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결국 폭발한 민 씨는 마음이 지쳐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뒤에선 남녀가 포효하는 소리에 전소환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민 씨는 천천히 내원 정청으로 걸어갔다. (예전엔 항상 송석석이 저 의자에 앉아 집안일을 관리했는데. 가사가 아무리 복잡해도 그녀는 인상 한번 찡그린 적 없이 부드러운 얼굴로 모든 사람을 대했지. 시어머니가 밤에 아플 때도 밤새 간호하며 이튿날에도 휴식하지 않고 할 일을 다 했지. 마치 힘든 걸 모르는 사람처럼. 하지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버티는 거지.) 예전엔 민 씨가 미처 몰랐는데 지금은 모두 알게 되었다. 그녀는 피곤해서 의자에 앉아 텅 빈 정청을 보았다. 등 기름을 아끼느라 복도에도 풍등을 하나밖에 켜지 않았다. 처참한 불빛이 들어와 외로운 책걸상을 비추어 장군부가 마치 무덤 같았다. 민 씨는 진심으로 송석석을 위해 기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장군부에 있을 때 자신에게 해준 것 때문이었다. 물질뿐만이 아니었다. 민 씨는 자기가 책임지고 관리를 해보니 송석석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고 무엇을 막아주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민 씨는 너무 기진맥진해서 차라리 평범한 백성의 집에 시집갔으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성실하게 살 수 있고 비현실적인 추구 때문에 사람들의 정력을 빼앗기진 않겠지.) 그녀는 생각을 하며 의자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하인이 들어와서 둘째 도련님께서 부인의 뺨을 때려 소란을 일으킨 후 문을 박차고 나가 노부인께서 화가 치밀어 기절했다고 보고했다. 민 씨는 대답만 하고 말했다. “다들 가서 일 봐.” 그녀는 이것이 시작일 뿐 이제부터 가정이 조용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여묵이 매산으로 출발하려고 할 때 이부의 임명이 내려졌고, 그는 경위지휘사에 들어가 경위지휘지사 사진무사라는 5품 직책을 맡게 되었다.그 자리로 임명된 사람이 두 명이었는데 다른 한 명은 현갑군의 필명이라는 사람이었다. 경위는 현갑군 출신이고 북명왕은 현갑군의 지휘
전북망이 임명을 받자 이방도 자신에게 경위나 현갑군에 입대하여 소대목이라도 맡기를 원했다.이방도 자신이 잘못을 했으니 너무 높은 관직은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성릉관 전쟁에서 공로를 세웠으니 남강전쟁을 제외하고도 직책을 원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명을 맡으면 고개를 들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이 짧았던 것이었다. 송석석도 이름뿐인 직함을 받았을 뿐 경위 관아에 갈 필요도 현갑군의 합숙훈련에 참여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특별한 필요가 있다면 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갈 수 없는 게 아니라 가지 않는 것이었다.그래서 이방은 며칠을 기다렸지만 성릉관 대첩의 공을 모두 멸살하는 제명 서류가 왔다.그녀는 더 이상 장군이 아니며 심지어 군인도 아니게 되었다. 성릉관의 공도 모두 몰살되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간 적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그리고 병부에서 보낸 장군 갑옷과 영패, 무기까지 모두 돌려보내야 했다. 게다가 예전의 병복도 남길 수 없었다.이 일이 이방 마음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자신이 전쟁터에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명이고 백부장이며 장군이었다. 그리고 힘들게 장군부까지 시집갔는데.그녀는 이게 시작일 뿐이라고 앞으로도 청운의 길을 열어 여자 관리의 모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장군부에 시집온 게 모든 끝의 시작일 줄은 몰랐다.그녀는 미친 듯이 마당에서 물건을 부쉈다. 눈에 보이는 건 모두 박살이 났고 하인들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해 민 씨를 찾으러 갔다. 민 씨는 이방이 자신의 마당에서 미친 짓을 하는 것이니 상관할 수 없다며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전 노부인께서 아직 병상에 누워 계셔 아무도 감히 알릴 수 없었다.다른 사람들은 알고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전소환은 결국 이방을 찾아갔다. 그녀는 독한 눈빛으로 이방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저 천한 년이 아니었다면 송석석은 여전히 내 형수고 북명왕에게도 시집가지 않을 텐데. 이 여자가 화근이
