양 마마가 말을 끝냈다.곧이어 시녀가 국수를 들고 들어왔다.송석석은 배가 고팠다.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을 보고 식욕이 떨어졌다.양 마마가 다정하게 말했다.“드시지요. 하늘에서 마님이 보고 기뻐하실 겁니다. 제가 약조 드립니다.”송석석이 그릇을 건네받았다.곧이어 그녀의 눈물이 한 방울씩 국 안으로 떨어졌다.목이 메여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바꾸었다.“왕관도 참 무겁네. 목이 다 아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야.”양 마마가 옆에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참 바보 같으십니다. 드시고 나시면 왕관을 빼고 옷을 갈아 입혀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시가 되기 전에 왕야 께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면을 몇 입 먹었다. 훌쩍 거리는 바람에 어린 소녀와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그 단검은? 모친이 신물에 대한 답례는 주셨는 가?”“단검은 국공 대감의 군기창에 있습니다. 노비가 정리해서 가져 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내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님께서는 답례를 주셨습니다.”양 마마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가씨께서 직접 자수하신 손수건입니다.”송석석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뭐, 그 손수건이 약혼 선물이었다는 것인 가.”그녀는 모친이 모두에게 나눠 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합니다.”“그 많은 물건 중에 왜 하필 손수건을 나눠 주신 건가?”송석석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모친은 왜 하필 못생긴 손수건을 사여묵에게 건네 준 것일까?’그녀는 그가 가진 손수건을 보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흉을 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전투장에서도 손수건을 아끼고, 자신의 옆에 두었다.송석석이 전북망과 이미 혼인을 했어도 손수건을 버리지 않았다.그녀는 그의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 한편, 양 마마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지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아가씨가 처음으로 수공예를 하셨지 않습니까. 마님께서는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지 모릅니다.”송석석은 우는지 웃는지 알 수가 없다.곧이어 국
혼인식 때문에 새로 만든 옷이 엄청 많다.게다가 북명황실에서 식을 올리기 때문에 비단은 필수다.그녀의 상자 안에는 사계절의 옷이 가득 들어 있다.다양한 색깔과 동시에 정교한 자수 솜씨를 볼 수 있었다.그 밖에 다른 상자 안에는 호피와 두루마기가 들어 있다.하지만 받은 예물과 혼수 덕에 평생 동안 옷감을 살 필요가 없어졌다.오늘 입은 옷과 옷장에 넣어 둔 옷들은 요 며칠 동안 입을 예정이다.눈에 띄는 색깔이지만 촌스럽지는 않았다.게다가 송석석은 붉은 색 계열의 옷이 어울렸다.특히 방금 갈아입은 자홍색이 그러하다. 자홍색 안에 복숭아의 붉은기가 들어가 있는 색깔이다.그 덕에 그녀의 피부가 더욱 화사하게 보였다.고급스러운 외투는 부드럽기 그지없고, 비단 표면에서 광택이 났다. 조금 얇지만 온돌 덕에 큰 문제는 없었다.오히려 송석석은 가벼운 차림새에 홀가분했다.게다가 목욕을 하면서 울음 때문에 막혔던 코도 뚫렸다.앞마당에서 왕야가 술에 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그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신방으로 올 예정이다.아직 해시다.양 마마가 말한 것보다 더 일찍이었다.왜 남의 혼인식에서 취할 때까지 술을 먹는 것일까.소식이 들려오자 양 마마는 하인들에게 서둘러 식사를 준비하라 시켰다. 신방에는 풍족한 음식이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의미는 부족함이 없는 부부생활을 하라는 뜻이다.술과 술잔을 제외하고 모든 음식이 새롭게 바뀌었다.사실 다른 음식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뜨겁게 데워서 다시 내보낸 것이다.그들은 빠르게 식사 준비를 마쳤다. 곧이어 장대성이 왕야를 부축이며 매화원에 도착했다.송석석은 갑자기 든 생각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축하가 하나 더 있지 않은 가.’신혼부부의 방에 친척이나 친구들이 찾아오는 순서가 남았다.문득 전북망과 혼인을 치룰 때가 생각이 났다. 당시에 그는 전쟁에 나갔었지만 사람을 불렀었다.결국 민망한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만약 그때와 같은 성격이라면 결말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송석석은 걱정 되
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자리에서 나와 사람을 시켜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 시켰다.그리고 왕야의 얼굴을 한 번 더 닦으라고, 지시했다.송석석이 그를 평상에 눕혔다. 이어서 보주가 다시 방으로 들어와 말했다.“사부들이랑 사형들이 술을 많이 먹인 것 같습니다. 장 부장께서 말씀 하시 길,왕야께서는 술을 거절하는 게 두려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이 드신 술은 ‘도화주’입니다.”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렸다.“사부들이 계속 술을 권했다니?”괴롭힘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이다.게다가 만종문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다.그들과 일일이 마시려면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이어서 보주가 물었다.“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월파의 도화주는 농도가 낮지 않습니까?”“아마 사부가 만든 술은 고월파의 도화주가 아닐거야.”송석석은 귀가 빨개진 사여묵을 바라보았다.‘교배례는 하지 못하겠구나. 오늘 이 한상 가득한 식사는 나 혼자만 먹게 되겠지.’그를 깨우지도 못하는 상황에 물을 수도 없었다.곧이어 명주가 뜨거운 물을 가져왔다.송석석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이제 다들 내려가 봐. 오늘 밤은 내가 보살펴 드릴게.”명주가 잠시 머뭇거렸다.“하지만 오늘 밤은...”오늘은 양 마마가 명주에게 신방의 망을 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야의 상태는 교배례도 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마마, 교배례가 남지 않았습니다.”명주가 뒤를 돌아 양 마마에게 물었다.곧바로 양 마마의 한숨이 들려왔다.“왜 이 꼴이 되도록 술을 먹인 거야? 왕야를 생각도 안 하고 빈속에 술을 넣으면 어쩌 자는 건지, 참.”양 마마는 임병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오늘 밤은 송석석에게 제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왕야는 좋은 사윗감이 아닌가.왜 이 모양이 될 때까지 그를 괴롭혔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왕야는 전투장에서 얻은 상처도 적지 않았다.하지만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 적도 없다.송석석 뿐만 아니라 양 마마도
