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누나 집 가요.”우리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애교 누나의 집으로 향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애교 누나는 다급히 내 벨트를 풀었다.하지만 하필이면 내 벨트가 그대로 걸려버리는 바람에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그러자 한참 동안 내 벨트를 풀던 애교 누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누나 왜 갑자기 울어요?”애교 누나는 흐느끼며 대답했다.“우리가 몇 번이나 하려고 했는데, 매번 할 때마다 방해받잖아요. 하느님도 우리 이런 일 못하게 막는 거 아니에요?”“하느님은 무슨. 전 그런 거 안 믿어요. 가서 가위 좀 가져다 줘요. 이딴 벨트 잘라버리면 그만이니까.”그 말에 애교 누나는 피식 웃었다.“그래요.”곧이어 애교 누나는 가위 하나를 가져왔고, 나는 아예 벨트를 잘라버렸다.“봐요. 이러면 됐잖아요.”애교 누나는 내 바지를 벌려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다음 순간, 나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이윽고 애교 누나는 내 바지를 벗기더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나 이제야 겨우 마음의 부담 없이 이 짓을 할 수 있게 됐네요. 수호 씨, 정말 우리 남편에 비하면 놀랍네요. 우리 남편은 이거 절반도 안 되고 생긴 것도 못생겼는데.”나는 피식 웃으며 비꼬았다.“애교 누나, 왕정민이 밖에서 만나는 애인은 대체 왕정민 어디가 마음에 들었을까요?”그러자 애교 누나도 피식 웃었다.“누가 알겠어요? 가정 형편이 안 좋은 집 여자겠죠. 그런 여자는 보통 남자 돈 보고 만나잖아요.”“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누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텐데 왕정민은 그러는 이유가 뭐래요?”“스릴을 원해서겠죠. 남자는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오래 보면 질리거든요. 나는 왕정민이랑 결혼한 지 7년도 넘었으니 진작 질렸을 테고.”“정말 인간도 아니에요.”나는 화가 나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랬더니 애교 누나가 내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됐어요. 왕정민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가 할 일이나 해요. 수호 씨, 나도 내가 여자라는 걸 느껴보고 싶어요. 그래
애교 누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네 머리를 끌어안고 세게 입을 맞췄다.“수호 씨, 이번 생에 수호 씨를 만난 게 너무 다행이에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애교 누나는 감동했는지 눈시울을 붉혔다.나는 그런 누나에게 입을 맞추고는 옷을 입었다.“저도 마찬가지예요.”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다 입은 나는 애교 누나를 바라봤다.“기다려요. 바로 돌아올게요.”애교 누나는 매력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얼굴은 아름다운 공주 같았다.“여보, 기다릴게요.”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쏜살같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근에 있는 편의점에서 콘돔 한 박스를 구매했다.그러고는 또다시 전속력으로 돌아와 열쇠로 문을 열었다. 집에 들어와 보니 애교 누나는 이미 거실에 앉아 있었다.누나를 본 순간 나는 곧장 달려가 애교 누나를 품에 안고 입을 맞췄다.“사 왔어요. 이제 시작해도 돼요.”그때, 애교 누나가 몸부림치며 나를 밀어냈다. 그걸 본 나는 당연히 애교 누나가 번복하는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어쩌다 찾아온 기회인데 애교 누나가 번복하게 할 수 없었다.나는 애교 누나를 꼭 끌어안고 누나의 입을 막았다. 그랬더니 애교 누나는 ‘읍읍’ 소리 내며 뭐라 말하는 듯하더니 결국 나를 밀어내고는 낮게 속삭였다.“화장실에 사람 있어요.”그 말에 놀란 나는 얼른 화장실 쪽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쪽에서 누군가가 움직였다.흐릿한 실루엣을 보니 샤워하고 있는 듯했는데, 단번에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혹시 제 형수님이에요?”나는 애써 놀란 가슴을 달랬다.‘정말 형수면 내 목소리 알아챈 건 아니겠지?’그때 애교 누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내 다른 친구예요.”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잔뜩 솟았던 흥이 이내 가라앉았다.애교 누나가 어렵게 나에게 허락했는데 결국 또 친구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되다니.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친구가 왜 하필 지금 온 대요? 여긴 왜 왔대요?”“남편이랑