사여묵은 만종문에 갔고, 혜 태비는 사람을 보내 송석석을 궁중에 들였다. 장공주 생일 연회를 통해 혜 태비는 송석석에게 대한 태도를 바꾸었지만 아직 며느리로 받아들이기엔 부족했다. 혜 태비는 아직 송석석에게 사용할 수단이 없었다. 송석석이 장공주에게까지 건방지게 대하니 강제적인 수단은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송석석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포기하게 할 작정이었다. 송석석은 장춘궁에 도착하자 찻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딤섬과 찻물까지 다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오만한 혜 태비도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음이 뻣뻣해서 억지로 지어낸 웃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송석석이 배알 하자 혜 태비는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잡담하듯 말했다. “난 정말 너를 위해서 말하는 건데 넌 묵이에게 속은 거야. 묵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는 예전에 그녀 말고는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한 사람이야. 그러니 그가 너에게 마음을 줄 수가 없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결혼을 해봐서 알잖아. 왜 남자에게 속아 넘어가?” 혜 태비가 물었다. 그녀는 송석석이 안타까운 표정을 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얼굴엔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이 일은 왕야님께서 나에게 말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혜 태비는 놀라서 물었다. “알면서 왜 그에게 시집가려는 거야? 그는 널 사랑하지도 않고 마음속에 네가 전혀 없는데 왜 굳이 그에게 시집가려는 거냐고? 왕비의 자리를 위해서? 국공부의 지위가 높으니 자신의 행복으로 바꿀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러자 송석석은 웃으며 물었다. “태비께서는 왕야님께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와 결혼하려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혜 태비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면 누구든 상관없는 거겠지.” “그래요? 아무나 하고 할 수 있는 결혼을 왜 꼭 나와 하려는 걸까요?”그러자 혜 태비는 말문이 막혔다. 혜 태비는 사실 아들이 꼭 송석석과
혜 태비는 송석석의 단아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날씬한 몸매를 보며 생각했다.(아무리 봐도 묵이의 말처럼 단칼에 사람을 세 동강 낼 수 있는 사람 같지 않단 말이야.)그녀는 송석석이 장공주의 연회에서 한 말이 생각나서 물었다.“그날 장공주의 미움을 샀는데 그녀가 복수할까 봐 두렵지 않느냐?”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이빨이 없는 호랑이가 뭐가 무섭습니까?”그러자 혜 태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네가 아직 젊다는 거야. 그녀의 수법이 얼마나 많은 지 알아? 그런 사람이 뒤에서 너에게 복수한다면 엄청 괴로울 거라고.”“뒤에서 한 번 복수하면 우리는 대놓고 정정당당하게 두 번 갚아주면 그만입니다. 우린 떳떳하고 부끄럼 없어 뒤에서 든 앞에서 든 두렵지 않거든요. 하지만 장공주는 알려지지 않은 일이 너무 많죠. 사람이 약점이 있으면 대처하기 쉬워지기 마련이고요.”그녀는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부수고 아무렇지 않게 유리조각을 테이블 위에 털어놓았다.그 모습을 본 혜 태비는 가슴이 철렁해 자기도 모르게 곧았던 허리를 약간 굽혔다가 약해 보이는 행동임을 깨닫고 바로 꼿꼿이 폈다.송석석은 그 모습을 힐끔 보며 손가락으로 치마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가볍게 털었다.“우리 만종문에는 규칙이 있어요. 타인이 날 범하지 않으면 나도 타인을 범하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타인이 나를 범한다면 뿌리를 뽑죠!”혜 태비는 가슴이 다시 철렁했다. 송석석은 웃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게 바로 은혜와 원한을 구분하는 강호의 습성이죠. 하지만 우리 세가에서는 도리를 따지지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지 않아요. 오늘도 혜 태비마마께서 나를 불러 도리를 따지려고 하는 거니 제가 가만있는 거예요. 만약 저를 불러 뜨거운 태양 아래서 대기하라고 하거나 나의 뺨을 때린다면 한 번은 참아도 두 번은 절대로 참을 수 없어요.” 송석석은 차갑고 예리한 눈빛으로 말했다. 혜 태비는 속으로 겁을 먹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분명히 내가 저번에 그녀를 불렀을
