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그래도 믿지 않았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온다연의 신분증은 지금 그녀의 손에 없었다. 급한 마음에 휴대폰을 열어 사진을 보여줬다. “이것 보세요. 저희 웨딩사진이에요.” 경찰은 반신반의하며 사진을 두어 번 쳐다봤다. 그리고 유강후를 몇 번 더 쳐다봤다. 사진 속의 사람이 유강후인 것을 확인하자 경찰이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이 진짜 당신 남자친구예요?”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곧 결혼해요.” 경찰은 휴대폰을 온다연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이만들 가세요. 무단 주차로 인한 벌금을 납부하는 걸 잊지 말고요!” 경찰이 멀어지자 온다연은 다시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자마자 유강후의 깊은 시선을 마주쳤다. 무거운 그의 눈빛에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을 탓하지 마세요.” 온다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분은 좋은 의도로 그런 거고 그게 경찰의 직업이잖아요.” 유강후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강한 존재감은 그가 말하지 않을 때 더욱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온다연은 그의 시선에 약간 주눅이 들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아까 일부러 때린 게 아니에요. 당신이 또 키스할 줄 알고 그만...” “근데 정말 아파요. 물 마실 때도 아프고 당신이 계속 밤새도록 키스했으니까 저도 좀 힘들었어요...” 그녀는 점점 더 억울해하며 말하다가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저를 하나도 아껴주지 않고 자꾸 제가 싫어하는 걸 말하게 하거나 하게 만들고...” 그녀는 팔목을 들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희고 가느다란 팔목에 푸르게 멍이 들어있고 손가락 자국도 선명했다. 분명 어젯밤 그가 만든 흔적이었다. 온다연은 울먹이며 말했다. “조금도 상냥하지 않아요! 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하는 거죠...”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에 난 멍 자국을 보며 마음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한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만큼 온다연의 마음에서 그를 밀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고작 하루 이틀 만에 실현되는 건 불가능했기에 조금 더딜지라도 서두르지 않기로 다짐했다. 유강후는 태연하게 온다연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경찰한테는 어떤 사진을 보여준 거야? 웨딩 사진?” 온다연은 얼굴을 붉히며 핸드폰을 낚아챘다. “아니거든요?” 사실 온다연은 요즘 심심할 때마다 포토샵 어플을 켜서 이것저것 만졌다. 그러다가 문득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궁금해져 인터넷에서 대충 사진을 골랐고 얼굴을 붙여 넣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려서 몇 장을 저장해 뒀다. 그 사진이 이럴 때 쓰일 줄이야. 하지만 절대 유강후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몇 분 후 그들은 집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병원에서 누군가 연고를 보내왔다. 잠자리에 들기 전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에 약을 얇게 발라주고, 여기저기 튼 입술에도 립밤을 발라줬다. 시원한 민트향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이거 뭐예요? 향이 엄청 좋네요.” 유강후는 그녀의 분홍빛 혀를 보고선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냥 평범한 립밤이야.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유강후는 이불을 끌어당겨 온다연에게 덮어주고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얼른 자.” 온다연의 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껐고 방안에는 침대 머리맡의 작은 등불만 남아있었다. 온다연은 그가 강제로 자기와 함께 자게 할 줄 알고 긴장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유강후는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줬을 뿐만 아니라 세심하게 불까지 꺼줬다. 온다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침대에서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도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어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자정이 될 때까지 뒤척이다가 순간 잠이 오지 않는 원인이 떠올랐다. 곰돌이! 그 곰인형이 유강후의 침실에 있다. 자리에
그 결과 수천 개의 기사가 검색되었다. 제일 위에 뜬 건 며칠 전 온천 호텔에 있었던 유강후 관련 기사였다. 사진 속의 유강후는 차분한 느낌의 정장 차림이었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다음으로 시선이 가는 곳엔 여자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임청하다. 포니테일을 한 임청하는 유강후의 정장과 같은 톤의 옷을 입고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활기찬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의 분위기까지 더해지자 왠지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온다연은 조금 남아있던 잠까지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아래에 뜬 다른 기사들을 클릭했다. 모두 며칠 전 온천호텔에서 찍힌 사진들인데 정말 신기하게도 모든 사진에 임청하가 담겨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임청하의 시선이 유강후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캐치했다. 