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리고 더 있어?”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오늘은 절대 저한테 키스하지 마요. 제가 직접 내려갈 거니까 안아주지도 마요!”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모든 요청을 다 들어주었다. “이제 나랑 같이 갈 수 있겠어?”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강후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기가 있는 무균실을 지나갈 때 온다연은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서성였다. 얼굴을 문에 기대어 안을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결국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유강후는 병원과 가까워 서둘러서 차를 직접 몰고 왔기에 차는 병원 입구에 대충 세워져 있었다. 차에 타고 나서 유강후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안전벨트를 채워주려 몸을 기울였다. 그가 다가오는 순간 온다연은 또다시 그가 키스를 하려는 줄 알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쳤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사실 이건 온다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어젯밤에 너무 심하게 키스를 당해 지금도 입술이 부어 있고 입안과 입술 가장자리도 상처가 나서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아팠다. 그런데 그만 손이 먼저 반응했고 마치 뺨을 한 대 내리친 것처럼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유강후는 그녀의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얼굴과 눈빛이 달라졌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연, 내가 너무 너를 봐줬나? 기회만 되면 내 뺨을 때리는 건가?” 온다연도 깜짝 놀랐지만 이미 때린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먼저 키스하려고 다가온 건 그였으니 말이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 겁을 먹었으면서도 온다연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당신이 먼저 저한테 키스하려고 했잖아요!” 유강후는 인내심이 그녀로 인해 거의 소진될 지경이었다.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온다연, 나는 너의 남자야. 너와 키스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온다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무서운 기억이 다시 떠올라
경찰은 곧바로 무전기를 들며 말했다. “인평 개인 병원 입구에서 경찰을 공격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유강후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고 다가온 경호원들에게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뭘 하려는 거야? 당장 물러서!” 경호원들은 그제야 물러섰지만 경찰은 여전히 유강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경찰은 온다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가씨, 겁먹지 마세요. 제 동료들이 곧 도착할 거고 우리가 당신을 보호할 겁니다. 지금 차에서 내려 제 쪽으로 오세요.” 그는 차 문을 단단히 잡으며 유강후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이건 단순히 불법 주차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불법 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있어요.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불법 주차는 분명 제 잘못입니다. 처벌을 받고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면 제 변호사가 연락을 드릴 겁니다.” 경찰은 비웃으며 말했다. “변호사 하나로 날 겁먹게 하려고? 내가 당싱 같은 쓰레기들 무서워할 것 같아? 내가 입고 있는 이 제복을 괜히 입고 있는 줄 알아?” 그러고는 엄격하게 소리쳤다. “내려!” 이때 온다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찰 아저씨, 오해하신 거예요. 이 사람은 변태가 아니에요.” 온다연은 방금까지 울어서 눈이 붉게 물들었고 목소리도 가늘고 여리게 들렸다. 경찰은 이를 보고 그녀가 협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다정하게 말했다. “아가씨, 겁내지 마세요. 이 변태들이 당신을 어쩌지 못할 겁니다. 혹시 사진을 찍어서 당신을 협박하면서 좋은 말을 하라고 시킨 건 아닌가요?” 경찰의 판단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는 병원에서부터 이 남자가 계속해서 이 어린 아가씨를 껴안으려 하고 아가씨는 계속해서 그를 피하며 거절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온다연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온다연이 고등학생처럼 어려 보였기
경찰은 그래도 믿지 않았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온다연의 신분증은 지금 그녀의 손에 없었다. 급한 마음에 휴대폰을 열어 사진을 보여줬다. “이것 보세요. 저희 웨딩사진이에요.” 경찰은 반신반의하며 사진을 두어 번 쳐다봤다. 그리고 유강후를 몇 번 더 쳐다봤다. 사진 속의 사람이 유강후인 것을 확인하자 경찰이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이 진짜 당신 남자친구예요?”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곧 결혼해요.” 경찰은 휴대폰을 온다연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이만들 가세요. 무단 주차로 인한 벌금을 납부하는 걸 잊지 말고요!” 경찰이 멀어지자 온다연은 다시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자마자 유강후의 깊은 시선을 마주쳤다. 무거운 그의 눈빛에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을 탓하지 마세요.” 온다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분은 좋은 의도로 그런 거고 그게 경찰의 직업이잖아요.” 