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안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조용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그 강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이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이게 정말인가요?”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얼음 같은 세상에 오래 머물다가 갑자기 따뜻한 방으로 들어와 따끈한 음식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에겐 마치 한낱 환상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으로 유강후의 허리를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정말 오랫동안 누구와 함께 새해를 보내본 적도 같이 불꽃놀이를 본 적도 없어요. 설날에 세뱃돈을 받아본 것도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이 안 나요. 마지막으로 받은 건 아마도 주...” “아저씨, 저 정말 행복해요. 오늘이 참 좋아요.” 그녀의 말은 마치 작은 바늘들이 그의 가슴에 하나씩 박히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그는 온다연에게 자유로운 삶을 준다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그녀를 지독한 악몽 속으로 떠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그녀의 곁에 머물러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다른 남자였다. 그 남자는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아 유강후조차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는 온다연을 더 강하게 끌어안고는 그녀를 꼭 안은 채 다급하게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그녀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온다연은 손을 입술 위에 대며 막았다. “안 돼요. 양치도 안 했는데!” 그때, 밖에서 또다시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온다연이 고개를 들어 다시 불꽃을 보려 하자 유강후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만 봐. 우리 방에 가자.” 그는 불꽃놀이 따위는 이제 보이지 않길 바랐다. 더 이상 주한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안 돼요, 조금만 더 보고 싶어요!” “안 돼. 착하지. 방에 가서 양치하자!” “아저씨, 안 돼요..
유강후는 온다연이 도망칠 틈을 절대 주지 않았다. 그녀를 단단히 무릎 위에 고정하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다시 한번 깊게 물었다. 고통에 온다연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으... 조금만 부드럽게... 너무 아파요…” 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힘껏 감싸며 가빠진 숨소리로 속삭였다. “다연아, 내가 누군지 말해봐.” 그의 단단한 손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온다연은 그의 강렬한 시선과 동작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숨이 가빴다. 그녀는 입을 열어 힘겹게 대답했다. “유강후... 아저씨 유강후잖아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에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른 사람은 절대 생각하지 마. 오직 나만 생각해, 알겠어?” 온다연은 그의 강한 손길에 놀라 손을 재빨리 빼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고 부드럽게 그녀의 귀를 물었다. “다연아, 내가 누구라고?” 몸이 자연스레 떨리며 온다연은 대답했다. “유강후!” “틀렸어!” 하지만 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귓불을 살짝 물고 속삭였다. “그게 아니야. 넌 ‘내 남자’라고 해야지.” “다시 대답해 봐. 내가 누구라고?” 그녀는 그 몇 글자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입술을 세게 물었다. 유강후의 손아귀 힘은 더욱 거세졌고 그녀의 허리를 잡아 아래로 눌렀다. 몸에 닿는 온도에 그녀는 두려워졌고 유강후에게 애원했다. “안돼요. 아저씨, 이러지 마요.” 그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착하지? 얼른 얘기해 봐, 내가 네 남자라고. 말하면 안 할게.” 그녀는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앞이 흐릿한 게 곧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유강후는 그녀의 표정에 잠시 흔들렸지만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그때, 온다연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유강후는 온다연의 마음속에 자신의 존재를 깊이 새기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인지할 수
그는 해열제를 가져와 그녀에게 먹이고 뜨거운 물과 우유도 마시게 했다. 그녀의 얼굴은 열이 올라 분홍빛이 돌았고 눈빛은 흐릿했지만 그는 결코 그녀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아래에 눕히고 나직하게 계속 그녀에게 물었다. “다연아, 내가 누구라고?” 온다연은 열로 인해 몸이 불편하고 졸리기도 했지만 그가 계속 강요하는 바람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몇 마디 말도 여러 번 반복하니 점점 더 쉽게 대답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희미한 의식으로 답했다. “유강후...” 그는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며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유강후는 누구지? 너한테 어떤 사람이야?” 온다연은 몸을 살짝 떨며 대답했다. “남자... 내 남자…” 그러나 유강후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녀를 유혹했다. “너의 남자는 누구야?” 온다연은 반사적으로 그에게 답했다. “유강후…” 유강후는 마치 보상이라도 하듯 그녀에게 가볍게 입 맞추며 말했다. “다시 말해봐. 너의 남자는 누구야?” “유강후…” 마치 의도적인 훈련처럼 여러 번 반복하며 연습을 계속했다. 결국 그 답이 그녀의 영혼에 각인된 듯이 익숙하게 되었다. 밤이 거의 밝을 때까지 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온다연은 오후까지 푹 잠을 자고 나서 전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강후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고개를 숙이며 한쪽으로 숨기 바빴다.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그가 너무 몰아붙일 때만 방으로 숨어버렸다. 