남주 누나는 화가 난 듯 옷을 받아 들었다.“너 평소 집에 혼자 있잖아. 웬 남자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남주 누나가 안에서 옷을 입는 걸 보자 나는 난감하다는 듯 애교 누나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나라고 일부러 본 것도 아니니까.나는 애교 누나에게 다가가 누나더러 내 신발 끈을 풀어달라고 애교를 부렸다.그러자 애교 누나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혼자 해요. 친구가 보면 설명하기 어려우니까.”나는 애교 누나의 머리를 잡은 채 누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안 해줄래요? 안 해주면 계속 입 맞출 거예요.”한편 애교는 수호의 입맞춤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특히 친구가 화장실에서 언제든 나올 수 있다는 걸 생각하자 부끄럽고 긴장되었다.물론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이었다.하지만 왠지 이런 느낌이 너무 좋았다.“이젠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애교 누나는 웃으며나를 째려보더니 몸을 쪼그리고 내 신발 끈을 묶어주었다.나는 현관 의자에 앉아 손으로 애교 누나의 엉덩이를 주물렀다.그 느낌은 너무 좋았다.내 손에 애교 누나는 낮은 신음을 내뱉더니 눈도 점점 흐릿해졌다.“그만해요. 못 참겠으니까.”나는 씩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못 참겠으면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요.”“어떻게 해요? 친구가 여기 있는데.”애교 누나는 말하면서 화장실 쪽을 흘긋거렸다. 친구가 언제든 나올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친구가 있는데 하면 더 스릴 있지 않아요? 아니면...”나는 말하면서 애교 누나를 일으켜 세웠다.그런데 애교 누나는 의외로 거절하지 않고 내 품에 폭 안겨 나에게 키스했다.나는 그 기회를 틈타 애교 누나를 마구 주물러댔다.하지만 누나의 친구가 나오기 전에 얼른 떨어졌다.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주 누나는 나를 힘껏 째려보더니 이내 애교 누나에게 걸어갔다.“애교야, 왜 그래?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아, 아무것도 아니야. 집이 덥나 봐.애교 누나는 찔리는 듯 대답하고는 나를 한번 째
‘아무리 커도 그쪽 가슴보다는 안 크거든요.’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남주 누나의 가슴은 한눈에 봐도 약 D컵 정도 돼 보였다.‘이렇게 큰 가슴은 처음 보는데 눈을 크게 뜨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나는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지만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수호 씨, 얼른 사과해요.”“미안해요, 남주 누나. 아까는 고의가 아니었어요.”남주 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애교 누나가 웃으며 말했다.“남주야, 수호 씨 마사지 솜씨 엄청 좋은데 너도 시도해 볼래?”“싫어.”“해 봐. 너 자꾸만 어깨 아프다며? 수호 씨더러 마사지해달라고 하면 풀릴지도 모르잖아.”애교 누나는 남주 누나를 소파에 앉히고는 나더러 안마하라고 재촉했다.결국 나는 고분고분 그 옆으로 다가가 남주 누나의 어깨를 확인해 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결론을 얻었다.“평소에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고, 운동도 안 하죠?”그 말에 남주 누나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어떻게 알았어요?”“견갑근이 튀어나온 걸 보면 오십견이 오려는 증상이에요.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테이블 앞에 앉아 있어 어깨가 한쪽이 높고 한쪽이 낮아요.”“의외로 주가 꽤 있네요?”남주 누나는 그제야 조금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그럼 와서 나 좀 주물러 저요. 좀 개선할 수 있는지 봐 봐요.”나는 남주 누나더러 등져 앉으라고 하고는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아, 아파!”그런데 남주 누나가 아픈지 꽥꽥 소리 지르자 나는 힘을 조금 뺐다.“오십견이 좀 심한 것 같아요. 이런 건 자주 주물러 줘야지 안 그러면 목디스크가 생길 수 있어요.”“그 정도라고? 나 겁주는 거 아니죠?”“제가 왜 겁주겠어요?”나는 말하면서 남주 누나의 등을 따라 척주를 만졌다.“여기 혹시 자주 아프지 않나요?”내 말에 남주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여기가 척추인데 지금은 그나마 가벼운 증상이라 괜찮지만 엄중하면 척추가 변형될 수도 있어요.”“헐,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 얼른 마사지해 줘요.”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두 사람이 몰래 뒤에서 이렇게 하는 게 재밌었으니까.“남주 누나, 지금 장난하는 거죠? 장난이겠죠.”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 연기했다.그때 남주 누나가 갑자기 나를 꼬집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맞아요. 장난이었어요.”남주 누나는 싱긋 눈웃음을 치며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 가늘고 예쁜 손으로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나 지금 허리가 무척 아픈데, 침실로 가서 주물러 줄래요?”