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정하진은 한소은이 두고 보자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하룻밤 사이에 인터넷에는 조향 협회에 관련된 게시물들이 쏟아지듯 나왔다. 게시물들의 타이틀과 내용들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대게 조향업의 흑막을 가리키는 내용들이었다.사실 요 며칠간 대윤 그룹의 향수에 금지 성분이 검출된 기사와 조향 협회가 한소은에 보이콧을 선언한 내용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하지만 조향 협회의 흑막을 까발리는 게시물들이 쏟아져 나오며 삽시간에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게시물들의 내용은 제각각이었다. 협회 높은 자리를 차지 하는 분이 누구에게서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 또 누구는 권력을 남용했다는 내용, 협회에 가입하는 조건은 그들이 근거도 없이 마음대로 정했다는 내용 등등 수도 없는 폭로가 이어졌다.네티즌들은 협회에서 이런 게시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조사를 하기도 전에 보이콧을 선언했다.이름 있는 조향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외국에 있던 국내 조향사들까지도 실명으로 보이콧 사인에 동참했다. 조향 협회를 처음 창립할 시기의 신념은 정말 좋았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 창립 초기의 원로들이 점점 더 권력에 집착하자 초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의 조향 협회는 누군가가 권력을 행사하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국내 조향업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사인에 동참한 조향사들은 자신들이 이 협회에서 위협을 받았던 일들을 모두 폭로했다. 협회에 가입하려면 돈을 내야 하는 것과 불평등한 대우, 윗사람이 자기의 공로와 명예를 빼앗은 일, 심지어는 윗사람에게 희롱을 당한 일까지 모두 낱낱이 밝혀진 셈이다.많은 게시물이 동시에 게시되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화제성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이 소식을 접한 조향 협회는 처음에는 크게 당황하더니 곧 게시물과 기사를 누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런 화제성과 열기를 쉽게 잠재울 수는 없었다.하룻밤 사이에 터진 일이다 보니 실검을 내릴 수도, 게시물을 삭제할 겨를조차
잦은 회의가 있다 보니 술과 담배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게 되었다. 일 년의 반 이상을 호텔에서 지내고 갖은 향수 냄새, 화장품 냄새를 맡던 그의 후각은 이전만큼 예민하지 않게 되었다.몇 년간 조향 외의 일들만 처리하다 보니 향수를 제작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인터넷에 올라온 게시물을 보고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고서야 조향 협회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근 2년간 협회에서 내놓은 제품들은 다 변변치 못한 향수들이었다.많은 생각을 하고 나니 정하진은 조금 마음이 동요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는 이미 한소은이 한 말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했다. 이게 정말 자기가 원했던 조향업의 미래였던가? 어쨌거나 그가 조향 협회에 있는 한 책임을 져야 했다. 협회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일이 발생하게 두어선 안 된다.정하진이 마음을 가다듬고 컴퓨터를 열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소셜미디어에 발표할 해명하는 문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해명문에는 최근 협회에 대한 게시물들은 누군가가 그들을 모함하려 한 것이고 협회의 이름에 먹칠한 게시자들을 모두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해명문을 작성하고 틀린 곳이 없는지 한번 확인하고는 제성 쪽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해명문을 프린트해서 협회 인감을 찍고 스캔한 후 다시 그에게 보내왔다.해명문의 최종 버전이 그에게 다시 전달해 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해명문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전에 정하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네티즌들의 반응을 다시 보기로 했다.차라리 안 보는 게 나을 뻔했다. 손가락이 그대로 굳었고 정신이 멍해졌다. 식은땀도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협회에 대한 게시물로 인해 인터넷이 두 번이나 붕괴했었다. 겨우 협회를 검색했을 때 연관 검색어 때문에 그가 한 번 더 놀랐다.[하 씨 어르신][협회 회장][후각 상실]뜨는 연관 검색어마다 큰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정하진은 떨리는 손으로 연관 검색어를 클릭했다. 대충 읽어 보니 조향 협회 회장