유강후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전날 밤에 너무 강하게 몰아붙여서 이런 반응이 나온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가 여전히 주한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그의 흔적만으로 가득 채워지고 그의 낙인이 찍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밤 같은 훈련을 반복해서 계속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영혼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 “다연아, 착하지?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데리러 갈게.” 온다연은 여전히 침묵했다. 유강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연, 벌써 저녁이야. 어디에 있는지 말해줘. 데리러 갈게.” 드디어 저편에서 온다연의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는 항상 저를 강요해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었고 다시 전화를 걸자 이미 꺼져 있었다. 이때 개를 산책시키는 이웃 아주머니 두 분이 지나갔다. 그중 한 분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옆 단지에서 어제 사람이 죽었대요. 어떤 어린 아가씨가 남자친구랑 싸웠는데 화가 나서 싸우고 나서 바로 뛰쳐나갔대요. 남자는 화가 나서 쫓아가지 않았다잖아요. 그 아가씨는 아픈 와중에 얇게 입고 나갔는데 결국 단지 뒷문에서 쓰러졌대요.” “요 며칠 날씨가 추웠잖아요. 밤에는 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쓰러진 아가씨를 아무도 못 봤던 거지. 하룻밤 동안 그렇게 있었다가 얼어 죽었대요. 남자는 그걸 보고 후회해서 바로 기절하고 정신을 차려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기절하고...” 골목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에 유강후의 가슴이 싸늘해졌고 손발까지 점점 차가워졌다. 그는 즉시 이권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이권, 온다연의 휴대폰 위치를 확인해 줘.” “온다연 씨는 병원에 있어요. 왜 위치를 확인하려고 하시죠?” 유강후는 그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온다연을 잘 지켜봐. 밖에 못 나가게 해. 바로 갈게.” 병원에 도착한 그는 온다연을 찾으려 이곳저곳 돌아다닌 끝에 아기 병실 옆에 있는 장비 보관실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유강후를 보자마자 그녀는 일어서서 문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그의 품에 붙잡혔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부어있는 것을 본 유강후는 살짝 가슴이 아팠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기를 보러 오려면 나에게 말해줘야지. 밖은 이렇게 추운데 혼자 걸어온 거야?” 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지며 전날 밤
유강후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리고 더 있어?”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오늘은 절대 저한테 키스하지 마요. 제가 직접 내려갈 거니까 안아주지도 마요!”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모든 요청을 다 들어주었다. “이제 나랑 같이 갈 수 있겠어?”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강후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기가 있는 무균실을 지나갈 때 온다연은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서성였다. 얼굴을 문에 기대어 안을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결국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유강후는 병원과 가까워 서둘러서 차를 직접 몰고 왔기에 차는 병원 입구에 대충 세워져 있었다. 차에 타고 나서 유강후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안전벨트를 채워주려 몸을 기울였다. 그가 다가오는 순간 온다연은 또다시 그가 키스를 하려는 줄 알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쳤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사실 이건 온다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어젯밤에 너무 심하게 키스를 당해 지금도 입술이 부어 있고 입안과 입술 가장자리도 상처가 나서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아팠다. 그런데 그만 손이 먼저 반응했고 마치 뺨을 한 대 내리친 것처럼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유강후는 그녀의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얼굴과 눈빛이 달라졌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연, 내가 너무 너를 봐줬나? 기회만 되면 내 뺨을 때리는 건가?” 온다연도 깜짝 놀랐지만 이미 때린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먼저 키스하려고 다가온 건 그였으니 말이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 겁을 먹었으면서도 온다연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당신이 먼저 저한테 키스하려고 했잖아요!” 유강후는 인내심이 그녀로 인해 거의 소진될 지경이었다.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온다연, 나는 너의 남자야. 너와 키스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온다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무서운 기억이 다시 떠올라
경찰은 곧바로 무전기를 들며 말했다. “인평 개인 병원 입구에서 경찰을 공격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유강후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고 다가온 경호원들에게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뭘 하려는 거야? 당장 물러서!” 경호원들은 그제야 물러섰지만 경찰은 여전히 유강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경찰은 온다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가씨, 겁먹지 마세요. 제 동료들이 곧 도착할 거고 우리가 당신을 보호할 겁니다. 지금 차에서 내려 제 쪽으로 오세요.” 그는 차 문을 단단히 잡으며 유강후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이건 단순히 불법 주차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불법 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있어요.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불법 주차는 분명 제 잘못입니다. 처벌을 받고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면 제 변호사가 연락을 드릴 겁니다.” 경찰은 비웃으며 말했다. “변호사 하나로 날 겁먹게 하려고? 내가 당싱 같은 쓰레기들 무서워할 것 같아? 내가 입고 있는 이 제복을 괜히 입고 있는 줄 알아?” 그러고는 엄격하게 소리쳤다. “내려!” 이때 온다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찰 아저씨, 오해하신 거예요. 이 사람은 변태가 아니에요.” 온다연은 방금까지 울어서 눈이 붉게 물들었고 목소리도 가늘고 여리게 들렸다. 경찰은 이를 보고 그녀가 협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다정하게 말했다. “아가씨, 겁내지 마세요. 이 변태들이 당신을 어쩌지 못할 겁니다. 혹시 사진을 찍어서 당신을 협박하면서 좋은 말을 하라고 시킨 건 아닌가요?” 경찰의 판단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는 병원에서부터 이 남자가 계속해서 이 어린 아가씨를 껴안으려 하고 아가씨는 계속해서 그를 피하며 거절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온다연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온다연이 고등학생처럼 어려 보였기
