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주의 말을 듣던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모님 진정하세요. 석석 낭자가 공주부에 침입해 고모님을 모욕한 건 분명 잘못된 일이죠. 하지만 석석 낭자가 이런 일을 벌여 얻는 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증인은 있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그리고 열녀비 사건은 경조부에 조사를 맡기겠습니다. 만약 석석 낭자가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엄히 벌할 거예요.”“증인이요? 증인이라면 많죠. 공주부 시종들 전부가 증인입니다. 호위가 막을 새도 없이 쳐들어왔고 그자가 절 모욕하는 걸 저택 사람들 모두가 들었습니다.”잠깐 멈칫하던 장공주가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열녀비 사건을 경조부에 맡기는 건 지나친 처사인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뭐 합니까. 백성들은 워낙 우매하여 일단 다시 조사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제가 열녀비를 보냈다 확신할 겁니다. 그럼 제 결백을 씻을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죠.”“도대체 뭐라고 모욕을 했단 말입니까? 말이라도 해보세요.”태후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엇이라 모욕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모욕했다는 그 사실이죠. 전 아 나라의 장공주입니다. 설령 묵이와 혼인을 한다 해도 제가 황실 어른이니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면 안 되는 거겠죠. 그런데 혼인도 올리기 전에 황실을 능멸했으니 대역죄인이 아니면 뭐겠습니까.”“아니.”황태후가 손을 저었다.“말끝마다 대역죄인이라는 말만 하지 말고 자초지종을 말해 보세요. 그럼 석석 그 아이가 장공주가 무섭게 생겼다고 말해도 모욕이란 말입니까? 그건 사실을 말한 것에 불과하니 벌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야 벌을 내려도 내릴 수 있죠.”이에 장공주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변했다.“태후께선 송석석 그 아이를 지나치게 감싸고 계십니다. 폐하, 폐하께서 말씀해 보세요. 송석석 그자는 조정의 대신이죠. 대신이 황가 일족을 모욕하는 것도 죄가 아닙니까?”아무리 물어도 송석석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말을 하지 않는 걸 본 황제는 장공
혜 태비는 왜 송석석의 죄를 물을 수 없는지 몰랐다. 불경은 엄청 큰 죄였다. 하지만 대장공주께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 혜 태비는 언니에게 물어보고 서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채고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대장공주의 얼굴을 보며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대장공주는 화가 나서 결국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이번에 궁에 들어와서 깨달은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송석석이 저렇게 나대는 건 모두 태후와 황제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도와주는 사람이 사여묵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저렇게 멋대로지.’대장공주가 떠난 뒤 황제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모님이 정절문을 세우라고 요구한 게 사실인가 봅니다. 이번엔 고모님이 너무하셨습니다.” 태후는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방금 공주의 뺨을 갈기고 싶은 걸 겨우 참았습니다. 오만하고 무지한 데다 음험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하다니 황실의 체면을 모두 구기고 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그러니 송 부인이 당시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태후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제 앞에서 한 번도 억울함을 털어놓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분명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어마마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미 떠난 사람이니 안식하길 바랄 수밖에 없죠.” 황제는 음험한 눈빛으로 생각했다. ‘이방이 송 씨 가문을 멸문했는데 진실일 밝혀지지 않는다면 송 부인께서 어떻게 안식할 수 있겠어… 어떻게 해야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그냥 이렇게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건가? 오 대반의 말이 맞아. 송씨 가문이 억울함을 너무 많이 당했어.’황제는 정무가 있어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났다. 그래서 태후와 혜 태비만 남게 되었다. 혜 태비는 생각에 잠겼다. ‘대장공주는 오늘 기세등등해서 송석석에게 처벌을 내리려고 했어. 송석석이 대단해봤자 이번 처벌은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나