나는 순간 흥분되어 미칠 지경이었다.‘남주 누나가 이렇게 화끈한 스타일이었다니.’하지만 여전히 신중하게 행동했다.“어떻게 그래요? 이따가 애교 누나가 침실로 들어와 보면 어떡해요?”“누가 뭐 하자고 했나? 그냥 허리 좀 주물러달라고 한 건데, 무서워할 거 뭐 있어요?”“그... 그래요.”나는 남주 누나를 따라 객실로 향했다.그러자 남주 누나가 얼른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웠다.남주 누나의 몸매는 매우 좋았고 피부도 백옥 같았다.두 다리는 늘씬하고 가는 건 아니었지만 아주 예뻤고, 새하얀 발은 작고 귀여웠다.“자, 허리 주물러 봐요.”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남주 누나의 곁에 앉았다.애교 누나를 안기 전에 애교 누나의 친구를 만질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나는 손을 남주 누나의 허리에 살포시 얹었다.남주 누나의 허리는 가늘지 않지만 매우 나른해 마치 뼈가 없는 듯했다.그러다 내가 주무르자 남주 누나는 일부러 신음을 내는 바람에 내 마음은 간질거렸다.“남주 누나, 소리 내지 않으면 안 돼요?”“왜요? 소리 내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해요?”“아니. 누나 소리가 너무 매혹적이라...”남주 누나는 내 그곳을 흘긋 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아하, 불편하구나. 도와줄까요?”그건 내가 간절히 바라던 바다.“그럼 올라와요.”“정말요?”“헛소리 그만하고 얼른.”남주 누나가 말하면서 나를 잡아끄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남주 누나 위로 엎드렸다.“정말 도와줄 거예요?”“그럼요.”
“남주 누나, 쉿!”나는 다급히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남주 누나를 막았다.그도 그럴 게, 이렇게 높은 소리를 내면 아무리 음악을 틀어도 소리를 가릴 수 없으니까.“나라고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러나? 참지 못하겠는데 어떡해요? 수호 씨, 얼른요. 나 참지 못하겠어요.”나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감히 용기내지 못했다.이토록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나는 얼른 베개 위에 펴져 있던 베갯잇을 들어 남주 누나 입에 넣었다.이렇게 하면 소리를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그러고는 이내 남주 누나를 공략했다.남주 누나는 아주 민감했는데, 손이 닿을 때마다 몸을 뱀처럼 움직였다.게다가 아무리 베갯잇으로 입을 막았다 해도 자꾸만 매혹적인 목소리를 냈다.나는 한편으로 들킬까 봐 무서우면서 짜릿하기도 해 남주 누나를 얼른 공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남주야, 수호 씨랑 뭐 하는 거야?”“남주 누나, 어떡해요. 애교 누나가 발견했어요.”나는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남주 누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마지못해 내가 직접 남주 누나의 옷을 정리해 주고 있을 때, 애교 누나가 점점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었다.“수호 씨, 남주 왜 저래요?”애교 누나는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남주 누나를 보더니 물었다.나는 너무 찔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때, 남주 누나가 입을 열었다.“애교야, 수호 씨 정말 끝내주는데? 내 허리 주물러줬는데 너무 시원해서 갈뻔했어.”“넌 부끄러움도 없어?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해?”애교 누나는 얼른 달려와 남주 누나의 옷을 정리했다.“수호 씨는 아직 어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남주 누나는 씩 웃었다.“아직 어리니까 짜릿한 거지.”“쉿. 계속 말할래?”애교 누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나가라는 눈빛을 보냈다.나는 결국 아쉬워하며 나갈 수밖에 없었다.‘남주 누나 정
“너무 성실하고 얌전해서 탈이지. 할 줄 아는 게 고작 자세 몇 개라 지겨워. 너도 알잖아, 나 성욕 강한 거. 나한테는 너무 부족하다고.”“그래도 남편한테 미안한 짓 하면 안 되잖아.”“내가 언제 미안한 짓 했다고 그래? 이혼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아이 가지고 남편한테 키우라고 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내가 밖에서 남자 안 만나 이렇게 계속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이혼하게 될 거잖아.”애교는 못 말린다는 듯 남주를 째려봤다.“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그만하자. 아무튼 조심해. 네 남편 모르게 하고.”“알았어.”두 사람이 침실에서 나왔을 때, 나는 이미 형수와 통화가 끝났다.“애교 누나, 형수님이 돌아오라고 해요.”“그래요, 가 봐요.”“네.”나는 아쉬운 듯 애교 누나와 작별했다.사실 나는 조금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도 그럴 게, 오늘 왕정민이 나와 단독으로 약속 잡기로 했다고 형수한테 들었으니까.난 그 사람과 사적으로 만나도 싶지 않다.하지만 형과 형수를 봐서 참을 수밖에 없다.집에 돌아오니 형수가 특별히 양복 세트를 준비해 주었다.