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성실하고 얌전해서 탈이지. 할 줄 아는 게 고작 자세 몇 개라 지겨워. 너도 알잖아, 나 성욕 강한 거. 나한테는 너무 부족하다고.”“그래도 남편한테 미안한 짓 하면 안 되잖아.”“내가 언제 미안한 짓 했다고 그래? 이혼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아이 가지고 남편한테 키우라고 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내가 밖에서 남자 안 만나 이렇게 계속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이혼하게 될 거잖아.”애교는 못 말린다는 듯 남주를 째려봤다.“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그만하자. 아무튼 조심해. 네 남편 모르게 하고.”“알았어.”두 사람이 침실에서 나왔을 때, 나는 이미 형수와 통화가 끝났다.“애교 누나, 형수님이 돌아오라고 해요.”“그래요, 가 봐요.”“네.”나는 아쉬운 듯 애교 누나와 작별했다.사실 나는 조금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도 그럴 게, 오늘 왕정민이 나와 단독으로 약속 잡기로 했다고 형수한테 들었으니까.난 그 사람과 사적으로 만나도 싶지 않다.하지만 형과 형수를 봐서 참을 수밖에 없다.집에 돌아오니 형수가 특별히 양복 세트를 준비해 주었다.“수호 씨, 이 양복 어울리는지 입어 봐요.”“형수, 왜 갑자기 양복은 입어요?”양복을 봤더니 심지어 유명 브랜드라 가격도 꽤 나갔다.그때 형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제 곧 한의원에 면접 보러 가잖아요. 그래서 새 옷 한 벌 준비해 봤어요.”“한의원 면접이요? 없는데?”“수호 씨 정말 바보네요. 수호 씨 형이 왕정민한테 부탁했는데 왕정민이 동의했어요. 이제 좀 있으면 인턴으로 들어가게 해준대요.”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다.솔직히 강북 한의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건 한의학과를 졸업한 학생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다.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지금 이 순간, 나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다.내가 이렇게 하면 정말 왕정민과 한패가 되는 것이니까.때문에 나는 딱 잘라 말했다.“형수, 저 안 가면 안 돼요?”“왜요?”“제 능력으로 일자리 찾고 싶어요.”내
“제가 일해서 돈 벌면 형수 예쁜 옷 사줄게요.”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동안 형수와 형이 나한테 너무 잘해줘 보답하고 싶었으니까.그랬더니 형수는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그래요. 기대할게요.”나는 준비를 마친 뒤 형수와 함께 집을 나섰다.형수는 곧장 한의원으로 향하며 왕정민에게 전화했다.위층에 있으니 바로 올라오라는 왕정민의 말에 형수는 나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무실 앞에 도착했더니 밖에 부원장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왕정민은 바로 안에서 부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왕정민이 한의원 원장과도 아는 사이라니.’왕정민은 우리가 들어온 걸 보자 손을 흔들었다.그러자 형수는 나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부원장, 이 애가 내가 말했던 정수호야. 아직 어려 보여도 한의학에 아주 빠삭해.”왕정민이 부원장한테 나를 소개하는 걸 보자 나는 형수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형수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왕정민 옆에 가 낮은 소리로 몇 마디 했다.그랬더니 왕정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그래요. 그럼 우선 혼자 면접 보게 하고 안 되면 다시 연락해요.”“그럴게요.”“부원장님, 그럼 두 분 얘기 나누세요.”형수는 두 사람과 작별하고는 나를 데리고 사무실을 나섰다.“이미 말해뒀어요. 우선 혼자 면접 보고 통과하지 못하면 그때 도와주겠데요.”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문제없을 거예요. 저 학과 수석이거든요.”형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우리는 곧장 한의과에 도착했다.한의과에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커다란 창구에 고작 몇 명의 연세 있는 어르신들만 앉아 있었다.그에 반해 서의과 쪽 창구는 환자들로 가득 붐볐다.보아하니 이름은 한의원이라고 하나 실상은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한의과 진료실은 고작 하나뿐이었는데, 아주 외진 곳에 있었다.이건 병원을 탓할 수 없다. 그저 요즘 대부분 사람들이 서의를 더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나라에서 지원하는 큰 병원도 이런데 작은 진료소는 더 말할 것도 없
