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목여태감이 금군을 보고 물었다. 금군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왕야께서 세 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설마…… 아닙니다. 경도를 떠나시겠다는 왕야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태감님은 아시겠습니까?”“뭐라고? 아이가 셋?” 목여태감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뒷목을 잡았다. 목여태감은 급히 명원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폐하! 제가 급히 전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재상들과 회의 중이었던 명원제는 문밖에서 들리는 목여태감의 다급한 목소리에 인상을 썼다. 하지만 태감이 일을 하면서 이런 적이 없기에 정말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명원제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태감이 문을 열고 들어와 명원제에게 귓속말을 했다.태감의 말을 듣고 명원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이 사실이냐?”“예, 금군이 방금 들어와 보고했습니다.”명원제도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앉아 있는 재상들을 보았다.“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네. 급한 안건은 내일 마저 하도록 하지.”재상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명원제의 목소리에 감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재상들이 떠나자 명원제가 목여태감을 보고 “초왕부로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어서방으로 오라고 하거라! 짐이 직접 물어보겠다!”라고 말했다.“예!” 목여태감은 명원제의 명을 받고 다급히 밖으로 향했다. 금군은 황제의 명을 받고 마차를 끌고 초왕부로 향했다. 잠시 후 초왕과 초왕비가 어서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명원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려고 하자 명원제가 원경릉에게 온화하게 말했다.“초왕비는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그 말을 듣고 우문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꼿꼿이 섰다. 명원제는 그런 우문호를 보며 인상을 썼다.“너도 임신을 한 것이냐? 아니면 다리가 부러진 거야?”그 말을 듣고 우문호가 무릎을 꿇으며 “부황께 문안을 드립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 명원제는 우
한쪽 무릎을 꿇은 우문호가 명원제를 바라보았다.“여섯 개의 발, 소자도 보았습니다.”그의 말을 들은 명원제는 한숨을 내쉬며 어의들을 보았다. “어의들 어찌할 것이냐? 짐의 손자들은 모두 건강하게 태어나야 할 것이야!”명원제의 호령에 어의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잠시 후, 의논 끝에 한 명의 어의가 명원제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황상, 세 아이의 출산 과정은 한 아이의 출산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그렇기에 모체의 건강이 필수적이지요. 초왕비의 몸조리에 힘을 써야 하며, 세 아이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뱃속에서 다스려야 합니다.”“당연한 말을 길게도 하는구나.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냐?” 명원제는 당연한 말을 하는 어의에게 실망스럽다는 말투로 어의를 노려보았다.“왕비께서 지금 다섯 달이 되었으므로 운동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도 주의해야 합니다. 하루 다섯 끼를 소량으로 나눠서 먹어야 하며 하루에 두 번 이상 가벼운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원판이 머뭇거리며 우문호를 보더니 “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저도 지킬 것은 지킵니다. 초왕비와 함께 잠만 자고 있습니다.”“만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원판이 말했다.“무슨 만일입니까? 지금 본왕을 의심하는 겁니까?”우문호가 오늘 입궁한 이유는 부황이 원경릉의 뱃속의 세 아이를 봐서라도 정후부에서 초왕부로 거처를 옮겨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어의의 말을 듣고 우문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입궁해서 세 쌍둥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주의할 것이 뭐가 있느냐? 출산을 할 때, 어떤 약을 준비해야 한다거나?” 명원제가 어의에게 물었다.“대주의 강영후(江寧侯)께서 가져온 무우산(無憂散)을 준비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무우산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인이 보아하니 지금 왕비께서 배는 크고