“수호 씨, 이 양복 어울리는지 입어 봐요.”“형수, 왜 갑자기 양복은 입어요?”양복을 봤더니 심지어 유명 브랜드라 가격도 꽤 나갔다.그때 형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제 곧 한의원에 면접 보러 가잖아요. 그래서 새 옷 한 벌 준비해 봤어요.”“한의원 면접이요? 없는데?”“수호 씨 정말 바보네요. 수호 씨 형이 왕정민한테 부탁했는데 왕정민이 동의했어요. 이제 좀 있으면 인턴으로 들어가게 해준대요.”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다.솔직히 강북 한의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건 한의학과를 졸업한 학생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다.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지금 이 순간, 나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다.내가 이렇게 하면 정말 왕정민과 한패가 되는 것이니까.때문에 나는 딱 잘라 말했다.“형수, 저 안 가면 안 돼요?”“왜요?”“제 능력으로 일자리 찾고 싶어요.”내
“제가 일해서 돈 벌면 형수 예쁜 옷 사줄게요.”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동안 형수와 형이 나한테 너무 잘해줘 보답하고 싶었으니까.그랬더니 형수는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그래요. 기대할게요.”나는 준비를 마친 뒤 형수와 함께 집을 나섰다.형수는 곧장 한의원으로 향하며 왕정민에게 전화했다.위층에 있으니 바로 올라오라는 왕정민의 말에 형수는 나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무실 앞에 도착했더니 밖에 부원장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왕정민은 바로 안에서 부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왕정민이 한의원 원장과도 아는 사이라니.’왕정민은 우리가 들어온 걸 보자 손을 흔들었다.그러자 형수는 나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부원장, 이 애가 내가 말했던 정수호야. 아직 어려 보여도 한의학에 아주 빠삭해.”왕정민이 부원장한테 나를 소개하는 걸 보자 나는 형수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형수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왕정민 옆에 가 낮은 소리로 몇 마디 했다.그랬더니 왕정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그래요. 그럼 우선 혼자 면접 보게 하고 안 되면 다시 연락해요.”“그럴게요.”“부원장님, 그럼 두 분 얘기 나누세요.”형수는 두 사람과 작별하고는 나를 데리고 사무실을 나섰다.“이미 말해뒀어요. 우선 혼자 면접 보고 통과하지 못하면 그때 도와주겠데요.”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문제없을 거예요. 저 학과 수석이거든요.”형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우리는 곧장 한의과에 도착했다.한의과에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커다란 창구에 고작 몇 명의 연세 있는 어르신들만 앉아 있었다.그에 반해 서의과 쪽 창구는 환자들로 가득 붐볐다.보아하니 이름은 한의원이라고 하나 실상은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한의과 진료실은 고작 하나뿐이었는데, 아주 외진 곳에 있었다.이건 병원을 탓할 수 없다. 그저 요즘 대부분 사람들이 서의를 더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나라에서 지원하는 큰 병원도 이런데 작은 진료소는 더 말할 것도 없
윤미화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막았지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막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방을 한 칸 한 칸 수색하다가 결국 내가 숨어 있는 방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나를 잡았다.그러고는 곧장 나를 8층 808호실로 끌고 갔다.놈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기뻤다.내 계획이 성공했으니 말이다.서윤기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내가 말했잖아. 발버둥 치지 말라.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내가 전에 사람 잘못 봤네. 서윤기 당신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눈에 돈밖에 없는 인간이었어.”나는 서윤기를 비아냥거렸다.그러자 서윤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돈 버는 게 나빠? 뭐 문제 있어? 난 상인이야. 상인이 돈 벌지 않고 설마 사람을 구할까?”“아무리 돈을 벌고 싶어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약재 가격을 높이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안 좋은 약재와 좋은 약재를 섞어서 팔고 가짜 약재로 진짜 약재를 바꿔치기 할 수 있어? 이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이건 내가 가장 참지 못할 부분이다.