형수가 내 옷을 정리해 준 뒤, 나는 면접 볼 자료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한의과에는 의사도 적어 한의사 한 분이 직접 면접을 봤다.그분은 60살이 넘는 영감이었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나는 예의 있게 먼저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면접 보러 왔습니다.”영감은 콧등에 안경을 얹더니 고개를 숙여 나를 흘긋 봤다.“앉아요.”나는 그분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내가 준비한 자료와 내 졸업증을 건넸다.하지만 영감이 먼저 손을 뻗어 나를 막았다.“잠깐. 우선 하나만 물을게요. 혹시 다른 사람 소개로 왔어요?”나는 할 수 없이 손을 뒤로 뺐다.“아니요, 인터넷에서 공고를 보고 면접 보러 왔습니다.”“아, 그럼 어느 학교 학생인가?”“강원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수석 졸업입니다.”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영감은 싱긋 웃었다.“그럼 대단하군.”나는 영감이 나를 칭찬하는 거라고 생각해 겸손하게 말했다.“아닙니다. 워낙 한의학을 좋아하다 보니 한의사가 되는 게 꿈입니다.”“음, 포부도 남다르네. 좋아요. 면접은 끝났으니 통지 기다려요.”“다른 시험은 하지 않습니까?”“필요 없으니 가요.”나는 넋을 잃은 채 밖으로 나왔다.그러자 형수가 다급히 달려와 물었다.“어떻게 됐어요? 성공했어요?”“성공한 것 같아요. 저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럼 통과했다고 말했어요? 출근은 언제부터래요?”하지만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형수는 이상했는지 또 물었다.“그럼 뭐라고 말했는데요?”“통지 기다리라고 했어요.”“전화번호는 남겼어요?”나는 또 고개를 저었다.그랬더니 형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전화번호도 안 남겼는데 어떻게 통지해요? 얼렁뚱땅 넘어간 거잖아요.”형수의 말에 나는 그제야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걸 알아챘다.그때, 또 다른 사람이 면접 보러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굳게 닫히지 않는 걸 보자마자 나는 문에 바싹 기대 대화를 엿들었다.그 영감은 상대
늙은 한의사는 내가 다시 들어오는 걸 보자 언짢은 듯 말했다.“전화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왜 또 들어왔어요?”나는 너무 불쾌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제가 전화번호도 안 남겼는데 어떻게 통지하려고요?”내 말에 한의사는 할 말이 없었는지 되려 버럭 화를 냈다.“자네는 우리 병원과 안 맞네. 나가!”그 말을 들으니 나는 더 화가 났다.“저는 강원대학 한의과대학을 졸업했어요, 아까 그 이름 모르는 지방대 졸업한 학생보다 몇 배는 낫지 않나요? 그런데 저 사람은 되고, 왜 저는 안 돼요?”한의사도 내 말에 제대로 열이 뻗쳤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안 되면 안 되는 거자. 뭐 말이 그렇게 많아? 당장 나가!”“안 나가요. 면접 다시 보러 왔어요.”“글쎄 자격 없다니까, 나가!”“자격 있어요. 저 진 부원장님 알아요.”부원장이라는 말에 한의사는 표정이 이내 바뀌었다.그리고 마침 그때, 테이블에 있던 전화가 울려 전화를 받더니 태도가 180도로 변했다.“네, 부원장님. 네네... 이미 도착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한의사는 허허 웃으며 사람 좋은 얼굴을 했다.“진 원장님과 아는 사이였다면 진작 말하지.”“제가 부원장님 언급하지 않은 건 제 능력으로 이 일자리 차지하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하다니.”상대는 내 말에 난감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젊은이가 이상이 있는 건 좋은 일이지만 현실을 알아야지. 이제 면접 통과했으니 내일부터 출근하게. 내일 또 여기로 오면 되네, 내가 일자리 마련해 줄 테니. 바로 내 직속 제자로 받아주겠네. 어떤가?”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랬더니 그 한의사가 다시 말했다.“싫다면 약국에서 약 처방이나 할 수밖에 없지 뭐. 그런데 일주일에 약 몇 번 처방하지도 못할 거네.”그런 건 당연히 싫었다.