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내가 만아를 보내준 이유입니다. 생명에는 귀함과 천함이 없는데 왜 어떤 이들의 삶은 버러지만도 못하게 죽음을 맞이한단 말입니까? 밥 한 끼를 먹자고 하는데도 덜덜 떠는 저 자를 보세요. 저 사람이 배가 불러서 저러겠습니까? 저 자는 배가 고파서 던져주는 음식을 얻어맞으면서도 달려가 받아먹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배를 곯았으면 사람이 그러겠습니까? 근데 지금을 보세요! 곤장을 맞을지언정 자신의 신분이 천하다고 느껴져 저와 밥 한 끼도 먹지 않겠다고 하지 않습니까.”원경릉은 희상궁을 보며 울분을 토했다.“왕비님께서는 저 자와 같지 않습니다. 왕비께서는 존귀한 신분입니다.” 희상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원경릉을 타일렀다.원경릉은 이 세상은 자유와 평등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서부터 신분이 있는 세상…… 그런 세상에 나고 자랐으니 당연히 저럴 수 있다.하지만 원경릉은 공평한 사회에서 태어나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모든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배웠다. 눈 떠보니 왕비였던 원경릉은 왕부의 모든 하인들이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것이 적응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참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잡초 뽑듯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혼자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금도 마찬가지다. 원경릉은 고만아가 초왕부로 온 이유를 알고 싶었을 뿐, 고만아에게 곤장 50대를 내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문호와 원경릉의 생각 차이로 다투면서 상황이 이렇게 크게 번졌다.원경릉은 우문호가 고만아를 벌주기 위해 곤장 50대를 때리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원경릉이 그녀를 감싸는 게 화가 나서 화풀이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둘 중 어떤 이유라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정말 고만아 말대로 악의 없이 초왕부에 일을 하러 왔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왕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원경릉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자신을 불안
이 시대에 온 이상 예전의 나는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게 쉽지 않다.이곳에 온 지 오래됐다. 가만 생각해 보아도 원주인 원경릉도 지금의 그녀도 그렇게 자상하거나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어떻든 지금의 그녀는 생명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며 쉽게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사식이는 고만아 때문에 우문호와 말다툼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어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을 쉽게 결정하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희상궁이 들어와서는 침상에 올려진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왕비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몸 상하십니다.”“호명은?”원경릉은 몸을 추스르며 물었다.“녹주가 데리고 가서 밥을 먹였습니다. 왕비께서 호명이 눈에 밟히신다면 왕부에 사소한 일이라도 도맡아 하게끔 하겠습니다.”희상궁이 원경릉의 어깨를 다독였다.“상궁께서 전에 제게 물으셨죠. 왜 자신을 죽이지 않고 곁에 두었냐고요. 그때 제가 태상황님께서 희상궁이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대답했죠.”“예 기억합니다. 왕비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셨습니다.”원경릉은 잠시 침묵했다. “태상황님께서 희상궁을 어여삐 여기는 것은 맞으나 최종 결정은 제가 했습니다. 저는 제가 생명을 다룰 수 있는 심판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제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희상궁을 살려두었습니다.”원경릉의 말을 듣고 희상궁은 원경릉이 고만아를 살려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허나 왕비……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이 또한 왕비께서 어쩔 방도가 없습니다.”“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사람은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꼬투리 잡아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버린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척박해지겠습니까.”“그래도 너무 위험한 선택입니다. 고만아를 죽인다면 적어도 왕비께서는 두 다리 뻗고 주무실 수 있잖습니까.”원경릉은 속절없이 한숨만 내뱉었다.“왕비의 마음이 여리고 착한 것…… 소인이 잘 압니다. 하지만 왕비께서는 단 한 번이라도