약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약재상이 질이 안 좋은 약재를 섞어 팔고 가짜 약재로 수만 채운다면, 약은 제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그때 서윤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정 사장이랑 같이 일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약재를 가장 싼 가격에 팔았어. 그렇게 매일 개처럼 일했는데 결국엔 고작 몇 푼밖에 못 벌었다고.”“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번 돈이 동종업자들이 1년 동안 번 것보다 적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놀리고 비꼬아 댔는지 알아? 병에 걸린 환자들도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의사한테 고마워하지, 누가 약재상한테 고마워해?”“양쪽에서 모두 찬밥 신세 당하면서 내가 왜 남 좋은 일만 해야 하는데? 내가 정 사장과 협력하지 않은 이후로 한 달에 얼마씩 버는 줄 알아?”“4억 가까이 돼. 전에는 1년에도 이 정도 못 벌었어. 매달 4억이면
그 행동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뭐 하는 거예요?”서윤기는 라이터를 의서에 가까이 가져갔다.“호텔 에어컨이 좀 춥지 않아요? 우리 따뜻하게 해요.”나는 다급히 의서를 빼앗았다.“미쳤어요? 의서에 얼마나 많은 난치병 치료 방법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걸 태우면 사람들의 희망을 태우는 거나 다름없어요.”서윤기는 라이터를 내려놓고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난 장사꾼이지 의사가 아니에요.”“이...”나는 전에 서윤기가 유순하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이 사람도 그저 돈만 밝히는 악덕 상인이라는 걸 알았다.나뿐만 아니라 정 사장님도 그동안 서윤기에게 깜빡 속았다.손에 든 의서를 그대로 포기하자니 나는 너무 아쉬웠다.이건 할아버지의 심혈이다. 의서 한 권을 집필하려고 우리 정씨 가문이 대대로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 이 의서를 건지려면 서윤기와 손을 잡아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내 마음은 너무 복잡했다.그때 문득 대담한 생각이 떠올라 나는 의서를 챙긴 뒤 이를 악물고 밖으로 도망쳤다.하지만 얼마 못 가 호텔 직원이 내 뒤를 따라붙었다.어쩐지 내가 의서를 갖고 도망쳐도 서윤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했더니 호텔 안팎에 이미 서윤기의 사람이 가득했다.나는 절대 잡히면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죽을 듯이 도망쳤다. 호텔 직원이 쫓아오면 그 사람을 발로 차고 때리면서 의서를 꼭 지켜내려고 아등바등했다.그와 동시에 나는 윤미화에게 전화했다.“지금 어디 있어요?”[호텔이지. 무슨 일인데?]“지금 누가 절 죽이려고 해요. 윤 사장님이 좀 도와줘요.”나는 도망치면서 되도록 일을 심각하게 설명했다. 그건 윤미화가 빨리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헉.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몇 층이야?]“8층에서 내려가는 중이에요.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쫓아와요”나는 신속히 내 상황을 설명했다.그러자 윤미화는 잠깐 생각하더
서윤기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하긴, 서윤기 같은 사장한테 몇천만 원은 돈도 아니다.만약 서윤기가 거래할 마음이 없다면 내가 모든 재산을 준다고 해도 절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하지만 이렇게 포기하려니 내키지 않아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의서를 저한테 팔 건데요?”“이 의서는 나한테 필요해서 안 판다고 했을 텐데요.”서윤기는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나는 계속 서윤기에게 끌려가기만 했다.“서 사장님은 그 의서로 저와 거래할 생각이죠?”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그러자 서윤기가 담담하게 웃으며 자기 잔에 와인을 따랐다.그 동작은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충분히 증명했다.하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서윤기를 보니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강북 한약 상회 일이라면 전 결정권이 없어요. 정 사장님도 이미 건강을 회복했으니 상회 일은 사장님이 다시 맡고 있으니까요.”나는 먼저 내 생각을 내비쳤다.그제야 서윤기는 손에 든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돈은 나도 많아요. 돈 벌 루트가 필요한 거지. 하지만 난 내 파트너한테는 항상 관대하거든요. 파트너들과 함께 돈 버는 것도 좋아하고요.”서윤기는 애매모호하게 말을 흐렸지만 나는 단번에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서윤기는 내가 자신과 손을 잡으면 의서를 바로 주겠다는 뜻이었다.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서윤기를 바라봤다.“전 이제 상회 일도 관여하지 않는데 저랑 손잡아서 서 사장님한테 무슨 이득이 있죠?”“수호 씨가 상회 일에 관여하지 않지만 정 사장과 사이가 좋은 건 상회 사람들이 다 알고 있죠. 수호 씨가 나서면 정 사장의 뜻을 대변할 수 있을 거예요.”‘이 너구리 같은 인간이 이걸 노린 거였네.’나는 이제야 서윤기의 속내를 완전히 알았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다면 실망하시겠네요. 저는 정 사장님께 미안한 일은 안 해요.”서윤기는 의서를 꺼내 테이블 위