명원제는 원경릉의 말을 듣고 의아했다. 조정을 위해 자신의 부친의 직위를 해제해 달라니, 명원제는 지금까지 이런 부탁은 처음 들어보았다. 사실 명원제도 정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간 정후의 조상들이 세운 공이 있어 그를 조정에 두었을 뿐이다.잠시 후, 명원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원경릉을 보았다.“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직위를 해제하는 대신에 짐이 그에게 토지라도 하사하겠……”“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옵소서!”“응? 어째서?”명원제는 부친에게 박한 원경릉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폐하, 세상에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부황께서 부친에게 토지를 주신다면 부친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황상의 은혜를 입었다고 거들먹거릴 것입니다.”그 말을 들은 명원제가 웃음을 터뜨렸다.“너는 네 아비를 잘 아는구나!”“예……” 원경릉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짐이 잘 생각해 보마. 지금 그게 급한 게 아니다. 너희는 지금 당장 건곤전(乾坤殿)으로 가서 태상황님께 문안을 드리고 이 좋은 소식을 전하거라. 그리고 태후에게 가서도 이 소식을 전해라. 아마 태후는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구나.”우문호와 원경릉이 인사를 하고 어서방을 나오자마자 그 안에서 호탕한 명원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원경릉이 놀라서 휘청거렸다. “저거…… 부황께서 웃는 거야?” 원경릉이 놀라서 우문호를 쳐다보았다.“어서방에서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사람이 부황님 말고 또 누가 있겠어?”“왜 저러시는 거지?”원경릉은 처음 듣는 명원제의 웃음소리에 당황했다.“손자가 셋이나 된다니까 기쁘신 거겠지.”우문호가 그녀를 부축해 계단을 내려갔다.*건곤전에 도착한 두 사람은 태상황에게 인사를 드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태상황은 명원제처럼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담배를 피우다가 담뱃대를 상선에게 건네주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켜라.” 태상황이 상선에게 말했다.“예.”태상황은 원경릉을 보며 인자하게 웃
“예, 몸조심하겠습니다.” 원경릉이 말했다.태상황이 원경릉에게 빨리 태후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하고 왕부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우문호와 원경릉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후에게 갔다. 태후가 있는 곳에 마침 현비도 자리했다.현비는 호비(扈妃)가 들어온 뒤부터 마음이 뒤숭숭해 태후를 찾아와 위로를 받았다. 태후는 그녀의 고모로 그런 현비를 귀여워하면서도 때로는 매섭게 꾸짖기도 했다. 현비가 태후를 찾아온 이틀 내내 하소연을 하자 태후도 귀찮다는 듯 현비에게 네 분수를 알라며 따끔하게 혼냈다. 우문호와 원경릉이 태후를 보러 왔을 때 마침 현비가 태후에게 혼나고 있었다. 현비는 그런 모습을 두 사람에 들킨 것이 화가 나서 두 사람에게 분풀이를 했다. “모두 너희 때문이다! 호강연을 초왕부에 들였으면 이 사달이 나지 않았을 것 아니냐! 그 어린것이 후궁으로 들어와 어떤 일을 꾸밀지 모르거늘…… 너는 다 늙은 네 어미를 피 말려 죽일 셈이냐?”우문호는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와서 이런 소란을 겪을 수 없다는 듯 정색했다. “모비, 이제 고정하시지요. 호비는 이제 부황의 사람입니다. 어린것이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호비가 결정한 일을 왜 소자의 탓으로 나무라십니까?”현비는 화는 났지만 우문호의 말이 다 맞아서 잠시 입을 다물고 입술을 뜯었다.“모비가 너한테 그런 말도 못 하느냐? 만약 네가 나서서 호강연을 후궁으로 들이겠다고 했으면 이 사달이 났겠느냐고! 너를 제외한 어느 친왕이 정비 하나만 두고 있느냐? 손왕비도 지금 손왕에게 맞는 후궁을 찾고 있다는데, 너는? 지금 초왕비가 임신했다고 유세라도 떠는 것이냐? 자고로 황실의 자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너도 할당량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초왕부의 일은 탕양이 맡아서 처리하니 탕양에게 말씀하세요.”“탕양이 네 상전이라도 되는 거야? 왜 탕양을 들먹이느냐? 후궁이 너를 구워 삶기라도 하겠느냐? 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야?”태후는 현비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그들의 대화에
태후의 말에 현비는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 아이라는 말을 들은 현비는 아이를 잘만 낳으면 큰 복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만약 아이가 모두 태어나지 못한다거나, 하나만 산다거나…… 물론 지금이야 세 아이를 임신했다고 기뻐하지만 그때 가서 아이가 잘못된다면 그 슬픔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태후는 한사코 초왕 내외보고 밥을 먹고 가라고 했다. 태후도 여자로서 임신과 출산의 경험을 남김없이 원경릉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녀는 원경릉에게 출산의 경험을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원경릉은 그녀에게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신중함을 보았다. 원경릉은 궁을 나와 왕부로 돌아갈 때까지 금군들의 호위를 받았다. 왕부에 도착한 뒤로도 금군 8명이 남아 원경릉을 호위하였고 금군들이 왕부 내를 순찰했다. *태후는 초왕 내외가 궁을 떠난 후 명원제를 불러서 초왕 내외를 난처하게 하지 말라고 명하며 특히 초왕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태후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음고생을 했다. 황실 왕비들이 여러 번 임신 소식을 전했지만, 하나같이 낳지 못하고 뱃속의 아이들이 비극을 맞이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심한 마음고생으로 십 년은 늙었다. 태후는 원경릉의 임신 소식을 듣고 이번만큼은 증손자를 절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늘부터 원경릉의 뱃속의 세 아이는 자신이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명원제는 근심 가득한 태후의 표정을 보고 “제가 언제 그들을 난처하게 했습니까? 저 또한 초왕비가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다섯째도 힘들게 하지 말시게. 남편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퍽하면 다섯째에 곤장을 내리치질 않는가! 도대체 황상은 나이가 몇 살인데 아들을 괴롭히는 것이야?”태후는 아들의 황제가 된 그때부터 아들이 아닌 황제로 대했다. 그래야 보는 이들도 황제를 믿고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후가 처음