온다연은 임청하가 유강후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유강후가 워낙 사람의 눈길을 끄는 존재라 그를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는 건 이상할 게 없지만, 그 여자가 임청하라는 게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어쩌면 온다연은 첫인상부터 임청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른 기사 몇 개를 더 훑어봤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이 심란해져 점점 잠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뾰로통해서 핸드폰을 한쪽에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원래는 우유 한잔을 마시고 다시 방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문이 반쯤 열린 서재에서 새여 나오는 불빛이 온다연의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우유를 손에 들고 2분 동안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시각 유강후는 바쁜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옅은 회색의 잠옷을 입고 있으니 정장을 입었을 때의 강렬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없지만 눈부신 미모는 평소와 똑같았다.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 있었는데 몇 가닥이 이마 앞으로 늘어져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젊어 보
“가지 마...” 온다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유강후의 손을 꽉 잡은 채 얼굴을 기대며 혼잣말을 했다. “가지 마...” 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졌다. ‘또 그 사람 꿈을 꾸는 건가?’ “아저씨...” 들릴 듯 말듯한 온다연의 그 목소리에 유강후는 기분이 심란해졌다. ‘무슨 꿈을 꾸는 거지? 나랑 같이 있는 꿈을 꿨나?’ 그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 “얼른 얘기해 봐. 나 좋아하지?” 온다연은 표정을 살짝 찡그리더니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아기...” 그 말은 유강후의 가슴을 심하게 후려쳤고 눈빛마저 유난히 어둡게 변했다. 그들의 아이가 없어졌다는 걸 온다연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히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유강후의 손은 온다연의 부드러운 얼굴에 닿았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선을 따라 가볍게 미끄러졌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온다연이 눈을 뜬다면 평소 강인하기만 하던 유강후가 조금 무너진 모습을 보게 된다. 심지어 그의 눈빛에는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함이 담겨있다. 숨김없는 미련과 깊은 슬픔에 더불어 공허함과 쓸쓸함마저 곁들어 있다. “다연아, 우리의 아기는 더 이상 여기에 없어...”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도 너무 괴로워...” 극도로 절제된 목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그를 수천 킬로그램의 돌로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웠다. 희미한 불빛이 그의 옆모습을 비추자 오늘따라 유난히 연약해 보이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모두가 의지하는 강한 남자의 아이콘이 지금은 극심한 고통에 빠져 절망 속에서 그를 구원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강후는 그녀의 옆에 누웠다. 온다연은 잠결에 느껴진 익숙한 온도와 숨결에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의 품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 후 작은 손을 유강후의 허리에 걸치고 가녀린 다리로 그를 감쌌다. 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이 순간만큼은 고통에서
유강후는 단번에 강해숙의 의도를 알아챘고 곧장 임청하를 미국 지사로 옮겼다. ‘질투할 줄은 몰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보내고 여기에 남겨두는 건데. 그럼 매일 질투할 거잖아.’ 이때 온다연이 그의 품에서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아저씨...” 온다연이 깨어난 줄 알고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프니까 살살해요...” 유강후는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무슨 꿈을 꾸는 거지? 설마 키스하는 꿈을 꿨나?’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던 유강후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온다연은 깊이 잠들었다. 꿈속에서 유강후와 키스하고 있었는데 도망가지 못하게 손으로 꽉 누르고 있었고 어찌나 힘이 센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 다음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유강후가 집을 나섰다. 그는 평소와 달리 숙연한 모습이었다. 검은 셔츠의 단추는 끝까지 채웠고 손목에는 검은 구슬로 이루어진 팔찌를 찼다. 차는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권은 손에 작은 상자를 든 채 유강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탄 유강후는 그 상자를 손에 넣고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말없이 바라봤다. 차는 교외를 향해 속도를 냈다. 차 안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고 누구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법사님께서 아이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겁니다. 이제 도련님이 움직일 때가 왔습니다.”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장 귀중한 보물을 만지듯 작은 상자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권은 다시 속삭였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런 시련을 겪는 것도 어쩌면 하늘의 뜻일 겁니다. 다연 씨가 몸이 좋아지면 아이는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겁니다.” 유강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 “당시 수술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을 교체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경원에서 떠나게 만들어. 그전에 계약서 체결하고 조금이라도 소문을