물론 눈앞의 이 늙은 한의사가 싫었지만 이름만 걸어 두고 놀고먹기만 하는 것은 더 싫었기에 나는 결국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이건 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왕정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앉아 있었다.왕정민이 나를 도와주고, 나보다 나이도 많으니 이것까지는 괜찮았지만, 이거에서 끝나지 않고 나를 교육하는 어조로 말했다.“수호야, 남에게 술 따를 때는 잔을 채워야지. 이렇게 채우지 않는 거 아주 무례한 거야.”그 말을 들으니 왕정민이 더 싫어졌다.그때 형수가 옆에서 웃으며 설명했다.“수호 씨가 이제 막 사회에 나와서 경험이 없으니 많이 가르쳐 줘요.”그러면서 내가 따른 술잔에 술을 채웠다.나는 마지못해 왕정민에게 사과했다.“정민 형, 아까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과드릴게요.”“뭐 잘못하고 말고가 아니라 그냥 귀띔하는 거야. 앉아.”나는 묵묵히 술 한 잔을 비웠다.“나더러 일자리 먼저 안배하라고 해서 약속 지켰는데, 나한테 약속했던 일은 언제 할 수 있죠?”그때 왕정민이 갑자기 하는 말에 형수가 대답했다.“그래도 진도 많이 나갔으니 얼마 지나지 않으면 될 거예요.”“조금만 서둘러요. 오래 기다려줄 수 없으니까.”왕정민은 나한테만 차가운 게 아니라 형수한테도 차갑게 대했다.‘이치대로라면 형이 왕정민 친구이니 친구의 아내한테 존중해야 맞는 거 아닌가?’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왕정민의 눈길이 자꾸만 형수의 가슴을 향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이내 시선을 거두고 전화하러 갔다는 거다.그 덕에 나도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다.“형수, 저 사람 왜 저렇게 짜증 나요?”내가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자 형수는 웃으며 말했다.“사업 잘되고 잘 나가는 사장이니 갑질하는 거죠. 마침 갔으니 우리끼리 천천히 먹어요. 이거 대충 해도 60만 정도는 되는데, 안 먹으면 낭비잖아요.”‘하긴.’나와 형수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여기 술도 있어요. 한 병에 20만 원이니 우리 다 마셔요.”‘그건 좀 위험하지 않나? 취하면 어쩌려고?’내가 분명 속으로 말했는데 형수는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취하는 게 낭비하는 것보다는 낫죠.
“뭐 진심이고 아니고가 있어요? 난 그냥 아이 갖고 싶은 거라고요.”형수는 내 팔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내가 수호 씨 형과 결혼할 때 사실 아이를 가졌었는데, 그때 수호 씨 형이 일자리도 불안정하고 아이를 낳으면 키울 수 없을 것 같다고 지우라고 했거든요. 이건 분명 그때 그 아이를 지워 벌받은 거라고요.”형수는 몹시 서럽게 울었다. 심지어 그 슬픔이 나한테까지 전해져 나는 형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형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형 아직 병원에서 검사도 안 받아 봤잖아요. 우선 검사부터 받아보게 해요.”형수는 씁쓸하게 웃었다.“희박해요. 수호 씨 형 젊었을 때도 정자가 적었는데 이제 이렇게 됐으니 더 말할 것도 없어요.”만약 형 몸이 계속 그 상태였다면 확실히 치료하기 어렵다.때문에 나는 애써 형수를 위로했다.“형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형과 상의해 봐요. 정 안 되면 그때 다른 방법 찾아보고요.”“동성 씨, 나 사실 당신 탓한 적 없어. 그런데 나도 여자라 남자의 손길이 필요하다고.”형수는 나를 안으며 갑자기 형의 이름을 불렀다.형수가 술에 취해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형수, 쉬세요.”때문에 나는 형수를 얼른 눕혔다.하지만 형수가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더니 갑자기 입을 맞췄다.“동성 씨, 나 동성 씨 사랑해. 우리 오랫동안 하지 않았잖아. 이번 한 번만 나 만족시켜 주면 안 돼?”코를 찌르는 듯한 술 냄새가 덮쳐왔지만 형수 입술의 온기가 전해지자 나도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결국 참지 못한 나는 형수의 허리를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하지만 마지막까지 가려고 할 때 겨우 멈췄다.형수는 지금 취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상황에서 내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게다가 형수한테는 이미 형이 있기에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깨어나서 나를 탓할까 봐 무서웠다.나는 너무 아쉬워 형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형수, 미안해요. 내가 또 마음대로 했네요, 탓하지 마세요.