원경릉이 정후부에서 초왕부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자 그 모습을 본 정후는 기쁨의 눈물을 글썽였다. 그가 입궁에 사퇴를 신청하자마자 큰 딸 원경릉이 황제의 명으로 초왕부로 복귀할 수 있게 됐다. 정후는 큰 딸이 황실의 며느리이고, 둘째는 구씨 집안과 혼담을 나누고 있으니 이제 남은 첩의 딸들만 좋은 집안에 시집을 보내면 시댁의 힘을 얻어 다시 복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원경릉이 떠날 채비를 하자 노마님의 마음은 무거웠다. 당연히 출가한 손녀가 남편의 집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 맞는 것이지만, 손녀의 뱃속에 세 아이만 생각하면 그녀를 곁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자신이 손수 보살펴주고 싶었다. 원경릉은 그런 조모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떠나기 전에 노마님의 손을 잡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우문호도 옆에서 노마님에게 절을 하며 앞으로 원경릉을 잘 돌볼 테니 조모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노마님은 우문호에게 손녀를 잘 보살피라고 말하며 왕부에서 무슨 일이 있거든 바로 정후부에 소식을 전하라고 했다. 노마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미 시집간 손녀에게 잔소리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해 말을 멈추었다. 마차에 올라탄 원경릉은 우문호의 어깨에 기대었다.“이제야 마음이 편하네.”“경릉아, 수고 많았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운이 참 좋은 것 같아.”우문호는 원경릉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맞아. 운이 좋지.”태상황이 원경릉을 명월암으로 보냈고 우연히 진북후의 모친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도 하늘에서 도운 일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원경릉은 이 또한 태상황의 큰 그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태상황님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게 분명해.’또한 귀빈 사건이 해결되어 나씨 집안의 누명도 벗겨졌다. 비록 과거의 영광스러웠단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앞으로 황제가 나씨 집안을 박대할 수 없을 것이며, 나씨 집안사람들은 우문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해 우문호를 도와줄 것이다. 원경릉은 황실 내외에서 사
제왕의 얼굴은 흉터뿐 아니라 얼굴과 목 여기저기 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너 얼굴이 왜 이래?” 우문호가 제왕에게 물었다. 제왕은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조용히 “묻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원용의가 “맞았습니다. 제가 제왕을 데리고 호국사에 주지스님을 뵈러 갔는데 주지스님이 제왕의 몸에 귀신이 붙었다면서 버들가지로 때리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호국사까지 가서 그런 수모를 겪은 게냐?” 우문호가 물었다. “하하, 제왕 직접 대답해 드리세요.”원용의는 제왕을 한 번 보고 그의 병이 생각나 웃음이 터졌다. 제왕은 부끄럽다는 듯 조용히 우문호를 끌고 나가 이야기했다. 원용의는 원경릉이 초왕부로 돌아온 것이 기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원누이의 뱃속에 아이가 셋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축하합니다!”“고맙네, 근데 제왕의 병은 좀 나았습니까?”원경릉은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원용의는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습니다. 제가 조모를 찾아가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호국사의 주지스님을 찾아가라고 하셔서…… 근데 데리고 갔다 왔는데도 별 소용이 없는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주지스님이 보시기에는 어떻답니까?”“귀신이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그럼 괜찮다는 말이네.”원경릉은 제왕이 원용의의 관심을 받기 위해 꾀병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만아가 들어와 기왕부에서 사람이 왔다고 전했다. “왕비님, 기왕비께서 기왕부로 오시라고 합니다.”“지금?”“예, 청이가 와서 전했습니다.” 만아는 옆에 있던 청이를 불렀다. 청이가 인사를 원경릉에게 인사를 하고는 “초왕비님 기왕비께서 기왕부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빨리 기왕부로 와달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슨 일?”원경릉이 물었다. 원경릉은 기왕비 성격상 원경릉에게 무엇을 부탁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왕부에 진짜 큰일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비님,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일단 가시지요.”
