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지 모르게 요즘 걸핏하면 졸리고 피곤해. 오늘은 마차에서 꾸벅꾸벅 졸았다니까?” 원경릉은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그럼 이제부터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어.” 우문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했다.“이제 별일 아니면 밖에 안 나가려고. 만사가 다 귀찮다.”원경릉이 아랫배를 만지며 웃었다.“움직였다! 만져봐!”원경릉이 우문호의 손을 자신의 배 위에 올렸다.“배가 금방 커진 것 같네.” 우문호가 그녀의 배를 보았다.“응. 요즘 잘 먹어서 살이 쪘나 봐. 이제 돼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야.” 원경릉이 말했다.“돼지 중에서도 가장 예쁜 꽃돼지가 되겠네.” 우문호가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이 웃으며 그의 발을 밟자 그는 발등을 움켜쥐고 그녀를 응시했다.“근데 경릉아 어찌 얼굴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구나. 나랑 떨어져 있는데 얼굴이 폈네?” 우문호가 말했다.“치!”원경릉이 그를 노려보았다.우문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정말 신기해. 전에는 내가 널 밀어내기 바빴는데, 지금은 없으면 허전하고 보고 싶고 너랑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 우문호가 말했다.“전에 알던 원경릉이 아닌가 보지.” 원경릉은 그런 그를 보며 웃으며 눈동자를 반짝였다.우문호는 그녀의 배에 귀를 대고 아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예전의 원경릉은 의술도 몰랐고, 동정심도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여자였거든.”원경릉은 우문호의 말에 깜짝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녀의 배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경릉아 뱃속에 사람이 하나가 들어있는 게 맞지? 근데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설마…… 쌍둥이는 아니겠지?” 원경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심장 박동을 들을 수 있는 거 있잖아. 그거로 들었을 때 두 개의 심장 박동이 들렸어?” 우문호가 물었다.“나는 태동 수만 측정했지, 박동 측정은 하지 않았어.”원경릉은 손가락으로 임신 개월 수를 세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쌍둥이라면 지금 청진기로
“왕야께서 헛소리를 하시는 거야. 그걸 믿니?” 원경릉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나도 키우기 힘든데, 둘이라니…… 원경릉은 쌍둥이 생각만 해도 눈이 질끈 감겼다.엄마가 된다는 것도 적응하는데 한참이 걸렸는데 한 번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니 원경릉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원용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를 바라보며 “원누이, 제가 한 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저도 만져보고 싶습니다!” 사식이도 벌떡 일어났다.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다가 얼굴이 숯검댕이가 된 서일이 들어오며 사식이의 말을 듣고 “무슨 좋은 게 있길래 만져본다고 그럽니까?”라고 말했다.그 말을 들은 우문호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서일을 노려보았다.원경릉은 쓴웃음을 지었다. 임신을 하고 나니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배로 향했고, 만져보고 싶다는 둥 마치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전시품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원경릉은 원용의와 사식이를 보고 “그래, 이리 와서 만져 봐.”라고 말했다.둘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배에 손을 올렸다. 마치 귀한 보물을 만지듯이 깨질까 두려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 “세자, 이모가 한 번 만져보겠습니다.” 사식이가 경건한 목소리로 큰 숨을 내쉬더니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언니! 안에 사람이 있어요! 너무 신기합니다! 사람 몸 안에 또 사람이 있다니!”사식이는 원용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원용의는 사식이의 말을 듣고 웃었다. “너는 임신한 것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게다가 원누이와 오랫동안 같이 지냈는데 뭘 그렇게 놀라느냐?”“전에는 만져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죠! 아이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만져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을 느끼니 너무 신기합니다!” 사식이가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사식이의 모습을 본 우문호도 처음으로 원경릉의 배를 만졌을 때의 감정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제가 세자의 이모가 될 수 있을까요?” 사식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당연하지!” 원경릉이