유강후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강한 존재감은 그가 말하지 않을 때 더욱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온다연은 그의 시선에 약간 주눅이 들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아까 일부러 때린 게 아니에요. 당신이 또 키스할 줄 알고 그만...” “근데 정말 아파요. 물 마실 때도 아프고 당신이 계속 밤새도록 키스했으니까 저도 좀 힘들었어요...” 그녀는 점점 더 억울해하며 말하다가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저를 하나도 아껴주지 않고 자꾸 제가 싫어하는 걸 말하게 하거나 하게 만들고...” 그녀는 팔목을 들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희고 가느다란 팔목에 푸르게 멍이 들어있고 손가락 자국도 선명했다. 분명 어젯밤 그가 만든 흔적이었다. 온다연은 울먹이며 말했다. “조금도 상냥하지 않아요! 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하는 거죠...”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에 난 멍 자국을 보며 마음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한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만큼 온다연의 마음에서 그를 밀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고작 하루 이틀 만에 실현되는 건 불가능했기에 조금 더딜지라도 서두르지 않기로 다짐했다. 유강후는 태연하게 온다연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경찰한테는 어떤 사진을 보여준 거야? 웨딩 사진?” 온다연은 얼굴을 붉히며 핸드폰을 낚아챘다. “아니거든요?” 사실 온다연은 요즘 심심할 때마다 포토샵 어플을 켜서 이것저것 만졌다. 그러다가 문득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궁금해져 인터넷에서 대충 사진을 골랐고 얼굴을 붙여 넣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려서 몇 장을 저장해 뒀다. 그 사진이 이럴 때 쓰일 줄이야. 하지만 절대 유강후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몇 분 후 그들은 집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병원에서 누군가 연고를 보내왔다. 잠자리에 들기 전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에 약을 얇게 발라주고, 여기저기 튼 입술에도 립밤을 발라줬다. 시원한 민트향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이거 뭐예요? 향이 엄청 좋네요.” 유강후는 그녀의 분홍빛 혀를 보고선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냥 평범한 립밤이야.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유강후는 이불을 끌어당겨 온다연에게 덮어주고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얼른 자.” 온다연의 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껐고 방안에는 침대 머리맡의 작은 등불만 남아있었다. 온다연은 그가 강제로 자기와 함께 자게 할 줄 알고 긴장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유강후는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줬을 뿐만 아니라 세심하게 불까지 꺼줬다. 온다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침대에서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도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어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자정이 될 때까지 뒤척이다가 순간 잠이 오지 않는 원인이 떠올랐다. 곰돌이! 그 곰인형이 유강후의 침실에 있다. 자리에
그 결과 수천 개의 기사가 검색되었다. 제일 위에 뜬 건 며칠 전 온천 호텔에 있었던 유강후 관련 기사였다. 사진 속의 유강후는 차분한 느낌의 정장 차림이었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다음으로 시선이 가는 곳엔 여자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임청하다. 포니테일을 한 임청하는 유강후의 정장과 같은 톤의 옷을 입고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활기찬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의 분위기까지 더해지자 왠지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온다연은 조금 남아있던 잠까지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아래에 뜬 다른 기사들을 클릭했다. 모두 며칠 전 온천호텔에서 찍힌 사진들인데 정말 신기하게도 모든 사진에 임청하가 담겨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임청하의 시선이 유강후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캐치했다. 온다연은 임청하가 유강후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유강후가 워낙 사람의 눈길을 끄는 존재라 그를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는 건 이상할 게 없지만, 그 여자가 임청하라는 게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어쩌면 온다연은 첫인상부터 임청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른 기사 몇 개를 더 훑어봤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이 심란해져 점점 잠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뾰로통해서 핸드폰을 한쪽에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원래는 우유 한잔을 마시고 다시 방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문이 반쯤 열린 서재에서 새여 나오는 불빛이 온다연의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우유를 손에 들고 2분 동안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시각 유강후는 바쁜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옅은 회색의 잠옷을 입고 있으니 정장을 입었을 때의 강렬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없지만 눈부신 미모는 평소와 똑같았다.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 있었는데 몇 가닥이 이마 앞으로 늘어져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젊어 보
