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백건의 소식인 줄 알고 윤설아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안색이 삽시간에 흐려졌다.“뭐라고?!”“무슨 일인데 그래?”그녀의 안색이 안 좋게 변하자, 윤중성이 바로 물었다.“혹시 네 큰아버지 쪽......”윤설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흐려진 안색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더니 핸드폰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이 개자식이!”요영은 윤설아가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윤설아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의 낯빛은 더욱 안 좋게 변했다.“설아야. 무슨 일인데 그래?”요영이 하던 일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엄마가 키운 그 잘난...... 허!”윤설아가 요영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에 요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요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뭐라고?”사실 요영을 당황하게 한 건 윤설아의 말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윤중성이 있는 방향을 한번 슥 보았다.윤중성은 어리둥절 한 듯 두 여자를 연달아 바라보며 윤설아에게 물었다.“설아야.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윤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눈빛으로 요영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원망과 증오가 가득 서려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요영을 놀라게 했다.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감히 묻지도 못했다.이때, 경찰이 윤설아를 찾아왔다.“윤설아 씨, 당신을 시장 교란, 타인을 위협, 비방 및 납치한 혐의로 고발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서 조사에 협조해 주십시오.”경찰이 이렇게 많은 혐의를 말하니 윤중성과 요영은 놀라서 정신이 멍해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윤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지 몰라? 우리 설아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막 지껄이는 거야? 내가 경찰청에 가서 당신들 모두 고소할 줄 알아!”윤중성이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저희는 그저 절차에 따라 사건을 조사 하려는 것뿐입니다. 공무집행 방해를 하시면 당신도 함께 경찰서로 이송하겠습
방금 까지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던 윤중성은 윤설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금방 설아가 당신 아들이라고 했죠? 무슨 아들?”윤중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요영에게 물었다. 두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모두당신을 만나기 전의 일이라고 해도 이렇게 화낼 거예요?”어차피 모두 들통난 마당에 요영은 더 이상 숨길 마음이 없었다. 자리에 앉고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나와 만나기 전 말인가요? 허, 참. 요영, 당신이란 여자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날 속이다니. 이것 말고 더 숨기는 거 있어요? 아들이 몇 명이나 더 있는 거예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던 거예요? 이러니 다들 그 바닥 여자는 만나지 말라고 한 거였군요 당신 정말 대단해요. 요영, 정말 대단해!”윤중성은 비틀거리며 뒤로 뒷걸음질 쳤다. 충격적인 말들의 연속에 윤중성은 순간 확 늙어 보였다.그런 그를 보던 요영은 그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그래도 몇십 년 함께한 부부인데 안쓰럽지 않을 리가 없다.그런데도 요영은 움직이지 않았다.“이렇게 상처받은 얼굴 하지 마세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신을 만나기 전의 일이었고 당신과 결혼한 후 에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한 일 한 적 없어요. 당신에게 충성을 다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요? 오랜 시간 동안 진고은 그 여자와 함께했잖아요. 아들까지 낳은 것도 모자라 집에까지 데려와 놓고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내 탓 하는 거예요? 나 몰래 다른 남자와 아들까지 낳아놓고 내 돈으로 그 아들을 키웠을 거잖아요. 이 천한 여자 같으니라고!”윤중성은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가장 악독한 말로 그녀를 모욕했다.요영은 오히려 담담해졌다. 가볍게 웃더니 그의 말에 대답했다.“그래요. 난 천한 여자예요. 그런 당신은 뭔가요? 일이 닥치면 숨기만 하는 겁쟁이잖아요. 일이 생기면 그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낼 때까지 기다리고. 윤씨 가문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당신이 벌 받는