사실 다른 사람보다 더 충격을 받은 사람은 정하진 이였다.그가 협회에 들어온 지 2, 3년은 훌쩍 넘었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 씨 어르신과 그렇게 가깝게 지냈는데 어르신이 후각을 잃은 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누가 거짓을 지어내어 모함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하진이 일어나 차를 한 잔 따르고는 마시지도 않고 모니터를 보며 멍을 때렸다. 그는 지금 하나도 조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하게 잘 생각해 볼 수 있었다.하 씨 어르신과 함께 행사와 평가회에 참가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평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사소한 부분들이 문득 떠오르기 시작했다.매번 평가회에 참여할 때 신인이 조향한 향수와 작품은 모두 그가 먼저 평가하게 했다. 그 당시에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어르신이 자기를 시험하고 경험을 쌓게 배려해 주는 줄로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항상 자기가 평가를 한 후에 어르신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평가만 몇 마디 덧붙일 뿐이었다이번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는 절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참가했던 모든 행사가 다 이렇게 진행됐었다.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행사를 참가할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누구 하나 다를 거 없이 모두 다른 사람이 먼저 평가하게 하고 어르신이 몇 마디 더 덧붙이는 식이었다.어디가 좋다 나쁘다 하는 평가가 아닌 그저 겉치레 말만 하고 앞으로 노력하라며 격려하는 말뿐이었다.‘정말 어르신의 후각에 문제가 생긴 건가?’잠시 고민하다 정하진은 아까 걸려 온 전화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기 속에서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딱딱한 로봇음 만 전해져 왔다.생각해 보니 전원을 끌만도 했다.이런 게시물이 나온 상황에서 분명 하 씨 어르신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기자들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가족과 친구들의 관심까지 더해지니 자기라도 전원을 껐을 것이다.정하진은 잠시 생각하다 협회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나야. 하
“여보세요?”“정하진이에요.”정하진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신분을 밝혔다.“네, 정하진 씨.”한소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무슨 일인가요?”“몰라서 묻나요? 인터넷에 떠도는 협회에 관련된 게시글들 당신이 한 거죠?”그는 다소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제 와서 돌려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피차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한소은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지금 따져 묻는 건가요? 당신이 무슨 신분으로? 협회 부회장의 신분으로 묻는 건가요?”“내가 어떤 신분으로 묻든 당신이 저지른 일을 감히 인정하지 못하는 건가 봐요?”정하진은 녹음 버튼을 눌렀다. 지금 그녀와의 모든 대화를 녹음할 작정이었다.“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한 거라고도 말한 적 없죠.”그녀가 헛웃음을 삼키며 이어 말했다.“인터넷에 떠도는 협회에 대한 게시글들은 저도 봤어요. 정말 놀라운 내용들이 많더군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그 내용들이 모두 다 진실인가요? 당신은 협회 부회장이니 누구보다 잘 알겠죠?”“당연히 거짓이에요!”그가 단숨에 대답했다. 설령 자기가 녹음하고 있지 않았어도 이런 걸 인정할 리가 없었다.“그런 황당한 말들은 분명 누가 우리를 모함하려고 지어낸 말들이에요. 한소은 씨, 당신이 사람을 사주해 그런 게시물을 올리게 한 거죠?”“정하진 씨, 게시물의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주한 건 아니에요. 그저 호기심에 물어보는 건데 하 씨 어르신의 후각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사실인가요?”“......”정하진은 마치 누가 자기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뚝.”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은 소리에 더욱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한소은, 넌 정말 눈치가 빨라.’그녀가 사주한 짓이라는 증거를 확보하려 녹음했건만 모두 헛수고였다.반면, 전화를 끊은 한소은은 시간을 한번 보았다. 그러고는 실험 기구 있는 곳으로 가 증류된 원료가 어떤 형태를 내는지 데이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그녀는 며칠 동안 계속 실험에 몰두
“왜 벌써 오셨어요?”한소은이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손을 뻗어 김서진의 목에 감자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두 사람이 이렇게 달콤한 모습을 보니 오이연은 내심 부끄러워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는 목석같은 자기의 남자를 흘겨보았다. 자기는 아마 평생 이런 달콤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당신 지금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알아요? 내가 오지 않으면 오늘도 집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죠?”김서진은 그녀에게 작업실을 만들어 준 게 조금 후회되었다. 이렇게까지 작업실에 박혀 일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아니에요. 오늘은 거의 다 끝났어요. 이제 조향 단계만 남았는걸요. 향수가 완성돼 가요.”한소은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자야겠어요.”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오이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가서 푹 쉬어.”“난 안 힘들어. 여기 남아서 데이터를 조금 더 기록해야 겠어.”오이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그러자 옆에 서 있던 서한이 입을 열었다.“아니, 당신 힘들어.”그의 말에 오이연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하나도 안 힘들거든!”