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내려놓은 여준재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지금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하지만 보고받은 소식 때문에 기쁜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구 비서님이 해럴드한테 협박당하고 있습니다!”“어떻게 된 일이야?”여준재의 표정은 순간 진지해졌다.부하직원은 차마 숨기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했다.해럴드를 심문하던 구남준은 이 사람이 몸에 미니 총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생각 못 했던 것이다.그는 구남준이 경계심이 풀렸을 때 그에게 총을 겨누더니 풀어달라고 협박했다.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이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시키는 대로 하고 남준이 안전부터 확보해.”부하직원은 명을 받자마자 시킨 대로 했다.여준재도 시름이 안 놓이는지 따라갔다.하지만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어 여준재는 뉴욕에 있는 한 개인 별장에 도착했다.밖에는 수십 명의 부하직원이 별장을 지키고 있었다.여준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해럴드가 구남준에게 총을 겨누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별장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 위협적인 말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경고하는데, 좋기는 수작 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아니면 이 사람과 함께 죽을 거니까!”출혈 과다 때문인지 구남준의 얼굴은 아주 창백해 보였다.그는 별장 밖에 있는 여준재를 보고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오늘 있은 일은 입사하고부터 제일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하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잠시 후, 해럴드는 별장 입구까지 나왔다.자신이 요구한 대로 차 한 대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래도 경계심이 풀리지 않는지 턱으로 한 경호원을 짚더니 말했다.“빨리 시동 걸어. 차에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이 말을 들은 다른 경호원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여준재가 옆에서 걸어 나오더니 명령했다.“시킨 대로 해.”아까 그
해럴드는 어쩔 수 없이 시내 밖으로 달렸다.차에 GPS가 달려있었기 때문에 어떤 길로 가든 여준재와 그의 부하직원이 바짝 뒤따를 것이 분명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해럴드는 바닷가에 도착했다.재수 없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맞았다.얼마 운전하지도 않았는데 기름이 바닥나고 말았다.“젠장!”그는 욕설을 퍼붓더니 이를 꽉 깨물고 차에서 내리더니 뒤를 쫓는 자들을 피해 비틀거리면서 바닷가로 달렸다.바닷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사람들은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는 해럴드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차에서 내린 여준재는 비틀거리면서 인파 속으로 도망가는 해럴드를 발견했다.그는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잡아 와!”“네!”명받은 경호원들은 하나둘씩 바닷가로 달려갔다.뒤늦게 동일한 복장에 살기가 가득한 채 달려오는 경호원 무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차렸다.사람들은 뒤로 물러서면서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경호원들의 동태를 살폈다.여유적적 경호원들의 뒤를 따르던 여준재는 시선을 해럴드에게 고정했다.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야구모자를 눌러 쓴 한 남자가 피식 웃으면서 자신을 매섭게 쳐다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이 사람은 다름 아닌 원준이 고용한 세계랭킹 10위에 드는 킬러 울프였다.울프는 한 걸음 한 걸음 서서히 여준재에게 가까이 갔다.순식간에 여준재의 뒤에 나타난 그는 품에서 비수를 꺼내려고 했다.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마침내 여준재의 뒤에 바짝 붙은 그는 비수를 꺼내 여준재를 찌르려고 했다.이와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울프가 비수를 꺼내 여준재를 찌르려던 찰나 이를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여준재는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무의식적으로 뒤돌았다가 울프가 비수로 자신을 찌르려는 모습을 보았다.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울프의 손을 잡아 발로 차버렸다.하지만 울프도 세계랭킹 10위안에 드는 킬러였기 때문에 행동이 아주 민첩했다.이렇게 두 사람은 막상막하로 힘을 겨루고 있었다.
