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놈! 그게 무슨 헛소리야!”서북후가 음침한 어조로 말했다.“하하! 대단한 서북후가, 서북의 황제가, 강씨 가문에 놀아나서 죽으러 왔는데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다니. 웃겨서 정말.”이도현은 서북후를 비웃었다.“건방진 놈, 장군님이 고작 네 놈의 말에 속을 것 같아?”서북후 뒤에 있던 젊은이가 불쑥 큰 소리로 외쳤다.“주인과 말하는 데 개가 짖네?”이도현은 안색이 싸늘해지며 말했다.“너......”남자는 이도현의 기세에 그대로 눌려버렸다.“한 번만 더 짖으면 넌 죽는다.”“이 자식이, 너 같은 애송이가 날 죽이겠다고?”젊은이는 콧방귀를 뀌었다.이도현은 대답 대신 손을 휘둘렀고, 이내 은침 하나가 날아가 젊은이의 목구멍을 관통했다.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사람들은 미처 반응도 하지 못했다. 젊은이가 바닥에 쓰러져 숨을 멈추자 그제야 그들은 사태 파악을 할 수 있었다.“네 이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서북후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포효했다.“죽여라!”서북후가 명령을 내리자, 그의 뒤에 있던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상대는 마치 구름처럼 허공에 떠오르더니 삽시에 이도현을 향해 돌진했다.노인의 수단은 아주 악독했고 그의 모든 움직임은 치명적이었다. 세 수를 주고받은 뒤, 이도현이 말했다.“영감이니까 내가 세 수는 봐줬지만, 이젠 봐 주지 않아.”앞선 세 수에서 이도현은 모두 한 손만 사용했다.그의 말에 노인은 모욕당한 듯 안색이 달아올라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도현은 노인의 심장을 정확히 가격했다.엄청난 힘은 노인의 심맥을 파열시켰고 그 자리에서 바로 숨을 거두었다.“이공호!”서북후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노인은 서북후가 키우는 두 명의 천급 강자 중 한 명이다. 전체 서북에서도 으뜸가는 실력을 갖춘 고수가 이렇게 쉽게 죽어버렸다.“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서북에서 소란을 피우는 속셈이 대체 뭐냔 말이다!”서북후가 경계하며 물었다.그는 이도현이 소란을 피우는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고,
두 여인은 바로 비행기에서 이도현과 서로 오해가 있었던 한지음과 이설희다.한지음은 이도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우리 또 보네요. 비행기 내리고 그렇게 가버리시더니, 힘들게 찾았어요.”이도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서북후 이 장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한지음, 다른 사람이 그녀의 신분을 모를지라도, 서북후는 똑똑히 알고 있다.하지만 그런 신분을 가진 한지음이 이도현과 서로 아는 사이라니, 서북후가 알기론 이도현은 그저 과거 강씨 가문의 개보다 못한 데릴사위였을 뿐이다.이런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한지음같은 인물을 알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한지음은 이도현에게 정중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이도현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이 두 여자를 바라봤다.‘왜 하필 지금 온 거지? 시간 하나 기막히게 골랐네. 하필 내가 포위됐을 때, 하필 이 밤에. 이 늦은 밤에 두 여자가 말이야, 집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겁도 없이 날 찾아와? 뭐 하려는 짓이야......설마 또 발병한 거야?’“두 여성분이 이 늦은 밤에 여기까지 웬일이죠?”“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어요. 여기 계신 걸 알았으니 당연히 인사드리러 와야죠.”한지음은 이도현을 향해 방긋 웃었다. 어둠 속에서 이도현은 마른침을 삼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서북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한지음 씨, 이 자식 알아요?”“삼촌, 오랜만이네요. 전보다 더 위엄있어 보여요. 염경에서도 서북후라는 이름이 들리던데요?”“과찬입니다, 한지음 씨.”서북후 이 장군은 한지음 앞에서 놀라울 정도로 공손했다.“삼촌의 실력을 누가 몰라요?근데 이 폐허까진 어쩐 일로 오셨어요? 사람도 많이 대동했네요? 어우, 살벌해. 삼촌 설마 이도현 씨와 오해라도 생겼어요?”한지음은 예쁜 눈을 크게 뜨며 호기심에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바닥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처참한 광경이, 그녀 눈에는 오해일 뿐이었다.“한지음 씨가 모르는 게 있어요. 이 건