일찍 일어나 의자에 앉아 게임 하고 있던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형수 취해서 잠들었어요. 핸드폰도 몇 번이나 울렸는데 모르고 자더라고요.”“누구 전화였어요?”“애교 누나요. 제가 대신 받았어요. 애교 누나한테 최남주라는 친구가 있는데 우리가 나오기 전에 그 누나가 애교 누나 집에 갔었거든요. 그래서 저녁 준비하지 말고 같이 밖에서 먹자고 해요.”“뭐예요? 혹시 최남주도 만났어요?”“네, 왜요?”“걔가 무슨 짓 안 했죠?”나는 너무 당황했지만 진실을 말할 수 없어 뻔뻔하게 거짓말했다.“아무 짓도 안 했어요. 마침 형수가 전화해서 몇 마디 못 했어요. 그런데 왜 그래요? 그 여자 무서워요?”형수는 나한테 손짓하더니 자기 옆자리를 툭툭 내리쳤다.그러고는 내가 형수 옆에 앉자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최남주 아주 굶주린 유부녀예요. 수호 씨 형도 꼬셨다니까요. 그런데 수호 씨처럼 젊고 멋있는 남자를 보면 분명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형수는 남주 누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큰둥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남주 누나가 보통 여자가 아닌 걸 알았지만 형한테까지 손을 내밀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형수와 애교 누나가 절친이니 남주 누나와 형수도 친구인데, 어떻게 친구 남편을 꼬실 수 있지?’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형수, 걱정하지 마요. 무조건 거리 둘게요. 그런데 애교 누나는 어떡해요? 아직도 우리 전화 기다릴 텐데.”“내가 전화해서 못 간다고 할게요.”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애교 누나한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와 형수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어, 애교야... 남주도 왔어? 둘이 식사해. 난 안 갈게. 뭐? 수호만 보내라고?”“내가 좀 뻐근해서 수호 씨한테 마사지 받으려고 그러는데.”“그래. 그럼 이따 나도 같이 갈게.”다시 말을 바꾸는 형수를 보자 나는 어리둥절했다.“형수, 아까는 안 간다면서요?”형수는 그 말에 난감한 듯 대답했다.“애교가 그러는데 오늘 남주가 쏜대요. 해산물로. 남주는 부자라 한턱
세 사람이 모두 잔을 들고 축하해주니 나는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다.형제자매도 없이 혼자커온 지라 항상 누나가 있었으면 했었다.누나는 나를 지켜주기도 할 거고, 다정하기도 하니까.그런데 한꺼번에 누나 셋이나 생겨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마워요.”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수호 씨,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선물할게요.”애교 누나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남주 누나가 이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얼씨구, 해가 서쪽에서 뜨려고 그러나? 애교가 먼저 나서서 남자한테 선물도 다 주고.”애교 누나는 그 말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목소리 좀 낮춰. 사람들 다 듣잖아.”남주 누나는 애교 누나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야, 너 솔직히 말해봐. 너 수호 씨한테 딴맘 있지?”“무슨 헛소리야? 난 수호 씨 남동생으로밖에 생각 안 해.”“동생? 정말 순수한 남동생 맞아?”공공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야한 농담을 하는 남주 누나 때문에 애교 누나는 얼굴이 빨개졌다.이윽고 남주 누나의 팔을 꼬집었다.“목소리 낮춰. 사람들 많은데 부끄럽지도 않아?”남주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왜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저 사람들은 안 들으면 되잖아. 안 그래? 태연아?”내 옆에 앉아 있던 형수는 남주 누나의 말에 호응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나한테 묻지 마. 나도 너랑 다른 부류니까.”남주 누나는 아무도 제 편을 들어주지 않자 갑자기 어깨를 움직이며 애교를 부렸다.그때마다 흔들리는 가슴을 보니 속옷을 안 입은 게 틀림없었다.‘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 보기가 다 민망하네.’“태연아, 설마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내가 뭐 네 남편 꼬신 것도 아니고, 살짝 장난 좀 친 거 가지고.”애교 누나는 그 일을 몰랐는지 놀란 듯 물었다.“꼬셨다니? 너 동성 씨한테 무슨 짓 했어?”남주 누나는 그 말에 입을 삐죽거렸다. “별거 아니야. 지난 번에 네 남편이 우리 데리
