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얼굴은 흉터뿐 아니라 얼굴과 목 여기저기 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너 얼굴이 왜 이래?” 우문호가 제왕에게 물었다. 제왕은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조용히 “묻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원용의가 “맞았습니다. 제가 제왕을 데리고 호국사에 주지스님을 뵈러 갔는데 주지스님이 제왕의 몸에 귀신이 붙었다면서 버들가지로 때리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호국사까지 가서 그런 수모를 겪은 게냐?” 우문호가 물었다. “하하, 제왕 직접 대답해 드리세요.”원용의는 제왕을 한 번 보고 그의 병이 생각나 웃음이 터졌다. 제왕은 부끄럽다는 듯 조용히 우문호를 끌고 나가 이야기했다. 원용의는 원경릉이 초왕부로 돌아온 것이 기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원누이의 뱃속에 아이가 셋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축하합니다!”“고맙네, 근데 제왕의 병은 좀 나았습니까?”원경릉은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원용의는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습니다. 제가 조모를 찾아가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호국사의 주지스님을 찾아가라고 하셔서…… 근데 데리고 갔다 왔는데도 별 소용이 없는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주지스님이 보시기에는 어떻답니까?”“귀신이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그럼 괜찮다는 말이네.”원경릉은 제왕이 원용의의 관심을 받기 위해 꾀병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만아가 들어와 기왕부에서 사람이 왔다고 전했다. “왕비님, 기왕비께서 기왕부로 오시라고 합니다.”“지금?”“예, 청이가 와서 전했습니다.” 만아는 옆에 있던 청이를 불렀다. 청이가 인사를 원경릉에게 인사를 하고는 “초왕비님 기왕비께서 기왕부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빨리 기왕부로 와달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슨 일?”원경릉이 물었다. 원경릉은 기왕비 성격상 원경릉에게 무엇을 부탁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왕부에 진짜 큰일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비님,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일단 가시지요.”
만아는 즉시 우문호를 찾으러 나갔다. 우문호는 만아의 말을 듣자마자 제왕과 함께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제발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니길 바랐던 우문호는 기왕부의 하인 청이를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문득 전에 탕양이 자신의 스승을 찾아갔다가 왕부로 돌아와서, 스승이 초왕부의 기운이 좋지 않다며 조심하라고 했다고 말을 전했던 게 떠올랐다. ‘그게 저주인형을 뜻했다니.’우문호는 임신한 원경릉을 향한 질투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런 치사한 방법으로 원경릉을 공격할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다. 그는 화가 났지만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기왕부로 오라고 했으니 가야지. 저주인형을 누가 만들었건 본왕이 반드시 범인을 잡아 낼 것이다.”원경릉은 왠지 모르게 기왕비가 꾸민 일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기왕비는 현재도 원경릉의 진료를 받고 있다. 만약 저주인형으로 원경릉을 저주해 원경릉이 죽어버린다면 누가 기왕비를 치료해 주겠는가?설사 기왕비가 이 일을 꾸몄다고 해도 그녀는 치밀한 사람이라 누군가가 발견할 곳에 저주인형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기왕비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네, 주명양 제법이구나. 그렇다면 기왕도 주명양과 한 패인가?’제왕 내외가 같이 가겠다고 해서 네 명이 기왕부로 향했고, 희상궁과 만아도 그 뒤를 따랐다. 기왕부에 도착하자 청이가 앞으로 나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더니 초왕비가 왔다고 전했다. 우문호는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발로 대문을 뻥 찼다. 