태후는 동생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떠보는 심정으로 말했다. “너 조만간 황실로 가서 묵이와 함께 살게 되는데 모르는 게 많으면 굳이 황실을 주관하려고 하지 말고 석석에게 중책을 맡겨.” “언니, 그건 아니죠.” 혜 태비는 황태후의 말을 끊고 모처럼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며느리가 들어오자마자 중책을 맡는 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난 마음 놓고 그녀에게 맡길 수 없어요. 자매끼리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난 송석석이 싫어요. 그 아이가 내 며느리가 되는 것도 싫어요. 그러니 더더욱 그 아이에게 황실의 중책을 맡길 수 없어요.” “그래? 그럼 네가 중책을 맡을 거야?” 태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럼 내일부터 후궁을 다스리는 황후의 권리를 너에게 줄 테니 네가 한번 해봐. 마침 황후도 휴식이 필요하니 네가 며칠 관리해 봐.” “내가 궁중의 일을 맡아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황후가 후궁을 다스리는데도 내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언니가 후궁을 다스릴 때도 내가 많이 도왔잖아요. 안 그래요?” “많이 도와주긴 했지. 오히려 일이 더 복잡해져서 문제였지만.” 태후는 인정사정없이 말했다. “부모님이 널 너무 애지중지하게 키워서 네가 입궁한 후에도 내가 항상 널 지켜보고 널 보호했어. 그러니 너도 편히 아들 딸을 출산할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황실로 가서는 편히 살고 싶으면 며느리 잡을 생각 하지 마. 네가 석석을 싫어하든 그녀 애가 시집오는 게 싫든 이 일은 이미 정해진 일이야. 그러니 네가 반대한다고 변수가 생기진 않아. 네가 황실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태후는 이렇게 엄격한 말투로 혜 태비와 말한 적이 없었다. 송석석 때문에 언니가 더 이상 자신을 예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혜 태비는 송석석이 더 미웠다. 하지만 혜 태비도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아무리 송석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국 그녀는 사여묵에게 시집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 일은 확실히 대장공주의 소행이었다. 송석석의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방식으로 송석석에게 교훈을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진성 백성들 모두 송석석이 효녀라고 하던데 그녀가 상중에 시집갔다는 걸 알게 되면 백성들이 욕을 퍼붓겠지.’이때 공주부의 육집사가 기쁜 마음으로 들어와서 아뢰었다. “공주님, 군주님, 지금 밖에 소문이 퍼져서 찻집과 술집에서 모두 이 일을 논하고 있어요. 거의 모든 사람이 욕설을 퍼붓고 있어요.” “거의라니? 그럼 모두가 욕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가?” 가의 군주는 냉담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아직도 그녀의 편을 드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그러자 육집사가 말했다. “군주님, 백성 중 몇 명이 송석석이 시집갈 땐 이미 아버지가 떠난 지 24개월이 자난 후라고 그녀의 편을 들어 말하고 있어요.” 삼년상이란 딸로서 3년 동안 상을 입어야 하는데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24개월을 지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가의 군주가 말했다. “보통 백성들이 송석석이 시집간 날짜를 기억할 리 없잖아? 아마도 국공부에서 사람을 사주해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거야.” 그녀는 장공주를 보며 물었다. “어머니, 그럼 송석석은 실제로 상을 입는 기간을 지킨 겁니까?” 그러자 장공주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걸 누가 알아? 백성들도 권리 있는 자들을 욕하면 그들의 마음도 후련해질 테니까 그런 것까지 상관하지 않을 거야.” “만약 송석석이 기간을 채운 후 시집간 거라면 그녀가 백성들에게 해명을 하기만 하면 우린 헛수고하는 거 아니에요? 이번에 돈 꽤 많이 썼잖아요?” 장공주는 대답을 하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돈을 많이 썼지만 온 진성 백성들이 모두 송석석을 욕하게 할 수 있다면 돈을 쓴 보람이 있어.”장공주의 마음은 시원했지만 확실히 엄청 많은 돈을 썼다. 몇 년 동안 장공주는 공주부의 돈을 물 쓰듯이 써 겉으로는 번지르르하지만 사실은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부모님께서 애초에 주신 식읍과
장공주는 천천히 웃었다.‘그래, 혜 태비라는 돈주머니를 찾아가야지.’혜 태비는 장춘전에서 심하게 재채기를 했다. 낮잠을 자려고 하는데 장공주와 가의 군주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씨 유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장공주 모녀가 왜 같이 온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몇 년 전에 가의 군주와 덕 귀태비가 함께 연지가게를 차려 돈을 좀 벌었다.모든 일에서 뒤처지기 싫어하는 혜 태비는 그들이 돈을 벌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가게를 차리려고 했지만 가의 군주가 아니라 친정의 조카와 함께 할 생각이었다.그런데 가의 군주께서 찾아와 독특한 비법이 있다고 궁 안의 연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며 혜 태비에게 3천 냥을 가져와 함께 가게를 차리자고 했다.혜 태비가 가의 군주를 믿지 못하자 장공주가 나서서 혜 태비에게 그들 모녀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는 괴변을 늘어놓았다. 혜 태비는 원래 두 사람을 무서워하는데 장공주의 어두운 표정을 볼 때마다 바로 돈을 꺼냈다.