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윤영은 연락처를 받자마자 전화를 걸었고 빠르게 통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정중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사윤영도 예의 있게 물었다.“혹시 여 대표님인가요?”“죄송하지만 아닙니다. 저는 대표님 비서인데 누구시고, 왜 대표님을 찾으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구남준은 업무적인 태도로 말했다.사윤영은 다소 놀랐지만 금방 받아들였다.여준재는 그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비서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것으로 충분했다.사윤영은 잠시 딴생각에 잠겨있다가 전화를 건 목적을 얘기했다.“사실 제 친구가 대표님 약혼녀를 구했거든요.”“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구남준의 흥분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사윤영은 당황하며 다시 말했다.“제 친구가 대표님 약혼녀를 구하게 됐는데, 고다정 씨 상황이 좀 특별하고, 또 제 친구와 여 대표님이 과거에 원한이 좀 있었나 봐요. 그래서 친구가 바로 연락드리지 않았어요. 여 대표님께서 언제쯤 데리러 오실 수 있을까요?”이 말을 들은 구남준은 재빨리 말했다.“지금 대표님 찾으러 갈 테니 끊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는 차 키를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병원으로 향했다.사윤영은 전화를 끊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10분 정도 지나자 다소 흥분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재차 들려왔다.“여준재입니다. 제 약혼녀는 어디 있나요?”“여 대표님 안녕하세요. 고다정 씨는 지금 무릉에 있는 제 친구 집에 계세요. 혹시 7년 전에 레이싱 때문에 귀찮게 했던 구영진이라는 사람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기억합니다.”평소 기억력이 좋았던 여준재가 낮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사윤영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구영진이 제 친구인데 너무 모질게 대하진 말아 주세요. 워낙 애 같은 사람이고, 또 지금은 고다정 씨와 아이를 잘 돌봐주고 있어요.”솔직히 여준재는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약혼녀와 아이를 구한 것을 봐서 참으며 짙어진 눈빛으로 물었다.“정확한 주소를
“네, 기억을 잃었어요. 단지 사람들이 그쪽이 내 약혼자라고 하는 걸 들었어요.”고다정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제안했다.“저 찾으러 오신 거니까 들어와서 얘기해요. 아저씨, 저분들 거실로 좀 안내해 주세요. 옷 갈아입고 바로 내려갈게요.”“알겠습니다, 고다정 씨.”장씨 아저씨는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안내하는 제스처를 취했다.5분도 채 되지 않아 일행은 거실에 앉았다.고다정은 여준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조금 전 불빛이 없을 때도 이 남자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니 남자의 생김새가 제법 그녀의 취향이었다. 고다정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 침착하게 말했다.“소개 좀 해줄래요? 그리고 내가 왜 임신한 상태에서 총을 맞고 바다에 던져졌는지 그 사고에 대해 알려줄 수 있어요?”“그러죠.”여준재는 다가가서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난 한 달 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옆에 서 있던 구남준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모님을 살피며 속으로 한탄했다.‘기억을 잃은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대표님과 사모님에게 일어나다니.’“약혼자인 저 말고도 아이 둘이 있고, 외할머니도 계시는데 다정 씨가 실종되고 쓰러지셨어요. 하지만 다정 씨가 돌아가면 괜찮아지실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여준재는 고다정을 위로하는 말로 말을 마쳤다.고다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남자가 한 말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지만, 가슴에 와닿는 감정이 이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하지만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왜 우리는 아이가 둘이고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 합치면 셋이나 되는데 아직 미혼 관계인 거죠?”“말하자면 긴데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 짧고 굵게 알려줄게요.”여준재는 고다정의 질문에 전혀 놀라지 않고 첫 만남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진지하게 듣던 고다정은 그제야 자신이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보름 전에 결혼식을 올렸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여준재는
“...”구영진은 고다정이 그동안 가둬놓은 것에 대해 보복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옆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훤칠한 남자를 보며 이기지 못해도 세게 나가려 했으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의 의지와 달랐다.“그냥 농담한 거예요. 여 대표님도 괜찮으시죠? 그래도 내가 약혼녀 구해드렸잖아요. 그때 내가 잠수해서 우연히 만나지 않았으면 심하게 다친 채로 바다에서 죽었을 거예요.”“압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여기 무사히 서 있는 거죠.”여준재는 짙은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어쨌든 다정 씨와 내 아이를 구해줬으니 한 가지 부탁을 들어드리죠. 제 능력이 닿는 대로 최대한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이 말을 들은 구영진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짓다가 반짝이는 눈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정말입니까?”“네.”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듭 말했다.그러자 구영진은 잔뜩 들떠서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걸 말했다.“좋아요. 그럼 내 조건은 우리가 다시 한번 레이싱하는 겁니다. 그동안 계속 연습했어요. 