“아, 네. 들어와 앉았다 갈래요?”“그러죠.”서윤기는 사실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지만 나는 냉큼 기회를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방금 봤던 여자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만 실수하면 속살이 다 노출될 지경이었다.여자는 이런 상황과 장소가 매우 익숙한 듯했다.그때 서윤기가 여자에게 돈을 한 웅큼을 던져주며 나가라는 눈치를 주자 여자는 아무 말없이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엉덩이를 흔들며 방을 나갔다.서윤기는 그제야 나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주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수호 씨는 강북에서 생활하지 않아요? 설마 호텔에서 지내요?”나는 서윤기가 나를 찔러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도 이제 사업하는 사람이니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호텔에 머무는 건 불가피한 일이에요. 집에 가는 게 오히려 더 어렵다니까요. 그런데 이곳에서 서 사장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큰 사업을 하는 사장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가끔 재미를 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나도 아예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아니다.서윤기는 내 말에 허허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하지만 몇 분만 더 일찍 왔더라면 큰일 났을 거예요.”‘늙은 여우 같은 것.’서윤기가 상회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으면 내가 끌려다닐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윤기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내가 결국 먼저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만 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서 사장님, 전에 조천석 사장님한테서 의서를 구매하셨죠?”“조천석? 어디 보자... 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이 하도 많아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네.’나는 결국 직접적으로 힌트를 줬다.“강북 경진당 사장 조천석 말이에요. 책 이름이 ‘고의문’인데 기억나시나요?”내가 이 정도로 알기 쉽게 말했는데 계속 모
현성과 민우는 내가 혼자인 게 시름이 놓이지 않고 걱정되어 돌아온 거엿다.무엇보다 내가 이번에 건드린 사람은 임천호다. 바로 그 S시 전체를 주름잡고 수많은 용병을 거느리고 있는 효웅이라 불리는 남자 말이다.우리는 그런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봤지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다.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우리 같은 새내기한테 그런 사람은 닿을 수도 없고 두려운 존재다.하지만 현성과 민우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 곁에 있기로 했다.이건 단지 감동이라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목숨을 나눈 우정과도 같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천수백 마디로도 우리의 우정을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나는 방 두 개를 현성과 민우에게 내어주고 혼자 거실에 누워 속으로 감탄했다.이 순간 흥분과 감동, 두려움과 무서움이 한데 섞여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하지만 이렇듯 신맛이 났다 단맛이 났다 쓴맛이 났다 매운맛이 나는 이런 과정이 바로 성장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우리 셋은 함께 천수당에 출근했다.나는 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으려고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10시가 넘었을 때쯤 윤미화가 서윤기의 행방을 찾았다며 전화해 왔다.“어디 있는데요?”[샹젤리호텔. 내가 지금 마침 그곳에 가봐야 하니까 먼저 가서 확인해 볼게.]그 말을 들으니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뭐 하러 가는데요?”[고객이 거기서 기다려. 설마 내가 수호 씨랑 같이 가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했어?]나는 순간 머쓱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 오해한 건 미안해요.”나는 윤미화를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자각하고 다급히 사과했다.그러자 윤미화가 웃으며 말했다.[말만으로 미안하다면 다야? 실제 행동을 보여줘야지.]“사장님, 우리 한 식구 아니었어요? 뭐 하러 조목조목 다 따져요? 거리감 들게.”[누가 한 식구라는 거야?]“아니에요? 우리 탐정 사무소는 한 가족 아