“감히 우리 장군님한테 이딴 식으로 말해?”서북후 곁에 있던 여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닥쳐!”서북후가 여자를 훈계했다.“감히 한지음 씨에게 무례하게 굴다니.”이내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한지음 씨, 한지음 씨의 생명의 은인을 놓아주지 않는 게 아니라요, 이 자식이 제 구역에서 제 고수들을 죽였어요. 서북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한지음의 귀엽던 얼굴은 어느새 쌀쌀하게 변했다.“이도현 씨는 제 생명의 은인이죠. 그런데 삼촌이 굳이 이렇게 나오신다면...... 우리 아빠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제가 어찌 감히! 부디 제 어려움을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살인자를 내버려 둔다면 서북은 점점 더 혼란에 빠질 거예요.어르신의 체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대국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니 어르신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서북후는 미소 속에 칼날을 숨긴 채 해명했다.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옆에 있던 이도현은 한지음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는 여자의 도움이 하나도 필요 없다.고작 서북후 따위가, 그리고 한 무리의 잔챙이들은 절대 이도현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흥! 웃기시네. 내가 가겠다는데, 고작 당신들 따위가 날 막을 수 있겠어?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 싫어서 잠시 당신들을 살려두지만, 언제까지 살려둘지는 나도 장담 못 해. 한지음 씨의 체면을 봐서 다시 한번 묻는다. 꺼질래, 안 꺼질래?”이도현이 쌀쌀맞게 말했다.그 말에 서북후는 사나운 웃음을 짓더니 언성을 높이며 대답했다.“네 이놈! 넌 오늘 그 건방짐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줄 것이다!”“죽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말을 끝낸 이도현은 도깨비처럼 빠른 속도로 서북후의 면전까지 다가와 그의 목을 조른 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장군님 내려놔! 아니면 당장 죽여버릴 거야!”“장군님 내려놔......”서북후 산하의
“그쪽은?”“하하하! 자식, 난 네 여덟째 선배야. 어서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면 빵댕이를 찰싹 때려줄 거야.”여자는 활짝 웃으며 엉큼한 말을 내뱉었다.그 말에 이도현은 입을 삐죽였다.‘보아하니 또 엉큼한 여자네. 어떻게 빵댕이를 함부로 입에 올려. 예쁜 여자들 하나같이 다들 왜 이래? 힙이라고 하면 될걸.’하지만 이도현은 이미 눈앞의 여자가 바로 그의 여덟째 선배라는 걸 확신했다.다른 이유는 없다. 엉큼한 스승이 가르친 제자가 엉큼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하도 내가 지조가 있으니 말이지, 아니면 똑같이 물들었을걸.’이건 태허노도를 욕보이는 말이 아니라 증거도 있는 사실이다.몇 년 전 이도현은 태허노도가 사는 동굴에 갔다가 의도치 않게 뻘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숨을 헐떡이는 태허노도를 발견했다.이도현은 이 늙인이가 혹시라도 죽을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달려갔지만, 이내 두 사람은 서로 난처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태허노도는 몸이 편찮은 것이 아니라 등초스님이라는 책을 보고 있었다. 적당히 일러스트가 있는 그런 책이다.이도현은 그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을 보며 난처함이 극치로 도달했다.게다가 태허노도는 뻔뻔스럽게 그에게 음양 교태의 비밀을 연구하고 있으며 이름하여 남녀의 삼십육묘기라고 했다.터허노도는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이도현은 척추를 잃었지, 눈을 잃은 게 아니다.그 책은 등초스님이 아닌 등채스님이었다.이도현이 아무리 고문을 모른대도 그 몇 글자는 똑똑히 알아봤다.하지만 태허노도의 뻔뻔한 태도에 이도현은 마치 자기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정말 그 말이 맞았다. 내가 창피함을 모르면, 상대방이 대신 창피하다는 말.태허노도의 응큼함과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의 엉큼한 단어를 연결해 보니 빼박이다.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여덟째 선배? 여긴 어떻게 왔어요?”이도현은 어이가 없었다.“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영감탱이한테서 소식 들었어. 내 후배가 완성으로 내려왔으니 많이 도우라고. 내 도움이 아주 많이 필요할
신연주는 염국에서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다. 염국의 고위관료이자 권력의 중심에 있는 여자였기에 무림고수 중에 그녀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황성의 한씨 가문은 몇 년 전까지는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돈 좀 있는 사업가 가문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한씨 가문에 손길을 내밀면서 한씨 가문은 수많은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서북후 같은 권력자도 그 가문 사람들은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상류사회 사람들은 신연주는 본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녀가 가진 신분이나 배경이 만만치 않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소문에 그녀가 염국의 여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혜안,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잔인한 성격까지 갖춘 사람이었다.“신연주가 이 자식의 선배라고?”서북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어쩐지 기고만장하더라니, 감히 서북에서 소란이란 소란은 다 일으키고 말이에요! 