여준재의 대학 동창인 진 선생님의 이름은 진현준, 의학을 전공하여 지금은 외국에서 유명한 외과 의사였다.그는 지금 수술실에서 사력을 다해 친구를 살리고 있었다.“마취 완료.”“상처 처리 완료.”“지혈면 준비 완료.”“흉기를 빼자고.”냉정한 목소리와 함께 수술실에 있던 의사며 간호사며 바쁘게 움직였다.다행히도 무사히 여준재의 가슴에 박힌 비수를 뽑아냈다.상처 처리, 지혈, 봉합 등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수술이 막바지에 다가설 때쯤, 심장박동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큰일입니다. 환자 심장 박동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심장박동기를 지켜보던 간호사는 실성한 듯 소리를 질렀다.이때 운산 고씨 가문 아파트.약을 만들고 있던 고다정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가슴이 아파 났고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손에 쥐고 쥐고 있던 용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유리가 깨지는 쨍그랑 소리와 함께 다시 정신을 차렸다.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조각을 보면서 이상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기 맥을 짚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이상하네.”그녀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곧 잊어버리고 바닥을 청소한 뒤 다시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머나먼 곳에서 여준재가 생사가 오가고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진현준은 심장박동수가 떨어지고 있는 여준재의 신체 기관이 이름 모를 독소 때문에 이상이 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저 잠시 이 독소가 온몸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고 철저히 빼낼 수는 없었다.그렇게 새벽까지 진행된 열 몇 시간의 응급이 드디어 끝났다.복도 의자에 앉아있던 구남준은 입은 상처 때문에 피곤해 보였지만 병실로 돌아가 휴식할 생각을 하지 않고 가슴을 졸이면서 수술실 문만 빤히 쳐다보았다.진현준의 의술을 봐서는 특이 사항이 없는 이상 수술이 이렇게 오래 진행될 일이 없었다.구남준은 자신을 자책했다.만약 해럴드를 심사할 때 주의했었다면 협박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여준재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후회에 잠
그날 저녁, 고다정은 구남준의 연락을 받았다.“고 선생님, 대표님한테 사고가 발생했는데 고 선생님만이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무슨 일인데요?”당황한 고다정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었다.구남준은 간략하게 말했다.“대표님 습격을 당하셨는데 가슴에 꽂힌 비수에 이름 모를 독소가 묻혀있어 신체 기관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고 선생님께서도 대표님 상태가 짐작이 갈 것입니다. 병원에서는 해독제를 연구해 내려면 최소한 한 달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대로는 버텨내지 못할 것입니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짐을 챙겨서 가겠습니다.”고다정은 더는 묻지 않고 여준재를 살리겠다고 말했다.구남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헬리콥터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네. 알겠습니다.”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통화를 마쳤다.외국에서 인사불성이 된 여준재를 생각하면서 급히 약국을 벗어났다.“외할머니, 저 짐 좀 싸주세요. 너무 많이는 말고 갈아입을 수 있을 정도로만요. 저는 약재 챙기러 갈게요.”강말숙은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무슨 일 있어? 왜 갑자기 짐을 싸?”“준재 씨가 외국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중독으로 상태가 많이 안 좋대요. 지금 바로 가보려고요. 곧 저를 데리러 오는 사람들이 도착할 거예요.”고다정은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강말숙은 놀라고 말았다.더 묻고 싶었지만, 고다정의 다급한 뒷모습을 보고 꾹 참고 그녀를 위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고하준과 고하윤은 고다정의 말을 듣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방에서 뛰쳐나왔다.“엄마, 삼촌 다쳤어요? 정말이에요?”고다정은 고개를 돌렸다가 간절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고하준과 고하윤을 발견했다.곧 떠나야 했기 때문에 숨길 수도 없다는 생각에 바로 말했다.“맞아. 준재 삼촌 다쳐서 엄마 돌봐주러 가야 해. 엄마 없는 동안 외할머니 말을 잘 들어야 해. 알았지?”하지만 고하준과 고하윤이 이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엄마, 저희도 삼촌 보러가고 싶어요. 저희도
고다정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을 마중 나온 구남준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다른 이유가 아니라 얼굴이 아주 창백해보였기 때문이다. 온전히 의지로 버티고 있는모습이었다.“구 비서님, 살고 싶지 않으세요?”고다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구남준은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고 선생님이 안 오시면 시름이 안 놓여서요. 오셨으니 이제 안심이 되네요.”고다정은 이 말을 듣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여준재의 상태가 생각보다 많이 심각한 듯했다.이때, 고하준과 고하윤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삼촌, 어디 아파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아프면 쉬어야죠.”두 녀석의 말에 구남준은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는 부드럽게 녀석들을 바라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맞아. 엄마가 오셨으니 삼촌은 이제 쉴 수 있을 것 같아.”구남준은 고다정 모자 3인을 여준재의 병실로 안내했다.점점 멀어져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멍때리고 있던 진현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몇 분 뒤, 이들은 VIP 병실에 도착했다.들어가자마자 창백한 모습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온몸에 호스를 꽂은 채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여준재를 보았다.그녀의 가슴은 누군가에게 찢기는 듯이 아팠다.두 녀석은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못하는 여준재를 보고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삼촌, 저 엄마랑 오빠랑 삼촌 보러 왔어요.”고하윤은 침대에 바짝 붙어 발꿈치를 들면서 말했다.예전처럼 자신이 말하면 여준재가 부드럽게 바라봐 줄 것만 같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 봐도 대답하지도 않고 웃어주지도 않는 여준재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옆에서 지켜보던 고다정은 심정이 말이 아니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구 비서님, 요 며칠 준재 씨 주치의가 어느 분이셨어요? 준재 씨 상태를 확인해야해서요.”뒤를 따르던 진현준이 그녀의 말을 들었다.구남준이 소개하기도 전에