원경릉의 맥을 짚던 어의가 말을 더듬으며 “왕야…… 소신이 왕야께서 저를 찾으신다고 하여 왕비의 상태가 좋지 않은 줄 알고 금군에게 말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쉿. 어의는 맥을 짚어서 태아의 맥박에 이상한 점이 있는지만 확인하거라.” 우문호가 말했다.어의는 엄숙한 표정으로 왕비의 맥에서 이상한 점이 있는지 눈을 감고 신중하게 맥을 느꼈다. 그러나 왕비가 이전까지 별 증상이 없었고 맥박도 안정적이라 크게 이상한 점이 없었는데, 왜 지금 와서 맥을 다시 짚어보라는 건지 어의는 의아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수차례 맥을 짚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조어의가 난처한 표정으로 손을 떼더니 “왕야, 맥이 조금 이상한 것은 사실이나 쌍둥이임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확신할 수 없단 말이야? 조어의 그거 하나도 진단을 못 내리면서 황실 어의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우문호가 어의를 몰아붙였다. 조어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활활 타오르는 난로를 보았다. “왕비님께서 지금 약을 많이 드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무우환이나 자금탕을 많이 먹으면 간혹 이런 현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지금 맥박으로는 쌍둥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그럼 언제 확인해야 알 수 있느냐? 만약 쌍둥이라면 더 신경을 써야 할 텐데……”우문호는 쌍둥이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초산에 쌍둥이면 원경릉이 힘들까봐 걱정이 되었다.“한두 달만 지나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어의 그럼 두 달 후에 뵙겠습니다.”원경릉이 말했다.“예, 그럼 소신 물러가겠습니다.”만아는 조어의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섰다. 조어의가 떠난 후 우문호는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두 달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만약 쌍둥이라면 애를 낳을 때 얼마나 위험하겠느냐!”“왕야 그런 말은 삼가세요. 왕비께서는 젊고 건강하시니까 아이를 무사하게 낳을 겁니다. 임신 중에 걱정은 독입니다. 좋은 생각만 하시고 안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문호는 말없이 손으로 이마를 닦았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난로를 힐끗 보았다. 난로 안에 불이 어찌나 활활 타오르는지 그 모습이 우문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왕야, 도대체 왕비 뱃속에 아이가 몇이라는 겁니까?” 사식이가 물었다. 우문호는 손을 저으며 “재촉하지 마라. 본왕이 지금 듣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다.“잘 들어봐.”원경릉은 의자에 머리를 가볍게 대고 한숨을 쉬었다. 우문호는 스스로 청진기를 움직이며 숨까지 참으며 소리에 집중했다. “왕야, 도대체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원용의도 참지 못하고 우문호를 재촉했다. 우문호는 뻘뻘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들었다. “셋!”“셋이요?” 원경릉을 제외한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문밖의 탕양과 서일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우문호가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지며 큰 소리가 났다. “왕야!”서일과 탕양이 깜짝 놀라 기절한 우문호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우문호를 일으켜 그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잠시 후 우문호가 휘청거리며 일어나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예전에 태상황님께서 비취를 세 개 주셨지? 설마…… 당장 그거 돌려드려야겠다!”“왕야, 일단 진정하세요! 잘 생각해보면 좋은 일입니다!”탕양이 우문호를 끌어당겼다.우문호는 탕양의 말에 화가 났다. 그는 몸이 떨리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방방 뛰었다.“이게 어떻게 좋은 일이란 말이야? 한 번에 셋을 임신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탕양은 셋을 낳은 여자를 본 적이 있느냐? 쌍둥이도 위험한데 세 쌍둥이라니! 자칫 잘 못하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그걸 알고도 좋은 일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냐?”희상궁이 황급히 우문호를 잡아당기며 “왕야, 진정하시지요. 왕비께서 놀라십니다!”라고 말했다.우문호는 희상궁의 말에 고개를 돌려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원경릉은 날뛰는 우문호를 보자 덜컥 겁이난 듯 눈시울이 붉어졌
“적어도 사람이 진맥을 하는 것보다는 정확할 겁니다.”원경릉이 희상궁에게 답했다. 우문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원경릉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의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서일을 불러 부병을 형녕각(邢寧閣) 주변에 배치해서 엄호하도록 했고, 문지기와 하인들에게 정후부를 수시로 순찰하게 했다. 만약 도중에 의심스러운 사람이 나타나면 즉각 체포하라고도 지시했다.그리고 사식이와 만아에게 왕비의 곁을 지키고 만약 일이 생겨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워야 한다면 한 사람은 꼭 그녀의 곁을 지키도록 교육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마친 우문호는 원경릉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원경릉은 그를 보고 조용히 “가서 일 봐. 하루 종일 여기 있으면 부황께서 화를 내실 거야.”라고 말했다.“부황께서 정후부에 와서 너를 볼 수 있도록 하셨어.”“다섯째, 그는 황제야. 넌 부황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그는 이미 관용을 베풀었고 그 덕에 네가 지금 정후부에 와서 나를 볼 수 있는 거야. 만약에 네가 부황을 속인다면 분명 부황께서 크게 화를 내실 거야.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경조부로 돌아가 일을 하는 게 좋겠어.”그는 원경릉의 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아무리 자신의 아버지라고 해도 부황은 황제이다. 황제의 권위에 반항을 하는 것은 대역죄임을 우문호는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원경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일해. 난 괜찮으니까.”