만아는 즉시 우문호를 찾으러 나갔다. 우문호는 만아의 말을 듣자마자 제왕과 함께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제발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니길 바랐던 우문호는 기왕부의 하인 청이를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문득 전에 탕양이 자신의 스승을 찾아갔다가 왕부로 돌아와서, 스승이 초왕부의 기운이 좋지 않다며 조심하라고 했다고 말을 전했던 게 떠올랐다. ‘그게 저주인형을 뜻했다니.’우문호는 임신한 원경릉을 향한 질투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런 치사한 방법으로 원경릉을 공격할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다. 그는 화가 났지만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기왕부로 오라고 했으니 가야지. 저주인형을 누가 만들었건 본왕이 반드시 범인을 잡아 낼 것이다.”원경릉은 왠지 모르게 기왕비가 꾸민 일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기왕비는 현재도 원경릉의 진료를 받고 있다. 만약 저주인형으로 원경릉을 저주해 원경릉이 죽어버린다면 누가 기왕비를 치료해 주겠는가?설사 기왕비가 이 일을 꾸몄다고 해도 그녀는 치밀한 사람이라 누군가가 발견할 곳에 저주인형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기왕비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네, 주명양 제법이구나. 그렇다면 기왕도 주명양과 한 패인가?’제왕 내외가 같이 가겠다고 해서 네 명이 기왕부로 향했고, 희상궁과 만아도 그 뒤를 따랐다. 기왕부에 도착하자 청이가 앞으로 나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더니 초왕비가 왔다고 전했다. 우문호는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발로 대문을 뻥 찼다. 기왕부의 모든 사람들이 본관에 있었고, 그 가운데 정좌에 기왕이 화가 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기왕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들을 보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섯째 왔구나, 형님으로서 정말 미안하다. 큰 형수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다니. 허나 안심하거라 내가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 테니까. 이 악독한 여인을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우문호는 탁자 위에 놓인 저주인형을 보았다. 저주인형을 자세히 보니 옷도 머리 장식도 모두 원경릉의 모습을 빼다
현대로 돌아가 가족과 한자리에 모이니 모두 즐거워 보였다. 원경릉은 집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데리고 휘종제와 건종 태자를 알현하러 갔다.휘종제와 건종 태자도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아이들이 유학하러 와서 앞으로 여기서 산다는 얘기에, 휘종제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앞으로 아이들에게 드는 모든 비용은 전부 자기들이 대고 방학에 북당으로 보내고, 개학 때 맞이하는 것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외갓집엔 모두 출근하는 분들 뿐이라 불편할 거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일단 감사드리고 북당에서 가져온 술과 검, 궁에서 가져온 흙 한 줌과 돌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우문호가 준비한 것으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 사람은 고향의 흙과 돌이 그리운 법이라고 했다.휘종제와 건종 태자가 흙과 돌을 보더니 손에 들곤 통곡하기 시작했다.원경릉이 두 사람을 위로한 뒤, 그들은 슬퍼하며 ‘언제 한 번 가볼까, 딱 한 번 보더라도, 아무도 만날 수 없어도 좋을 텐데.’라고 한탄했다.“긴 세월 고향 강산을 꿈에도 잊지 못했으나 돌아갈 수는 없었네..”원경릉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이 시큰해졌다. 휘종제와 건종 태자의 슬픔을 원경릉은 아주 잘 아는 것이 자신도 전에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단지 그들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원경릉도 뭐라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 어쨌든 이건 안풍 친왕이 진행한 일로 정말 돌아가고 싶으면 아마도 안풍 친왕이 준비해 줄 수 있었다. 북당으로 돌아가면 안풍 친왕에게 상황을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입학 준비를 마친 뒤, 원경릉은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아이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충만했기에 그녀와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그 점이 씁쓸했다.아이들이 크면 놔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얘들은 아직 다 안 컸잖아.돌아가기 전에 원경릉은 양여혜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양여혜가 기화를 데리고 올 줄 몰랐다.원경릉은 기화를 보자 머리가 아픈 게, 기화는 또