경찰은 그래도 믿지 않았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온다연의 신분증은 지금 그녀의 손에 없었다. 급한 마음에 휴대폰을 열어 사진을 보여줬다. “이것 보세요. 저희 웨딩사진이에요.” 경찰은 반신반의하며 사진을 두어 번 쳐다봤다. 그리고 유강후를 몇 번 더 쳐다봤다. 사진 속의 사람이 유강후인 것을 확인하자 경찰이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이 진짜 당신 남자친구예요?”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곧 결혼해요.” 경찰은 휴대폰을 온다연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이만들 가세요. 무단 주차로 인한 벌금을 납부하는 걸 잊지 말고요!” 경찰이 멀어지자 온다연은 다시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자마자 유강후의 깊은 시선을 마주쳤다. 무거운 그의 눈빛에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을 탓하지 마세요.” 온다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분은 좋은 의도로 그런 거고 그게 경찰의 직업이잖아요.” 유강후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강한 존재감은 그가 말하지 않을 때 더욱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온다연은 그의 시선에 약간 주눅이 들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아까 일부러 때린 게 아니에요. 당신이 또 키스할 줄 알고 그만...” “근데 정말 아파요. 물 마실 때도 아프고 당신이 계속 밤새도록 키스했으니까 저도 좀 힘들었어요...” 그녀는 점점 더 억울해하며 말하다가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저를 하나도 아껴주지 않고 자꾸 제가 싫어하는 걸 말하게 하거나 하게 만들고...” 그녀는 팔목을 들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희고 가느다란 팔목에 푸르게 멍이 들어있고 손가락 자국도 선명했다. 분명 어젯밤 그가 만든 흔적이었다. 온다연은 울먹이며 말했다. “조금도 상냥하지 않아요! 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하는 거죠...”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에 난 멍 자국을 보며 마음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한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만큼 온다연의 마음에서 그를 밀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고작 하루 이틀 만에 실현되는 건 불가능했기에 조금 더딜지라도 서두르지 않기로 다짐했다. 유강후는 태연하게 온다연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경찰한테는 어떤 사진을 보여준 거야? 웨딩 사진?” 온다연은 얼굴을 붉히며 핸드폰을 낚아챘다. “아니거든요?” 사실 온다연은 요즘 심심할 때마다 포토샵 어플을 켜서 이것저것 만졌다. 그러다가 문득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궁금해져 인터넷에서 대충 사진을 골랐고 얼굴을 붙여 넣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려서 몇 장을 저장해 뒀다. 그 사진이 이럴 때 쓰일 줄이야. 하지만 절대 유강후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몇 분 후 그들은 집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병원에서 누군가 연고를 보내왔다. 잠자리에 들기 전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에 약을 얇게 발라주고, 여기저기 튼 입술에도 립밤을 발라줬다. 시원한 민트향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이거 뭐예요? 향이 엄청 좋네요.” 유강후는 그녀의 분홍빛 혀를 보고선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냥 평범한 립밤이야.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유강후는 이불을 끌어당겨 온다연에게 덮어주고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얼른 자.” 온다연의 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껐고 방안에는 침대 머리맡의 작은 등불만 남아있었다. 온다연은 그가 강제로 자기와 함께 자게 할 줄 알고 긴장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유강후는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줬을 뿐만 아니라 세심하게 불까지 꺼줬다. 온다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침대에서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도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어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자정이 될 때까지 뒤척이다가 순간 잠이 오지 않는 원인이 떠올랐다. 곰돌이! 그 곰인형이 유강후의 침실에 있다. 자리에
온다연은 영상 속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러다 또 다른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장화연을 바라보았다.장화연은 벽에 기대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서 있었다.온다연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다가가 추궁하고 싶었다.‘대체 강후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숨겨왔어요?’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장화연은 유강후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봤자 장화연은 끝까지 그를 감싸기만 할 것이다.온다연은 알고 있었다.만약 장화연이 정말 자신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은 진실을 털어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하지만 장화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마음속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온다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장화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창백하게 질린 온다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장화연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다연이 먼저 일어섰다.“장 집사님, 저 몸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어요.”장화연은 그녀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줄 알고 조용히 말했다.“우림 도련님은 괜찮을 겁니다. 열이 떨어지기만 하면 곧 그룹 병원으로 옮길 거예요. 그쪽이 장비도 더 좋고, 의사들도 더 뛰어나니까요.”그럴듯한 위로를 들으며, 온다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화장실에 도착한 온다연은 손을 떨며 그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이 사람이 제 약혼녀입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근데, 유 대표님이 온다연이랑 이미 혼인신고 했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혼인신고? 진짜인지 누가 알아? 나도 들은 얘긴데,