기왕부의 모든 사람들이 본관에 있었고, 그 가운데 정좌에 기왕이 화가 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기왕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들을 보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섯째 왔구나, 형님으로서 정말 미안하다. 큰 형수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다니. 허나 안심하거라 내가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 테니까. 이 악독한 여인을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우문호는 탁자 위에 놓인 저주인형을 보았다. 저주인형을 자세히 보니 옷도 머리 장식도 모두 원경릉의 모습을 빼다
기왕비는 우문호와 원경릉이 기왕부로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서 우문호의 앞으로 걸어갔다. “다섯째, 그 인형을 나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기왕비가 두 손을 내밀었다. 기왕비의 두 손은 마치 닭발처럼 살이 하나도 없이 야위어있었다. 우문호는 저주인형을 들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하고 있던 하고 있던 비녀를 빼서 인형을 갈라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했다.기왕은 그런 기왕비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거세게 잡았다.“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게냐? 네 법당에서 찾아낸 저주인형이다! 네가 꾸민 일이 아니라면 그게 거기에서 왜 나왔겠어? 변명의 여지가 없다!”“……”“당장 이 여자를 궁으로 끌고 가 부황께 처분해달라고 하거라!”기왕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왕을 바라보았다. “왕야, 걱정 마요! 그러게 보채지 않으셔도 입궁할 겁니다. 하지만 입궁하기 전 경조부윤인 다섯째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꼭 나눠야겠습니다. 왕야께서는 이 손을 놓고 제 말 좀 들어보시지요.”“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야?” 기왕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다섯째, 걱정말게. 이 여자의 죗값은 내가 반드시 치르게 할 테니.” 기왕이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기왕의 팔을 잡았다. “잠시만요. 기왕비께서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으니 일단 들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왕은 원래 이 일을 조용히 자기 선에서 처리하고 부황에게는 보고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청이가 초왕부에 가서 이 소식을 전했고, 사람들이 기왕부로 왔다. 기왕은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골치가 아팠다. 기왕은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다섯째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왕은 자신의 팔을 잡은 원경릉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초왕비, 이 여자의 말은 들을 필요 없네. 죄인의 변명을 들어서 뭐 하겠는가?”“이 일은 저와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사건의 진상을 알
주명양은 사식이를 건드려봤자 득이 될 것이 하나 없다는 것을 알고 우문호를 향해 올린 손을 거두었다. 기왕비는 우문호가 자신을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가 편을 들어주자 이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잠시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어릴 적부터 누구의 도움 없이 모든 일을 혼자서 계획하고 해결하고 결과에 책임을 진 기왕비. 지금까지 그녀를 믿어주고, 힘들고 어려울 때 그녀의 편을 들어준 사람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비가 청이를 시켜 원경릉을 기왕부로 오게 한 이유는 초왕비가 자신을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오늘 기왕부에서 벌어진 일을 추후에 초왕비가 듣게 된다면 그녀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는가?