궁을 떠난 송석석은 정말로 장공주 저택으로 향했다.애초에 장공주부로 향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사이에 입궁 하명을 받아 시간이 잠깐 지체된 것뿐이었다.하지만 별로 아쉬울 건 없었다.오후가 지난 시간이니 장공주도 낮잠에서 깨어났을 테고 전투력이 충만할 테니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요 며칠 창고를 정리하면서 전에 장군부에서 가지고 온 혼수품을 남길 건 남기고 팔 건 팔고 팔 수 없는 건 구석에 쌓아두었다.사여묵과 결혼을 하는 이상 원래 쓰던 혼수를 쓸 수는 없으니 창고를 정리하고 새로 들일 물건이 뭐가 있는지 진복에게 정리하라고 시켰다.그리고 그 수많은 잡동사니 중에서 송석석은 장공주가 보내준 열녀비를 발견했다.쓸데없이 화전옥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열녀비, 귀한 “선물”이니 당연히 장공주에게 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장공주가 열녀비를 선물했을 때쯤은 아버님과 오라버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진성에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 아직 매산에 있었던 송석석은 이 열녀비를 보지 못했었다.‘어머님이 당연히 버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창고에 처박아두셨네. 상심이 크셔서 대충 처리하라고 시키셨는데 하인들이 함부로 던지지 못하고 여기 보관해 둔 모양이네.’송석석은 열녀비를 들어 이리저리 관찰해 보았다.장신구 상자 정도 되는 크기에 중간에는 열녀비라는 세 글자가, 그리고 양옆에는 전승보물이라는 글자가 조각되어 있었다.이 열녀비를 받았을 때 어머니가 느꼈을 분노와 무력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집안의 장정들이 다 죽고 혼자서 어린 손자, 손녀들을 거느리고 어떻게 장공주와 맞설 생각을 하셨을까?전에는 이 열녀비가 버려졌다고 생각해 장공주를 찾지 않았지만 찾아낸 이상 어떻게든 다시 돌려줘야 했다.그날 연회에서 송석석이 사람들에게 열녀비를 보여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애초에 이 물건이 있을 것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저 다들 보러 오지 않을 것이란 확신에 그런 말을 했던 것뿐이었다.자리에 있는 모두들 장공주가 아무리 독하다 해도 국공부
장공주의 분노한 얼굴과 달리 송석석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그녀는 곁눈질로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종들이 장공주 앞을 막아서며 호위를 부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어서, 어서 여기 좀 와보십시오!”하지만 송석석은 씨익 웃었다.“공주 마마, 긴장하실 필요없습니다. 전 물건을 돌려드리러 온 거니까요.”장공주의 시선이 그녀가 손에 든 열녀비로 향하더니 표정이 살짝 굳었다.‘저 물건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 받자마자 바로 깨버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날 했던 말은 그저 허풍인 줄 알았는데 정말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호위장이 졸병들을 몰로 쳐들어오려 하자 장공주는 높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물러나거라. 문 앞에서 지키고 있어.”열녀비를 하사했다는 건 그녀의 측근들만 아는 일이라 널리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지금 달려온 건 안채 호위들이 아니라 입이 싸기로 소문난 외원 호위들, 가끔씩 술이라도 한 잔씩 마시면 못하는 말이 없는 자들이었다.어느새 장공주의 시중을 드는 하녀 한 명만이 자리를 지켰다.문이 닫히자마자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송석석에게 꽂혔다.“네가 정녕 죽고 싶은게로구나. 사여묵과 혼인한다고 그자가 널 지켜줄 거라 생각했더냐? 감히 공주부에 쳐들어와? 지금 당장 네 목을 칠 수도 있다.”하지만 장공주를 바라보는 송석석의 얼굴에선 그 어떤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끝없는 증오뿐이었다.“그런 말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공주마마께서 제 목을 치실 수 있듯 지금 저도 공주마마의 목을 취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살면서 수많은 악인을 보았다지만 공주마마처럼 악독하고 마음이 좁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저의 아버님과 오라버니는 이 나라를 위해 희생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존경하긴커녕 이토록 악독한 저주를 퍼부어 어머님과 새언니들에게 돈을 던지고 가슴에 비수를 꽂으셨죠. 공주마마는 인간도 아닙니다. 짐승도 이런 짓을 할 순 없을 겁니다.”“무엄하다!”화가 잔뜩 난 장공주가 씩씩거렸다.“네, 무엄하다는 거 저도 압니다!