두 시간이 지났다.아이에게 열이 났다는 걸 유강후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는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심지어 메시지 한 줄조차 없었다.도대체 무슨 일, 무슨 회의가 그렇게 바빠서, 전화 한 통조차 걸 시간이 없는 걸까?그는 항상 말해왔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그녀와 아이라고.하지만 지금 온다연의 머릿속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과 더불어, 전화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로 어지러웠다.그녀는 과연 그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들은 것을 믿어야 할까?유강후의 전화를 대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비서이거나 이권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남자였다.그녀가 혼란 속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휴대전화의 알림음이 울렸다.‘틀림없이 강후 씨가 보낸 메시지일 거야!’그녀는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하며 초조함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낯선 번호에서 온 친구 추가 요청이었다.검은색 프로필 사진에는 두 개의 눈만 드러나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어둠 속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악몽 같았다.친구 요청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네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어.]온다연은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친구 요청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여러 개의 영상과 사진을 보냈다.온다연은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하나 눌러봤고, 곧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영상 속에는 유강후가 어떤 여자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영상은 꽤 먼 거리에서 찍힌 듯했지만, 그가 유강후라는 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여자를 품에 안고,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아기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스치는 다정함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은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담하고 온화한 실루엣은 뚜렷했다.흰색 홈웨어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 온다연이 입
“그 빨간 점은 딱 심장을 겨냥한 위치였어요. 만약 그대로 맞았다면 분명 심장에 명중했을 겁니다. 설령 나은별 씨가 총알을 대신 맞았다고 해도, 그분의 키를 고려하면 그 상처는 턱 아래에 있어야 해요. 하지만 지금 그분의 상처는 왼쪽 가슴에서 어깨 쪽으로 치우쳐 있죠.”진시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판단으로는, 암살자가 나은별 씨가 나타난 걸 보고 즉시 무기의 위치를 조정한 겁니다.”그녀는 응급실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암살범이 왜 나은별 씨를 보고 갑자기 위치를 바꿨을까요? 대표님, 그 이유는 직접 조사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수술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때 로운이 다가와 진시현을 안아 들고 수술실로 향했다.진시현은 몸을 살짝 비틀며 저항했다.“팀장님, 괜찮습니다. 제가 걸어갈 수 있어요.”하지만 로운은 무표정하게 단호히 말했다.“움직이지 마.”결국 진시현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품에 안겨 수술실로 들어갔다.그 시각, 대형 주택 내부에서는 온다연이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우림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아이가 오후 두세 시쯤 갑작스럽게 미열이 났다.처음에는 단순히 소화 문제일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설명하고 소화제를 조금 먹였다.그러나 저녁 여섯 시가 되자 아이의 열이 갑자기 급상승했다.다급히 달려온 주 박사가 진찰한 결과, 폐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하지만 주 박사는 서양의학 전문의가 아닌 데다 전문 장비를 가져오지 않았기에 병원으로 즉시 데려가야 한다고 권했다.문제는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집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출몰해 장화연은 이 주택도 감시당하고 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그래서 병원에서 의사와 장비를 호출하려고 논의했지만, 전문 장비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소란이 클 것 같았다.게다가 이 건