기왕비는 그녀가 사건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나면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기왕비는 기왕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전 오늘 초왕부에 갔을 겁니다. 하지만 주명양이 법당에 들어와 참배를 하다가 불상 뒤에서 저주인형을 발견했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기왕이 저를 기왕부에 가둬두었습니다. 기왕과 주명양은 이 일을 제가 꾸몄다고 하는데, 저는 맹세코 이 일을 모릅니다. 초왕비의 사주팔자도 모르는데 제가 이런 걸 어떻게 만들겠습니까?”“네 법당에서 찾았는데 그게 네 것이 아님 누구 것이겠느냐?” 기왕이 코웃음을 쳤다. “마음만먹으면 누구 것인지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왕야께서는 진범이 누구인지 조사조차도 하지 않으시잖아요.”기왕은 확신으로 찬 기왕비의 눈빛에 소름이 끼쳐 당황한 표정으로 기왕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조사는 무슨! 부황께 보고 드리고 부황의 뜻에 따르면 된다!”그가 기왕비를 끌고 밖으로 나가자 우문호가 그 뒤를 따라나섰다.“형님께서 입궁하신다면 저도 함께 입궁하겠습니다.”“이 일에 대해서 참견하지 말거라. 본왕이 직접 처리할 것이다!”“저주
“주후궁, 더 할 말 있는가?” 기왕비가 주명양에게 물었다. 주명양은 퉁퉁 부은 뺨을 감싼 채 기왕비를 보며 “기왕비가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궤변인지 아닌지는 여기 경조부윤이 있으니 조사를 해보면 알겠지.”“경조부윤? 어디요? 경조부윤에서 이미 잘린 지 오래 아닙니까?”주명양이 웃었다. “정직이 됐던 건 맞지만, 황제께서 초왕을 경조부윤으로 복직시킨 것 모르시나요? 초왕께서는 여전히 경조부윤이십니다.” 원용의가 말했다.“복직? 그래요? 그럼 황제의 성지가 있습니까? 복직을 했다는 증거가 있을 거 아닙니까?” 주명양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우문호는 그 말을 듣고 옆에 있는 서일을 불렀다. “서일, 관아에 가 보좌관과 포도대장은 지금 당장 기왕부로 오라고 전하거라. 그리고 필적 검사를 진행할 것이니 냉대인도 모셔오너라.”“다섯째,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 기왕부에서 일어난 일을 왜 관아에서 처리하느냐?” 기왕이 말했다. “형님께서 방금까지 입궁해서 이 일을 해결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입궁을 해서 부황께 말씀을 드리면 부황께서 분명히 경조부 신하들을 시켜 진상규명을 실시할 겁니다.”“이건 황실의 일이니 황실 사람들끼리 해결하면 되지 않느냐?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이야?”우문호는 기왕의 말에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한걸음 가까이 기왕에게 다가갔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원경릉의 사주팔자가 적힌 저주인형이 있는 이상 이 일은 기왕부만의 일이 아니라고!”“너……”“서일! 뭐 하고 서있어 당장 관아에 가서 본왕의 말을 전하거라!”“예!”서일이 빠르게 뛰어갔다. 달려가는 서일의 뒷모습을 보던 기왕은 부병들을 시켜 서일의 앞을 가로막았다. “본왕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기왕부를 나갈 수 없다!”부병들은 서일을 저지했고 서일은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한 부병들을 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우문호의 명령을 기다렸다. “나가거라!” 우문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일이 장검을 뽑아 들었다.“기왕부에는 백여
기왕부의 난투극우문호가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장검을 휘둘러 두 사람을 베어내며 사식이의 포위망을 풀었다.사식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왕야 감사합니다!”“돌아가서 왕비를 지켜줘!” 우문호가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며 연환퇴를 시전하자 원용의 앞에 2명의 기왕부 병사가 나가떨어지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사식이에게 얘기까지 했다.그러나 사식이는 돌아가지 않고 그쪽은 만아로 충분하니 우문호와 원용의를 도와 계속 싸웠다.원경릉은 가슴이 철렁했다. 밖에는 기왕부 병사가 잔뜩 있고 우문호는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는데 벌써 싸우기 시작했으며, 기왕부 병사들은 그가 왕야 신분이라 감히 중상을 입히진 못해도 얕은 상처를 무수히 입혔다.게다가 우문호는 무공이 허접 해서 구사한테도 맞아서 멍 들고 얼굴이 붓는 지경 아닌가.