나는 윤지은이 그동안 나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다. 가끔 외로울 때 나를 찾아 외로움을 달래는 것 외에는 아무 감정이 없다고 여겼다.때문에 윤지은이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그래서인지 이 순간 나는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현실적인 느낌과 비현실적인 느낌이 한데 섞여 나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윤미화가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거 봐. 내 말 맞지? 지은 씨가 수호 씨를 좋아한다니까.”“윤 사장님도, 지은 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아 되물었다.그러자 윤미화는 화가 난 듯 나를 째려봤다.“더 사람이 하는 대화 못 들었어? 또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믿기지 않아서요. 제가 전에 지은 씨한테 고백했는데 아주 대차게 차였거든요.”“우리 평소에 만나면 항상 다투기만 해요. 누구도 서로 양보하지 않아요. 게다가 연인끼리 하는 달콤한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고, 서로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 적도 없어요.”“너무 사랑하면 미워지고 너무 미워하면 사랑한다는 거 몰라?”윤미화는 아주 철학적인 말을 했다.나는 그 말을 한참 곱씹었다.“확실히 일리가 있네요.”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는 너무 기쁘다. 그러면 윤지은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뜻이니까.하지만 한편으로 골치 아팠다. 나한테 이미 애교 누나가 있기에 나는 윤지은을 책임질 수 없고 사랑을 받아줄 수도 없다.윤미화는 마치 내 뱃속에 들어왔다 나온 것처럼 농담조로 말했다.“평생 결혼하지 마. 그러면 부담 없잖아.”“어떻게 그래요?”“안 될 거 뭐 있어? 결혼은 종잇장으로 한 약속에 불과해. 누구한테 잘해주고 싶으면 그런 게 없이도 잘해줄 수 있잖아. 요즘 연애만 하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 많아. 난 그것도 괜찮다고 봐.”‘대체 뭐라는 거지?’나는 그 정도로 개방적이진 않다.나는 우선 마음을 가다듬었다.
강한나는 윤지은 옆에 앉으며 물었다.“다리는 왜 그래?”“별거 아니야.”강한나는 장소도 개의치 않고 윤지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윤지은의 종아리는 벌겋게 부어오른 데다 물집까지 잡혔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둬? 그리고 이렇게 됐으면 병원부터 가지 왜 여기까지 달려와서 저 사람 일에 신경 쓰는 건데? 너 미쳤어?”강한나는 윤지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윤지은은 남자에게 희망을 걸 사람이 절대 아니고, 남자를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을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그런데 윤지은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었다.강한나는 문득 눈앞의 윤지은이 자기가 알던 그 윤지은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괜찮은 줄 알았어.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어.”윤지은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그녀도 다리에 흉터가 남을까 봐 걱정됐다.“안돼. 너무 아파. 얼른 병원 데려다줘.”강한나는 화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어 윤지은을 업고 일어났다.“못 말려 정말. 여자는 역시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니까.”윤지은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그런 거 아니야. 허튼 생각 하지 마. 정말 실수로 이런 거야.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어.”“알았다. 알았어. 해명할 거 없어. 그럴수록 오히려 뭘 숨기려는 것 같으니까.”강한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윤지은이 떠난 뒤 윤미화만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약 30분 뒤, 나는 풀려났다. 하지만 윤미화만 보여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지은 씨는요?”“몰랐어?”“뭘요?”“다리에 화상을 입어 물집까지 잡혔는데 수호 씨를 돕겠다고 달려온 거였어. 방금 경찰 친구가 병원에 데려갔어.”윤지은이 화상을 입다니. 어쩐지 방금 절뚝거린다 했는데.그 정도로 화상을 입었다면 절대 가볍지 않다.게다가 여자는 누구나 예쁜 걸 좋아하니 흉터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게 먼저일 텐데, 윤지은은 상처를 치료하러 가지 않고 먼저 나를 찾아왔다.나는 윤미화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어
윤지은은 마음이 초조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때문에 실수로 컵라면을 엎어 뜨거운 물이 다리 위로 흘러내렸다.윤미화는 아파서 찬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대충 찬물로 덴 곳을 헹구고 얼른 옷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무슨 일인데요? 상세하게 말해 봐요.”윤미화는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했다.이윽고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에게 연락했고, 경찰서에 인맥이 있던 강한나가 인맥을 통해 말을 해둔 덕에 윤지은과 윤미화는 곧바로 나를 찾아왔다.“윤지은? 여긴 어쩐 일이에요?”평소 혼잣말 할 때 이름만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이름이 튀어나왔다.윤지은은 절뚝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윤지은이 걷는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했다.“다리는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야.”