“가지 마...” 온다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유강후의 손을 꽉 잡은 채 얼굴을 기대며 혼잣말을 했다. “가지 마...” 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졌다. ‘또 그 사람 꿈을 꾸는 건가?’ “아저씨...” 들릴 듯 말듯한 온다연의 그 목소리에 유강후는 기분이 심란해졌다. ‘무슨 꿈을 꾸는 거지? 나랑 같이 있는 꿈을 꿨나?’ 그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 “얼른 얘기해 봐. 나 좋아하지?” 온다연은 표정을 살짝 찡그리더니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아기...” 그 말은 유강후의 가슴을 심하게 후려쳤고 눈빛마저 유난히 어둡게 변했다. 그들의 아이가 없어졌다는 걸 온다연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히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유강후의 손은 온다연의 부드러운 얼굴에 닿았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선을 따라 가볍게 미끄러졌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온다연이 눈을 뜬다면 평소 강인하기만 하던 유강후가 조금 무너진 모습을 보게 된다. 심지어 그의 눈빛에는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함이 담겨있다. 숨김없는 미련과 깊은 슬픔에 더불어 공허함과 쓸쓸함마저 곁들어 있다. “다연아, 우리의 아기는 더 이상 여기에 없어...”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도 너무 괴로워...” 극도로 절제된 목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그를 수천 킬로그램의 돌로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웠다. 희미한 불빛이 그의 옆모습을 비추자 오늘따라 유난히 연약해 보이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모두가 의지하는 강한 남자의 아이콘이 지금은 극심한 고통에 빠져 절망 속에서 그를 구원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강후는 그녀의 옆에 누웠다. 온다연은 잠결에 느껴진 익숙한 온도와 숨결에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의 품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 후 작은 손을 유강후의 허리에 걸치고 가녀린 다리로 그를 감쌌다. 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이 순간만큼은 고통에서
유강후는 단번에 강해숙의 의도를 알아챘고 곧장 임청하를 미국 지사로 옮겼다. ‘질투할 줄은 몰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보내고 여기에 남겨두는 건데. 그럼 매일 질투할 거잖아.’ 이때 온다연이 그의 품에서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아저씨...” 온다연이 깨어난 줄 알고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프니까 살살해요...” 유강후는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무슨 꿈을 꾸는 거지? 설마 키스하는 꿈을 꿨나?’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던 유강후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온다연은 깊이 잠들었다. 꿈속에서 유강후와 키스하고 있었는데 도망가지 못하게 손으로 꽉 누르고 있었고 어찌나 힘이 센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 다음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유강후가 집을 나섰다. 그는 평소와 달리 숙연한 모습이었다. 검은 셔츠의 단추는 끝까지 채웠고 손목에는 검은 구슬로 이루어진 팔찌를 찼다. 차는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권은 손에 작은 상자를 든 채 유강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탄 유강후는 그 상자를 손에 넣고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말없이 바라봤다. 차는 교외를 향해 속도를 냈다. 차 안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고 누구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법사님께서 아이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겁니다. 이제 도련님이 움직일 때가 왔습니다.”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장 귀중한 보물을 만지듯 작은 상자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권은 다시 속삭였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런 시련을 겪는 것도 어쩌면 하늘의 뜻일 겁니다. 다연 씨가 몸이 좋아지면 아이는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겁니다.” 유강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 “당시 수술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을 교체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경원에서 떠나게 만들어. 그전에 계약서 체결하고 조금이라도 소문을