말을 마친 유강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은별을 안아 들고, 거침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옆에서 소이섭도 서둘러 따라붙었다. 가는 내내 나은별의 피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소이섭이 간단히 응급 처치를 해보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의식을 잃은 나은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강후, 은별 씨는 이런 사람이야. 널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그는 차갑게 비꼬듯 말했다.“그 고아 출신 여자애 때문에 네가 은별 씨를 몇 번이나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지? 앞으로도 계속 몰아세울 거야?”유강후는 이를 악물며 낮게 소리쳤다.“닥쳐. 내가 뭘 하든 네가 훈계할 자격은 없어!”소이섭은 냉소를 지었다.“그래도 말해야겠어. 넌 은별 씨한테 너무나 많은 빚을 졌어. 어떻게 갚을 건데? 돈으로? 네가 가진 돈이 만능이라도 된다고 생각해?”그 순간,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온다연이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떨려 있었다.“강후 씨,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있어요. 너무 높아서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어디예요?”유강후가 대답하려는 찰나, 소이섭이 낮게 속삭였다.“설마 은별 씨를 내버려두고, 그 고아 출신 여자애를 찾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네 아들은 단순히 열이 나는 거고, 은별 씨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그다음 순간, 차갑고 무거운 총구가 소이섭의 머리 뒤에 닿았다.유강후는 전화를 손으로 가린 채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한마디만 더 하면 네 목숨은 끝이다.”소이섭은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총구를 치우고 나서 유강후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다연아, 걱정하지 마. 지금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바로 못 가. 장 집사랑 병원으로 먼저 가 있어. 내가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하지만 온다연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배어 있었다.“주 박사님께서 진찰했는데, 대엽성 폐렴일 가능성이 크대요. 해열제도 소용이 없어서 아까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어요. 빨리
술이 준비된 곳으로 걸음을 옮기니, 사람이 조금 뜸했다.진시현은 유강후의 팔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사모님께서 보시고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요?”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해.”그는 방금 전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들 쪽을 아주 잠깐 바라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덧붙였다.“아까 수군거리던 사람들 찍어서 이권에게 보내서 처리하게 해.”진시현은 즉시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며 긴장된 표정을 띠었다.“김원도가 왔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다시 유강후의 팔을 친밀하게 잡고, 그의 몸에 기댔다.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강후 씨, 저 조금 추워요.”유강후는 손짓하자마자 누군가 부드러운 캐시미어 숄을 가져왔다.그는 직접 숄을 집어 들고 진시현의 어깨에 다정하게 걸쳐주었다.그리고 숄을 걸쳐주며 살짝 몸을 기울여, 마치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조심해. 저 근처에도 몇 명이 있어.”진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때 김원도가 다가왔다.그는 진시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유 대표, 이분은 누구지?”유강후는 진시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김씨 집안 사람이라면 강씨 집안의 휘장을 모를 리가 없겠지. 내 약혼녀야.”김원도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유 대표는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곁에 있으니 오늘 밤에도 많은 여성분들이 마음 아파하겠어.”유강후는 김원도의 말을 무시한 채, 시선을 그에게서 돌려 방금 막 들어온 다른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남자는 김원도와 닮았지만, 그의 음험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그는 유강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원도에게 다가갔다.“형, 형도 여기 있었어?”김원도는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김원혁, 네가 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소문은 새어 나갔고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해 질 무렵, 유강후와 진시현이 뉴월드 호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그 자리는 단숨에 술렁거렸다.유강후는 말할 것도 없이 경원시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그는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의 출현은 곧바로 주목을 끌었다. 연회 주최자인 주경한은 유강후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유 대표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제 연회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유강후의 옆에 서 있는 진시현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가슴 위에 달린 블루 사파이어 브로치를 알아차렸다.조명 아래에서, 브로치 가장자리의 Y 모양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주경한은 이 바닥에서 감각이 빠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그는 한눈에 이것이 강씨 집안의 여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임을 알아차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이분이 바로 사모님이시군요!”그러나 유강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주경한은 이미 소문으로 유강후가 요즘 한 아가씨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녀가 강씨 집안 여주인의 물건을 사용할 정도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혹시 유 대표님, 곧 결혼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유강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곧 합니다.”주경한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럼 제가 빨리 축의금을 준비해야겠네요.”그는 진시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진시현은 유강후를 살짝 바라보았다.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주경한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장화연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을 믿으셔야 합니다.”그 말은 온다연의 추측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꽉 조여들었고, 마치 뒤틀려버린 밧줄처럼 고통스러워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그래서, 정말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거네요.”