하지만 몇 년 동안 연지가게에서 번 돈을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해마다 적자를 봐 그들은 계속 돈을 요구했다. 혜 태비는 속으로 울고 싶었지만 나중에 그녀가 가난하다 거나 인색하다는 소문이 돌까 봐 주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몇 년 사이에 가의 군주가 보지도 못한 연지가게 때문에 혜 태비에게서 뜯어간 은만 해도 만 냥이 넘었다.고씨 유모는 혜 태비가 궁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그녀를 모셔 당연히 그녀를 위해 생각했다.“또 돈 받으러 온 게 확실합니다. 태비마마, 연지가게가 이득도 없는데 문을 닫는 건 어때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또 돈을 달라고 찾아올 겁니다. 이 몇 년만 해도 많은 돈을 들였잖아요.”혜 태비도 연지가게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폐업을 하려고 하니 창피했다. 덕 귀태비는 연지가게로 돈을 잘만 벌고 있는데 자기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분해서 지금까지 해온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장공주와 가의 군주를 들였다. 역시 연지가게의 일로 찾아온 것이었다. 혜 태비는 참
장공주는 혜 태비에게서 받은 돈에서 조금 풀어 술집과 다방의 설화인에게 계속 송석석이 효도를 지키지 않은 것을 들먹이도록 했다. 국공부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 걸 보고 장공주는 그들이 무서워서 나오지 않는 줄 알고 속이 시원했다. ‘나와 맞서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지.’그녀는 이 참에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사여묵과 송석석의 혼인을 동의하는 건 황제의 자리에 화근을 심어주는 것이니 강산을 위해서 송석석이 북명황실로 시집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황제가 듣고 깊이 생각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묵이와 석석은 모두 무장이에요. 남강을 수복하고 국토를 호위하며 나와 조정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묶이는 내 동생이라 어릴 때부터 친밀하게 지냈고요. 묵이는 결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고모도 함부로 추측하지 말아 주세요.” 장공주는 잠깐 멍하더니 고모의 신분을 내세우며 호되게 말했다. “멍청하긴. 그리 쉽게 사람의 마음을 믿어서야. 황실에서 형제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걸 보지 못했느냐? 황제가 되어서 그렇게 쉽게 사람을 믿으면 그가 황제의 믿음을 사서 나쁜 일을 행할까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이때 황제의 안색이 안 좋아지더니 차갑고 음울한 눈빛으로 옥반지를 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오 대반은 금세 알아차리고 황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장공주님, 제발 말을 삼가 주십시오. 이런 말이 전해지면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장공주께서 황제폐하와 북명왕의 형제애를 이간질한다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그건 장공주님께도 불리하지만 황제폐하와 북명왕에게도 불리한 말입니다. 지금 황제폐하와 북명왕께서는 사이가 좋으신 데다 북명왕과 송석석 아가씨의 혼인은 이미 정해졌는데 이제 와서 황제폐하께서 사람을 명해 혼인을 망친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황제폐하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장공주는 황제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옥반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 공공의 말은
이때 찻집 손님들은 격분해서 발언한 사람이 바로 오늘날의 흠천감 감정님임을 알아보았다.사람들은 갑자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감정님께서 직접 고른 날인데 상중일 리가 없잖아?”이때 감정은 멍해진 설화인을 가리키며 물었다.“누가 너에게 국공부를 모욕하라고 사주했느냐? 송국공가의 일곱 영웅은 모두 남강 전장에서 전사했어. 그 후 송장군이 여장군으로 봉함을 받고 전쟁터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북명왕을 도와 남강까지 수복했지. 양심이 있는 백성이라면 송국공에게 깍듯이 존경하는데 넌 여기서 근거도 없는 말로 대중을 현혹시켜 송 장군을 불효 막심한 사람으로 몰고 가려고 하다니. 대체 무슨 속셈인 거냐?”이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설마 적국의 첩자가 일부러 송 장군을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겠지?”그러자 다른 한 명이 말했다.“그럴 수도 있지. 다들 잊었어? 송씨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서경의 첩자에게 죽임을 당했잖아. 저 사람이 우리 상국 진성에 숨어 있던 첩자일지도 몰라. 빨리 관청에 보고해.”설화인은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 아니야. 난 서경의 첩자가 아니야. 나는…….”“서경의 첩자도 아닌데 왜 송 장군을 헐뜯는 거냐?”“그러게, 대체 무슨 속셈인 거냐?”“도망가지 못하게 에워싸라.”누군가가 외치자 사람들은 줄줄이 앞으로 막아 설화인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삿대질을 당했다.진복은 2층 옥탑방 입구에 서서 설화인이 포위된 채 삿대질을 받는 것을 보고서야 웃으며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감정은 직접 나와서 해명하고 관청에도 보고했는데 장공주를 불어내지 않더라도 그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아마도 이 설화인들을 모두 매수해야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설화인이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며칠 사이에 소문에 진성에 쫙 펴졌는데 관청이 개입해서 하나하나 추적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진복은 국공부로 돌아가 아가씨에게 말해줬다. 송석석은 양 마마와 손수건을 수놓고 있었는데 보고를 듣고 그저 엷은 미소만 지었다.