바람이 불자 주위의 편백나무 잎사귀가 그의 슬픔에 화답하는 듯 바스락 소리를 냈고 애절하고 쓸쓸한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강후는 고개를 숙이더니 상자에 가볍게 입맞춤하고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야, 넌 영원히 엄마 아빠의 아이야. 영원히.” 그 후 미리 준비한 자신과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엮어 안에 넣고선 상자를 닫았다. 이때 비서가 묘비 위쪽의 작은 구멍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이제 보내줄 때가 됐습니다.” 유강후는 앞으로 나서서 상자를 넣었다. 그는 상자가 천천히 가라앉고 작은 구멍이 서서히 닫히는걸 두 눈으로 지켜봤다. 유강후는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정오가 되어서야 차는 정원을 빠져나와 눈에 띄지 않은 작은 사찰로 향했다. 이때 장화연이 전화를 걸었다. “다연 씨 깨어났습니다. 도련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여쭤보시는데...” 줄곧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그제야 풀리기 시작했다. “회사라고 얘기해 줘. 오후에 들어갈 거야.” “방금 일어났어? 또 아무것도 안 먹었겠네?” “조금 드셨습니다.” “뭐 먹었어?” “계란찜이랑 제비집 몇 입 드시고선 화방에 그림 그리러 가셨습니다.” “또 신발 안 신고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옆에서 잘 지켜봐. 찬 음식은 절대로 주지 말고.” “알겠습니다. 도련님.” 통화를 마친 유강후는 다시 싸늘한 표정으로 돌변해 이권을 바라봤다. “뭘 봐? 한동안 가만히 있으니까 맞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나 봐?” 이권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 단지 도련님이 다연 씨를 무척이나 아끼시는 것 같아서...” 유강후는 차갑게 코웃음 쳤다. “당연히 아껴야지.” 이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끼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밥은 그렇다 치고, 신발 신는 것까지 신경 쓰는 건 참...’곧 차는 고풍스러운 사찰 앞에 멈춰 섰다. 이권은 유강후의 뒤를 따르며 나지막하게 속사였다. “법사님께서 내일 바로 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무려 임산부였다.게다가 그 남자의 품에 안겨 가냘픈 목소리로 아저씨를 찾기도 했다.남자는 그녀가 숨이 딸릴 정도로 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손을 쓰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그 꿈은 꽤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바람이 사납게 불고 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내린 폭우가 쉼 없이 창문을 거세게 두드릴 때야 온다연은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본 광경은 키 큰 남자가 창가에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었다.온다연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사람을 부르려던 찰나 그 남자가 다급히 제지했다.“부르지 말아요, 저예요!”낮은 목소리는 익숙했다.온다연은 잠시 멈칫한 끝에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다름 아닌 꿈속의 그 남자였다!창문을 통해 들어온 것인지 의문이 가득하던 찰나 온다연의 인기척을 느낀 경호원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온다연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경호원들은 여전히 걱정되어 물었다.“아가씨, 천둥소리에 놀라셨습니까? 같이 있어 줄 사람이라도 필요하십니까?”“필요 없다니까요!”“아가씨,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거셉니다. 문을 열어주시면 창문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저희가 검사해드리겠습니다!”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필요 없다고 말했잖아요. 귀찮으니까 더 말 시키지 말아요!”온다연이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경호원들도 잠잠해졌다.유강후의 옷과 바지는 모두 반쯤 젖어있었고 머리카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강후의 기세만큼은 가려지지 않았다.게다가 옷이 젖은 탓에 거의 보일락 말락 한 그의 탄탄한 몸매에 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졌다.“강 대표님이 왜 창문으로 들어오는 거죠?”유강후는 창문을 닫고 몸을 돌려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깼어요?”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가 창문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여긴 2층이라고요!”유강후는 여
남자는 안윤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채며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평범한 사람이라고?”“안 아가씨, 10년 전 금우역에서 불을 지른 일을 기억하나? 내 얼굴 좀 봐. 이 흉터, 네놈들이 지른 불 때문에 생긴 거야!”남자의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우리 부모님은 그저 평범한 농민이었어.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나를 잘 키워 공부를 시켜 성공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부모였어.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 너희는 지나가다가 웃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분들을 악의 화신이라 규정했지! 그러고는 우리를 집 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어. 우리 부모님은 필사적으로 날 품에 안으셨고, 덕분에 나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어. 하지만 부모님은 그만 온몸이 새까맣게 타버리고 말았지.”“그분들이 무슨 죄가 있었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살아갈 자격조차 없었다는 거야? 몇 년 동안 너희를 찾아 헤맸어. 그렇게 한 명씩 제거했지. 너희가 세상을 정화한다고? 난 너희 같은 악마들을 정화할 거다!”남자는 안윤희의 목을 세게 움켜쥐었고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안윤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너희들 정말 잘 숨어 있더구나. 한 놈을 찾는 데 꼬박 반년에서 일 년이 걸렸어. 그런데 오늘은 누가 너를 직접 내게 데려다주고 돈까지 준 거야.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줄이야!”그는 안윤희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지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형님들, 배 위에서 고기 구경 못한 지 오래됐지? 오늘 마음껏 즐겨보자!”“저기요, 이 아가씨는 신국 안씨 가문의 큰 아가씨입니다.”“걱정하지 마. 방금 뉴스에서 이 아가씨가 이미 죽었다고 나왔어. 심지어 시신도 확인됐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이 여자는 그저 안씨 가문의 아가씨를 닮은 여자일 뿐이야.”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안윤희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안 돼! 나는 안씨 가문의 큰딸이야! 너희가 날 건드리면 우리 이모부가