나이를 먹은 윤중성은 노형원의 발길질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사람 불러. 이 자식 좀 어떻게 해보란 말이야!”하지만 아무도 그를 구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노형원이 데려온 사람들이 이미 윤중성의 집을 통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저 돈 받고 일을 하는 하인에 불과한 그들이 선뜻 나서서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한참을 발로 차다 화가 잦아들고 힘도 빠진 후에야 노형원이 멈추었다.그러는 동안 요영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찬 수건으로 얼굴에 갖다 대며 차가운 눈빛으로 윤중성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 했다.소파에 앉아 숨을 헐떡이던 노형원이 손짓하자 바로 물을 따라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몇 년 동안 그는 지금처럼 이렇게 통쾌한 적이 없었다. 마음속에 꾸역꾸역 담아두었던 억울함과 분노가 드디어 터져 나오니 너무도 상쾌했다.“괜찮아요?”노형원은 맞은 편에 앉은 어머니를 슥 보더니 물었다.그가 갑자기 쳐들어왔을 때 요영은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윤중성을 마구 걷어차고 있을 때 비로소 알아차렸다.“이 모든 게 다 네가 꾸민 거지?”사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현재로선 그가 꾸민 일인이 분명했다.하필 이런 상황에 노형원이 쳐들어와서 대놓고 윤중성에게 이런 짓을 한다는 건 그가 이미 모든 걸 손에 쥐고 있다는 걸 말한다.“다는 아니에요.”노형원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는 가볍게 웃었다.“어머니의 귀한 딸 덕도 있어요.”윤중성의 집은 정말 컸다. 밖에서 지나갈 때 노형원은 여러 번 눈여겨보았었다. 좋은 위치에 넓은 면적, 지금 이렇게 들어와 보니 인테리어와 가구들도 모두 호화로워 보였다. ‘이런 집에서 사는 게 정말로 인생을 누리는 거지.’노형원이 살던 집은 비집고 낡았다. 여름에는 온갖 벌레가 나오고 겨울에는 추워서 벌벌 떠는 작은 집이었다. 그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 사람들은 넓고 편한 집에서
“그 여자는 어머니가 이 남자와 낳은 딸이잖아요. 전 아닌걸요. 이러는데 어떻게 남매가 될 수 있는 거죠?”노형원이 자기를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그리고 친남매라 해도 계산 할 때는 똑바로 계산해야 하죠. 나와 그 여자는 친남매도 아닌걸요.”“너희들이 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해도 모두 내가 낳았어. 엄마를 봐서라도 잘 지낼 수 없는 거니?”남매끼리 서로 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요영이 말을 이어갔다.“네가 설아를 모함해 회사에서 밀어낸다고 회사를 얻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잊었나 본데 대윤 그룹은 결국엔 윤씨야. 윤씨도 아닌 네가 쉽게 회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노형원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거봐요. 어머니도 날 남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윤설아와 손을 잡고 회사를 얻겠어요? 그리고 이 대윤 그룹도 곧 윤씨가 아니게 될 거예요!”“개소리하지 마”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윤중성이 노형원의 말들 듣고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노형원은 그런 윤중성을 슥 보았다. 일어설 힘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누워있는 그를 보더니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어디 마음껏 욕해봐. 아무튼 대윤 그룹이 곧 윤씨의 것이 아니게 되는 걸 보게 될 테니.”“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잠시 생각하던 요영이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가 계획을 잘 짰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있어. 우리 가족을 모두 나락에 떨어뜨려도 넌 대윤 그룹을 가질 수 없을 거야. 대윤 그룹 절반 이상의 지분은 윤백건이 가지고 있어. 지금 윤백건과 윤 부인이 자취를 감춘 이상 넌 그들 손의 지분을 가질 수도 주주들의 지지를 얻을 수도 없어. 그러니......”“내 손에 없다고 어떻게 확신해요?”노형원은 요영의 말을 가로챘다.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득의양양해 보였다.“그럴 리가!”요영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윤백건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분을 자기 목숨보다도 더 중