우문호가 탁자를 내리치자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왕비를 믿으라고? 자신의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여인을 어떻게 믿겠어?”그는 술잔을 새로 꺼내 술을 가득 담아 마시고는 입을 닦았다.“나도 이렇게 말다툼하는 거 지겨워. 왕비가 본왕에게 주명취가 달려들었을 때 즐겼지 않았냐고 하더라…”“왕야, 주명취가 아니라 주명양 아닙니까?” 냉정언이 그의 말을 고쳐주었다.우문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냉정언을 보며“주명취가 누구야? 아! 아!”라고 말했다.그는 다시 탁자를 내리치며 “주명양이지! 내가 방금 주명취라고 했느냐? 아닌데?”라고 말하자 냉정언이 그의 말실수를 지나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주명취라고 했습니다.”우문호는 그를 노려보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왜 그렇게 말이 많아?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원경릉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봐.”냉정언은 손을 저으며 “아니, 왕야께서 말을 해보세요.”라고 말했다.“몰라… 본왕은 모르겠다…” 그는 머리가 아픈 듯 고개를 저으며 “본왕이 미쳐버릴 것 같아. 왕비가 나를 화나게 해서 미쳐버리겠다고! 오늘 왕부에 돌아가면 내가 반드시 뺨을 올려부칠 것이야!”라고 말했다.그는 두 손으로 탁자의 가장자리를 잡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술에 취해 혀가 꼬였지만 그는 오늘 있었던 일은 냉정언에게 모두 말했다.우문호의 말을 듣고 냉정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얘기를 들어보니 왕야가 일을 괜히 크게 키우셨군요. 초왕비가 무슨 말을 했든 제 생각엔 별 뜻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왕야가 과민반응한 것 같네요. 으휴…… 거기서 공주부 얘기는 왜 꺼내가지고…… 원래 지난 일은 덮어두는 것이지 자꾸 꺼내면 독이 됩니다. 왕야의 말대로 고만아를 살려둔 일은 왕비께서 지나치게 자애로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전쟁 나가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만약 왕야 뜻대로 고만아에게 곤장을 내리쳤다면 초왕부의 뜰에서 사람이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감옥에서 처형당한 수빈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취한 우문호가 원경릉을 찾아가다우무호가 입을 삐죽거리며 차갑게: “안 먹으면 안 먹는 거지, 누가 신경 쓴데?”“예, 한 끼 안 드셔도 별 일 없지만, 희상궁 말이 왕비마마께서 목욕하실 때 부딪혀서 넘어지셨는데 그 뒤로 계속 배가 살살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의원을 부르지 않으신다는 군요.”우문호가 눈썹을 찡그리며, “죽든 말든 상관 마라.”“예,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럼 왕야는 오늘밤 어디 묵으시겠습니까? 왕야께선 왕비마마와 같은 침실에 묵고 싶어하지 않으실 테니.” 탕양이 물었다.“누가 걔랑 같이 있고 싶데? 난……” 우문호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서, “왜 의원을 안 불러? 넘어져서 어디를 다쳤는데? 아주 그냥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좀 내야겠어.”말을 마치고 저벅저벅 안으로 걸어 들어가 문을 박차자 ‘뻥’하고 창틀이 흔들릴 정도로 소리가 났다. 희상궁이 안에서 우문호가 분노에 찬 얼굴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얼른 우문호를 만류했지만 우문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갔다.우문호는 곧바로 원경릉 앞까지 가서 여전히 취기가 도는 눈으로 원경릉을 한참 노려보다가 완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원경릉 곁에 앉아 쫑알쫑알 고자질하며: “원 선생, 구사가 내 가슴을 발로 찼어, 돌아올 때 가슴이 엄청 아팠거든, 빨라 좀 봐줘, 심장까지 다친 거 아닌지 어쩌면 뼈가 부러졌을지도 몰라.”우문호의 노기등등한 모습에 허둥지둥 따라 들어온 탕양이 이 말을 듣고 천천히 가리개를 내렸다. 왕야는 왕비 앞에선 원칙이고 나발이고 없었다.원경릉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우문호를 보더니 약 상자에서 청진기를 꺼내더니 “누워!”우문호는 얌전히 누워서 고요한 눈빛으로 원경릉을 보는데 여전히 억울한 얼굴이다.원경릉이 우문호의 심장 소리를 듣더니 청진기를 내려 놓고, “괜찮아.”“괜찮아?” 우문호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보더니 고통스런 표정으로, “하지만 아직도 아파, 이렇게 살살 만져도 엄청 아프다고.”원경릉이 우문호를 보니 얼굴이 귀까지