“하지만 우리 언니 병 반드시 고쳐야 해.”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그러자 서지예는 다급히 나를 막아섰다.“뭐 하자는 거지?”“지예 씨 언니는 마음에 병이 있어요. 제가 심리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무조건 낫게 한다고 장담하겠어요?”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다.서지예도 자신의 요구가 좀 지나치다는 걸 알았는지 한발 물러섰다.“그럼 우리 언니랑 대화 많이 하면서 설득해 봐. 더 이상 죽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이제야 말이 되네요.”하지만 이것도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나는 한의학을 전공했지 심리학을 전공한 게 아니다. 더욱이 심리학 의사도 아니라 어떻게 서나연을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서지예는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떠나기 전에 특별히 몸에 좋은 약재를 몇 가지 사갔다.그렇게 하루를 바삐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저녁 7시가 넘었다.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는 온종일 의미 없는 일만 한 것 같다. 다행히 민우와 현성은 뭐라 하지 않았지만.그날 저녁, 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며 S시에 다녀온 일을 얘기했다.그때를 떠올리니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임천호 때문에 몇천만 원 손해 본 것도 모자라 앞으로 다른 사람한테까지 영향이 미칠지 모르겠어.”그 말에 현성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무서울 게 뭐 있어? 분명 해결 방법이 있을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우리랑 같이 이겨내면 되지.”민우도 내 어깨를 두드렸다.“걱정하지 마. 우리는 너랑 같이 일하기로 했으니 절대 널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두 사람의 감동적인 말에 나는 갑자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민우와 현성이 옆에 있으니 확실히 마음이 편해졌다.“너희밖에 없다. 자, 짠하자.”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그러던 그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내가 가게에 있으면 임천호는 절대 우리 가게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난 가게 나가는 횟수를 줄일 테니까
“마음 가는 대로 얘기해도 내용이 있을 거 아니야. 어떤 내용으로 대화했는데?”서지예는 끈질기게 추궁했다.하지만 한참을 생각해도 나는 그날 대화 내용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별것도 아닌 얘기를 내가 어떻게 기억해요?”결국 마음이 조급해진 서지예는 무의식적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잘 좀 생각해 봐. 나한테는 중요한 거란 말이야. 우리 언니 평소 남들과 얘기 안 해. 내가 뭘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한다고.”“그런데 길게 대화했다는 건 진짜 놀라운 일이야. 정수호, 아니면 네가 우리 언니 좀 봐줄래?”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서씨 가문이 S시에서 어떤 가문인데요. 돈 있고 권력 있는 집안에서 설마 의사 하나 찾지 못하겠어요? 날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라면 포기해요.”나는 흙탕물 싸움에 끼어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게다가 임천호가 만약 그 일을 알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거다.그때 서지예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우리 언니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두고 볼 거야? 의사라며? 사람 살리는 게 의사의 본분 아니야?”“전 의사지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 구해줄 수는 없잖아요.”나는 이내 반박했다.그러자 서지예가 나를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그런데 이미 알면서 구하지 않으면 의사 자격 없는 거지.”“지예 씨도 의사면서 왜 본인이 구하지 않아요?”‘그리고 말은 왜 또 이렇게 듣기 거북하게 한담?’서지예는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내가 할 수 있으면 이렇게 널 찾아와서 입 아프게 설득하겠어?”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서지예는 이내 말을 이었다.“우리 언니를 치료해주면 내가 큰 고객 많이 소개해 줄게.”만약 서지예가 돈을 준다고 했으면 난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큰 고객을 소개해 준다고 하니 내 마음은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내가 필요한 건 인맥이지 눈앞에 보이는 돈이 아니었다.서지예는 서씨 가문 둘째 딸이고