어서방, 오 대반이 보고를 올렸다.“폐하, 장공주께서 입궁하셨습니다. 폐하를 알현하고 싶다십니다.”산처럼 쌓인 상소문들 사이로 황제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붓을 내던진 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무슨 일이냐?”이에 오대반이 조심스레 대답했다.“구체적인 연유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화가 많이 나신 듯한 모습이었습니다.”“짐의 고모님은 성격이 아주 괴퍅하시지.”황제가 피식 웃었다.“행사 때문에 입궁하실 때마다 짐에게 어른 대접을 받으시길 원하시는 분이 날 따로 만나시겠다?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으신 건가? 아니면 아직도 생일 연회 일 때문에 화가 나신 걸까?”연회에 대한 일을 대충 듣긴 했지만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일 때문에 화가 나있는 건가 싶어 의아했다.“드시라 해라.”황제의 말에 잠깐 망설이던 오대반이 대답했다.“장공주 마마께서는 자안궁에 계십니다. 폐하더러 오시라는데요. 혜태비 마마도 부르셨답니다.”“불러?”황제가 코웃음을 쳤다.“그래. 짐이 조카이니 고모님을 만나뵈러 가는 게 당연하지.”허리를 숙인 오대반이 입을 열었다.“가마를 준비해라.”어서방에서 후궁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 데다 날이 워낙 더워 걸어서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가마에 오른 황제를 향해 오대반이 속삭였다.“그날 생일 연회에서 석석 낭자가 장공주마마가 송 부인께 선물했던 열녀비를 언급했다 합니다. 그게 참...”“짐도 들었다.”황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사실이라면 황가의 일원으로 추앙받을 자격도 없지. 할바마마가 장공주에게 주었던 사랑을 저버리는 일이야.”“아직도 석석 낭자에게 원한이 남은 모양입니다.”“원한?”황제는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송국공과 혼인하려다 거절당했던 일을 말하는 게냐?”“네. 당시 그 사건은 황궁을 꽤 들썩거리게 만들었습죠. 그 일로 부마를 들이신 뒤로도 한참을 화가 나계셨습니다. 부마와도 겉보기엔 화목하나 실제론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들리고요.”황제가 오대반을 힐끗 바라보자 그는 당황하며
이에 장공주가 이를 악물었다.“송석석입니다!”그 이름이 흘러나오자 혜태비가 당황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공주부로 향하는 게 아닌지 사람까지 보냈지만 그자가 다시 돌아오도 전에 장공주가 입궁을 하더니 그녀까지 이 자리로 불러냈다.저 기세를 보아하니 굳이 보고를 듣지 않아도 송석석이 공주부로 향했고 장공주에게 불손한 짓을 저질렀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무슨 말을 한 걸까? 저렇게까지 화나 나다니. 지금까지 폐하에게까지 부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송석석? 그 아이가 뭘 어찌 했다고 황제더러 벌하라는 것입니까?”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장공주가 소리쳤다.“그자가 함부로 공주부에 침입해 저를 모욕했습니다!”하지만 송석석을 아끼는 태후는 장공주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공주부에 침입했다면 사람을 불러 내쫓으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모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사실 그대로 말할 순 없어 망설이던 장공주가 입을 열었다.“제 생일 연회에서 행패를 부릴 때도 아직 나이가 어려 철이 안 들었다 생각하고 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부로 제 처소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 앞으로 절 가만두지 않겠다 저주까지 퍼부었던 말입니다.”‘저주?’무슨 저주일까 싶어 순간 혜태비의 눈이 반짝였다.한편 태후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정말 이상하군요. 석석 그 아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장공주를 도발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나라의 장공주를요.”왠지 송석석의 편을 드는 듯한 말투에 장공주는 그제야 황태후와 송 부인이 막역한 사이라는 걸 떠올렸다.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니 화가 더 치밀었다.“군공 좀 세웠다고 묵이의 왕비로 간택되더니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봅니다. 저 같은 건 아주 안중에도 없더군요. 뭐, 어쨌든 절대 이대론 못 넘어갑니다.”악독함으로 번뜩이는 눈빛에 혜태비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석석 낭자가 사과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럼 바로 국공부
송석석은 곧바로 평서백부로 가서 최씨를 찾아 상황을 전달했다. 최씨는 단호히 한 마디만 했다."소 대장군과 관련된 일이니 지체할 수 없군요. 당장 나서겠습니다."전북망이 형부로 끌려간 이후 왕청여는 줄곧 불안에 떨었다. 친정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최씨는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이건 두 나라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신 같은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겁니까?"그렇다고 최씨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전북망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전북망이 형부에 갇혀 있지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고생하거나 고문당하지는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최씨는 왕청여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왕청여는 눈물을 머금으며 하소연했다."