공주부가 사주했다는 걸 증명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장공주가 매수한 많은 사람 중에 겁이 많은 사람이 있어 관아에서 심문을 하자 바로 자백했다. 공주부에 연루되자 공양은 일단 조사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직접 국공부로 송석석을 찾아갔다. 송석석이 시집갈 때 연회를 크게 하지 않고 혼사를 조용히 치러 혜안후부에서도 셋째 부인만 보내 예물을 보냈을 뿐 결혼식 당일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송석석은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진성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양과 몇 번 만나지 못했다. 그녀가 매산에서 돌아왔을 때, 혜안후부에서 둘째 형수를 만나러 왔던 여자들이 있었는데 공양은 한두 번밖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땐 송석석이 규칙을 배우고 있어서 얼굴을 가리고 인사만 하러 나왔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양을 본 것은 온 집안이 멸살되었을 때, 그녀가 장군부에서 친정으로 돌아와 그가 피투성이가 되어 조카의 작은 머리를 안고 돌계단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는데, 눈빛이 비통하고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그가 직접 온다는 소식을 들은 송석석은 자수를 하고 있던 손을 떨며 바늘로 손가락을 찔렀다. 흐르는 피를 보고 있자니 마치 어두운 밤의 악귀처럼 눈앞이 온통 새빨갛게 변했다. 송석석은 공양이 기껏해야 사람을 보낼 줄만 알았지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송석석은 마음을 다잡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바로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그녀는 한참 정신을 가다듬고 서야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멸문 이후로 형수님들의 친정가문과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장군부에 있을 때는 마주칠 수 있는 자리는 모두 피했다.왜냐하면 서로의 가슴에 묻어둔 화약의 심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만나지 않고 각자 위장하며 살아왔던 것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해일처럼 밀려오는 아픔을 억누를 수 없을 테니까. 송석석은 평범한 옷을 갈아입고 넓은 소매 속에 숨겨둔 손을 떨었다. 그녀는 공양이 바닥에 앉아 서우의 머리를 안고 울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본청으로 나온
그가 앉은 자리는 북당이 이번 협상에서 취한 입장을 대표했다.그는 중립의 위치에 있었다. 송석석은 다시 한 번 국가가 강성한 것이 정말 좋다며 감탄했다. 협상의 처음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양쪽 모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였고, 양쪽의 역관들이 그것을 전달하며, 모두 역사적 문제를 강조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양보를 한다면 계속해서 양보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첫 번째 협상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데 그쳤다.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협상이 시작되었다. 역시 초반에는 전날처럼 양쪽에서 강조하는 말들이 오갔다.그러다가 잠시 후, 안풍친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두 나라의 국경 문제는 이미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국경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본왕은 두 나라가 서로 친선을 맺고,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두 나라가 더 이상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며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안풍친왕은 한 장의 목록을 꺼냈다. 그 목록에는 양국의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곡물, 가축, 비단, 직물, 수공예품, 찻잎, 모피, 도자기, 종이, 벼루, 각자의 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약초, 향료, 청염, 철광, 옥석 광물 등이 있었다. 양쪽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이익 앞에서, 어떤 일들은 협상이 가능했다. 협상이 되지 않으면 잠시 미룰 수도 있었다. 수년간의 전쟁은 두 국가의 국고를 이미 소진시켰기에 양쪽 모두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북당의 발전 경험에 따르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것은 뒤처진 생각이며, 농업과 상업을 동시에 중시하는 것이 살길이었다. 상업세 또한 매우 높았다. 안풍친왕의 이 목록 덕분에 두 나라는 국경