‘이제 어머니가 계시니 술 먹으면 몸 상한다고 말해? 예전에는 왜 말 안 했어?’다행히 누군가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 있었다. 회왕은 벼슬에 오른 뒤로 술을 조금 하기 시작했는데, 많이는 안 마시고 한두 잔만 마실뿐, 석 잔째면 아내를 보러 집에 갔다.즐겁게 박원과 소홍천을 보낸 우문호와 원경릉은 만두와 아이들을 유학 보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비록 환타와 칠성이는 아직 어려서 2년 정도 더 남아있었지만, 유치원 다니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며,형들이랑 꼭 같이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 원경릉과 우문호는 골치가 아파졌다.그나마 우문호에게 약간 위로가 된 건 딸만큼은 곁에 있다는 사실로, 칠성이와 환타가 하도 졸라대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가가, 다 가.”아이들은 기뻐했으나 눈 늑대와 호랑이도 여전히 성깔을 부리며 따라가겠다며 소란을 피웠다.현대에서 어떻게 호랑이와 눈 늑대를 키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였다. 게다가 이 동물들은 아주 영민해서 사람 일을 이해해, 꼬마 주인들이 이번에 가면 열흘 보름이 아니라 몇 년 있다가 온다는 걸 알고 아무리 혼을 내도 말을 안 들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만두가 이리저리 구슬려서, 동물들에게 자기들에겐 여름방학, 겨울 방학이 있고 학기 중에도 쉬는 날이 있어서 1년에 합치면 적어도 4개월은 이쪽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적어도 1년에 절반 가까이는 같이 있는 거라고 위로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비록 시공간은 떨어져 있어도 같이 자라기를 원할 것이다. 유학을 가는 일이기 때문에 원경릉이 직접 따라가서 진학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이 일은 전에 현대에서 언급한 적이 있어, 로양이 아이들에게 호적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물론 아이들을 호적에 올리려면 원경릉 부부도 호적에 올려야 하는 것이, 아이들을 오빠 이름 아래 입적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이 일은 로양이 원만하게 처리해 원경릉 가족 모두 호적을 가지게 되었다.게다가 원래 집을 사뒀기 때문에, 부근 학군에 진학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원경릉은 다섯
대오가 경성으로 돌아올 때 홍엽도 원숭이와 같이 돌아왔는데, 그도 풍도성에서 힘을 보탰다. 사실 홍엽이 안 가도 안풍 친왕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둬서, 안풍 친왕 능력이면 안지여 정도 상대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이리 나리 일행은 경성에 도착해, 우선 집으로 돌아가 공주와 천행이를 보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은 뒤 입궁해서 경과를 보고했다.사적인 원한은 한두 마디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지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으며 아직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남은 건 정사를 논하는 것이었다.“어머니와 같이 풍도성에서 보름 정도 지내며 기본적인 민심을 파악했는데, 천문 세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직 명망이 높아 보입니다. 풍도성 백성들은 사실 세금이 너무 많고 경제가 번영한 성과가 전부 안지여 수중에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안지여의 통치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풍도성을 접수한 것에 백성들 대부분은 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천하태평이냐 하면 그럴 순 없는 것이, 일부는 성주가 자기들의 황제라 여기고, 조정이 풍도성을 접수한 것이 풍도성이 침략당했다고 여겨 나중에 약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부를 임명하실 때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우문호가 말했다. “흠, 큰할아버지께서 천거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박원이라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그러자 이리 나리의 눈빛이 빛났다. “제 아버지가 추천한 사람이니 전 찬성입니다!”“아버지?” 우문호가 의아해하며 이리 나리를 쳐다봤다. ‘안풍 친왕비가 사부님이면 안풍 친왕은 사부의 남편 아닌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지? 사부님의 배우자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흠, 안풍 친왕은 제 아버지십니다!” 이리 나리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어쨌든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 없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진정한 아버지였다.“하하하!” 우문호도 그저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이리 나리가 퇴청할 때 우문호가 이리 나리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무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