윤지은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의자를 당겨 그 위에 앉았다.“일은 대충 들었어. 하지만 상대가 절대 합의는 안 해주겠다고 하네. 정말 의서를 돌려줄 생각 없어?”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절대 안 내놔요. 내놓으면 끝이에요. 그건 제 할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에요.”“그럼 강도죄가 성립되어 감옥살이해야 해.”윤지은이 강조했다.나는 복역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윤지은은 고개를 저었다.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어쨌든 그 의서는 절대 내놓을 수 없어요.”“봐요. 내 말 맞죠? 참 융통성이 없다니까요.”윤미화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그때 윤지은도 나를 날카롭게 째려봤다.“융통성도 없고 멍청하기도 하네요.”“내 상황을 보고도 욕이 나와요?”‘참 동정심도 없다니까.’윤미화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죽어도 뜻을 안 꺾겠다고 버티는 거야? 이게 뭔지 봐 봐.”윤미화는 새 책 하나를 나한테 건넸다.너무 궁금한 나머지 몇 장 펼쳐 본 순간 나는 눈이 커다래졌다.“이, 이건 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서 내용이잖아요.”‘왜 인쇄되어 있지?’할아버지가 남긴 의서는
“고집 한 번 세네. 아주 정호섭과 똑같아. 좋아. 그럼 나도 쓸데없는 말 하지 않을게.”서윤기는 손을 휙 저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직원이 내 몸을 더듬었다.“서 사장님, 없어요.”서윤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봤다.“의서를 숨겼어?“그건 원래부터 우리 집 의서였어.”“그런데 지금은 내 거야. 네놈이 내 물건을 빼앗았으니 내가 신고하면 넌 감방행이야.”“정수호,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 나랑 손잡으면 의서 건은 책임을 묻지 않고 큰돈을 만지게 해줄게.”나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아무리 돈이 좋아도, 난 깨끗한 돈만 취급해. 양심을 팔아 돈 버는 일은 안 해.”“좋아. 그럼 신고하지.”30분 뒤, 경찰 몇 명이 현장에 도착했고 호텔 CCTV에 찍힌 바람에 나는 잡아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결국 경찰들에게 잡혀갔다.내가 잡혀가는 걸 보자 윤미화는 다급히 달려와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의서는 찾았어요?”나는 가장 걱정되는 것부터 물었다.그러자 윤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찾아서 챙겼어. 그런데 왜 잡혀가는 거야?”“그 약재상이 신고했어요. 의서를 내놓지 않는다고 잡혀가는 중이고요.”“의서가 뭐라고 주면 될 거 아니야.”“안 돼요. 그건 할아버지가 저한테 남겨준 거라 절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면 안 돼요. 서윤기는 악덕 상인이라 그 책을 망가뜨릴 거예요.”나는 그 의서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그럼 나도 구해줄 수 없어.”나는 윤미화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다. 때문에 이 일도 솔직히 윤미화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서윤기의 인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경찰들은 나를 경찰서에 데려간 뒤 서둘러 심문하지 않고 취조실에 계속 가두었다.이건 분명 절차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서윤기의 체면을 봐서 일부러 이러는 거다.안에 갇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윤미화가 나를 꺼내주기만을 기다렸다.윤미화는 강북
윤미화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막았지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막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방을 한 칸 한 칸 수색하다가 결국 내가 숨어 있는 방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나를 잡았다.그러고는 곧장 나를 8층 808호실로 끌고 갔다.놈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기뻤다.내 계획이 성공했으니 말이다.서윤기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내가 말했잖아. 발버둥 치지 말라.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내가 전에 사람 잘못 봤네. 서윤기 당신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눈에 돈밖에 없는 인간이었어.”나는 서윤기를 비아냥거렸다.그러자 서윤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돈 버는 게 나빠? 뭐 문제 있어? 난 상인이야. 상인이 돈 벌지 않고 설마 사람을 구할까?”“아무리 돈을 벌고 싶어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약재 가격을 높이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안 좋은 약재와 좋은 약재를 섞어서 팔고 가짜 약재로 진짜 약재를 바꿔치기 할 수 있어? 이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이건 내가 가장 참지 못할 부분이다.