양 마마가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그녀는 곧바로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이다음 순서는 부부가 직접 해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만약 옆에서 송석석에게 충고를 한다면 화가 점점 커질 뿐이다. 게다가 그녀는 왕야가 아닌 자신의 사부에게 화가 난 것이다.이리하여 양 마마는 두 사람만 남겨 두자는 결론을 내렸다.‘그래야 아가씨도 남편을 마음 아파하겠지.’한편, 송석석은 왕야의 얼굴을 닦아주고 손을 씻었다.그리고 탁자 위에 있는 차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왕야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동시에 송석석이 화가 났다는 걸 알았다.그도 자신을 향한 분노가 아닌 걸 알고 있다.그녀는 차가운 표정이지만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다. 방 안에는 용과 봉황이 그러져 있는 화촉이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곳곳에는 매듭이 걸려져 있다.그는 기침을 몇 번 하고는 물었다.“제가 거의 다 한 매듭입니다.어떻습니까?”송석석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사실 왕야가 말하지 않았다면 발견을 못 했을 수도 있다.매듭의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계속 떨렸기 때문이다.그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리고 그의 길고 얇은 두 손을 바라 보았다.“정녕 혼자 만드셨습니까? 이런 것도 하실 줄 아십니까?”왕야의 머리가 살짝 흐트러졌지만 잘생긴 외모는 여전하다. 곧이어 미소를 지으며 질문에 답했다.“사실 배운 겁니다.”송석석의 눈빛이 반짝 거렸다.반짝 거림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이어서 모르는 척 하면서 그에게 물었다.“왜 배우셨습니까?”“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직접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희 혼례식 이니, 많이 참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리고 잠시 머뭇거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지금까지 말을 못 했던 것이 있습니다.”그는 손을 이마에 두었다.어지러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다.제일 또렷한 정신에서 말을 해야 취언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송석석은 천천히 식탁 앞으로 다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
이황자의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사범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황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평가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세 황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진짜라고 믿으며,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말로 인해 자랑스러워할 때마다 덕비는 매번 그를 바닥으로 밀쳤다. 그녀는 늘 연민과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내 뱃속에서 태어나 평생 그 바보에게 밀리게 생겼구나. 바보 주제에 운은 또 얼마나 좋은 지.” 그는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귀에 익힐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덕비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않고 매번 사적으로만 그에게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마마마가 대황형을 가장 싫어하면서 왜 매번 자애롭고 온화한 눈빛으로 대황형을 보며, 분명 바보라고 해놓고 총명하다고 칭찬하는지 몰랐다. 이해가 안 돼서 몰래 청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청이는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황자 님, 마마께서는 이황자 님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계신 거예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기뻐하셨고 그에게 한숨을 쉬거나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지 않았다. 숙청제가 그를 보러 올 때마다 덕비는 그가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러자 숙청제는 그에게 어떤 책을 읽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을 기억했는지도 물었다.그는 매번 대답을 아주 잘해서 숙청제를 흡족하게 했다. 답은 모두 미리 외운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건 없었다.가끔은 숙청제가 그에게 대황형이 괴롭히거나 장난감을 빼앗지는 않는지 물어보기도 했다.하지만 그런 질문에도 정답이 있었는데, 그는 매번 자기가 동생이니 황형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황자가 매번 그렇게 대답할 때마다 숙청제의 눈빛은 몹시 복잡했는데, 이황자는 그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숙청제가 잠시 침묵한 후에 그의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