아들이 노형원의 손에 있다는 말에 윤중성은 펄쩍 뛰었다.“너, 너 이 자식 겸이에게 무슨 짓 했어?”“쯧쯧.”노형원이 웃긴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역시 아들이 중요하긴 한가 보네. 내가 말했잖아. 당신이 협조만 잘해준다면 무사할 거라고.”노형원은 속으로 윤설아가 고마웠다. 그녀는 정말 말 잘 듣고 유능한 수하들을 키워냈다.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그 사람들이 평생 자기에게 충성할 거란 착각이었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충성은 없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은 그저 ‘이익’에서 나오는 것뿐이다.이익만 보장된다면 언제든지 충성하는 대상을 바꿀 수 있는 게 사람이다.대윤 그룹은 하룻밤 사이에 주인이 바뀌었다. 윤씨 가문에서 회사 경영권을 두고 싸우고 있을 때 대주주들은 어느 라인을 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노형원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더니 회사 경영권을 가져가 버렸다.대부분 주주들이 그의 손을 들어주었고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지분 양도 계약서까지 들고 있었다. 계약서에는 윤백건의 사인과 인감이 찍혀 있었고 검증 결과 조작한 것이 아니라는 판정이 나왔다.물론 부분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도 그가 예상했던 문제들이다. 이제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씩 회사에서 내쫓기만 하면 된다.노형원이 대윤 그룹으로 들어와서 그저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가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고 누가 어느 라인에 탔는지 정도는 꿰고 있었다.윤설아 그 멍청한 여자는 자기가 회사에서 매일 놀고먹으며 그녀의 옆에 빌붙어 사는 줄로만 안다. 나중에 그녀가 회사를 얻으면 한자리 해주겠다고도 말했었다.‘웃기고 있어!’어려서부터 세상 인정 모두 겪어본 노형원은 눈치가 정말 빨랐다. 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다른 사람의 발밑에 굴복할 그가 아니었다. 고작 한자리 해주겠다는 말이 그의 마음에 찰 리가 없다.노형원은 대윤 그룹뿐만 아니라 환아에게도 손을 뻗을 생각이었다.대윤 그룹의 주인이 바뀐
김서진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맞추며 그동안의 그리움을 달랬다.그녀가 너무 바쁜 탓에 며칠 동안이나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 매일 피곤한 얼굴로 집에 돌아오는 그녀를 볼 때마다 너무 안쓰러운 마음에 그냥 자게 내버려 뒀다.하지만 지금 활기찬 그녀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서진 씨, 그만…… 시간 없어요."주위의 온도가 점점 뜨거워졌고 분위기도 묘해졌다.'비행기 따위 내가 알 게 뭐야.'얼마나 지났을까. 한소은은 침대에 누워 몸을 한번 뒤척였다. 당장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지만 너무 피곤해서 꿈쩍하기도 싫었다.이때 김서진이 그녀의 허리 만지며 서서히 손을 앞으로 갖다 댔다.화가 난 한소은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배를 살살 어루만져 주는 그의 손길에 그녀는 다시 얌전해졌다."비행기 정말 놓치겠어요."그녀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정말 유란이랑 합작할 생각이에요?"김서진은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그녀 등 뒤에 딱 붙어서 물었다.그러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을 스쳤다. 그 간지러움에 그녀는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개인 브랜드를 세울 생각 아니었어요?"그녀는 이 얘기를 몇 번이나 했었다. 사무실을 차린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그건 상관없어요. 브랜드는 여전히 제거니깐요. 만약 유란 쪽에서 마음이 있다면 투자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합작해도 되고요. 예를 들어서 콜라보 상품을 내던가."그녀는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누었다.김서진은 손을 놓지 않고 여전히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한소은은 김서진이 아주 품위 있고 속이 넓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의 소유욕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다. 다만 그가 자신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었다."유란이 당신의 요구를 동의할 것 같아요?"유란은 유명한 국제 브랜드인데다가 그들과 합작하고 싶은 사람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들이 찾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에 그녀가 요구를 제기했으니. 그녀가 무슨 근거로 유란이
