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십여 분이 지난 뒤였다.여준재는 다급히 병실 쪽으로 갔으나 허탕을 쳤다.구남준도 눈치채고는 다가오는 간호사를 붙잡고 물었다.“혹시 여기 있던 환자분은 어디 갔나요?”“강씨 할머니를 말씀하는 건가요?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가족들도 모두 그쪽에 있을 겁니다.”간호사는 사실대로 말했다.여준재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즉시 응급실로 달려갔다.그가 도착했을 때는 두 아이가 심해영 곁에서 울고 있었다. “우리 아기들, 엄마, 대체 무슨 일이에요?”“흑흑... 아빠...”두 아이는 여준재를 보자마자 눈물을 마구 쏟아냈다.그리고 그에게 달려와서는 더욱 슬피 울면서 겨우 말을 내뱉었다.“아빠, 어떤 사람이 와서 알려줬는데 우리 엄마는 배 속의 아이랑 같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대요. 사실이에요?”“으앙... 엄마, 죽지 마요... 돌아와요. 아빠, 빨리 엄마를 데리고 와요. 분명 아빠가 꼭 엄마를 데리고 온다고 했잖아요.”여준재는 두 아이가 슬피 우는 모습을 보더니 가슴 한쪽이 아려와 두 주먹을 꽉 쥐었다.그리고 어느새 두 눈이 빨개진 채 쪼그리고 앉더니 두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울지 마. 엄마는 실종되었을 뿐 죽은 게 아니야.”“그런데 아까 그 사람이 분명 엄마는 죽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엄마가 바다에 뛰어든 뒤 총에 맞은 동영상도 보여줬어요. 증조 외할머니는 그걸 보고 나서 충격받고 피를 토했던 거예요.”고하준은 눈물이 글썽해서 여준재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여준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 사람이 직접 두 아이와 할머니 쪽에 와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저 나쁜 사람이 엄마를 숨겼을 뿐이야.”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삭히며 최대한 다정하게 두 아이를 안심시켰다.두 아이는 코를 훌쩍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저희는 아빠를 믿어요.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엄마를 구해주
또 한 시간이 지나서야 강말숙은 겨우 의식이 돌아왔다.그동안 여준재는 강말숙을 계속 자극하며 입이 마를 때까지 말을 걸었다.성시원을 포함한 의사, 간호사들의 뒤를 따라 강말숙을 응급실 밖으로 내보냈다.그때 그의 귓가에 성시원의 경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수술실에서 한 말은 그냥 해본 말이어야 할 거야. 준이, 윤이를 막 대했다가 내가 널 가만두지 않아.”“...”여준재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일 없을 테니까요.”아까 했던 말들은 강말숙을 자극하기 위한 것일 뿐, 두 아이를 더없이 사랑하는 그가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나.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심해영은 곧바로 다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어르신은 괜찮으세요?”“고비는 넘겼지만 더 자극을 받았다간 신령님이 오셔도 구하기 힘들 겁니다.”주치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심해영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저녁 늦은 시간, 일행은 강말숙을 병동으로 데려다주었다.여준재는 성시원의 피곤한 표정을 살피며 정중하게 말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어르신. 많이 힘드셨을테니 돌아가서 쉬세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내가 강말숙 씨를 구한 건 다정이 외할머니이기 때문이야.”성시원은 거만하게 코웃음치면서도 쉬라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나이가 나이인 지라 몇 시간 동안의 응급조치로 인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그가 떠나고 여준재는 심해영에게도 돌아가서 쉬라고 말했다.하루 종일 조마조마하던 심해영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심해영은 여준재가 고다정에게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그러자 여준재가 이렇게 말했다.“오늘은 제가 여기서 지켜볼 테니 가서 좀 쉬었다가 내일 저랑 교대해요. 다정이는 부하들이 찾는 중이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이 말을 들은 심해영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곧 여준재는 병실에 혼자 남게 되
디카프리도는 자신과 주인이 여준재의 계략에 넘어간 것을 알면서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구남준이 몇 번이나 잔인한 형벌을 주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밤이 지나고 구남준은 마침내 심문을 끝냈다.그는 바닥에 쓰러져 겨우 숨을 헐떡이는 남자를 바라보며 옆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죽지 않게 잘 지켜봐.”“네!”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따랐다.이후 구남준은 거점을 떠나 병원으로 향했다.어제 밤새 여준재는 강말숙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고다정이 없으니 그녀 대신 그녀의 유일한 가족을 돌봐야 했다.하지만 자신도 몸이 불편한 터라 밤을 새우지는 않았다. 그저 얕은 잠을 자며 밤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결과 휴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간단히 씻고 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구남준이 다가왔다.“대표님.”“심문한 건 어떻게 됐어?”여준재는 구남준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남준은 솔직하게 말했다. “디카프리도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온갖 고문 방법을 다 써도 말을 안 합니다.”이 말을 듣고도 여준재는 놀라지 않았다.디카프리도는 유라의 가장 충성스러운 심복인만큼 그럴 만도 했다.이윽고 그가 물었다.“유라 쪽에서는 디카프리도가 사라진 걸 몰라? 아무런 움직임도 없어?”“아직까지 어떤 정보도 들리지 않는 걸 보아 아직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구남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여준재를 바라보며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여준재는 미간을 찌푸렸다.유라는 디카프리도를 할머니에게 보낸 것 외에는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이윽고 여준재는 여기가 유라의 본거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유라는 중요한 인질인 고다정을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그리하여 구남준에게 이렇게 명령했다.“디카프리도를 유라가 묵고 있는 호텔에 보내.”“대표님, 디카프리도를 풀어주라는 말씀이세요?”구남준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여준재를 바라봤다.여준