원경릉이 그의 어깨를 다독이더니 “아 맞다! 배에 셋이나 들어있으니까 임신기간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거 알고 있지?”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우문호는 눈을 반짝이며 “너는 내 머릿속에 그런 생각만 가득한 줄 아느냐? 너만 건강하다면 내 욕구정도는 참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정말?”“정말이다.”“그래, 그럼 일 잘 하고, 내일 보자.”“하…… 널 두고 발이 안 떨어져. 불안해 죽겠다.”“네가 그러면 내가 더 불안해져.”우문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참으로 경사입니다! 어떤 훌륭한 어의가 세 쌍둥이임을 진단했다고 합니까?”조어의가 물었다.“그 지역의 용한 어의라고 해요. 확실한 건 아니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손자며느리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래요.”노마님이 말했다.“걱정스러운 일인 건 확실합니다.”“심지어 초산이라고 해요.”“초산이라면 더욱 주의해야 할 일들이 많지요. 하나만 품어도 아이에게 영양 공급하기가 벅찬데, 셋이면 산모가 쉬지 않고 영양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숨 쉬는 방법부터 운동하는 방법까지 다 달라요. 아마 6개월 정도만 돼도 무거워서 걷기 힘들 겁니다. 셋이 배에 들어있으면 조산을 할 수도 있으니 8개월이 지나면 어의를 상주시켜야 할 겁니다. 인삼을 먹이는 것도 좋아요. 산모가 기력을 잃지 않도록 좋은 음식도 많이 먹여야 합니다. 또 아이만 전문적으로 보는 어의도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나오면서 건강하지 않다면 어의가 신경을 써야 하거든요. 제가 예전에 세 쌍둥이 산모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산모가 아이를 낳던 도중에 하혈을 심하게 했고, 결국은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어요. 산모 그리고 아이 셋 모두 죽었습니다.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던 도중에 사망해서 아이들이 안에서 질식해 죽었거든요.”말을 하던 조어의가 노마님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노마님,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얼굴이 창백하십니다.”노마님은 손발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 쌍둥이를 낳다가 원경릉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노마님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노마님, 괜찮으십니까? 정신을 좀 차려보세요!” 조어의가 노마님에게 소리쳤다. 노마님은 천천히 눈을 뜨고 조어의를 보았다.“난로가 너무 뜨거워서 공기가 답답했는지 머리가 핑 돌았네요.”“그럼 창문이라도 열어서 환기를 시키겠습니다.”조어의는 추운 날씨에 창문을 열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세 아이를 모두 건강하게 낳는다면 그야말로 경사입니다!” 조어의가
노마님은 조어의가 기절하는 것을 보고 손씨 아주머니를 불러 그를 일으키라고 했다. 어의는 정신을 차린 후에도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울상을 지으며 노마님을 바라보았다. “노마님, 도대체 누가 세 쌍둥이라고 진단을 내린 겁니까?”“왕비가 직접 내리셨습니다.”조어의는 천천히 일어서며 “그럼 이 사실을 황상께 알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노마님은 웃으며 “조어의, 그럼 이 진단을 확신하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그…… 그건……” 조어의가 당황한 표정으로 노마님을 보았다. “만약 왕비께서 오진을 했다면요? 오진 사실을 황상에게 알린 죄는 어떤 처벌을 받을까요?”노마님이 물었다. “그건……”“세 쌍둥이라는 것은 지금 섣불리 진단할 수 없으니, 나중에 황상께 보고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황상께서도 예상하지 못한 세 쌍둥이라면 기쁨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일단은 지켜봅시다.”조어의는 어찌할 방도가 없어 머뭇거리며 노마님을 바라보았다. “그럼 노마님의 뜻은?”“일단 이 사실은 우리끼리만 압시다. 나중에 맥이 뚜렷해져서 세 쌍둥이라는 것을 조어의가 확인을 하면 그때 황상께 말씀을 드리면 됩니다. 그동안 어의는 많은 의학서적을 탐독하십시오. 이런 일은 드물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차질이 없게 완벽한 방법을 생각해내야 합니다. 왕비와 아이들을 꼭 지켜야 합니다.”“노마님, 어의 인생을 걸고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어의의 말에 노마님은 한시름 놓았다. “어의의 손에 이 나라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지금부터 어의는 왕비만 신경 쓰십시오.”노마님의 말에 부담이 된 어의는 귀라도 막아 말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노마님의 날카로운 눈빛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의는 노마님의 정원에서 나와 책더미 속에 틀어박혀 밥 먹는 시간에도 의학 서적을 보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의 전공은 산부인과가 아니지만 조어의는 지금 이 순간부터는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번에 왕비가 세 아이를 모두 순산한다면 그는 당대의 최고 명의로 칭