등 뒤에 신연주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거로군요.”서북후의 또다른 부하가 중얼거렸다.“군위님, 이번 일은 쉽지 않겠어요!”“흥! 배후에 누가 있든 오늘 아무도 이 자식을 못 데려가!”서북후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신연주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서북후는 신연주의 기습 질문에 몹시 당황했다.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카리스마에 완전히 압도당한 그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아주 작게 자기들끼리만 들리게 말했는데 도대체 저 여자는 어떻게 들었을까?잠시 고민을 거듭한 서북후 이 장군은 긴 한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거기 아가씨, 아가씨는 돌아가도 좋지만, 저 녀석은 두고 가세요. 아가씨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서북에서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다닌 놈인데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서북후는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세우기 위해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또박또박 말했다. 신연주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기를 속으로 기도하며.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들을 신연주가 아니었다. 그의
털썩!서북후가 쓰러지는 소리에 현장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서북후가 죽었어!”서북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이 장군이 한 여자의 손에 반항 한번 못해보고 죽었다.“선배님, 이건 좀….”이도현마저 말을 잇지 못했다.무슨 여자가 이렇게 살벌하담?그 역시 서북후를 죽일 실력은 충분하지만, 병권을 장악한 자를 잘못 건드렸다가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참고 또 참았는데!이 변태 같은 선배는 칼을 빼드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신연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훌훌 털고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가자! 이제 널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서북후? 그게 뭔데? 자기가 무슨 큰 벼슬이나 되는 줄 아나 본데 벌레만도 못한 자식이야. 내 후배를 건드리는 녀석들은 다 내 손에 죽어!”“형님!”슬픔에 찬 비명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서북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 무너진 것이다.슬픔에 차 분노의 고함을 지르고 있는 남자는 서북후의 동생 이유진이었다.그는 그렇게 믿었던 형님이 이렇게 쉽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도 서북 신군이 있는 자리에서 살해를 당한 상황.“미친년! 죽여 버리겠어!”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유진은 검을 빼들고 신연주를 향해 달려들었다.“감히 내 선배에게 칼을 겨눠? 죽고 싶구나!”이도현의 눈빛도 싸늘하게 빛나더니 번쩍이는 은침을 빼들었다. 두 갈래의 은침은 공중을 날아 이유진의 두 눈을 관통했다. 눈동자가 터지며 이유진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도현의 실력은 막강했다. 이유진 같은 자를 제거하는 건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를 밟아죽이는 것처럼 쉽고 간단했다. 어떻게 죽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 앞에서 꺼져!”이도현은 살기를 번뜩이며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사람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이도현은 그녀를 힐끗 흘겨보며 속으로 불만을 터뜨렸다.‘저 불같은 선배한테 걸렸으니, 앞으로 조용히 살기는 글렀군!’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위해 나서준 신연주에게 고마웠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를 위협하는 서북후의 목을 따버리다니.이런 관심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감동이었다.“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엮이다뇨? 도현 씨는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비행기에서 처음 만났다고요! 도현 씨를 만나지 않았으면 저 큰 사고를 당했을지도 몰라요!”“언니도 참. 의술이 이렇게 뛰어난 후배가 있으면 진작에 소개를 해줬어야죠! 제가 병마에 몇 년이나 시달렸는데요! 언니가 나빴어요!”한지음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역시 인연은 인연이네. 목숨을 살려줬으니, 사랑으로 갚겠다는 건가? 귀찮은 소개를 덜어서 좋네. 분명히 월하노인이 너희를 인연으로 묶어주신 거야. 인연이 다가올 때는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법이지!”