저녁 늦은 시간, 여준재는 강말숙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앉아 있는 강말숙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깨어나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괜찮아, 어젠 고마웠어.”강말숙은 여준재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어제 응급조치할 때는 혼수상태였지만 의식은 또렷했다.여준재가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버티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여준재 역시 강말숙이 고마워하는 이유를 잘 알았기에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돌아온 다정 씨가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했다고 원망할 테니까요.”“다정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강말숙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준재는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겁니다.”“아빠가 그렇다고 하니까 엄마는 꼭 올 거예요. 그러니까 할머니 건강해야 해요. 할머니가 아프면 엄마가 돌아와서 슬퍼할 거예요.”하준은 애늙은이처럼 강말숙을 위로했다.여준재도 고다정을 꼭 찾겠다고 약속하며 강말숙에게 몸조리를 잘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고다정이 돌아와서 그녀가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면 너무 슬퍼할 거라고 말했다.단지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말뿐일지라도 강말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말고 다정이 찾아. 나도 더 이상 쓸데없는 요행 안 바랄 테니까.”그렇게 며칠 동안 강말숙은 병원에서 치료받는 데 적극 협조했다.두 아이는 매일 심해영과 함께 병원에서 강말숙을 보살폈다.여준재는 밤에는 이쪽을 지키고 낮에는 몇 시간만 쉬면서 회사 일을 처리하는 동시에 구남준과 여명호를 시켜 유라를 성가시게 굴었다.하지만 그가 아무리 일을 만들어도 유라는 펄쩍 뛰며 화를 낼 뿐 고다정에게 가서 분풀이하지 않았다.유라는 여준재가 굴하지 않는 미친놈이라고만 생각했다.“젠장, 여준재는 대체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 거야!”호텔 방에서 유라는 부하들이 전해오는 악재를
유라의 마지막 말이 여준재의 마음을 움직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왼손을 오른손 위에 겹쳐 올렸다.유라는 그가 생각할 때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방해할 말을 하지 않았다.잠시 후 여준재는 결심한 듯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검은 눈동자로 유라를 바라보았다. “내 사람들이 해외에서 수색하고 있어. 너에 대한 의심을 풀고 싶으면 내 사람들이 네 구역에 들어가서 확인하게 해줘.”그가 떠올린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다.사실 고다정이 유라의 손에 없다면 그녀에게 시간을 쓰는 건 고다정을 찾는 것을 늦추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오히려 당황한 건 유라였다.여준재가 그런 제안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자신을 의심하는 여준재 때문에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던 그녀는 다른 꿍꿍이가 떠올랐다.“좋아. 내 영역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조건이 있어. 내 영역에서 고다정을 찾지 못하면 나한테 사과해.”“그래. 하지만 혹시라도 너희 쪽 사람들이 몰래 수상한 행동을 한다면 그때 가서 날 원망하지 마.”여준재는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곧 두 사람은 출발 시간을 합의했고, 고다정은 이 모든 것을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거의 보름 동안 구영진 별장에 갇혀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서둘러 탈출하지 않았다. 전에 어떻게 지냈든 이곳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는 고다정의 모습에 줄곧 그녀를 살피던 구영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이날 구영진은 결국 마음속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저택으로 찾아갔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한가롭게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고다정을 본 그는 입을 삐죽거리며 자신이 온 걸 알리려는 듯 헛기침했다.고다정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힐끗 바라보고는 구영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듯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구영진은 그녀의 태도에 무척 불쾌했다.“어이, 내가 여기 떡하니 서 있는데 안 보여?”“봤는데 말 섞기 싫