진현준의 목소리는 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지도 않았다.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구남준은 불쾌한지 미간을 찌푸렸다.고다정의 편을 들어주려고 할 때 누군가 먼저 선수 쳤다.“우리 엄마 엄청 대단한 사람이에요.”“꼭 삼촌을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두 녀석은 눈을 부릅뜨고 진현준을 쳐다보았다.진현준은 당황하더니 곧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삼촌?’“준재 아이가 아니었어요?”진현준은 멍하니 구남준을 쳐다보았다.두 녀석이 여준재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빼닮은 눈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구남준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목소리를 깔더니 말했다.“진 선생님, 대표님 개인적인 일이라 대표님이 깨어나시면 직접 물어보십시오. 지금은 고 선생님이 진맥할 수 있게 조용히 해주시기를 바랍니다.”진현준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구남준의 진지한 표정에 꾹 참았다.그는 고다정의 의술에 대해 별로 큰 기대는 없었다.비록 중의학을 접해보지 못했지만, 십 년 이십 년의 경력이 없이는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다정은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몇 분 정도의 진맥과 동공 및 입술을 확인한 후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여준재의 상태는 그녀가 생각했던 거보다 심각했지만 절망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선생님, 어떤가요? 살릴 수 있을까요?”구남준은 진맥을 마친 고다정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고다정은 그를 보더니 숨기지 않고 말했다.“살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신수 노인과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자신의 의술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로서의 여준재의 상태는 어떠한 실패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완벽을 추구하고 싶었다.구남준도 그녀가 조심스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얼마나 오래 상의해야 할까요?”“오래는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초보적으로 생각해 둔 치료 방법이 있긴 한데 어떤 약재를 쓸지 아직 더 고민해 봐야
몇 가지 약재를 수정한 후 드디어 최종 약 처방을 확정했다.이때 뉴욕은 야심한 밤이라 운산은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갈 때쯤이었다.통화를 하고있던 고다정은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이렇게 오래 통화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르신, 죄송해요.”“괜찮아. 너와 약재를 연구하면서 나도 배울 점이 많았어.”신수 노인이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그가 보았을 때 고다정은 비록 처방전을 쓰는 데는 미숙했지만, 약재 응용에서는 월등히 뛰어났다.이것이 바로 고대 한의학과 현대 한의학의 차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이 둘은 서로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고 통화를 마쳤다.핸드폰을 거두고 뒤돌아섰을 때 옆 소파에서 놀고 있던 두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방을 나섰다.장 집사는 밖에서 방안의 기척을 살피다 목소리가 들려오자 바로 1층 계단 입구로 걸어가 공손하게 물었다.“고 선생님, 일 다 보셨어요?”오후에 이미 구남준한테서 고다정의 신분을 듣고 미래의 사모님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그리고 고하준과 고하윤 역시 작은 도련님과 작은 아가씨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여준재에게 이렇게 큰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다정은 장 집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1층으로 내려온 고다정은 주위를 둘러보다 고요한 느낌에 물었다.“제 두 아이는요?”“작은 도련님과 아가씨는 이미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까 통화하실 때 배고프시다길래 저녁을 준비해 드렸습니다. 지금은 안방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장 집사는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더니 공손하게 물었다.“고 선생님, 배 안 고프세요? 주방에 남겨둔 음식이 있습니다.”고다정은 배를 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배고프네요.”배도 고팠고 피곤하기도 했다.열 몇 시간의 비행 끝에 휴식하지도 못하고 바로 병원에 달려갔기 때문이다.간단히 야식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 휴식했다.그리고 아주 깊이 잠들었다.계속 여준재의 상태가 걱정되어서인지 아침 일찍 깨났다....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잠에서
한순간 고다정은 마치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모든 의사들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침 몇 대와 탕약으로 어떻게 치료한다는 거예요? 무슨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만약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의 책임이에요?’“그러게, 우리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왈가부왈하는 소리에 고다정은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속에서 천불이 났다.이 사람들은 그녀의 치료 방법을 비판할 시간은 있어도 해독제를 연구해야겠다는 의지는 없었다.“그만 하세요!”고다정은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부드럽던 눈빛마저 예리해졌다.병실에 있던 의사들을 슥 둘러보더니 직설적으로 말했다.“제 치료 방법에 대해 불만이 있으시면 직접 치료해 보시던가요!”몇몇 의사들은 마치 목덜미가 잡힌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여준재와 오래 지내서인지 고다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 역시 위압감이 있었다.그녀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움찔해 날 수밖에 없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진현준은 구남준의 옆에 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형수님 성격 만만치 않은데요? 준재 감당할 수 있겠어요?”“고 선생님 성격 좋으신 분이에요. 자꾸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서이지 성격이 안 좋다고 말할 수 없죠.”구남준은 그를 불쾌하게 쳐다보더니 앞으로 다가가 고다정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여러분, 여러분도 환자에 대해 책임지려고 이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딱히 저희 대표님을 살릴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고 선생님의 치료 방법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어떠한 사고가 발생한다고 해도 이 병원과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임을 맹세합니다.”이런 말까지 나온 마당에 의사들은 딱히 반대하지도 않았다.진현준만은 그래도 여전히 고다정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놀라운 것은 구남준이 고다정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대표님 목숨을 저 사람한테 맡길 거예요?”“저는 고 선생님이 해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시도해 볼 수밖에 없잖아요. 이 기회를 놓치면 대표님이 버텨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