겨우 현철위 지휘사가 되었는데 이제 이방 일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씨 부인이 이런 혼사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셨겠지요!”최씨는 그 말을 듣고 꾸짖었다."일이 생길 때마다 원망만 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질 생각을 좀 하십시오!"형수의 꾸짖음에 왕청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녀는 결국 장군부로 돌아갔지만 안채의 일을 모두 시아버지 전기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장군부 안에서 왕청여에 대한 뒷말이 돌기도 했다.최씨는 장군부에 도착하자마자 왕청여에게 말했다."모든 하인들의 노비문서를 가져오게 하세요."왕청여가 이유를 묻자 최씨는 단호히 답했다."전북망을 구할 방법을 찾으려는 겁니다."왕청여는 자세히 물어보려 했지만 최씨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잘랐다."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시키는 대로 당장 실행하세요."결국 왕청여는 노비문서를 찾아와 그녀에게 건넨 후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최씨는 노비문서를 확인한 뒤 집안 관리인을 불러 하인들의 신원을 물었다. 특히나 이방을 보좌했던 하인들을 주목했다.대략적인 정보를 얻은 후 최씨는 다시 문지기를 불러다 물었다.그
서경 사신들이 홍려사를 떠나 회동관으로 돌아간 뒤에도 상국 측 협상 담당자들은 홍려사에 남아 다음 협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다.목 승상 역시 논의에 참여했다. "곡물을 배상해야 한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많은 양은 안 됩니다. 그들은 지난해 흉작으로 군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우리가 삼십만 석의 곡물을 배상한다는 건 그들의 군량을 채워주는 꼴입니다. 따라서 곡물 배상을 한사코 물고 늘어지다 하더라도 삼만 석을 넘겨서는 안됩니다."목 승상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덧붙였다."또한 황제께서는 국경선 문제에서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이 두 가지를 말한 후 그는 자리를 떴다. 북명왕의 협상 진행 방식에 대해 목 승상은 꽤 안심하는 듯했다.한편, 형부에서는 전북망이 이택을 만나겠다는 요청을 했다.어젯밤 이방과 대화를 나눈 뒤, 전북망은 이방이 서경이 소 대장군을 데려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 점이 몹시 불안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아무리 고민해도 이방이 어떤 방법으로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을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이택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그녀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이택이 직접 전북망을 찾아와 서둘러 그에게 질문했다."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도 말했습니까?"전북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말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봐도 답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도망칠 경로를 계획해 둔 걸 보면 서경 사신들을 설득해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이택은 아직 협상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 대장군이 협상에서 주요 쟁점으로 논의될 것은 분명했다. 만약 상국 측이 협상 중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그렇다면 협상이 끝난 뒤에는 과연 서경이 어떤 수단으로 상국의 손에서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인가?그런데 이방은 어떻게 서경 사신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걸까?"그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이
장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국이 양국 간 체결된 민간인을 해치지 않고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협정을 먼저 위반했으며, 전쟁 중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포로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경 첩자가 송씨 가문을 멸문한 일 역시 엄청난 죄악이라고 지적했다."우리가 평화 협상을 진행하려면 양측 모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만 양국 간의 평화로운 협상이 가능합니다."통역관이 이를 번역하자 사여묵과 상국 측 협상 담당 관원들도 이에 동의했다.그렇게 정식으로 협상이 시작되었다.서경 측은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첫째, 상국은 학살당한 서경의 민간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둘째, 황금 만 냥을 배상해야 한다.셋째, 서경으로 삼십만 석의 곡식을 배상하고 상국 측에서 운송해야 한다.넷째, 녹분성에서 체결된 협정을 무효화하며 국경선을 협정 이전의 기준으로 복구해야 한다.다섯째, 전북망, 이방, 소승을 서경으로 넘겨 처벌해야 한다.’