두 사람 화해한 걸까우문호가 한 손으로 원경릉을 너무 꼭 끌어 안아서 원경릉은 숨도 못 쉴 지경이다. 우문호는 ‘어’하더니, 온 몸에 긴장이 풀리며 “너 화 난 거 아니지? 내가 한 말은 전부 헛소리였어, 마음에 두지 마.”우문호의 온 몸에서 술 냄새가 뿜어져 나와 원경릉도 약간 취할 지경이다.원경릉은 몸부림을 쳐도 벗어나질 못하고 우문호의 가슴팍에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우문호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원경릉은 밤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원경릉은 우문호의 매끄러운 옷에 얼굴을 묻자 코가 시큰거리더니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원경릉이 흐느끼는 것을 느낀 우문호는 자신의 두 손으로 눈물을 다 닦아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화가 가라앉은 후 우문호는 비로소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병신 같았는 지 깨달았다.원경릉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 손을 치우고 우문호는 손가락으로 살살 그녀의 눈물을 닦으며 마음 깊이 후회하며: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 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말 하는게 아니었는데.”원경릉이 우문호의 거칠거칠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인 채, “나도 잘못 했어. 하지만 우리가 어떤 걸로 싸우든지 그런 말은 다시는 하지 말자. 마음이 너무 아파.” “맹세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을 게. 다시는 안 해.” 우문호가 원경릉을 끌어안자 냉정언부(冷靜言府)에서 들끓던 분노가 거기서 한바탕 쏟아내서 뒤라 그런지 눈 녹듯이 싹 사라졌다. 단지 체면때문에 구사와 냉정언 앞에서는 고자세를 취했지만, 사실 문을 박차던 순간부터 우문호는 계속 후회하며 걱정이 됐다.“너 밥 안 먹었다고 탕양이 그러더라.” 우문호가 원경릉을 놔주고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배가 안 고파서 못 먹겠어.”“나도 안 먹었어, 너도 나랑 같이 좀 먹자.” 우문호가 반대할 틈도 없이 얼른 나가 준비시켰다.희상궁이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놔서 ‘배고프다’는 한 마디에 바로 대령했다.서일이 밖에서 몰래 듣다가 사식이한테 쫓겨나며, “뭐하는 거예요?”“왕야께서 그 녀석 일
우문호와 원경릉의 맹세와 희상궁우문호는 원경릉이 아직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원, 화내지 마, 그런 말 한 거 정말 후회하고 있어.” 우문호가 후회막급이라 깊은 시름에 잠긴 표정이다.원경릉은 복도에 의자를 놓고 앉았는데 복도 앞에 양 뿔로 된 풍등이 스무 걸음 앞에 걸려 있다. 황혼 같은 불빛에 우문호의 멀끔하고 온화한 얼굴을 비추고, 눈썹뼈에서 귀부근까지 일직선으로 선명하게 그어졌던 흉터도 상당히 흐려졌다.원경릉이 우문호를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 화 안 났어, 정말로.”우문호는 원경릉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그녀는 전혀 생기가 없고 정숙한데 눈빛은 쓸쓸하고 얼굴 윤곽이 부드러운 빛에 포위되어 일종의 환각을 보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했다.원경릉의 입술이 스마일 모양을 그리며 미소를 띠려고 노력하지만 이 미소도 쓸쓸하기만 하다.원경릉의 이런 모습을 보고 우문호의 마음이 갑자기 아파왔다.“나 정말 화 안 났어.” 원경릉이 우문호의 얼굴을 매만지며 손가락으로 우문호의 흉터를 덮으며 가볍게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난 그냥 어떤 일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래. 좀 우스운 원칙 문제인데 그 문제가 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해.”우문호의 마음이 무엇인가에 격렬하게 부딪혔다.그는 빠르게 고개를 들고 원경릉을 보니 눈에 무언가 밀물처럼 가득 차 있고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너……뭐라고 했어?”원경릉이 웃으며 우문호를 보고, 가볍게 탄식하며 물방울 떨어지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래, 내가 왕야를 좋아한다고 말했 적이 아마 없었을 거야.”우문호가 순식간에 원경릉을 품 안에 넣고 자신의 숨결로 그녀 전부를 덮으며, 우선 입술로 그녀의 이마에 도장을 찍고 그녀의 입술을 찾아 내려갔다.한참 뒤 우문호는 숨을 내 쉬고 원경릉을 꼭 끌어 안은 채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만지며 맹세와 다름 없이 침착하게 말하는데: “사랑해, 평생 네 손만 잡기를 원해. 다른 사람은 없어, 만약 어느 날 나 우문호가 너 원경릉을 배신하면 지옥에 떨어져서