나는 속으로 오늘 왜 이토록 재수 없는지 한탄했지만 결국 서지예를 따라나섰다.밖에 나오자마자 서지예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봤다.“너 S시에 다녀왔어?”“네.”“뭐 하러 갔는데?”“돈 받으러 갔어요.”“거짓말. S시에서 우리 언니 만났잖아.”“지예 씨 언니를 만난 거랑 돈 받으러 간 거랑 모순되지 않잖아요.”나는 사실을 말했지만 서지예는 나를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를 뚫어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흥. 누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우리 언니에 대해 조사하러 갔겠지.”나는 너무 억울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제가 왜 지예 씨 언니를 조사해요?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요.”“너랑은 상관없지만 소여정과 상관있잖아. 솔직히 말해, 소여정이 우리 언니를 조사하라고 했지?”서지예의 엉뚱한 생각에 나는 화가 나 헛웃음이 나왔다.“증거 있어요? 소여정 씨가 저더러 지예 씨 언니 조사하라고 한 증거 있냐고요? 있으면 꺼내고 없으면 좀 가요.”나는 상대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그러자 서지예는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나도 증거가 없으니까 따지러 왔잖아. 하지만 증거를 찾으면 그땐 죽을 줄 알아.”“우리 언니가 임천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나 해? 소여정이 자기를 조사하라고 했다는 걸 언니가 알면 죽으려고 할 거야.”서예지는 어찌나 걱정됐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서예지가 언니의 안위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서나연의 상태를 떠올리니 확실히 안타까웠다. 귀하게 자랐을 부잣집 아가씨가 남자 하나 때문에 죽으려고 하다니.그때를 떠올리니 내 태도도 서서히 누그러졌다.“임천호는 지예 씨 언니를 사랑하지 않아요. 동생이면 언니가 그런 남자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걸 내버려두지 말고 포기하게 설득해야죠.”“말이 쉽지. 너 같은 사람은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 없지? 너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봐, 놓겠다고 쉽게 놓아지나.”서예지는 여전히 언니 편을 들었다.역시나 친자매 아니랄까
서윤기의 행방을 찾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인지한 나는 윤미화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탐정 사무소로 향했다.윤미화는 강북에 돌아온 뒤로 계속 잠을 보충하다가 내가 찾아오니 그제야 나른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얇은 잠옷 바람에 나를 맞이하는 윤미화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윤 사장님, 이미지 좀 생각하면 안 돼요?”윤미화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다른 애들 다 일하러 나갔어. 여기 수호 씨뿐이야. 전에 못 봤던 것도 아닌데, 조심할 게 뭐 있어?”“그래도 조심해야죠. 사장님이잖아요.”나는 여전히 귀띔했다.그제야 윤미화는 대충 외투를 몸에 걸쳤다.“그래. 알았어.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저 대신 사람 좀 조사해 줘요.”나는 곧바로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그 말에 윤미화는 눈이 커다래졌다.“뭐야? 나 사장이야. 직원이 사장한테 일 시킨다고?”“돈 낼게요.”“누가 돈 달래? 안 해. 얼른 나가.”윤미화는 손을 휘휘 저었다.이에 나는 싱긋 웃으며 윤미화 곁에 앉았다.“윤 사장님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분 아니잖아요. 항상 말만 독하게 하지 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거 알아요. 제발 도와줘요. 이 사람 저한테 정말 중요해요.”“흥. 난 돈에 매수당할 사람 아니야. 돈으로 날 매수하려 했다면 날 정말 얕잡아봤어.”나는 다급히 물었다.“그럼 뭘 원하는데요? 뭐든 말해요. 할 수 있는 거면 무조건 할게요.”“다리 좀 두드려 봐. 다리 아파.”“네.”나는 얼른 윤미화의 다리를 두드렸다.“이 정도 강도면 괜찮아요?”윤미화는 눈을 감고 빙그레 웃으며 마사지를 즐겼다.“좋네. 딱 좋아. 역시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다르네.”“그럼 아까 일은...”“아, 다리가 또 아프네.”나는 윤미화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리를 두드렸다.그러자 윤미화는 아예 나를 시종 취급하면서 차를 따르게 했다가 음식을 사 오게 했다가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켰다.그렇게 약 2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