상국 측도 어느 정도의 요구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서경이 제시한 조건들은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사여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수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삼십만 석의 곡식 배상과 국경선 변경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조건과 관련하여 이방은 서경에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승은 당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주된 책임이 없습니다. 단지 부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상국에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에 서경의 대학사 고공이 말했다."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애초에 상국이 협정을 위반하면서 발생한 재앙입니다. 서경에도 분명 잘못이 있지만 상국 역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그러자 이덕회가 나서서 반박
수란석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오늘 협상에서 그는 원래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죄를 물으며 압박을 가하고는, 상대방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며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한 뒤 귀국해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계획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협상도 오히려 서경 측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자신의 조카인 장공주에게조차 무시를 당해 더욱 분한 마음이 들었다.목 승상은 한쪽에 앉아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평화롭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녹분성 사건은 상국의 잘못이기에 상국이 사죄하고 보상하려면 평화롭게 협상을 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서경 측은 녹분성 학살 사건에 대한 기록 문서를 상국 측에 배포했다. 그 문서에는 당시 서경의 태자와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병사들의 구술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생존자들로,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생생히 증언했다.학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목격한 탓에 잔혹함에 벌벌 떨었다.문서에서는 우용이라 불리는 소장이 서경 선태자를 의미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사여묵과 이덕회는 우용이 선태자의 별칭이며, 그의 본명이 경역임을 알고 있었다.그 기록을 읽은 사여묵을 비롯한 상국 측 사람들의 마음도 몹시 무거워졌다.비록 이방과 이천명이 반복된 심문 끝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어떻게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가혹하게 학대하며 그 과정에서 우용을 끌어내려 했는지, 얼마나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는지를 말이다.특히, 우용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혹한 행위를 했는지도 말이다. 장공은 목 승상을 알아보고 향병을 시켜 그에게 문서를 건네 주었고, 사여묵의 신호에 따라 홍려사 관원은 송씨 가문 멸문의 참혹한 사건 기록도 배포했다.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과 깊은 관련이
증언은 전부 상국 문자로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경 사신들은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두 명의 통역관이 서경어로 증언을 천천히 읽어주었다.정영수는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과거 송회안이 서경을 격퇴하며 수많은 서경 병사를 죽인 일과 송석석의 외조부인 소승이 성릉관을 지키며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러온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소 가문과 송석석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번에 진성에 오게 된 기회를 틈타 송석석을 죽여 그 원한을 풀고자 했다는 것이었다.증언을 모두 들은 후에도 서경 사신들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정영수의 행위가 어쨌든 송석석을 해치려 했다는 점에서 성릉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서경 사신들은 북명왕이 이 문제를 담판 자리에서 꺼내지 않고 담판 전에 공정하게 따져 물었다는 점에서 그가 의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차라리 북명왕이 비열하게 이를 담판 자리에서 올렸다면 자신들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대응할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양안을 제외한 다른 사신들은 속으로 수란석을 온갖 욕설로 비난했다. 형인 수란키와 자신을 비교하려 들다니…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치 광대처럼 우스꽝스럽지 않은가!사여묵은 평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담판은 결국 심리전이 가장 중요하다.