기왕비가 듣고 온 소문우문호와 원경릉이 화해했다.하지만 두 사람 다 태도가 미묘해서 과거의 일은 들추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애를 썼고, 심지어 우문호조차 다리 저는 거지 호명(胡名)에 대해 묻지 않다가, 원경릉이 호명을 초왕부에 거두었다는 얘기를 서일에게 들었을 때도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아침에 우문호가 관아에 갈 때 원경릉의 얼굴에 입맞추며, “오늘은 조금 일찍 와서 저녁 같이 먹을 게.”원경릉이 우문호의 소매의 각을 잡고 일어나 옷깃을 정리해 주며, “좋아.”우문호가 나가는 것을 눈으로 배웅하며 원경릉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우문호는 어젯밤 밤새 원경릉을 안고 잠이 들어 놔주지 않았는데, 그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소심하기 그지 없어서 행여나 원경릉에게 밉보일까, 원경릉 기분이 나빠지는 건 아닐까 신경을 썼다.원경릉은 사실 이런 거는 싫고, 이전처럼 서로 지지고 볶으며 싸우는 게 두사람에게 맞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그 말을 한 뒤로, 원경릉은 우문호의 사랑과 감동을 느낄 수 있고, 우문호도 더욱 원경릉에게 신경을 쓰지만, 한밤중에 원경릉이 몸을 뒤척이면 우문호가 번쩍 눈을 뜨고 원경릉을 살피게 됐다.무슨 원칙이니 가치관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 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앞으로 비슷한 일을 최대한 피하면 된다.원경릉도 소빈의 죽음이 가져다 준 공포를 최대한 잊으면 된다.초왕부를 나온 뒤의 일을 원경릉은 잊으려고 노력했으며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그것은 한차례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사건이 마지막에 어떻게 처리되는지 원경릉은 관여하지 않았다.약 상자에 안경이 한 쌍 있었는데 여덟째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경릉은 당분간 그것을 전해주기 위해 입궁하지 않았다. “왕비마마, 기왕비가 오셨습니다.” 희상궁이 들어와 말했다.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갈게.”기왕비는 오늘 호수 빛 푸른 비단 옷을 입고 여우 털 바람막이를 걸치고 있는데, 눈에 띄게 정신이 돌아왔고 안색도 전처럼 그렇게 창백하지 않다
희상궁에 대한 모욕원경릉이 걱정돼서 희상궁에게, “희상궁, 바깥 사람들 주둥이는 썩어 빠졌으니 신경 쓰지 마요.”희상궁이 미소를 지으며: “왕비마마 걱정 마세요. 마마께서 하신 말씀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문이란 자기가 거기에 신경 쓰기 때문에 자신을 상처 입히는 거라고,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말을 마치고 희상궁은 예를 취하고 나갔다.원경릉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사식이를 시켜 가보라고 했다.기왕비는 수액을 걸고 미소를 지으며 재미난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모습이다.원경릉이 아무렇지도 않게: “즐거워 보이네요.”기왕비가 고개를 저으며, “이게 뭐가 즐거워요? 그냥 좀 재밌다 뿐이지. 그때 일을 잘 모르겠지만 이렇지 않았다는 건 알아요. 몇 년이 지나고 나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재밌지 않아요?”원경릉이 기왕비에게, “기왕비는 사람들에게 두루 발이 넓으니, 누가 이 소문을 퍼트렸는지도 아시겠군요.” 기왕비가 입을 비쭉거리며, “그건 모르겠네요.”원경릉이 쌀쌀맞게 웃으며, “그래요? 제가 기왕비 치료 첫날 뭐라고 말했는지 잘 기억을 못하셨나 보군요.”기왕비가 고개를 들어, “무슨 뜻이죠?”원경릉이 수액 바늘을 누르며 얼음 같은 눈빛으로, “기왕비, 당신이 나한테 쓸모가 하나도 없다면 내가 왜 당신을 구해줘야 할까?”기왕비가: “내가 그랬잖아요, 다섯째를 도울 수……”“그건 당신이 돕지 않아도 돼요.” 원경릉이 말을 자르고, “난 누가 퍼트린 말인지 확실히 알아야 겠어요, 증거를 원한다고요, 만약 그 증거를 못 찾으면 내일 오실 필요 없어요.”기왕비가 조금 화가 나서, “날 위협하는 건가요?”“네!” 원경릉이 눈도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답했다.“당신……”기왕비가 싸늘하게 원경릉을 쏘아보며 두사람의 눈빛이 대치하더니 기왕비가 항복하고는, “내가 가서 조사할 필요도 없이 누가 소문을 냈는지 알 잖아요.”“내가 아는 건 아는 거고, 당신이 나한테 증거를 가져오는 건 별개죠. 나는 증거가 필요하고 기왕비는 일처리가
위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혹시 복수하려는 것이냐?”“복수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안왕은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혼자 감당하게 한 위왕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위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찌 다섯째에게 설명할지 생각해 보거라. 보책은 아직 네 손안에 있잖냐.”안왕은 여전히 두꺼운 보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가만히 들고 있기도 거슬렸다.