“지음아, 이 후배 녀석이 바로 내가 너한테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던 남자가 바로 애야! 어때? 이 몸매 좀 봐. 죽이지?”신연주는 중매쟁이로 둔갑해서 한참을 떠들어댔다.하지만 이도현은 들을수록 불편했다. 소개팅 현장이 아니라 무슨 노예로 팔려가는 느낌이었다.“선배! 말 좀 정상적으로 할 수는 없어요?”듣다못한 이도현이 끼어들었다.“뭐가? 이도현, 너 복 받은 줄 알아? 이 하늘 같은 선배가 너한테 여자친구를 소개해 준다잖아! 그것도 이 나라 최고의 미인인데다가 돈도 많아. 넌 얘랑 결혼하면 아무것도 할 필요 없고 마누라한테 용돈이나 타서 쓰면 돼!”“아… 그러신가요….”이도현은 욕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아무리 예전에 궁핍한 생활을 좀 했다지만 지금 그의 실력으로 여자한테 빌붙어 사는 건 인력낭비가 아닌가?“언니! 그만해요! 더 얘기하면 화낼 거예요!”한지음이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말했다.“그래, 그래. 알았어! 남녀 사이의 일은 당사자끼리 얘기해야지. 어쨌든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으니 나중에
말을 마친 신연주는 다짜고짜 이도현을 끌고 욕실로 들어가며 한지음을 향해 소리쳤다.“올케는 아무데나 앉아서 쉬고 있어.”그러더니 이도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당황한 이도현은 다급히 그녀의 손을 잡으며 소리쳤다.“선배! 지금 뭐 하는 거예요?”“무슨 이상한 상상을 한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꿈은 야무지네?”신연주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더니 이도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도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변태 같은 녀석! 선배가 널 잡아먹기라도 해? 몸에 온통 피잖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아니! 선배, 이상한 상상한 적 없으니 씻는 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이도현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풉! 뭐야? 부끄러워하는 거야? 이 선배가 강호를 평정하며 무슨 장면을 못 봤겠어? 뭘 선배 앞에서 쑥스러워하고 그래?”신연주는 애써 당당한 척했지만,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이도현을 놓아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자! 도대체 무슨 거물을 숨겼기에 그리 쑥스러워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말을 마친 그녀가 이도현의 아랫도리로 손을 뻗었다.당황한 이도현이 옷깃으로 몸을 감싸며 뒷걸음질쳤다.“선배, 이러지 마세요! 밖에 사람이 있잖아요! 알아서 씻을 테니까 제발 나가요!”이도현은 다급히 신연주를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잠갔다.“저 여자는 미친 여자야. 스승님 말씀이 다 맞았어. 여자가 미치면 남자가 당해낼 수 없어!”이도현은 문에 기댄 채,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순결을 잃을 뻔했다.밖에서 신연주의 악마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어린 녀석이 무슨 부끄럼이 그렇게 많아? 너 나 밀어낸 거 나중에 후회한다?”한편, 욕실 안의 이도현은 드디어 옷을 벗고 딱딱하게 솟아오른 자신의 분신을 손으로 툭 치며 욕설을 퍼부었다.“자존심도 없는 녀석! 미친 여자한테 반응하다니! 나까지 다 창피하잖아! 여자 맛을 못 본 것도 아니고 이렇게
“동방인이 확실해?”광명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네. 소인, 분명히 확인했습니다.”병사가 대답했다.“그놈... 이름이 뭐라고 했지?”“그자가... 이도현이라고 했습니다.”“이도현이라... 역시 찾아왔구나. 결국 이날이 왔네.”광명왕은 왕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조금 전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몸서리치는 공포가 밀려왔다. 그는 마룡 천왕의 처참한 최후가 떠올랐고 또 인터넷에 퍼진 끔찍한 사진들과 피로 물든 하체가 떠올라 생각만으로도 오한이 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하체를 감싸 쥐었다.“위대하신 광명왕 전하. 명을 내려 주십시오. 제가 즉시 그 동방인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한 무사가 고함쳤다.“저도 함께하겠습니다.”“저 역시 동참하겠습니다.”“저도 위대한 광명왕 전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저놈을 죽여버리겠습니다...”...순식간에 대전은 광명왕을 섬기는 십이 대천사와 수많은 마법사, 무사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출전을 자청하며 전의를 불태웠다.보고하러 온 병사는 이 광경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이 녀석들아, 이럴 시간에 빨리 움직여야지. 너희가 빨리 움직여야 죽는 사람도 줄 거 아니야. 여기서 고함만 지르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진짜 용맹을 증명하려거든 당장 나가서 적의 피를 보여주던가.’병사가 초조해하며 동료들의 생사를 걱정하고 있을 때 광명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래. 다 같이 나가서 이 오만한 동방 놈을 죽여버리자. 감히 나 광명왕을 마룡 천왕처럼 우습게 여기지 못하게 본때를 보여주자.”“가자...”광명왕은 이를 악물고 살의를 품은 채 왕좌에서 내려섰다. 그는 성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한편, 광명왕 성의 대문 밖은 이미 수십 구의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이도현이 손을 등진 채로 천천히 성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창을 겨눈 수백 명의 병사를 향해 차갑게 선언했다.“광명왕더러 나오라고 해. 더 이상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수백