원래 서경은 천리 길을 달려와 상국에 죄를 묻는 입장이었기에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분노할 수도, 따져 물을 수도, 과감히 큰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왕비를 암살하려는 일이 벌어진 이상 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잘못한 것은 송씨 가문과 관련된 부분 뿐이었지만, 암살 시도가 담판 하루 전날 밤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리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수란석은 손등으로 증언 문서를 눌러 가리키며 사여묵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이 일 뿐이고, 암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사여묵은 감히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사부님,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어째서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너희는 너희 일에나 집중하거라. 나는 여기서 지켜보며 상황을 살필 테니. 일은 어떻게 됐느냐? 사람은 잡았느냐?"무소위의 질문을 듣고 보니 그가 오늘 밤의 암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사여묵은 다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석석과 그들이 정영수를 붙잡아 대리사에 넘겼습니다. 정영수는 본인이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라 자부했지만 석석을 만나 결국 크게 당하고 말았습니다.""그렇군." 무소위는 담담히 응답한 후 송석석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다른 장점은 전혀 없고 그나마 무술만 조금 할 뿐이다. 게다가 정영수는 진짜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도 아니지. 서경의 고수들은 대부분 조정에 나서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를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라.""알겠습니다." 송석석은 얌전히 대답했다.송석석은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완전히 달랐는데, 어떤 이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고 어떤 이는 존경했으며, 또 어떤 이는 질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소위만은 매산에서 지냈을 때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염선생은 이들이 궁중 연회 이후에 겪은 일들과 연황실과 회왕부의 움직임, 그리고 회동관에서 전해온 보고 내용을 대략 정리해 무소위에게 보고했다.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사여묵이 말을 꺼내려 했으나 무소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잠자는 것만큼은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네가 이번 담판의 주관자이니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 어서 가서 쉬도록."사부의 명령에 사여묵은 거역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 물었다. "사백께서 마당을 폭파하셨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그러자 염선생은 깜짝 놀라며 얼른 눈짓으로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사여묵은 그를 전혀 보지 못했다."그저 화약을 가지고
염선생은 배를 문지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회왕부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소?”“마차 세 대가 후문에 대기 중이며 그 안에 물건들을 싣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니 금은과 귀중품으로 보였습니다.”“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군.”염선생이 말했다. “무사부님, 염선생님, 저희가 사람을 보내 도중에 그들을 막는건 어떠신지요?”염선생은 겸손하게 사숙의 의견을 물었다. “무사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그가 뭐 어디로 가겠나? 분명 연주로 갈 것이다. 사람을 붙여 중간에 그의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아라. 빈손으로 연주에 가게 두고 연주에 도착한 이후에는……” 그는 평무종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람을 보내 그를 감시하게 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해라.”평무종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알겠습니다!”염선생은 무사부님이 감시를 붙일 건 알았지만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훔쳐 오라는 지시를 내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다.무소위는 두 사람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마침내 벌을 풀어주기로 했다. “물독을 밖으로 내가서 내려놓고 할 일을 하러 가거라.”두 사람은 대사면을 받은 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독을 이고 밖으로 나갔다. 물독이 워낙 커서 문을 겨우 빠져나갔다. 문이 조금이라도 작았다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했을 터였다.두 사람은 물독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와 짧은 훈계를 들었다. 그들은 벌받는 것에 익숙해서 모든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숙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무소위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숙이 너희를 벌주는 것이 야박하다 생각하느냐? 원망할거면 너희들의 못난 사부를 탓해라. 너희 사부는 산에서 화약을 연구하다가 내 마당을 날려 버리고도 뻔뻔하게 내게 진성까지 와 자기 제자들을 도와 달라 청하는 양심 없는 인간이다. 너희가 벌을 조금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내 마음의 화가 도저히 풀리지