이번엔 반드시,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길 겁니다!”멀지 않은 곳에서 잔뜩 흥분한 남자를 바라보며 여준재와 고다정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저 멍청한 남자가 바라는 게 고작 저런 것일 줄이야.’옆에 있던 구남준과 장씨 아저씨도 할 말을 잃었다.여준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진심입니까, 그게 다예요?”“난 진심이에요.”구영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여준재는 더 말하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시합 날짜는 저희 쪽 일이 끝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그 말에 구영진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계속 바쁘다고 나와의 약속을 미루는 건 아니겠죠?”“전 한 번 뱉은 말은 지킵니다. 시간 날 때 연락드리죠.”여준재는 말을 마치고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다정 씨 쉬어야 하니까 더 할 말 있으면 내일 다시 하세요.”구영진은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방에 들어선 여준재는 고다정을 조심
#남자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속으로 감동하며 무의식중에 이렇게 말했다.“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몸 상해요.”“알겠어요. 근데 지금은 다정 씨랑 떨어지기 싫어서 그랬어요.”여준재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고다정은 기억을 잃었어도 자신의 몸에 대한 걱정은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한편 고다정은 멍하니 넋을 잃고 남자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바라보았다.비록 여준재는 지금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은 변함없었고, 오히려 퇴폐미까지 더해져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여준재도 당연히 고다정의 눈빛을 알아차리고는 애정 가득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깨어났으니 일어날까요?”그렇게 말하며 그는 앞으로 다가가 고다정을 침대에서 일어나도록 도와주려 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고다정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상대가 자신의 약혼자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니 멍하니 보는 것도 당연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잘생기랬나.’여준재는 그런 고다정의 표정 변화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고, 기억을 잃고 난 뒤 고다정의 성격이 활발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간단히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는 장씨 아저씨가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구영진도 이미 일어난 뒤였다.사실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니었지만 여준재가 여기 있어 마음 놓고 잘 수 없었다.식탁 앞에서 알콩달콩한 두 사람을 보며 그는 속이 답답했다.‘이른 아침부터 꼭 솔로인 사람 괴롭게 해야 하나?’한 명은 기억을 잃었고 다른 한 명은 어제 막 찾아왔는데, 왜 하룻밤 사이에 둘이 부쩍 가까워진 것 같지?“그러고 보니 사람도 찾았는데 언제 갈 생각입니까?”구영진은 두 사람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었다. 괜히 이러다 부모님과 만나게 되면 설명하기도 난감했다.때가 되어 부모님이 고다정의 행방을 물으면 헤어졌다고 말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고다정과 여준재는 그런 그의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고
“저는 따지지 않겠지만 두 분께 아드님을 잘 단속하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네요. 또다시 이런 일을 벌였다가 막무가내인 사람한테 잘못 걸리면 구씨 가문에 엄청난 골칫거리가 생길지도 모릅니다.”구영진을 놀려보니 고다정이 왜 재미있어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특히 구영진의 다양한 표정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여준재의 이런 속내를 모르는 구민석 부부는 그의 말을 듣고 표정이 엄숙해졌다.특히 주혜원은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구영진을 덥석 잡아끌더니 사정없이 귀를 잡아당겼다.“이런 못된 놈을 봤나.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구나. 이런 일로 사람을 속이다니. 여 대표님과 고다정 씨가 문제 삼지 않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해?”“아, 엄마 살살해요. 아파요. 여 대표님과 고다정 씨도 계시는데 좀 체면을 살려주세요!”아파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구영진을 보며 고다정과 여준재는 폭소를 금치 못했다.이때 구민석도 옆에서 거들었다.“쌤통이야. 여 대표님과 고다정 씨가 계셔서 다행인 줄 알아. 아니면 나도 네 엄마랑 같이 때렸을 거야. 사고만 치는 자식!”여준재가 문제 삼지 않는다고 그들이 아무 표시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혼나고 난 구영진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온순해진 구영진을 바라보며 고다정은 미소를 지었다.“시간 나면 아주머니를 모시고 운산에 놀러 와요.”“그래. 시간 나면 꼭 갈게.”주혜원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어쩌다 아들을 후려잡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했더니 남의 약혼녀라니.‘짜증 나! 안 되겠어. 이 멍청한 자식을 더 패야지.’이를 모르는 고다정은 그날 오후 여준재를 따라 운산에 돌아갔다.헬기에서 내리니 이상철이 멀쩡한 고다정을 반갑게 맞았다.“작은 사모님, 끝내 돌아오셨네요.”“안녕하세요.”고다정이 방그레 웃으며 인사했다.당황한 이상철은 무심코 여준재를 쳐다보았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여준재는 숨기지 않고 고다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다정