우문호가 부병을 보낸 뒤로 정후부는 완전히 작은 초왕부가 되었다. 정후부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은 부병의 검사를 받아야 했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중 가장 힘든 사람은 주방에 있는 하인들이었는데, 고기나 식품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면 방금 사 왔다고 해도 버려야 했다. 하인들은 너무 힘들다고 투덜거렸지만 노마님이 허락하신 일이니 어쩔 수 없이 손씨 아주머니의 지시에 따랐다. 그뿐 아니라 후부의 분위기도 삭막해서 모두들 예민해졌다. 후작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후부를 삼일 동안 비웠는데, 하인들은 후작이 빨리 와서 이 삭막함을 정리해주길 바랬다. 며칠 전 원경릉의 형제인 원륜문이 와서 원경릉에게 많은 서적들을 가져다주며 국자감 냉정언에게 빌려왔으니 잘 읽어보라고 했다. “왕비, 냉대인(冷大人)이 말하길 뱃속의 아이의 소양을 길러주는 데에 가장 좋은 것이 독서라고 합니다.”책을 좋아하는 원경릉은 하루 종일 누워있으면서 할 일이 없었기에 눈앞에 놓인 수많은 책들을 보고 매우 기뻤다. 원경릉이 원륜문에게 감사의 말을 하려는 찰나 조어의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굳은 표정으로 원경릉에게 말했다.“눈이 상하십니다! 독서는 삼가십시오!”“저 시력 좋아요!” 원경릉이 말했다.조어의는 그녀를 보며 “왕비 소인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노마님은 원경릉에게 조어의가 이미 이 일을 알고 있다고 귀띔을 했기에 원경릉은 조어의가 나서는 게 이해가 갔다. 원륜문은 정색을 하고 조어의를 보며 “뱃속에 아이에게 가장 좋은 태교가 독서라고 합니다. 견문도 넓힐 수 있고 천하를 배워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 있는 독서를 왜 금하십니까?”라고 말했다.“소인 그저…… 왕비님이 눈이 상하실까 봐……”“눈이란 자고로 글씨를 보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원륜문의 말에 조어의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숙였다. “한두 시간이 최대입니다. 그 이상으로 눈을 사용하는 것은 좋
위왕이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저는 돕지 않습니다. 택란이 폐하를 사모한다고 말하거나, 혼인을 하고 싶다고 하지 않는 한, 꿈도 꾸지 마십시오!”“그럼 난 기다리겠소!”경천이 답했다.위왕은 그의 눈빛에서 보이는 익숙하고도 강한 결단력을 보며 말했다.“정말 고집이 세시군요. 대체 어찌 말해야 할까요? 세상엔 수많은 여인이 있습니다. 택란보다 더 뛰어난 여인도 있을 텐데, 어찌 택란만 붙잡고 이러십니까?”경천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확고하게 느껴졌다.“나는 오로지 하나만 바라볼 뿐이네. 내 생애 다른 여인을 얻을 생각도, 후궁을 들일 생각도 없소. 택란만 있으면, 나는 그 누구도 마음속에 두지 않네.”위왕과 안왕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경천의 말에 다소 감동하였다.그러나 약속을 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스무살, 서른이 되어서도 오늘 한 말을 기억하길 바랍니다.”위왕이 말했다.그러자 경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택란이 돌아오자, 다시 입을 열었다.“어제 내가 한 일은 조금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전부 없던 일로 생각해라.”“예!”택란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하기도 힘들 정도로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우리는 이제 좋은 벗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 나를 벗으로 생각해 줄 것이냐?”경천이 미소를 지으며 택란을 바라보자,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럼요. 저희는 벗이니깐요.”위왕은 그제야 경천이 그렇게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택란에게 계속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 두 나라가 협력하는 상황이니, 요구를 제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들이 궁을 떠나려 하자, 경천은 말리지 않고 두둑한 선물을 준비해 그들을 궁 밖으로 모시도록 했다.그들이 떠난 후, 경천은 통천각에 올라가 그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천천
“이득을 취할 수는 있지만, 약속은 해줄 수 없다.”위왕이 웃으며 말하자, 택란또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하하하. 참 현명하십니다!”“그럼! 국사는 국사, 개인적인 일과 섞여서는 안 된다.”택란도 동의했다.“그럼 저도 오늘 밤 장관에 머물겠습니다. 내일 저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시지요.”“그래,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함께 가마.”안왕이 말했다.택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고 물러나,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나갔다.다음 날 그녀는 두 친왕과 함께 동행하였고, 궁에 도착하자마자 삼 태감이 직접 그들을 어서방으로 모셨다.경천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안색이 다소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택란을 보자 눈동자, 그의 눈망울은 여전히 빛이 났다.협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러 왔기에, 안왕과 위왕도 편견을 내려놓았다. 경천이 택란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두사람은 못내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그들 역시 젊었었고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었기에, 그 사람을 위해 유치하고 때로는 무서운 짓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경천이 한 일도 그저 좋아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비록 책략이 다소 대담하긴 했지만, 혈기 왕성한 나이니 이해할 만했다.경천은 상석에서 내려와 직접 두 친왕에게 사과를 올렸다.“어젯밤 내내 생각해 보니, 어제 일로 두 분께 큰 불편을 가져다주었을 것이오. 부디 용서해 주시오!”위왕은 급히 일어나 예를 올리며 말했다. “폐하,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어젯밤 일은 저희도 이해합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 두 나라가 자주 오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작은 일이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경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는 말이오. 앞으로도 자주 오가며 지낼 것이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택란을 힐끗 쳐다보았다. 택란은 계획서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뜨거운 시선을 느낀듯 고개를 들었다.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고, 하얀 볼도 살짝 불그스레해졌다.두 나라 모두 광물 채굴