“그래... 당신들의 각오를 들으니 마음이 든든하네. 그러나 절대로 방심하면 안 돼. 마룡 천왕 성채에 수많은 고수가 있었음에도 패배했으니 우리도 더욱 신중해야 해.”광명왕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마룡 천왕 성채의 무능한 놈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들은 게으름만 피우며 허세를 부리다가 진정한 적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세는 결의가 단단합니다.”“그 동방 청년이 아무리 대단해봤자 혼자서 성채의 강자들을 전부 죽였다는 게 말이 됩니까? 광명왕 전하, 이건 정말 터무니없는 이야기 아닙니까?”“동방에는 ‘개미 떼가 코끼리를 넘어뜨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고수라도 집단의 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상대가 수만 명이 되는 군대라면 천하제일의 무사라도 지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맞습니다. 마룡 천왕 성에 수만의 병력과 수천의 고수들이 있었음에도 단 한 명의 청년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제대로 힘을 합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죠. 만약 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적을 상대했다면 하나님이라도 마룡 천왕성에서 빠져나가지 못했을 겁니다.”“수만 대군과 수천 명의 고수가 있음에도 단 한 사람도 그 청년을 막아내지 못했다니... 맙소사.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광명왕의 측근들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일제히 과장된 표정으로 마룡 천왕 성의 전투력을 폄하하며 비웃기 시작했다.광명왕 역시 불안감이 천천히 가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나. 수만 대군 속에서 홀로 살아남는 고수가 과연 있을까? 마룡 천왕의 성채에는 수만의 병사와 고수가 있는데... 설령 그 동방인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수만의 병력과 마법사들이 협공한다면 결국 지쳐 죽을 수밖에 없지...’그러나 마룡 천왕이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광명왕은 다시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남자의 근본까지 잃었는데 그런 굴욕적인 결말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래
“광명왕 전하. 마룡 천왕의 성채에서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그 동방인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합니다. 철저한 대비가 필요합니다.”수염을 곧게 기르고 마법 가운을 단정히 갖춰 입은 노자가 아주 묵직한 위엄을 풍기며 말했다.“사실입니다. 소문으로는 그 염국 출신의 청년이 요술까지 부린다고 합니다. 마룡 천왕의 성채에서 최고로 강한 마법사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합니다. 사후 그의 뇌에서 은바늘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그 청년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단순한 은바늘로 흔적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니... 그의 수단이 얼마나 지독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말 등골이 오싹할 정도입니다.”“예로부터 동방은 신비로운 땅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기이한 기술은 모두 염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염국 주변 국가들의 문화와 무술 역시 염국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염국의 영향력이 아주 대단합니다. 심지어 동방의 전반적인 무술이 모두 염국인의 손에서 흘러나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염국인은 신비롭고 신기한 민족입니다. 경이로운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지요...”“동방... 염국...”...앉아서 어떻게 이도현을 대응할까를 논의하던 광명왕의 심복들은 얘기하다가 대화가 점차 염국의 신비로운 힘과 동방의 잠재적 위협으로 흘러갔다.왕좌에 앉아있던 광명왕은 그들의 말을 듣다가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걱정 가득 찬 얼굴로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있는 부하들을 보자 광명왕은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이런 죽일 놈들아. 내가 너희를 불러들인 건 그 동방인을 어떻게 죽일지 계획을 세우라고 한 것이지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으라는 게 아니야. 나는 마룡 천왕처럼 두들겨 맞은 꼴을 당하기 싫다고.’광명왕은 마룡 천왕처럼 아들을 잃고 두 팔까지 잘리며 마지막에는 남자의 근본조차 잃어버리는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여기에 너희들은 대책을 세우라고 부른 거지 이런 쓸데없는 얘기나 하라고 부른 게 아니야. 이런 얘기들은 우리 사기나 꺾