만아가 위로하길: “왕비마마 안심하세요. 왕야께서 서일을 여기서 나가게 하실 겁니다.”과연 우문호의 초식이 민첩하고 빨라서 장검이 꽃처럼 원형으로 피어나며, 연속으로 몇명을 쓰러뜨리는데 중상을 입히지 않고 가볍게 넘어뜨리는 정도다.검에 불꽃이 튀는 와중에 우문호는 여유작작 기왕부 병사들 사이를 맴돌다가 여러 차례 눈 앞에서 포위되었는데도, 빛처럼 번쩍 날아올라 허공에서 검을 회전시켜 번번히 포위를 벗어나 여러 명을 찔렀다.찬 바람에 우문호의 옷자락이 나부끼며 추상같은 눈빛에 무지개 같은 검기가 피어 오른다. 서일과 일종의 암묵적으로 공격과 방어 짝을 이뤄, 둘 사이에 눈빛조차 교환하지 않아도 절묘하게 어울렸다.원경릉은 이때야 비로소 서일이 매번 그렇게 바보 짓을 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여전히 우문호가 서일을 곁에 두고 내쫓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하지만 기왕부 병사가 너무 많고 강호인이 난투극에 끼어들지를 않나 심지어 제왕을 압박하는 사람까지 있는데, 제왕은 잠시 숨었다가 결국 다시 나와, 원용의가 포위 당한 것을 보고 손에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채로 달려들어 원용의를 한 손으로 끌어냈다.원용의가 자세를 가다듬고 약간 당황하더
기왕부에서의 한판 승부주명양이 격분해서 소리 질러, “원경릉, 나는 널 안 건드렸는데, 네가 날 건드려?”주명양이 손에 붉은 채찍을 들어 올리자 번갯불이 하늘에 번쩍이듯 채찍이 ‘쉭’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바로 원경릉의 배에 휘둘러졌다.만아가 대경실색하고 마음 속에 주명양에 대해 갖고 있던 두려움도 잊고 격하게 손을 뻗어 채찍을 잡자 주명양이 냉소를 지으며 채찍을 거둬들이는데 채찍엔 쇠로 된 못이 박혀있어 만아의 손은 온통 시뻘겋게 피와 살이 엉겨 붙었다.원경릉이 이 상황을 보고 화가 나서 배가 아플 지경이라 어장을 휘두르며 때리는데 만아가 앞에서 보호하니 주명양은 채찍을 거둬들이지도 못하고 심지어 채찍을 바닥에 떨어뜨려 머리를 감싸 쥐고 숨으며 날카로운 소리로 “왕야 살려주세요.”하고 외쳤다.기왕이 고개를 돌리자 주명양이 원경릉에게 뚜드려 맞고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가는데, 기왕비가 날쌔게 와서 막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왕야, 오늘 이 재미난 연극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말려들 줄 상상도 못했죠? 절 내쫓겠다고 아주 애를 많이 쓰셨어요.”“이 미친 여자가, 꺼져!” 기왕은 주명양이 걱정돼서 격노하며 손을 들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기왕비의 따귀를 때렸다.기왕은 기왕비에게 지금 오직 증오와 미움만 있고 더욱이 기왕비의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보면 짜증이 났다.기왕비는 몸이 마르고 약해서 이 한대에 거의 바닥에 널브러졌다.기왕비가 비틀거리자 기왕이 재빠르게 앞으로 가려고 했다. 이때 기왕비가 갑자기 뒤에서 달려들어 기왕의 목을 누르고 손을 얼굴 위로 들어 머리채를 완전히 잡고 뒤로 끌어당기니 기왕은 순간 그대로 쓰러졌다. 기왕비는 원숭이처럼 잽싸게 올라타서 양 손으로 뺨을 때리는데 숨이 가빠져서 씩씩거릴 때까지 쉬지 않았다.기왕비의 이런 동작은 오래 연습한 것 같아서 폭발력이 어마어마했다.기왕이 손을 흔드는 순간 기왕비는 이미 비수로 그의 목을 누르고 머리카락이 뒤엉켜 흘러내린 가운데 얼음장 같은 눈빛이 형형하며, “어디 한번 움직여
기왕과 담판하는 우문호기왕이 차갑게 우문호를 노려보고 제왕에게, “일곱째야, 원인이야 어떻든지 간에 아바마마께서 하문하시면 너도 책임을 벗어날 수 없어. 황자들이 치고 받아 반드시 벌을 내릴 테니, 일을 만들고 싶지 않거든 얼른 후궁을 데리고 나가거라.”제왕은 원래 귀찮은 걸 싫어하고 실오라기 하나도 책임지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이건 황후의 잔소리 탓이다.그리고 제왕은 형제 간에 다섯째랑 비교적 좋은 관계긴 하지만 사실상 누구한테도 미움 받기 싫다.게다가 큰형에 대해서는 경외하는 마음도 있다.기왕이 제왕을 보내주기만 하면 오늘 이 일도 황제 앞에서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제왕이 저주인형 사건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바마마도 제왕 한 사람만은 처벌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제왕은 꼼짝 않고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이때 원용의가 제왕 앞에 서서 담담하게: “우린 안가요, 관아 사람이 오는 걸 기다리죠 뭐, 오늘 일은 우리가 직접 봤으니 증인이잖아요.”제왕이 바로: “맞아요, 우리 안가요.”기왕이 화를 내며, “너……”우문호가 검을 손에 쥐고 아무렇지도 않은 눈빛으로: “큰형, 아직도 죽기 살기로 덤비실 겁니까? 저 오늘 형이랑 끝까지 갈 겁니다.”