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소은 씨인가요?”전화기 너머에서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한소은이 당황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다름이 아니라, 이번 파리 패션쇼에서 에르사 회사 슈퍼모델이 뿌린 향수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동일 시리즈 향수 모두 한소은 씨께서 조향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상대방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한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어디서 이런 소식을 들으신 건가요?”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한소은이 경계한다는 걸 눈치채고 가볍게 웃었다.“한소은 씨,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전화를 한 건 악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희는 유란 회사입니다. 당신이 조향한 향수가 마음에 무척 들어 함께 일해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만나서 얘기해 보시지 않겠습니까?”“유란?”‘세계 최고의 향수 브랜드를 만든 그 향수 회사?’“맞습니다.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그 유란입니다. 허허, 저희는 사기꾼이 아니에요. 정말 당신의 향수가 마음에 들어 얘기하고 싶습니다.”상대방은 한소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알아맞혔다.한소은이 깊은숨을 내쉬고는 말했다.“제가 알기로는 본부가 파리에 있죠?”“맞습니다! 하지만 한소은 씨께서 파리로 오시기 꺼리신다면 저희가 그쪽 지점장에게 다시 연락드려 미팅 시간을 잡으라고 하겠습니다.”유란 쪽의 사람은 그녀에게 모두 맞춰줄 생각이었다.한소은의 핸드폰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소리가 작지 않았기에 옆에 있던 오이연도 통화내용을 모두 듣게 되었다. 그녀는 쩍 벌린 입을 틀어막으며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헐! 유란 본부라니!’세계 최고의 향수 브랜드인 데다가 수많은 조향사가 꿈에 그리던 회사였다. 지금 유란이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하는 건 한소은을 스카우트 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한소은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우선 어떤 부분을 함께하자는 건지부터 말해보세요.”“......”오이연은 놀라
유란 쪽의 사람은 한소은이 이렇게 쿨하게 거절할 줄 몰랐는지 그녀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해하며 다시 물었다.“한소은 씨, 우선 가격부터 들어보시는 건 어때요?”사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한소은이 가격을 들으면 마음을 바꿀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큰 금액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하지만 한소은은 들어볼 생각도 없는지 다시 거절 의사를 밝혔다.“필요 없어요. 얼마를 주셔도 팔지 않을 겁니다. 귀사에서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해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한소은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상대방이 급하게 한마디 덧붙였다.“한소은 씨, 우리 회사에서 이 향수를 좋게 보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 두셨으면 해요. 아무리 재능이 있는 사람이어도 혼자서는 큰일을 해낼 수 없어요. 우리 회사에서는 한소은 씨에게 가장 좋은 플랫폼을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지금 한소은 씨의 상황이 좋지 않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계속 조향 업계에 발을 담글 수 있을지도 문제라고 하던데요.”“이 일은 귀사에서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끊겠습니다!”말을 끝낸 한소은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정말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을 거야?”오이연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소은이 너무 빨리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다.상대방은 유란 이다! 다른 회사라면 몰라도 세계 1위이자 제일 큰 향수 브랜드다. 전 세계의 모든 조향사가 이 회사에 들어가려고 악을 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자기였다면 이렇게 좋은 기회가 눈앞에 왔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을 것이다.하지만 자기는 한소은이 아니다. 오이연은 평생 노력해도 한소은의 실력을 따라가지 못할 거란걸 잘 알고 있었다.“이 시리즈 향수는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거잖아. 여기에 쏟은 시간과 노력은 예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많아. 만약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승낙했겠지. 하지만 지금 유란에
생각하던 문제의 답을 찾지 못한 한소은은 우선 경찰을 따라 경찰서로 갔다.그녀의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죄목이 정해지지 않은 지금, 경찰들은 저번보다 공손하게 대했다. 따로 방에서 쉬고 있게 했고 차까지 내오고 나서야 드디어 조사가 시작되었다.“한소은 씨, 지금 윤소겸씨가 당신을 매수해 대윤 그룹이 출시한 향수 빅토리에 금지 성분을 첨가했다고 지목했어요. 이게 사실인가요?”“그런 일 한 적 없습니다.”한소은이 담담하게 말했다.“저는 윤소겸이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사실 대윤 그룹에서 절 지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어요.”“한 적이 없다면 윤소겸 씨가 왜 지목했을까요? 두 분 혹시 사적으로 원한이 있는 관계입니까?”“아니요. 왜 절 지목한 건지는 윤소겸 씨에게 물어봐야 할 거 같네요. 그리고 그 사람이 제출한 증거, 사진이나 녹음 파일 모두 전문적인 검증을 받는걸 요청합니다. 제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더 이상 해명을 하지 않겠어요.”......사실 경찰이 지금 묻는 말들 모두 관례적인 질문이다. 실질적인 증거는 많지 않았다. 그저 윤소겸이 자수를 하면서 그녀를 지목했다는 것뿐이었다.하는 수 없이 경찰이 윤소겸을 다시 심문했다.“당신이 한소은 씨를 향수에 금지 성분을 첨가한 장본인이라고 지목했는데 이에 대한 증거가 있나요? 그 여자가 직접 쓴 향수 레시피라든지 실질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그 여자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누가 직접 레시피를 쓰나요? 다 컴퓨터로 써서 프린트하지.”윤소겸이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그렇다는 건 아무런 증거가 없단 말입니까?”“증거는 이미 다 제출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증인인 내가 지금 여기에 있잖아요.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내가 자수를 했는데 그 여자가 하지 않았다면 왜 지목했겠습니까?”“이 사건은 내가 잘못한 게 확실합니다. 하지만 한소은이 향수에 어떤 금지 성분을 첨가했는지 모릅니다. 그저 사람들이 향수에 빠져 계속 우리 회사의 향수