유강후는 진시현의 볼록하게 나온 배를 한 번 바라보며 웃음을 띠고 말했다.“얼마나 됐어?”진시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거의 다섯 달 됐어요.”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움직이기도 해요.”유강후의 눈에 잠시 어두운 빛이 스쳤다. 예전에 자신의 아이도 딱 이 정도였을 때...유강후는 곧 미소를 짓고 로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로운, 대단하네. 이제 아빠가 됐구나. 결혼식 때 참석 못한 게 많이 아쉬웠는데 나중에 네 아들 태어나면 큰 선물로 보답할게.”항상 무표정하던 로운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번졌다.“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걸 받았습니다.”유강후는 말했다.“전에 준 건 모두 준구 것이었지. 지난 몇 년 동안 잘 관리해서 자산을 두 배로 늘렸더라. 하지만 이제 아내도 있고 아이도 생겼으니 너 자신을 위해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그걸 나눠서 20% 지분을 네가 가져. 내가 네 아들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라고 생각하고.”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뒤돌아 진시현의 볼록한 배를 몇 초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 대표님.”“며칠 동안 도련님을 데리고 가서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조상님께 향도 한 번 올리고요.”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똑똑한 아이이니 지금처럼 잘 키우면 성년이 되기 전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가 일을 맡길 수 있을 거다. 데려가는 건 좋지만 아직은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물론입니다.”유강후는 다시 물었다.“내가 찾으라고 한 자료는 확인했어?”로운은 묶어둔 자료를 꺼내 유강후에게 건넸다.“이것은 성염 조직에 대한 정보입니다. 인원은 많지 않지만 굉장히 단결되어 있습니다. 한 번 목표로 삼으면 끈적한 반창고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조직은 크게 두려워할 것은 없지만 상대하기엔 매우 불쾌한 존재입니다.”유강후는 자료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안윤희는 여기서
유강후는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차갑고 무심한 시선으로 안윤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성염 조직, 너랑 무슨 관계야?”안윤희는 고개를 확 들어 올리며 눈빛에 불안함을 담고 대답했다.“무, 무슨 성염이요?”성염 조직은 국제적인 테러 집단으로 극단주의자들로만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그들은 불이 모든 것을 정화한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악으로 간주한 대상은 무엇이든 태워 세계를 정화하려 했다.그들의 활동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았고 그들의 눈에 악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정화의 대상이 되었다.이로 인해 암흑가뿐만 아니라 정계에서도 성염 조직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유강후는 안윤희를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히 말했다.“네가 어떤 조직에서 왔든 상관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둬. 만약 네가 온다연에게 손이라도 대려 한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너희 안씨 가문과 성염 조직 모두 비참하게 끝날 테니까.”안윤희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꽉 쥐고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유강후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 나갔다.안윤희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천천히 일어섰다.방금 발에 차여 바닥에 나가떨어진 그녀는 무릎이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통증을 느끼는 기색은 없었다.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사라져가는 유강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난 분명히 널 선택했어. 그런데 날 거부하고 그 재수 없는 여자만 원한 대가가 뭔지 제대로 보게 될 거야. 다연이가 그렇게 좋다면 두 사람 다 함께 끝장내주지.”“이모, 이모부. 저는 다연이를 해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애가 먼저 제 선택을 빼앗았어요. 뻔뻔한 사람은 다연이지 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저를 탓하지 마세요.”안윤희의 낮은 혼잣말은 복도를 스치는 바람 속에 흩어졌다. 그러나 그중 일부가 안심의 귀에 닿았다.안심은 다친 채 서 있는 안윤희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니? 왜 이렇게 엉망이야?”안윤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제가 실수로 넘어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한 연인처럼 자연스러운 호흡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들만의 공간은 다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던 유강후가 온다연 앞에서 이렇게까지 낮은 자세를 보일 줄은.유강후는 온다연을 마치 손바닥 위에서 소중히 감싸 보호하는 것 같았다. 유강후는 모든 일을 직접 나서서 처리하며 온다연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보살폈다. 그녀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정성과 인내를 아끼지 않았다.