기왕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더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개를 돌려 기왕비를 찢어발길 듯이 노려봤다.오늘의 이런 변고를 기왕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원경릉을 저주인형 당사자로 삼은 것은 그녀가 아이를 가졌고 아바마마의 사랑이 깊어서 였다. 아바마마께서 훑어보시기만 해도 원경릉은 죄를 물어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기왕은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다섯째가 와서 소란을 피울 줄 상상도 못했다.기왕에겐 불리하다.기왕은 어서 주명양을 정비의 자리에 올려 주씨 집안의 도움을 받을 생각 밖에 없다. 왜냐면 몹쓸 계집의 친정에서 천천히 자금줄을 조여오며 더이상 그를 돕지 않기 때문이다.기왕에겐 절박한 상황인데, 몹쓸 계집이 사람을 시켜 다섯째를 오게 할 줄이야. 일곱째까지 올 줄은 더군다나 몰랐다.기왕은 지금 속으
현대로 돌아가 가족과 한자리에 모이니 모두 즐거워 보였다. 원경릉은 집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데리고 휘종제와 건종 태자를 알현하러 갔다.휘종제와 건종 태자도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아이들이 유학하러 와서 앞으로 여기서 산다는 얘기에, 휘종제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앞으로 아이들에게 드는 모든 비용은 전부 자기들이 대고 방학에 북당으로 보내고, 개학 때 맞이하는 것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외갓집엔 모두 출근하는 분들 뿐이라 불편할 거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일단 감사드리고 북당에서 가져온 술과 검, 궁에서 가져온 흙 한 줌과 돌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우문호가 준비한 것으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 사람은 고향의 흙과 돌이 그리운 법이라고 했다.휘종제와 건종 태자가 흙과 돌을 보더니 손에 들곤 통곡하기 시작했다.원경릉이 두 사람을 위로한 뒤, 그들은 슬퍼하며 ‘언제 한 번 가볼까, 딱 한 번 보더라도, 아무도 만날 수 없어도 좋을 텐데.’라고 한탄했다.“긴 세월 고향 강산을 꿈에도 잊지 못했으나 돌아갈 수는 없었네..”원경릉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이 시큰해졌다. 휘종제와 건종 태자의 슬픔을 원경릉은 아주 잘 아는 것이 자신도 전에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단지 그들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원경릉도 뭐라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 어쨌든 이건 안풍 친왕이 진행한 일로 정말 돌아가고 싶으면 아마도 안풍 친왕이 준비해 줄 수 있었다. 북당으로 돌아가면 안풍 친왕에게 상황을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입학 준비를 마친 뒤, 원경릉은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아이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충만했기에 그녀와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그 점이 씁쓸했다.아이들이 크면 놔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얘들은 아직 다 안 컸잖아.돌아가기 전에 원경릉은 양여혜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양여혜가 기화를 데리고 올 줄 몰랐다.원경릉은 기화를 보자 머리가 아픈 게, 기화는 또
‘이제 어머니가 계시니 술 먹으면 몸 상한다고 말해? 예전에는 왜 말 안 했어?’다행히 누군가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 있었다. 회왕은 벼슬에 오른 뒤로 술을 조금 하기 시작했는데, 많이는 안 마시고 한두 잔만 마실뿐, 석 잔째면 아내를 보러 집에 갔다.즐겁게 박원과 소홍천을 보낸 우문호와 원경릉은 만두와 아이들을 유학 보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비록 환타와 칠성이는 아직 어려서 2년 정도 더 남아있었지만, 유치원 다니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며,형들이랑 꼭 같이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 원경릉과 우문호는 골치가 아파졌다.그나마 우문호에게 약간 위로가 된 건 딸만큼은 곁에 있다는 사실로, 칠성이와 환타가 하도 졸라대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가가, 다 가.”