그녀는 결코 쉽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비루하게 살아남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그녀는 사람이 평생토록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했다. 여장군이 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이토록 넓은데, 충분히 강인하게 버틴다면 한 자리라도 찾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그래서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하지만 전북망은 그저 그녀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탈출 경로를 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번에 서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아시오? 합치면 백여 명이고, 시위만 해도 최소 예순 명이오. 내가 구해낼 수 있을 리 없잖소.”“혼자 할 필요 없으십니다, 장군님. 북명왕부가 도와줄 겁니다.” 이방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북망도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제가 서경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반드시 소승도 함께 데려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북명왕부는 소승을 못 본체 하지 않을 겁니다. 장군님은 단지 그들이 소승을 구할 때 저를 구해내면 됩니다.”전북망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하였소? 무슨 수로 서경 사람들이 소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다는 거요?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작정이오?”이방은 그를 흘겨보며 비웃었다. “알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 일을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를 구해 주시면 장군님과 저 사이의 빚은 깔끔하게 청산되는 겁니다. 앞으로 제가 죽든 살든 장군님과는 아무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아니, 난 받아드릴 수 없소.” 전북망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도와줄 수 없소.”“장군님, 장군님의 마음속엔 언제나 송석석이 남아 있겠지요. 장군님은 결국 저를 저버린 셈이 되는 겁니다.” 이방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데도 저는 장군님을 위해 진술까지 바꿨습니다. 정말 조금의 정마저도 잊
담판을 앞둔 전달 밤,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회동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대리사 역시 밤새 재판을 진행했다. 형부에서는 이방이 자백한 이후로 줄곧 전북망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심지어 무릎을 꿇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이방이 형부에 들어온 후 이렇게까지 약해진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택은 담판이 끝난 후 이방이 서경 사신에게 인계될 것이며 죽음도 쉽게 맞지 못할 잔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형수도 죽기 전에는 가족을 한 번 만날 수 있기에, 그는 오늘 밤 둘의 만남을 허락했다. 물론, 그 또한 감옥에서만 허용되었다. 이택은 전북망을 감옥으로 데려오라 명령하였다. 아전들이 감옥 문을 열어주자 전북망이 안으로 들어갔고 이택은 밖에서 대기했다. 당연히 전북망은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을 받아 어떠한 날카로운 물건도 지니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방이 자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이방은 현재 여성 수감자용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중요한 인물이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택은 엄중한 병력으로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작은 등불이 두 사람의 초췌한 얼굴을 비추었다. 성릉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의 그 당당함은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초라함, 그리고 절망과 혼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장군님을 위해 제 진술을 바꿨습니다.” 이방은 눈앞의 이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의지가 꺾인 모습에 그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다소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들에게 성릉관 일은 장군님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은 무사하실 것입니다.”전북망이 대답했다.“그건 사실이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 “하지만 장군님께서 개입하시기 전에는 소승이 모든 일의 주동자였습니다.”“그 말은 성립되지 않소. 황제와 형부는 믿지 않을 것이오.”이방의 얼굴이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상관없습니다. 서경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