장화연은 말했다.“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모님과 우림 도련님의 안전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도련님께서는 사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저는 사모님께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더 무서워질 만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본 장화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군가 사모님의 안전을 담보로 도련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 동안 도련님은 밖에 나가 사모님처럼 보이는 사람을 일부러 꾸며냈어요. 그렇게라도 설명해 드리면 조금은 나아지실까요?”장화연은 유강후 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의 모든 행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은 묵직한 신뢰를 주었고, 때로는 유강후를 대신해 발언하는 권위도 있었다.온다연은 그런 그녀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 전화.그녀가 그렇게 오래 들었던 그 전화가 정말 거짓일 수 있을까?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후 씨의 휴대폰을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나요?”장화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사모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건 도련님께서 돌아오신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워낙 복잡하니, 타인들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제가 우림 도련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오늘 밤은 사모님께서 아이와 함께 주무세요.”곧 예쁜 아기가 방으로 안겨 들어왔다.아이가 들어오는 순간, 온다연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곤히 잠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부드럽게
그는 수년 동안 유강후의 곁에서 그의 냉혹한 수완을 지켜보며 살아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난히 매섭고 강렬했다.김씨 집안은 동양국에서 가장 유명한 재벌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몰락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이 과정에서 소요된 막대한 자금과 수단, 그리고 상업계에 불어닥친 폭풍우 같은 소란은 평범한 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번 사건은 그가 유강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히 깨닫게 했다.앞으로는 정말로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면, 온다연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을.온다연의 방.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온다연이 침대 모서리에 웅크린 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 안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장화연은 우유를 내려놓고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사모님, 도련님이 보고 싶으신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가 왜 오늘 오지 않는 거죠? 정말 회사에서 회의 중인 걸까요?”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악몽을 꾸셨죠? 이거 마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온다연은 우유를 받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 오늘 너무 심했어요. 저한테 한 달간 휴학하라고 했어요. 이유는 단지 염지훈이 제 선생님이라는 것뿐인데, 저랑 상의도 없이 제 수업을 멋대로 중단시켰어요.”“원래는 그 사람과 크게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결혼도 했고, 아기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모든 일을 잘 상의하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참았어요. 그런데 강후 씨는...”온다연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요? 강후 씨는 다를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다른 재벌 자제들과 다를 게 없었네요
유강후는 온다연이 악몽에 시달린 줄 알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다연아, 악몽 꿨어?”온다연은 가볍게 답하고선 말을 이었다.“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꿈을 꿨어요.”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던 유강후는 온다연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다른 여자랑 있을까 봐 걱정됐어? 꿈에서도 내 생각뿐이네?”온다연이 물었다.“어디에 있는지 왜 대답 안 해요?”“회사에서 미팅 중이었어. 아마 이틀 동안 바빠서 못 갈 거야. 아이랑 같이 잘 지낼...”“강후 씨.”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었고 곧바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요. 옆에 다른 여자 있죠?”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온다연의 흐느끼는 목소리에서는 그녀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들었어요. 다른 여자랑...”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그녀가 또 악몽을 꾼 줄 알고 걱정된 마음으로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유강후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지금 당장 다연이가 있는 방으로 가봐. 방금 통화했는데 악몽을 꿨는지 울고 있었어.”장화연이 답했다.“지금 바로 가볼게요.”“일이 복잡해져서 당분간은 못갈지도 몰라. 다연이랑 우림이 잘 돌봐줘. 절대 밖에 나가게 해서는 안 돼.”“알겠습니다.”“차라리 우림이를 옆에 데려다줘. 아이랑 같이 자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그럴게요.”장화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경호원을 통해서 들었는데 다연 씨가 나은별 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다연 씨는 힘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분입니다. 도련님께 대한 오해가 생겼다면 그 마음을 달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모릅니다. 두 분 어렵게 여기까지 온 만큼 서로에게 그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 나은별 씨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