하지만 송석석은 서경의 종친과 관리들이 북당이 협상에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역력했다.놀란 마음이 지나고 나자, 그들은 기쁨과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북당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서경을 위한 든든한 지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송석석은 이 장면을 보며 오히려 안심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원신제가 미리 그들에게 이를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협상에 참여하는 관리들에게는 알렸어야 하는데, 그녀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이제야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서로 양보하는 방향으로 가길 원했지만, 궁정의 문무 백관들 중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신복하는 북당 안풍친왕을 초대한 것이었다.이렇게 보니, 어제 원신제가 그녀와 시만자를 궁으로 부른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 말했던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여성의 과거 시험을 예로 든 것은, 그녀의 많은 결정들이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여기까지 분석을 마친 송석석은 점점 더 낙관적이게 되었다.궁중 연회가 끝난 후, 북당 사람들은 대접을 받으며 떠났다. 그들은 그 한 끼를 제외하고는 의견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으며, 단지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상국의 사절단도 일어나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모두가 돌아가서 협상 준비를 해야 했다. 수란키가 제공한 일정을 따르면, 이틀 후부터 협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황궁 별관에 돌아가자, 이덕회는 모두를 모아 앉히고 논의했다.사실상 또 다른 진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양보를 해야 한다면, 모두가 지도 위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황제가 이미 양보의 한계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를 하게 되면 돌아가기도 어렵고,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그래서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그저 지도만 바라보며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
이날 아침, 송석석 일행은 서경으로 출발했다.송석석은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돌아올 때 성릉관을 또 지나야 했기에, 이후에도 외조부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성릉관을 떠나자마자, 평탄한 길이 사라졌다. 여기저기가 다 울퉁불퉁했고 일부러 인위적으로 파괴한 곳도 있었기에 마차가 지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하지만 진왕은 절대 다시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안정을 취했지만 다리 안쪽의 쓸림 상태가 아직 심했기에 걸을 땐 괜찮아도 말에 타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때문에 성릉관에서 공을 세우고 육아당까지 설립한 진왕은 까탈스럽게 마차를 고집했고 마차가 도무지 지나갈 수 없는 곳은 현갑군이 말에서 내려 마차를 밀면서 힘겹게 전진했다.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현재 양국으로 통하는 길이 개방되었기에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산길밖에 없었다면 고귀한 진왕의 엉덩이가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그렇게 겨우 서경 지대에 진입하여 루벌로 향하자, 서경의 관원과 병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가는 길까지 호송해주었다.송석석 일행들 중에서 통역관을 제외하고는 서경에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 같은 변경 도시라고 해도, 루벌은 성릉관보다 훨씬 낙후했다. 여기저기에는 망가지고 훼손된 집채가 많았으며 행색이 누추한 거지나 근심이 많아 보이는 백성들도 많았다.송석석은 이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른 건 사실이지만 이곳까지 침투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전에 전북망과 이방이 이곳 마을을 공격했다고 해도 공격당한 그 마을만 피해를 받아야지 루벌 전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은 말이 안 되었다.루벌의 한 역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석석은 호송하고 있던 관원한테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수란석이 성릉관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후방 공급이 부족한 탓에 병사들이 루벌로 돌아와 약탈을 진행한 것이었다.수란석 당시의 상황이 빅토르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그때 당시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