그리고 온다연은 그런 그의 행동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러다 부모님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서야 온다연은 자신이 유강후의 옷소매를 잡고 있었다는 것과 방금 그 소매로 입을 닦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황급히 손을 놓고 어쩔 줄 몰라 했다.방 안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안윤희만 질투 어린 눈빛으로 온다연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유강후는 이 어색한 분위기에 개의치 않는 듯 즉시 사람을 시켜 과일을 준비하게 했다.게다가 그가 준비한 과일은 전부 온다연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과일이 준비되고 나서 진수현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강 대표, 당장 나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제가 너무 오래 있었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일을 준비했으니 다연이가 다 먹는 걸 보고 나가겠습니다.”진수현은 조금의 인내도 없이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다연이 부모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우리가 충분히 지켜줄 수 있어. 그러니까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지금 당장 나가!”유강후는 움직이지 않고 과일 접시를 들어 올려 깎은 과일 하나하나에 이쑤시개를 꽂았다. 심지어 샤인머스캣조차도 빠뜨리지 않았다.그는 과일을 다 준비한 뒤 온다연 앞에 과일 접시를 내밀며 낮게 말했다.“먹어.”온다연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과일 접시를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왜 딸기까지 반으로 잘랐어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안윤희는 눈가가 붉어진 채 무언가 말하려다 문득 들어오는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피로가 얼굴에 드러났지만 강렬한 분위기와 또렷한 외모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그는 방 안에 있는 안윤희를 힐끗 바라봤고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안윤희의 온몸에 서늘한 전율이 퍼졌다.그의 눈빛은 차갑고 어두웠으며, 마치 독을 품은 칼날처럼 사람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안윤희는 자신이 수많은 남자를 만나봤다고 자부했지만 이렇게 무서운 눈빛을 가진 이는 유강후가 유일했다.안윤희의 마음이 급격히 흔들렸고 유강후가 뭔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했으며 관련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으니 불안할 필요가 없었다.죽은 사람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법이다.안윤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머리를 매만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 안녕하세요.”유강후는 더 이상 안윤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온다연 앞으로 다가가 작은 약병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곽 의사가 방금 보내준 약이야. 먹어봐.”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마치 세상에 수많은 아름다움이 있어도 그의 눈에는 온다연만이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인 듯했다온다연은 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특이한 향이 풍겼고 어딘가 피 냄새와도 비슷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온다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유강후는 병을 다시 가져가 약을 꺼내 직접 하나 삼켰다.“봐, 문제없어. 이 약 총 20알이야. 곽 의사가 그러는데, 재료가 워낙 귀해서 자기한테도 40알밖에 없었대. 그중 절반을 나한테 준 거거든. 이거 먹으면 건강 진짜 좋아질 거야. 어쩌면 앞으로 약 안 먹어도 될지도 몰라.”그가 말을 마치자 진수현은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약이 20알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하나를 먹었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유강후는 아무 대꾸 없이 옆에 있던 곶감을 집어 온다연의 입가로
“너도 명색에 안씨 가문의 큰딸이야. 가문이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지만, 여전히 명문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좋은 물건이 부족할 리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거니...”안심은 말을 멈추고 온다연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다연아, 그저 한 세트의 장신구일 뿐이야. 너무 기분 상하지 말고, 엄마가 더 좋은 걸로 새로 준비해 줄게.”온다연은 안윤희 눈에 잠깐 스친 뚜렷한 분노를 보고는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배은망덕하다는 말이 딱 적합했다.“엄마, 더 큰 금고를 하나 마련해 주세요. 귀중한 물건들은 거기 보관하고 제가 직접 관리할게요.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안심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물건은 네가 직접 챙기는 게 맞지.”안윤희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이건 분명 안윤희를 경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안윤희는 개의치 않았다. 고작 몇 개의 장신구일 뿐이었고 갚지 못할 정도의 거금도 아니었다. 대진 그룹의 부대표가 된다면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온다연은 바보처럼 자신의 손에 놀아나게 되어 있을 것이다.안윤희의 눈에 스친 냉소는 온다연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지난 3년간 아버지 진수현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운 온다연은 속으로 생각했다.