약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약재상이 질이 안 좋은 약재를 섞어 팔고 가짜 약재로 수만 채운다면, 약은 제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그때 서윤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정 사장이랑 같이 일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약재를 가장 싼 가격에 팔았어. 그렇게 매일 개처럼 일했는데 결국엔 고작 몇 푼밖에 못 벌었다고.”“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번 돈이 동종업자들이 1년 동안 번 것보다 적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놀리고 비꼬아 댔는지 알아? 병에 걸린 환자들도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의사한테 고마워하지, 누가 약재상한테 고마워해?”“양쪽에서 모두 찬밥 신세 당하면서 내가 왜 남 좋은 일만 해야 하는데? 내가 정 사장과 협력하지 않은 이후로 한 달에 얼마씩 버는 줄 알아?”“4억 가까이 돼. 전에는 1년에도 이 정도 못 벌었어. 매달 4억이면
그 행동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뭐 하는 거예요?”서윤기는 라이터를 의서에 가까이 가져갔다.“호텔 에어컨이 좀 춥지 않아요? 우리 따뜻하게 해요.”나는 다급히 의서를 빼앗았다.“미쳤어요? 의서에 얼마나 많은 난치병 치료 방법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걸 태우면 사람들의 희망을 태우는 거나 다름없어요.”서윤기는 라이터를 내려놓고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난 장사꾼이지 의사가 아니에요.”“이...”나는 전에 서윤기가 유순하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이 사람도 그저 돈만 밝히는 악덕 상인이라는 걸 알았다.나뿐만 아니라 정 사장님도 그동안 서윤기에게 깜빡 속았다.손에 든 의서를 그대로 포기하자니 나는 너무 아쉬웠다.이건 할아버지의 심혈이다. 의서 한 권을 집필하려고 우리 정씨 가문이 대대로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 이 의서를 건지려면 서윤기와 손을 잡아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내 마음은 너무 복잡했다.그때 문득 대담한 생각이 떠올라 나는 의서를 챙긴 뒤 이를 악물고 밖으로 도망쳤다.하지만 얼마 못 가 호텔 직원이 내 뒤를 따라붙었다.어쩐지 내가 의서를 갖고 도망쳐도 서윤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했더니 호텔 안팎에 이미 서윤기의 사람이 가득했다.나는 절대 잡히면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죽을 듯이 도망쳤다. 호텔 직원이 쫓아오면 그 사람을 발로 차고 때리면서 의서를 꼭 지켜내려고 아등바등했다.그와 동시에 나는 윤미화에게 전화했다.“지금 어디 있어요?”[호텔이지. 무슨 일인데?]“지금 누가 절 죽이려고 해요. 윤 사장님이 좀 도와줘요.”나는 도망치면서 되도록 일을 심각하게 설명했다. 그건 윤미화가 빨리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헉.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몇 층이야?]“8층에서 내려가는 중이에요.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쫓아와요”나는 신속히 내 상황을 설명했다.그러자 윤미화는 잠깐 생각하더
서윤기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하긴, 서윤기 같은 사장한테 몇천만 원은 돈도 아니다.만약 서윤기가 거래할 마음이 없다면 내가 모든 재산을 준다고 해도 절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하지만 이렇게 포기하려니 내키지 않아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의서를 저한테 팔 건데요?”“이 의서는 나한테 필요해서 안 판다고 했을 텐데요.”서윤기는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나는 계속 서윤기에게 끌려가기만 했다.“서 사장님은 그 의서로 저와 거래할 생각이죠?”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그러자 서윤기가 담담하게 웃으며 자기 잔에 와인을 따랐다.그 동작은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충분히 증명했다.하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서윤기를 보니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강북 한약 상회 일이라면 전 결정권이 없어요. 정 사장님도 이미 건강을 회복했으니 상회 일은 사장님이 다시 맡고 있으니까요.”나는 먼저 내 생각을 내비쳤다.그제야 서윤기는 손에 든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돈은 나도 많아요. 돈 벌 루트가 필요한 거지. 하지만 난 내 파트너한테는 항상 관대하거든요. 파트너들과 함께 돈 버는 것도 좋아하고요.”서윤기는 애매모호하게 말을 흐렸지만 나는 단번에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서윤기는 내가 자신과 손을 잡으면 의서를 바로 주겠다는 뜻이었다.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서윤기를 바라봤다.“전 이제 상회 일도 관여하지 않는데 저랑 손잡아서 서 사장님한테 무슨 이득이 있죠?”“수호 씨가 상회 일에 관여하지 않지만 정 사장과 사이가 좋은 건 상회 사람들이 다 알고 있죠. 수호 씨가 나서면 정 사장의 뜻을 대변할 수 있을 거예요.”‘이 너구리 같은 인간이 이걸 노린 거였네.’나는 이제야 서윤기의 속내를 완전히 알았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다면 실망하시겠네요. 저는 정 사장님께 미안한 일은 안 해요.”서윤기는 의서를 꺼내 테이블 위