‘그렇지!’경찰의 말을 들은 윤소겸의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번 도박에서는 그가 이긴 것이다. 이젠 모든 게 다 끝이 났다. 그는 분명 무사할 것이다.경찰청 로비에 양복을 쫙 빼입은 노형원이 서 있었다.“윤소겸씨를 보석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윤설아 씨를 고발하겠습니다.”“고발? 무엇을 고발한단 말입니까?”경찰이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발생한 일들은 모두 윤씨 가문을 둘러싼 일들이었다. 윤씨 가문이 정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나보다.“대윤 그룹 부사장 윤설아가 윤소겸에게 거짓 증언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노형원에 말에 경찰은 어리둥절 해졌다. 크게 뜬 두 눈에는 놀람이 가득 찼다.——몇 분 후 경찰이 윤소겸을 데리고 나왔다. 멀리서 노형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윤소겸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렸다.조사를 마치고 나오던 한소은이 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그러다 곧바로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노형원이 대윤 그룹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건 이상할 거 없었다. 하지만 여러 일들을 함께 두고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었던 일들이 이제는 말이 되기 시작했다.“한소은 씨, 미안합니다.”윤소겸이 한소은에게 다가가 경찰들이 보는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과했다.“내가 당신을 모함한 것이에요. 미안합니다.”한소은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건 또 무슨 짓이지?’한소은은 그런 윤소겸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당신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그저 사과하고 싶었어요. 전에 당신을 모함한 건 내 뜻이 아니었어요. 모두 윤설아가 위협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예요. 그러니 미안했습니다!”한소은은 윤소겸을 한번 보고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노형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하나도 놀랍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서서히 한소은 쪽으로 떨어졌다.“윤설아가 당신보고 날 모함하라 시킨 거라고요? 그 여자가 왜요?
사실 윤설아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한소은에게 있어서 노형원이란 사람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그랬군요.”한소은은 이제야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표정으로 윤소겸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당신네 윤씨 가문은 정말 복잡하네요.”그런 한소은의 말에 윤소겸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당신.”한소은이 고개를 들어 노형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에게 한발 다가가 노려보며 물었다.“이 사건에서 당신은 무슨 역할이었죠? 대신 싸워주는 사람? 공범? 아니면 정의의 사자라도 되나요?”“그저 조사하다 우연히 사실을 알게 된 것뿐이에요. 이 사건에 억울한 사람이 휘말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에게 편견이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 말들은 믿어줬으면 해요. 모든 일은 윤설아가 혼자서 꾸민 일이에요.”“맞아요, 다 그 여자가 꾸민 일이에요.”윤소겸도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그래. 다 윤설아 그 여자 때문이라고!’윤소겸은 속으로 생각했다. 윤설아만 아니었다면 자기가 이렇게 고생하지도, 하룻밤 사이에 나락으로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며칠 동안 경찰서에 수감되어 죄수의 삶까지 체험하게 되었으니, 윤설아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여자가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죠.”한소은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이건 당신네 집안일이에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죠.”말이 끝나자, 한소은이 그들을 지나쳐 갔다. 노형원을 지나칠 때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윤씨 가문의 일인데 당신은 왜 참견하는 거죠?”소리가 아주 작았지만 가까이에 서 있던 윤소겸이 그녀가 노형원에게 묻는 물음을 들었다. 순간 그의 가슴이 철렁하는 것 같았다.“그러게. 노형원 당신이 왜 참견하는 거지?”윤소겸이 의문을 품고 고개를 돌리자 노형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내가 왜 참견하는 건지 곧 알게 될거에요.”——윤설아는 아직도 윤백건과 윤 부인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윤백건의 소식인 줄 알고 윤설아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안색이 삽시간에 흐려졌다.“뭐라고?!”“무슨 일인데 그래?”그녀의 안색이 안 좋게 변하자, 윤중성이 바로 물었다.“혹시 네 큰아버지 쪽......”윤설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흐려진 안색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더니 핸드폰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이 개자식이!”요영은 윤설아가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윤설아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의 낯빛은 더욱 안 좋게 변했다.