아이들은 기뻐했으나 눈 늑대와 호랑이도 여전히 성깔을 부리며 따라가겠다며 소란을 피웠다.현대에서 어떻게 호랑이와 눈 늑대를 키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였다. 게다가 이 동물들은 아주 영민해서 사람 일을 이해해, 꼬마 주인들이 이번에 가면 열흘 보름이 아니라 몇 년 있다가 온다는 걸 알고 아무리 혼을 내도 말을 안 들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만두가 이리저리 구슬려서, 동물들에게 자기들에겐 여름방학, 겨울 방학이 있고 학기 중에도 쉬는 날이 있어서 1년에 합치면 적어도 4개월은 이쪽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적어도 1년에 절반 가까이는 같이 있는 거라고 위로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비록 시공간은 떨어져 있어도 같이 자라기를 원할 것이다. 유학을 가는 일이기 때문에 원경릉이 직접 따라가서 진학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이 일은 전에 현대에서 언급한 적이 있어, 로양이 아이들에게 호적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물론 아이들을 호적에 올리려면 원경릉 부부도 호적에 올려야 하는 것이, 아이들을 오빠 이름 아래 입적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이 일은 로양이 원만하게 처리해 원경릉 가족 모두 호적을 가지게 되었다.게다가 원래 집을 사뒀기 때문에, 부근 학군에 진학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원경릉은 다섯
대오가 경성으로 돌아올 때 홍엽도 원숭이와 같이 돌아왔는데, 그도 풍도성에서 힘을 보탰다. 사실 홍엽이 안 가도 안풍 친왕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둬서, 안풍 친왕 능력이면 안지여 정도 상대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이리 나리 일행은 경성에 도착해, 우선 집으로 돌아가 공주와 천행이를 보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은 뒤 입궁해서 경과를 보고했다.사적인 원한은 한두 마디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지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으며 아직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남은 건 정사를 논하는 것이었다.“어머니와 같이 풍도성에서 보름 정도 지내며 기본적인 민심을 파악했는데, 천문 세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직 명망이 높아 보입니다. 풍도성 백성들은 사실 세금이 너무 많고 경제가 번영한 성과가 전부 안지여 수중에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안지여의 통치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풍도성을 접수한 것에 백성들 대부분은 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천하태평이냐 하면 그럴 순 없는 것이, 일부는 성주가 자기들의 황제라 여기고, 조정이 풍도성을 접수한 것이 풍도성이 침략당했다고 여겨 나중에 약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부를 임명하실 때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우문호가 말했다. “흠, 큰할아버지께서 천거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박원이라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그러자 이리 나리의 눈빛이 빛났다. “제 아버지가 추천한 사람이니 전 찬성입니다!”“아버지?” 우문호가 의아해하며 이리 나리를 쳐다봤다. ‘안풍 친왕비가 사부님이면 안풍 친왕은 사부의 남편 아닌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지? 사부님의 배우자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흠, 안풍 친왕은 제 아버지십니다!” 이리 나리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어쨌든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 없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진정한 아버지였다.“하하하!” 우문호도 그저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이리 나리가 퇴청할 때 우문호가 이리 나리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무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