쌍둥이가 눈물을 머금은 것을 본 고다정은 급히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왜 울어? 조금 전까지 멀쩡했잖아.”“저희는 괜찮아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쌍둥이가 흐느껴 울며 말했다.사실 그들은 오랜만에 돌아온 엄마가 이전과 달리 멀게 느껴졌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아기가 생겨서 그런 걸까?쌍둥이는 속으로 허튼 생각을 했다.그들의 속마음은 여준재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에 여준재가 급히 설명했다.“엄마가 기억을 잃어서 지금 누구도 기억 못한단다.”여준재가 왜 갑자기 이 말을 하는지 의아했던 고다정은 붉어진 쌍둥이의 눈시울을 보고 나서야 무슨 영문인지 알았다.“미안해. 나는 과거의 기억이 없어. 그래서 이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도 몰라. 상처받았다면 엄마가 용서를 빌게.”그녀는 겸연쩍은 눈빛으로 쌍둥이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사과했다.이 말에 쌍둥이와 강말숙, 심해영이 깜짝 놀랐다.“기억을 잃었다고?”“엄마가 기억을 잃었어요?”그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잠시 기억을 잃었습니다.”이때 여준재도 입을 열었다.“내일 다정 씨를 데리고 병원에 갈 거예요. 전면 검사를 받으려고 신경과 전문의를 예약했어요.”자기를 위한 일인 걸 아는 고다정은 반대하지 않았다.“엄마가 기억을 잃은 거였군요. 아기가 생겨서 우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앳된 얼굴로 고다정을 쳐다보았다.“엄마가 우리를 기억 못 하면 다시 자기소개 할게요. 엄마, 안녕하세요, 저는 엄마 딸 여하윤이에요. 원래 고하윤이었는데, 아빠를 찾은 후 개명했어요. 올해 6살이고요. 유치원 상급반을 다니고 있지만 독학으로 초등학교 4학년 과정까지 끝냈어요.”“초등학교 4학년?”고다정이 깜짝 놀라자, 하윤은 자랑스럽게 작은 가슴을 쫙 폈다.“이게 다 똑똑한 오빠 공로예요.”하준은 이 말을 듣고 동생을 힐끗 보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며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저는 하준이에
집에 돌아간 후 쌍둥이는 줄곧 고다정 옆에 붙어있었다.고다정이 또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다.애들이 불안에 떠는 것을 눈치챈 고다정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저녁에 나하고 같이 자지 않을래?”그녀가 초대장을 내밀자 쌍둥이는 반가운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들이 활짝 웃는 것을 보고 고다정은 잘한 일임을 알았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통수가 따가워 돌아보니 여준재가 언제 왔는지 그들의 뒤에 서서 억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여준재의 눈빛을 읽고 무슨 뜻인지 이해한 그녀는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왜요? 설마 제가 남지 말라고 하면 당신은 남지 않을 건가요?”그러고 보니 어제도 이 남자는 그녀가 잠들면 가겠다고 해놓고, 결국 온밤 그녀의 방에 머물렀다.“그건 달라요.”여준재는 고다정이 어젯밤 일을 얘기한다는 걸 안다.그가 스스로 남는 것과 초대되어 남는 것은 성질이 다르다.고다정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쌍둥이까지 그의 팔을 당기며 거들었다.“엄마, 아빠도 우리랑 같이 자게 해요. 우리 한 가족이 오랜만에 같이 자는 거잖아요.”“엄마가 없는 동안 아빠가 잘 쉬지 못해서 지병이 재발했어요. 스승 할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아빠는 앓아누웠을 거예요.”영리한 하준이 아빠 대신 감성팔이 했다.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꼬맹이의 말을 믿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신 아파요?”이 말을 들은 하준은 급히 아빠에게 연약한 척하라고 눈빛을 보냈다.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에 여준재는 꼬맹이 말에 따르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지병이 재발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나았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이 말을 들은 하준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아빠한테 약한 척하라고 힌트를 줬는데 아빠는 왜 모를까? 엄마가 지금 우리를 기억 못 하는데, 자꾸 애교를 부려서
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잠시 기억을 잃은 게 맞아.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임은미는 한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묘했다.이렇게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이 자기 절친에게 일어나다니.역시 드라마는 생활에서 나오는 것이었다.이때 채성휘와 여준재가 다가오더니 급히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은미 씨, 임신한 몸으로 이렇게 뛰면 안 돼요. 이러다가 넘어지면 어떡해요?”“다정 씨, 방금 왜 피하지 않았어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데, 부딪쳐서 당신과 아기가 다치면 어떡해요?”두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고다정과 임은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둘이 같이 임신하리라 생각지 못한 게 분명하다.뒤이어 고다정은 임은미의 성화에 못 이겨 기억상실 후 발생한 일들을 이야기했다.다 듣고 난 후 임은미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구영진이라는 사람 진짜 웃기네. 기회가 되면 이 대단한 인물을 만나보고 싶어. 여 대표님을 놀릴 생각을 하다니.”“확실히 재미있는 사람이야.”고다정이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 사이는 고다정의 기억상실 때문에 소원해지지 않았다.오히려 기억상실 후 고다정의 성격이 활발해져 사이가 더 좋아졌다.두 여자가 다른 남자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자 여준재와 채성휘는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그쪽 여자를 좀 단속해요. 우리 다정 씨가 나쁜 영향을 받잖아요.”여준재가 인상을 쓰며 채성휘를 노려보자, 채성휘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그쪽 약혼녀가 내 여자친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고요?”두 남자의 불꽃 튀는 접전을 지켜보던 쌍둥이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웃고 떠든 후, 일행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임은미도 같이 갔다.절친이 검사받는 데 같이 가고 싶기도 했고, 또 가는 김에 외할머니를 뵈려는 것이었다.강말숙은 그들이 온 후로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병실에는 강말숙 혼자가 아니라 성시원도 있었다.어제 다른 일 때문에 미처 돌아오지 못했던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