“그리고 또 한 가지, 절대로 후배에게 직접 묻지 마. 대선배께서 이미 누구든 후배에게 묻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셨어. 만약 이 일로 후배가 위험에 처한다면... 대선배께서 직접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 대선배가 어떤 분인지 너도 알잖아. 한번 진지하게 나서시면 스승님조차 덜덜 떨 정도인데, 그때 가서 내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해도 소용없다.”윤선아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대선배... 그럼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요. 이제 정말 궁금한 게 없어요.”대선배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서명월은 몸을 부르르 떨며 재빨리 입을 다물어 버렸다.어릴 적 그녀들이 무공을 배울 때 대선배는 산에 자주 머물지 않았지만, 그녀들에게 강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이도현이 오기 전까지는 대선배가 태허산의 실질적 주인으로 모든 것을 통솔하는 왕과도 같았다.그녀의 말이 곧 장문의 명령이었고, 감히 거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스승님이 대선배에게 직접 부여한 권위였다.특히 대선배가 염황이라는 고위 직책에 오른 이후로 그녀의 기세와 카리스마는 더욱 빛을 발했다. 대선배가 위엄을 한번 발산하면 어린 시절의 그녀들은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그때는 스승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대선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들이 조금만 떼를 쓰거나 눈물을 흘리면 스승님은 곧 마음이 약해져 울고 있는 아이를 안고 사과하며 달래기에 바빴다.하지만 대선배는 달랐다. 아무도 대선배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비록 대선배는 단 한 번도 후배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지만 그녀들이 품은 공포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었다.지금도 대선배를 마주치면 다리가 떨릴 정도였다.그녀들 중에서도 오직 막내 후배와 세 번째 선배인 인무쌍만이 대선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세 번째 선배는 어릴 적부터 무공에 매진했을 뿐만이 아니라 냉정하고 말수가 적은 성격이었다. 게다가 대선배가 태허산을 떠난 뒤 그 지위를 계승한 그녀가 두려워할 리 없었다.막내
“선배...”이도현은 떠나가는 두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들이 오해할까 봐 걱정되어 설명하려 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서 가봐. 도현 후배. 네 할 일 하러 가. 선배가 다 이해하니까 빨리 가봐.”윤선아가 뒤돌아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도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선배님들 조심히 가세요...”“알겠으니까 어서 가...”두 선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이도현은 몸을 돌려 벚꽃루를 빠져나갔다. 그는 곧장 광명왕의 성을 향해 나아갔다.벚꽃루 자체가 광명왕의 세력 범위에 속했기에 광명왕의 성채는 벚꽃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천사국의 천사 황제 아래에는 열두 명의 천사왕이 있다. 이들은 천사국을 열두 개의 지역으로 나눴고 각 지역을 나눠 통치하며 각자의 영지에 성을 세워 독립된 왕국을 만들었다.광명왕의 성채는 이도현이 있는 이 지역에서 마치 궁전 같은 존재였기에 찾기 매우 쉬웠다. 길거리에서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물어봐도 광명왕의 성까지 안내해 줄 수 있었다.이도현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그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윤선아와 서명월은 방금 전 이도현이 서 있던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헤헤헤... 둘째 선배. 못된 녀석은 절대 우리 둘이 이렇게 슬그머니 따라갈 걸 생각 못 할 거예요. 이제 후배가 위험에 빠지면 우리 둘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후배를 구해요. 그럼 이 녀석은 감동을 받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죠? 나중에 후배더러 몸으로 갚으라고 해야겠어요. 헤헤헤...”서명월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이도현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신나게 웃었다.“목소리 낮춰. 후배가 들으면 어쩌려고. 우린 멀찍이 따라가야만 해. 아니면 후배가 눈치챌 수도 있어. 넌 아마 모를 거야. 이 못된 녀석의 신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비록 말은 안 했지만 대충 추측해보면 후배의 신기는 수백 미터 밖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야.”