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꾀병을 부리고 위왕 혼자 오게 한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막 침대에 누웠을 때 택란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로 택란을 만나러 나갔다.안왕은 보책을 가지려 했으나, 택란에게 넘겨받으면 곧 금나라 황후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어린 황제는 아직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택란은 두 분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말했다.“큰아버지, 오늘 일은 아바마마께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안왕도 원하던 바였기에 다급히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네 아버지한테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예.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택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버지였다.“어린 황제도 참, 어린 시절의 약속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령 너와 혼사를 약속했다 해도, 네가 승낙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안왕이 말하자 택란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때 이미 동의했었습니다.”다만 그때는 그저 그를 달래, 그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승낙했다니?”안왕과 위왕은 서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이 일은 전적으로 어린 황제의 탓도 아니다.“하지만 넌 그때 겨우 여덟, 아홉 살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 테니, 동의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위왕이 재빨
“폐하, 공주께서 폐하가 드리신 선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언제 올라온 건지, 진이는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응.”경천은 뒤돌아 상자와 두 개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배우며 수많은 옥을 망친 끝에 겨우 지금과 같은 모습을 조각해 낸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아직 어리셔서 폐하의 노고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진이가 위로하자 경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받지 않는 것이다.”진이가 잠시 멈칫했다.“너무 잘 안다니요?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요.”경천은 이미 실망한 기분을 떨쳐버렸고, 대신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진아, 나는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먼저 좋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단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에게 한 나라의 군주라 하지 않았냐?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아... 그런 것입니까!”진이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속상해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택란 일행은 궁을 나섰다. 냉명여가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어찌 황제가 주신 옥패를 받지 않으시나요? 그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택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절대 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단 있는 황제이고, 뛰어난 통치로 금나라가 정권 이양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두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그럼, 어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냉명여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택란이 답했다.“그 옥패가 약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명여야, ‘약속’이라는 말은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그도 누나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한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 아닙니까?”“그래. 하지만 나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