윤설아는 자신이 질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게 자신의 예상대로 진행될 줄 알았고 팔만 뻗으면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큰아버지가 유일한 변수라고 생했는데 결국에 자기가 키운 짐승한테 물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맞은편에 앉아 있는 요영은 하룻밤 사이에 부쩍 늙은 얼굴이었다."설아……."그녀의 두 눈은 부어있었고 이런 초라한 모습은 처음이었다."내가 이 꼴 되니까, 좋지?"윤설아가 바짝 마른 입술을 열며 물었다."당신 아들 믿고 살면 되겠네, 이제. 아빠도 당신도 다 똑같아. 다들 아들만 생각하잖아? 그럴 거면 날 왜 낳은 거야?"그녀가 피식 웃었다."역시 내가 바보였어. 도와줄 거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지. 안 그랬으면…….""설아, 그런 거 아니야. 나도 형원이가 그럴 줄 몰랐어. 나도 속고 있었어. 설아, 엄마 한번 믿어줘!"그녀가 다급하게 설명했다. 딸의 실망스러운 눈빛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윤설아와 노형원중 누가 대윤을 물려받든 그녀는 상관없었다. 다 그녀의 자식이고 그녀도 둘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그땐 모든 걸 얻은 설아가 형원을 가만두지 않을까 봐 겁이 났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됐어!"그녀가 언성을 높였다."그런 변명도 이제 지겨워. 가서 사랑하는 아들한테나 해! 난 이미 쓸모없으니까, 더 이상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마."그녀가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그 눈물 아껴서 아들한테나 보여줘!""설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엄마는 진짜……."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설아, 설아, 내가 해결해 볼게! 참, 정하진, 정하진이 도와주면 돌이킬 방법이 있을 거야!"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정하진 밖에 없었다.둘이 약혼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자기 약혼녀를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이 이름을 들은 윤설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비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
요영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네 큰아버지도 지금 형원 손에 있어.""뭐?"윤설아가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그, 그럴 리가 없어.""진짜야. 형원이가 그랬어. 그 여자랑 그 아이도 자기 손에 있다고. 지금 회사는 거의 형원이 손에 쥐여 있어. 나도…… 나도 이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그녀가 도움을 준 적은 없지만 대윤을 지금까지 지켜봐 왔고 이젠 자기의 아들이 대윤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건 즉 대윤이 더 이상 윤 씨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아닐 거야."윤설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나도 알고 있어. 큰아버지는 절대로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야. 큰어머니랑 아픈 척 연기까지 해가면서 계획을 짰는데 그렇게 쉽게 협박당할 리가 없어. 대윤을 이렇게 순순히 내준다는 게 말이 돼?"자기가 온갖 수를 다 써가면서 얻으려고 했던 대윤을 노형원이 무슨 능력으로 이렇게 쉽게 손에 넣었단 말인가?그녀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우처럼 교활한 윤백건이 노형원의 함정에 빠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건…… 퇴원하는 길에 잡혔다고 들었어. 너도 알다시피 형원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어. 아무도 예상 못 했다고. 물론 네 큰아버지도. 그때 네 큰아버지가 사라졌잖아. 그렇게 많은 집들을 다 비우고 어디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는데, 이제 알겠더라."하지만 윤설아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이렇게 쉬울 리 없어."그러더니 그녀가 갑자기 웃었다."어쩌면 운을 타서 그런지도 모르지. 그럼 축하한다고 전해줘.""설아야……."그녀의 말을 들은 요영의 마음이 너무 아팠다."엄마가 구해줄게. 구해낼 방법이 있을 거야!"노형원에게 부탁해서라도 기필코 자기 딸을 구해내고 말 것이다."그만 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까."윤설아는 몸을 일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웃음은 일그러져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