윤선아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스승은 자신이 없었다면 태허산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당시 이 말을 들은 이도현은 스승을 몹시 존경했고 자기도 더욱 열심히 노력해서 스승을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때문에 이도현은 산에서 8년 동안 밤낮없이 수련했고, 스승의 체면을 깎아내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정정하고 대단한 사조님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도현은 지금도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오늘 둘째 선배가 첫눈에 사조님을 알아봐서 다행이지, 만약 이도현이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사조라고 주장하는 노도사를 만났다면, 아마도 그와 대판 싸웠을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사조님이 진작 죽은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허름한 노도사 한 명이 나타나 자신의 사조라고 한다면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이런 생각이 들자 이도현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스승을 욕하기 시작했다.‘이 바람직하지 못한 영감탱이가 허풍을 떨어도 정도껏 해야지. 어떻게 자기 스승마저 죽었다고 거짓말한 거야. 정말 못됐다.’“후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광명왕의 성으로 갈 거야?”윤선아의 말에 이도현은 잡생각을 멈추었다.“가야죠. 지금 당장 갈 겁니다. 선배들은 이제 돌아가세요.”이도현이 말했다.방금 하마터면 위기에 빠질 뻔했다고 생각하니 이도현은 등골이 서늘했다.오늘 만약 사조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세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운명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는 기분,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이도현은 더 이상 두 선배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누구도 광명왕 주변에 족제비 같은 강자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이번에는 사조님 덕분에 운 좋게 위기를 모면했지만, 다음에도 이런 행운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광명왕을 혼자 찾아간다면 설령 족제비와 같은 강자를 만난다 해도, 이도현은 기회를 찾아 도망칠 수 있다.하지만 선배들과 같이 간다면 이도현은 두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었다.“안돼. 혼자 가는
잠시 후 밖에는 이도현 등 네 사람만 남게 되었다.“손제자들, 열심히 수련해. 난 너희들의 몸에서 우리 태허산의 휘황찬란한 미래를 보았어. 너무 대견스러워. 그리고 난 이만 가봐야겠어. 이제 시간 나면 다시 너희들을 보러 올게. 그동안 무공을 열심히 연마하고 있어. 잘 지내고.”허름한 노도사가 떠나려 하자 윤선아가 급히 말했다.“사조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가지 마시고 저희와 며칠 더 있어 주시면 안돼요? 마침 저희에게 무공도 조금 가르쳐 주세요.”“맞습니다. 저도 사조님을 처음 뵙는데 며칠만 더 있어 주세요. 저희와 함께 태허궁으로 가셔서 푹 쉬시면 됩니다. 저희가 알뜰히 모시겠습니다.”서명월은 노도사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태허궁이 너 이 계집애가 세운 거였어? 난 또 모르는 사람이 우리 태허라는 단어를 쓴 줄 알고 하마터면 쳐들어갈 뻔했어. 하지만 네가 쓴 거면 별문제가 없긴 하지. 너희 두 계집애가 다 문벌을 세우다니, 참으로 훌륭하구나. 아주 대단해.”“네 이 녀석은 더 말할 것 없더라. 단번에 우리 태허산의 명성을 만천하에 떨치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넌 나와 네 스승보다 더 잘하고 있어. 하지만 시시각각 심경에 유의해야 한다. 살생할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돼. 앞으로 네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너희들은 아직 갈 길이 머니까 열심히 노력해. 이제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면 이 세상이 너희가 생각하던 것과 완전히 다르고, 상상 이상의 물건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허름한 노도사는 의미심장하게 타일렀다.“사조님, 그런 이야기는 돌아가서 천천히 해주시고 우선 태허궁으로 가시죠. 저희가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서명월은 노도사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하하하. 계집애야, 난 천하를 떠돌며 자유롭게 살아온 몸이라 너의 태허궁에서 지내는 것이 불편할 거다. 이쯤에서 각자의 길을 걷자꾸나. 난 편히 누워서 향락하는 팔자가 아니다. 어서 가거라...”이도현