“설아야. 무슨 일인데 그래?”요영이 하던 일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엄마가 키운 그 잘난...... 허!”윤설아가 요영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에 요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요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뭐라고?”사실 요영을 당황하게 한 건 윤설아의 말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윤중성이 있는 방향을 한번 슥 보았다.윤중성은 어리둥절 한 듯 두 여자를 연달아 바라보며 윤설아에게 물었다.“설아야.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윤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눈빛으로 요영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원망과 증오가 가득 서려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요영을 놀라게 했다.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감히 묻지도 못했다.이때, 경찰이 윤설아를 찾아왔다.“윤설아 씨, 당신을 시장 교란, 타인을 위협, 비방 및 납치한 혐의로 고발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서 조사에 협조해 주십시오.”경찰이 이렇게 많은 혐의를 말하니 윤중성과 요영은 놀라서 정신이 멍해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윤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지 몰라? 우리 설아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막 지껄이는 거야? 내가 경찰청에 가서 당신들 모두 고소할 줄 알아!”윤중성이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저희는 그저 절차에 따라 사건을 조사 하려는 것뿐입니다. 공무집행 방해를 하시면 당신도 함께 경찰서로 이송하겠습
방금 까지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던 윤중성은 윤설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금방 설아가 당신 아들이라고 했죠? 무슨 아들?”윤중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요영에게 물었다. 두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모두당신을 만나기 전의 일이라고 해도 이렇게 화낼 거예요?”어차피 모두 들통난 마당에 요영은 더 이상 숨길 마음이 없었다. 자리에 앉고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나와 만나기 전 말인가요? 허, 참. 요영, 당신이란 여자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날 속이다니. 이것 말고 더 숨기는 거 있어요? 아들이 몇 명이나 더 있는 거예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던 거예요? 이러니 다들 그 바닥 여자는 만나지 말라고 한 거였군요 당신 정말 대단해요. 요영, 정말 대단해!”윤중성은 비틀거리며 뒤로 뒷걸음질 쳤다. 충격적인 말들의 연속에 윤중성은 순간 확 늙어 보였다.그런 그를 보던 요영은 그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그래도 몇십 년 함께한 부부인데 안쓰럽지 않을 리가 없다.그런데도 요영은 움직이지 않았다.“이렇게 상처받은 얼굴 하지 마세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신을 만나기 전의 일이었고 당신과 결혼한 후 에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한 일 한 적 없어요. 당신에게 충성을 다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요? 오랜 시간 동안 진고은 그 여자와 함께했잖아요. 아들까지 낳은 것도 모자라 집에까지 데려와 놓고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내 탓 하는 거예요? 나 몰래 다른 남자와 아들까지 낳아놓고 내 돈으로 그 아들을 키웠을 거잖아요. 이 천한 여자 같으니라고!”윤중성은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가장 악독한 말로 그녀를 모욕했다.요영은 오히려 담담해졌다. 가볍게 웃더니 그의 말에 대답했다.“그래요. 난 천한 여자예요. 그런 당신은 뭔가요? 일이 닥치면 숨기만 하는 겁쟁이잖아요. 일이 생기면 그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낼 때까지 기다리고. 윤씨 가문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당신이 벌 받는
나이를 먹은 윤중성은 노형원의 발길질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사람 불러. 이 자식 좀 어떻게 해보란 말이야!”하지만 아무도 그를 구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노형원이 데려온 사람들이 이미 윤중성의 집을 통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저 돈 받고 일을 하는 하인에 불과한 그들이 선뜻 나서서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한참을 발로 차다 화가 잦아들고 힘도 빠진 후에야 노형원이 멈추었다.그러는 동안 요영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찬 수건으로 얼굴에 갖다 대며 차가운 눈빛으로 윤중성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 했다.소파에 앉아 숨을 헐떡이던 노형원이 손짓하자 바로 물을 따라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몇 년 동안 그는 지금처럼 이렇게 통쾌한 적이 없었다. 마음속에 꾸역꾸역 담아두었던 억울함과 분노가 드디어 터져 나오니 너무도 상쾌했다.“괜찮아요?”노형원은 맞은 편에 앉은 어머니를 슥 보더니 물었다.그가 갑자기 쳐들어왔을 때 요영은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윤중성을 마구 걷어차고 있을 때 비로소 알아차렸다.“이 모든 게 다 네가 꾸민 거지?”사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현재로선 그가 꾸민 일인이 분명했다.하필 이런 상황에 노형원이 쳐들어와서 대놓고 윤중성에게 이런 짓을 한다는 건 그가 이미 모든 걸 손에 쥐고 있다는 걸 말한다.“다는 아니에요.”노형원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는 가볍게 웃었다.“어머니의 귀한 딸 덕도 있어요.”윤중성의 집은 정말 컸다. 밖에서 지나갈 때 노형원은 여러 번 눈여겨보았었다. 좋은 위치에 넓은 면적, 지금 이렇게 들어와 보니 인테리어와 가구들도 모두 호화로워 보였다. ‘이런 집에서 사는 게 정말로 인생을 누리는 거지.’노형원이 살던 집은 비집고 낡았다. 여름에는 온갖 벌레가 나오고 겨울에는 추워서 벌벌 떠는 작은 집이었다. 그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 사람들은 넓고 편한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