구영진이 떠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빼어난 분위기를 자랑하는 여자가 저택 밖에 도착했다.그녀는 초인종을 누르고는 옆으로 물러나 조용히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씨 아저씨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아가씨, 여긴 웬일이세요?”장씨 아저씨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잘 알았다. 사씨 가문의 큰아가씨, 사윤영이었다.동시에 그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예의상 사윤영을 저택 안으로 안내해야 하지만, 지금 저택에 살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니 안으로 데려가면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사윤영은 사장님과 사모님이 점찍어둔 도련님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으니까.사윤영도 그런 장씨 아저씨의 표정을 눈치챘지만 못 본 척하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구영진 씨 만나러 왔어요. 집에 있죠? 아까 오는 거 봤는데.”“그게... 도련님께서 돌아오시긴 했는데 조금 전에 가셨어요. 지금 가면 아마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장씨 아저씨는 사윤영이 도련님을 쫓아가기를 바라며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불행히도 그는 사윤영이 오늘 온 목적이 구영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사윤영이 무식해 보이는 구영진에게 정말로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특히 그녀의 주선으로 두 집안은 이미 결혼을 논의하고 있었다.그 결과 구영진이 해외에서 돌아온 뒤로 정략결혼은 흐지부지되었고, 게다가 구영진이 외국에서 여자까지 데려왔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였다.그리하여 사윤영은 두 집안의 결혼을 취소하게 만든 사람이 이 여자일 거라고 짐작했다.대체 어떤 여자기에 망나니 구영진을 휘어잡았는지도 무척 궁금했다.“쫓아갈 바엔 그냥 들어가서 기다릴게요.”사윤영은 말을 마치고 곧장 별장으로 들어갔다.장씨 아저씨는 옆에서 지켜보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도련님께 돌아오라고 연락해야겠다.’곧 사윤영이 거실로 들어왔고, 이때 고다정은 아직 방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아까 구영진이 돌아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
#사윤영이 고다정에게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고 있을 때, 밖에서 구영진이 황급히 뛰어 들어와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씩씩거리던 그는 사윤영을 노려보며 말했다.“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내가 안 왔으면 네가 아저씨 아줌마 몰래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사윤영은 구영진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대꾸했다.“네가 이러면 아저씨 아줌마한테 얼마나 성가신 일이 생기는지 알아?”“이건 내 집안일이야. 네가 참견할 필요 없어. 잔소리쟁이가 몇 년 만에 봐도 계속 남 일에 간섭하네.”구영진은 짜증스럽게 말하더니 이윽고 경고를 날렸다.“미리 말하는데, 저 여자가 여기 있다는 걸 어디 가서 말하지 마. 안 그러면 네 어릴 적 못생긴 사진 다 퍼뜨릴 거니까!”“...”이 순간 고다정과 사윤영 둘 다 할 말을 잃었다.사윤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퍼뜨리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나도 절대 이번 일 숨기지 않을 거니까!”말을 마친 그녀가 고다정을 바라보며 한결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오늘은 더 얘기 못하겠네요. 전 이만 돌아갈 테니까 나중에 시간 되면 다시 만나요.”“네, 조심히 가요.”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두 여자가 자신을 무시한 채 둘이서만 대화하자 구영진은 다가가 사윤영의 앞을 막아서며 위압적으로 말했다.“내 말대로 따르기 전까지 여기서 못 나가!”“나를 안 보내고 여기 남겨두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아? 내가 너 찾으러 여기 온 거 우리 엄마 아빠가 다 알거든.”사윤영은 전혀 가지 못할까 봐 두려운 기색 없이 당당하게 그를 노려보았다.구영진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그래서 뭐, 내가 너 못 봤다고 하면 그만이지.”이 말을 들은 사윤영은 크게 웃었다.고다정 역시 소파에 앉아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왜 웃어?”구영진은 사윤영의 예쁜 미소를 바라보며 살짝 흔들렸다.사윤영은 웃으며 말했다.“네가 뒷일 생각 못하고 이러는 게 웃겨서. 네가 날 못 봤다고 말해도
사윤영은 연락처를 받자마자 전화를 걸었고 빠르게 통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정중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사윤영도 예의 있게 물었다.“혹시 여 대표님인가요?”“죄송하지만 아닙니다. 저는 대표님 비서인데 누구시고, 왜 대표님을 찾으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구남준은 업무적인 태도로 말했다.사윤영은 다소 놀랐지만 금방 받아들였다.여준재는 그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비서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것으로 충분했다.사윤영은 잠시 딴생각에 잠겨있다가 전화를 건 목적을 얘기했다.“사실 제 친구가 대표님 약혼녀를 구했거든요.”“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구남준의 흥분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사윤영은 당황하며 다시 말했다.“제 친구가 대표님 약혼녀를 구하게 됐는데, 고다정 씨 상황이 좀 특별하고, 또 제 친구와 여 대표님이 과거에 원한이 좀 있었나 봐요. 그래서 친구가 바로 연락드리지 않았어요. 여 대표님께서 언제쯤 데리러 오실 수 있을까요?”이 말을 들은 구남준은 재빨리 말했다.“지금 대표님 찾으러 갈 테니 끊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는 차 키를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병원으로 향했다.사윤영은 전화를 끊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10분 정도 지나자 다소 흥분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재차 들려왔다.“여준재입니다. 제 약혼녀는 어디 있나요?”“여 대표님 안녕하세요. 고다정 씨는 지금 무릉에 있는 제 친구 집에 계세요. 혹시 7년 전에 레이싱 때문에 귀찮게 했던 구영진이라는 사람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기억합니다.”평소 기억력이 좋았던 여준재가 낮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사윤영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구영진이 제 친구인데 너무 모질게 대하진 말아 주세요. 워낙 애 같은 사람이고, 또 지금은 고다정 씨와 아이를 잘 돌봐주고 있어요.”솔직히 여준재는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약혼녀와 아이를 구한 것을 봐서 참으며 짙어진 눈빛으로 물었다.“정확한 주소를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