위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혹시 복수하려는 것이냐?”“복수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안왕은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혼자 감당하게 한 위왕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위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찌 다섯째에게 설명할지 생각해 보거라. 보책은 아직 네 손안에 있잖냐.”안왕은 여전히 두꺼운 보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가만히 들고 있기도 거슬렸다.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꾀병을 부리고 위왕 혼자 오게 한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막 침대에 누웠을 때 택란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로 택란을 만나러 나갔다.안왕은 보책을 가지려 했으나, 택란에게 넘겨받으면 곧 금나라 황후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어린 황제는 아직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택란은 두 분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말했다.“큰아버지, 오늘 일은 아바마마께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안왕도 원하던 바였기에 다급히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네 아버지한테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예.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택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버지였다.“어린 황제도 참, 어린 시절의 약속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령 너와 혼사를 약속했다 해도, 네가 승낙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안왕이 말하자 택란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때 이미 동의했었습니다.”다만 그때는 그저 그를 달래, 그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승낙했다니?”안왕과 위왕은 서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이 일은 전적으로 어린 황제의 탓도 아니다.“하지만 넌 그때 겨우 여덟, 아홉 살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 테니, 동의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위왕이 재빨
“폐하, 공주께서 폐하가 드리신 선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언제 올라온 건지, 진이는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응.”경천은 뒤돌아 상자와 두 개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배우며 수많은 옥을 망친 끝에 겨우 지금과 같은 모습을 조각해 낸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아직 어리셔서 폐하의 노고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진이가 위로하자 경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받지 않는 것이다.”진이가 잠시 멈칫했다.“너무 잘 안다니요?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요.”경천은 이미 실망한 기분을 떨쳐버렸고, 대신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진아, 나는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먼저 좋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단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에게 한 나라의 군주라 하지 않았냐?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아... 그런 것입니까!”진이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속상해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택란 일행은 궁을 나섰다. 냉명여가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어찌 황제가 주신 옥패를 받지 않으시나요? 그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택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절대 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단 있는 황제이고, 뛰어난 통치로 금나라가 정권 이양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두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그럼, 어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냉명여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택란이 답했다.“그 옥패가 약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명여야, ‘약속’이라는 말은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그도 누나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한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 아닙니까?”“그래. 하지만 나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