바람이 불자 주위의 편백나무 잎사귀가 그의 슬픔에 화답하는 듯 바스락 소리를 냈고 애절하고 쓸쓸한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강후는 고개를 숙이더니 상자에 가볍게 입맞춤하고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야, 넌 영원히 엄마 아빠의 아이야. 영원히.” 그 후 미리 준비한 자신과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엮어 안에 넣고선 상자를 닫았다. 이때 비서가 묘비 위쪽의 작은 구멍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이제 보내줄 때가 됐습니다.” 유강후는 앞으로 나서서 상자를 넣었다. 그는 상자가 천천히 가라앉고 작은 구멍이 서서히 닫히는걸 두 눈으로 지켜봤다. 유강후는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정오가 되어서야 차는 정원을 빠져나와 눈에 띄지 않은 작은 사찰로 향했다. 이때 장화연이 전화를 걸었다. “다연 씨 깨어났습니다. 도련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여쭤보시는데...” 줄곧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그제야 풀리기 시작했다. “회사라고 얘기해 줘. 오후에 들어갈 거야.” “방금 일어났어? 또 아무것도 안 먹었겠네?” “조금 드셨습니다.” “뭐 먹었어?” “계란찜이랑 제비집 몇 입 드시고선 화방에 그림 그리러 가셨습니다.” “또 신발 안 신고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옆에서 잘 지켜봐. 찬 음식은 절대로 주지 말고.” “알겠습니다. 도련님.” 통화를 마친 유강후는 다시 싸늘한 표정으로 돌변해 이권을 바라봤다. “뭘 봐? 한동안 가만히 있으니까 맞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나 봐?” 이권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 단지 도련님이 다연 씨를 무척이나 아끼시는 것 같아서...” 유강후는 차갑게 코웃음 쳤다. “당연히 아껴야지.” 이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끼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밥은 그렇다 치고, 신발 신는 것까지 신경 쓰는 건 참...’곧 차는 고풍스러운 사찰 앞에 멈춰 섰다. 이권은 유강후의 뒤를 따르며 나지막하게 속사였다. “법사님께서 내일 바로 돌
팔을 뻗어 그림을 만져보니 손에 물감이 묻었다. 유강후는 그림을 떼어내 장화연에게 주었다. “액자에 넣어서 사무실에 걸어줘.” 장화연은 그림을 들고나갔다. 소파로 걸어간 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의 차디찬 손끝이 부드러운 볼에 닿자 온다연은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졸음이 가득한 눈빛은 매우 흐릿해 보였고 목소리마저 가냘팠다. “아저씨...” 유강후는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그녀의 몸 양쪽에 뻗은 채 나지막하게 물었다. “하루종일 잤어?” 온다연은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계속 졸려요...” “어젯밤에 너무 늦게 자서 그런가 봐요. 잠이 안 왔어요...” 유강후는 잠꼬대를 하는 온다연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혼자 자면 더 잘 잔다며? 잠이 안 왔어?” 정말 이상하게 자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가도 옆에 유강후가 있으면 마치 잠꾸러기로 빙의되듯 바로 졸음이 밀려왔다. 그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할 수 없었던 온다연은 그저 말없이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유강후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비쳤고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온다연의 입술은 유난히 촉촉했는데 부드럽고 키스하기 좋아 보였다. 유강후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격렬하면서도 유연한 움직임에 온다연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느다란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고 팔로 유강후의 목을 꽉 감싸 안은채 결코 놓지 않았다. 이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의 부드러운 몸은 계속하여 유강후에게 달라붙었고 목소리에서는 애틋함이 느껴졌다. “아저씨...” “느낌이 이상해요...” 유강후도 거의 통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저 가볍게 키스하고 싶었을 뿐인데 온다연은 사람이 바뀐 것처럼 그의 입술을 물어뜯거나 깨물면서 손으로 몸 곳곳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이 몸에 닿으니 유강후도 흥분되기는 마찬가지다.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망정이지 그렇지
이때 온다연의 다른 손도 그의 허리에 닿았다. “아저씨...”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애교와 간절함이 묻어나 뭔가를 원하는듯했다. 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고 목이 점점 메어왔다. “ 잠깐 나갔다가 올게...” 유강후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 수가 없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냉장고를 열어 얼음물 두 병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야 마음속의 욕구를 가까스로 누그러뜨렸다. 온다연이 마음먹고 달려드는 순간 유강후는 꼼짝없이 넘어가게 되어있다. 노골적인 행동이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조금만 반응을 보이면 유강후는 통제력을 잃기 십상이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야릿한 옷을 입고 그에게 애교를 부리며 원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욕구가 밀려오는지 한겨울에 욕실로 들어가 찬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는 온다연은 안고 서재로 데려갔다. 그 후 작은 상자에서 정교한 팔찌 두 개를 꺼냈다. 팔찌는 세심하게 연마된 흑요석 구슬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는 난해한 문자가 가득 새어져 있었고 가운데는 투명한 물방울 모양의 호박석이 있었다. 호박석의 중앙에는 머리카락 같은 것이 보였다. 온다연은 호박석을 만지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안에 있는 건 뭐예요? 벌레?” 유강후의 눈에 고통이 번쩍였다. 그는 팔찌를 온다연에게 채워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종의 식물인데... 똑같은 게 나타날 확률은 아주 드물거든? 우연히 발견했는데 마침 법사님도 경원에 계셔서 특별히 부탁했지. 안전과 건강을 빌어주는 작용을 한달까?” 온다연은 다른 팔찌도 살펴보았다. 유강후의 팔찌는 구슬이 조금 클 뿐 가운데 호박석과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것도 똑같이 들어있었다. 아마 커플용인듯싶다. 유강후에게 커플템을 선물 받는 게 처음이었던 온다연은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머금고 재빨리 팔찌를 그에게 채워줬다. 그러고선 애정 어린 눈빛으로 호박석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호박석이 둘도 없는 존재라고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