“아, 네. 들어와 앉았다 갈래요?”“그러죠.”서윤기는 사실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지만 나는 냉큼 기회를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방금 봤던 여자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만 실수하면 속살이 다 노출될 지경이었다.여자는 이런 상황과 장소가 매우 익숙한 듯했다.그때 서윤기가 여자에게 돈을 한 웅큼을 던져주며 나가라는 눈치를 주자 여자는 아무 말없이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엉덩이를 흔들며 방을 나갔다.서윤기는 그제야 나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주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수호 씨는 강북에서 생활하지 않아요? 설마 호텔에서 지내요?”나는 서윤기가 나를 찔러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도 이제 사업하는 사람이니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호텔에 머무는 건 불가피한 일이에요. 집에 가는 게 오히려 더 어렵다니까요. 그런데 이곳에서 서 사장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큰 사업을 하는 사장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가끔 재미를 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나도 아예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아니다.서윤기는 내 말에 허허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하지만 몇 분만 더 일찍 왔더라면 큰일 났을 거예요.”‘늙은 여우 같은 것.’서윤기가 상회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으면 내가 끌려다닐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윤기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내가 결국 먼저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만 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서 사장님, 전에 조천석 사장님한테서 의서를 구매하셨죠?”“조천석? 어디 보자... 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이 하도 많아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네.’나는 결국 직접적으로 힌트를 줬다.“강북 경진당 사장 조천석 말이에요. 책 이름이 ‘고의문’인데 기억나시나요?”내가 이 정도로 알기 쉽게 말했는데 계속 모
현성과 민우는 내가 혼자인 게 시름이 놓이지 않고 걱정되어 돌아온 거엿다.무엇보다 내가 이번에 건드린 사람은 임천호다. 바로 그 S시 전체를 주름잡고 수많은 용병을 거느리고 있는 효웅이라 불리는 남자 말이다.우리는 그런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봤지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다.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우리 같은 새내기한테 그런 사람은 닿을 수도 없고 두려운 존재다.하지만 현성과 민우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 곁에 있기로 했다.이건 단지 감동이라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목숨을 나눈 우정과도 같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천수백 마디로도 우리의 우정을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나는 방 두 개를 현성과 민우에게 내어주고 혼자 거실에 누워 속으로 감탄했다.이 순간 흥분과 감동, 두려움과 무서움이 한데 섞여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하지만 이렇듯 신맛이 났다 단맛이 났다 쓴맛이 났다 매운맛이 나는 이런 과정이 바로 성장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우리 셋은 함께 천수당에 출근했다.나는 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으려고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10시가 넘었을 때쯤 윤미화가 서윤기의 행방을 찾았다며 전화해 왔다.“어디 있는데요?”[샹젤리호텔. 내가 지금 마침 그곳에 가봐야 하니까 먼저 가서 확인해 볼게.]그 말을 들으니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뭐 하러 가는데요?”[고객이 거기서 기다려. 설마 내가 수호 씨랑 같이 가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했어?]나는 순간 머쓱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 오해한 건 미안해요.”나는 윤미화를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자각하고 다급히 사과했다.그러자 윤미화가 웃으며 말했다.[말만으로 미안하다면 다야? 실제 행동을 보여줘야지.]“사장님, 우리 한 식구 아니었어요? 뭐 하러 조목조목 다 따져요? 거리감 들게.”[누가 한 식구라는 거야?]“아니에요? 우리 탐정 사무소는 한 가족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