그들은 기억을 지운다는 것이 곧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즉 사람이 죽어야만 기억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족제비가 말하는 ‘기억 지우기’는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었다.노도사의 허락을 받은 후 족제비는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는 몸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그 빛은 서서히 퍼져나가며 벚꽃루 전체를 감쌌다.이도현, 노도사 그리고 그의 두 선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순간 그 빛에 감쌌고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눈빛이 멍해지고 사람이 둔탁해졌다.얼굴에 보이던 두려움마저 사라지고 마치 꼭두각시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삽시에 벚꽃루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족제비는 계속해서 양손을 바삐 움직였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그 빛이 부단히 일렁이었다.몇 분 후, 족제비는 마치 모든 힘을 쏟아낸 것처럼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땀을 줄줄 흘렸다.이 과정은 약 몇 분간 지속했다가 어느 순간 사람들을 감싸고 있던 빛이 싹 사라졌다.족제비는 마무리를 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했다.그는 제자리에 겨우 서서 숨을 돌린 후 눈을 뜨고 말했다.“됐다. 이 사람들은 조금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다. 이제 가자.”이 말을 듣자 야나기 고로오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족제비를 바라보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스승님.”“가자. 오늘의 치욕을 마음 깊이 새겨두고 앞으로 더욱 열심히 수련해.”족제비가 차갑게 말했다.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리를 떠났고 이도현도 더 이상 그들을 막지 않았다.그 사이,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점차 멍한 상태에서 깨어났다.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대박...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난 분명 앨리스를 보러 왔고 방금 옷까지 다 벗었는데 왜 갑자기 여기로 온 거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로제, 내 로제 어디 갔어?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었는데... 옷은 또 언제 입은 거야? 벌써 시간이 다 됐잖아. 사장님, 시간 연장해주세요.
이런 일에 있어서 노도사는 크게 따지지 않는 편이었다.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노도사는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기에 무슨 일이든 너무 과하게 밀어붙이면 역효과가 일어난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설령 아무 힘없은 나약한 사람이라 해도,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궁지로 몰지 않는 게 좋다.궁지에 몰리면 토끼도 사람을 문다고 한 사람을 궁지까지 몰아붙이면 목숨 걸고 달려들 수 있다.약자와 강자를 막론하고 이런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일반 백성을 예로 들어보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약한 집단 중 하나이다. 지배자가 끼니만 챙겨준다면 그들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즉 ‘살아있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바람이다.지배자가 그들에게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양식만 제공해도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하더라도 살아있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지배자의 말에 순순히 따른다.하지만 만약 백성들의 기본적인 끼니마저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일어나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지배자는 큰 타격을 입기 마련이다.수천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백성들이야말로 역사를 써 내려가고 이끌어나가는 주요 원동력이었고 수많은 왕조가 백성들의 반란에 무너졌다.노도사도 당연히 이러한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적당한 선을 지키며 족제비를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다.따라서 그는 족제비의 물음에 전혀 상관없다고 대답했다.노도사는 현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 상관이 없기에 관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벚꽃루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그들은 그냥 재미 삼아 구경한 것뿐인데 이렇게 불똥이 튈 줄은 꿈에도 몰랐다.‘뭐라고? 기억을 지운다고? 어떻게 지우는데? 설마 우리를 싹 다 죽이겠다는 건가?’이런 생각이 들자 구경꾼들은 두려움에 떨며 하나둘씩 뒤로 물러나서 도망갈 준비를 했다.그들은 이 정도로 큰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았다. 단지 재밌는 구경거리를 본 것뿐인데 목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