회사 관리를 원하지 않는 것과 관리 능력이 없는 건 엄연히 다른 거라고.비록 회사를 직접 관리하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사업을 결코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온다연은 진수현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말했다.“아빠, 이제 제 신분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대진 그룹을 정식으로 이어받아 앞길을 열어가고 싶습니다.”온다연의 말에 안윤희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윤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했다.“다연아, 아직 몸이 좋지 않잖아. 건강을 회복한 뒤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아. 회사 일은 우리한테 맡겨도 되잖아.”온다연은 안윤희의 말을 무시한 채 진수현을 향해 말했다.“아빠, 언제까지 아빠 뒤에만 숨을 수는 없어요. 이
안씨 가문도 명문가이긴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할 뿐 이미 속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만약 진씨 가문이 뒤에서 받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안윤희는 제대로 된 옷 한 벌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예전에 온다연에게서 가져간 물건 중 상당수는 이미 팔아버려 이제 와서 돌려줄 수도 없었다.그때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윤희의 눈빛이 잠시 차갑게 빛나더니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다연아, 이러지 마. 예전에 네가 선물로 줬던 물건들을 이제 와서 돌려달라니, 말이 돼? 난 우리를 자매처럼 생각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일 줄은 몰랐어...”온다연은 아무 말 없이 안윤희를 차갑게 바라보았고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잠시 후, 진씨 부부가 방으로 들어왔다.안심은 안윤희가 온다연의 병상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곤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윤희가 먼저 말했다.“이모, 다연이가 제가 예전에 받았던 장신구들을 다 돌려달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뭘 받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일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줬어요... 어젯밤에 제가 다연이를 제대로 따라다니지 않고 혼자 둔 걸로 저를 원망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제 일이 있었는데 말이에요...”안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심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연아, 정말 그런 거야?”온다연은 상체를 일으키며 안윤희를 차갑게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언니, 연기 그만해. 그동안 언니가 내 물건 가져간 건 전부 언니 멋대로였잖아. 빌린다고 말했지만, 내가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어제 언니가 가져간 건 내가 결혼식 때 쓰려고 준비해 둔 장신구였어.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건데, 그냥 가져가더라. 난 허락한 적이 없었는데. 아니면 진씨 가문 물건은 언니가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뜻이야?”온다연의 말투에는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언제부터 진씨 가문이 안씨 가문과 한 식구가 됐는데?”
그때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화면에 표시된 번호를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몇 분 후, 안윤희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안윤희는 연한 하늘색 발목 길이 드레스를 입고 하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러나 침대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온다연의 모습이 훨씬 더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안윤희의 마음속에 묘한 질투심이 피어올랐다.안윤희는 방 안을 둘러보고는 유강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안윤희는 장미꽃을 창가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다연아, 몸은 좀 괜찮아졌어?”하지만 온다연은 원래부터 백장미를 싫어했다. 온다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윤희를 쏘아보며 물었다.“왜 왔어?”안윤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깨어났다고 해서 와봤어. 그런데 아직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누가 진씨 가문을 노리기라도 했어?”온다연은 이번 일에 안윤희가 직접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내가 깨어난 게 언니랑 무슨 상관인데?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언니가 더 잘 알지 않아?”안윤희는 순간 당황했다.온순했던 온다연이 요즘은 마치 가시가 돋은 듯 상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다연아, 혹시 어제 내가 목걸이를 빌려 간 것 때문에 아직도 화난 거야?”안윤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급해서 미처 말 못 했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온다연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빌린 거라고? 그럼 어제 가져간 장신구 다시 돌려줄래? 내가 다시 쓸 일은 없겠지만, 그건 어머니가 내 혼수를 위해 준비해 주신 거라 남에게 줄 수는 없어.”안윤희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돌려달라고 요구하다니, 감히!원래 그 장신구는 안윤희,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온다연이 중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