“아니야. 힘든 게 눈에 훤히 보여.”서한은 항상 무표정인 얼굴이다. 그런 얼굴로 이런 말을 하니 오이연은 정말 자기가 힘든 거 같았다.그녀가 무의식 적으로 얼굴을 만지며 의아했다.“정말 힘들어 보여?”한소은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 버렸다. 그제야 오이연은 서한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걸 깨달았다.오이연이 옆에 있던 쿠션을 그에게 던졌다. 날아오는 쿠션을 재빠르게 받아내고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만해. 서한씨 말이 맞아. 이틀간 정말 힘들었어. 나도 이렇게 힘든데 너라고 안 힘들었겠어? 다들 집에 가서 푹 쉬자. 남은 건 내일 마저 하면 되고......”한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예상하는데 이 향수가 출시되면 앞으로 우리 작업실은 더 바빠지게 될 거야.”“이렇게 자신
김서진이 어디로 갔는지 운전석은 비어 있었다. 순간 그녀는 심장이 철렁하는 것 같았다.몸을 바로 앉아 차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화하는 김서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훤칠한 몸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 시선을 끌었다.언제부터인가 그가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차지했다. 노형원과의 일을 겪고 난 후 그녀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을 줄 알았다. 설령 마음을 줬다 해도 그때처럼 그렇게 깊이 빠지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마음을 줬을 뿐만 아니라 그때보다 더 깊이 김서진이란 사람에게 빠져 있었다. 한소은의 시선을 느낀 김서진이 고개를 그녀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차가웠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 마주치자 따뜻하게 변했다.한소은은 그를 향해 웃어 보이며 차에서 내렸다.그의 앞에까지 걸어갔을 때 마침 그도 전화를 끊었다. 그의 몸에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누구와 통화를 한 건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다지 즐거웠던 통화는 아니었나 보다.한소은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언짢은 통화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녀가 다가가 김서진의 팔을 감았다.“왜 안 깨웠어요? 나 오래 잠들었죠?”“내가 작업실에 당신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면 잠도 안 잘 생각이었나요?”혼내는 말투였지만 김서진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가서 얼굴부터 씻어요. 음식을 배달시켰으니 곧 올 거예요. 밥 먹고 가서 자면 되죠.”“네.”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얼굴을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배달이 왔다. 김서진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시켰다. 그녀가 힘든 것을 감안해 집으로 배달시킨 것이다.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들의 앞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한소은은 열심히 젓가락질하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주문했어요. 다 먹지도 못할 텐데.”“그러면 당신이 많이 먹으면 되겠네요. 못다 먹으면 낭비하는 거니까.”“장난해요
한소은은 핸드폰을 한번 슥 보더니 받지 않고 바로 끊어 버리고는 이어서 밥을 먹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끊으면 다시 울리고 울리면 그녀가 다시 끊기를 반복했다.“누가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예요? 내가 대신 혼내줄게요.”한소은의 얼굴에 불쾌함이 가득 묻어 있는 걸 보던 김서진이 장난치듯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울리는 핸드폰을 빼앗아 가려 했다.그녀가 다시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럼 많은 사람을 혼내야 할 거예요.”김서진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혹시 기자들인가요?”한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빈번하게 전화하는 데는 기자 말고는 없을 것이다.그녀는 더 이상 입맛이 없어졌다. 배도 슬슬 불렀던 참이라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일어서서 그릇을 치우려 했다.“그대로 둬요.”김서진이 입을 열었다.“내가 치울게요.”한소은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와 함께 그릇들을 주방으로 가져가 식기 세척기에 가지런히 넣었다. 세척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거실에 두었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리는 중이다. 그녀는 누가 걸려 온 전화인지 보기도 싫었다.“하 씨 어르신 일 때문인가요?”김서진은 매번 이렇게 원인을 잘 캐치 했다.한소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이 사건이 폭로되면 한동안은 조용할 날이 없게 된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그녀가 이 일을 폭로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일이 폭로되기 전부터 그녀와 협회 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좋게 해결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줄지어 추문이 폭로되는 통에 대중들의 시선은 그녀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누가 폭로했건 그게 사실이라면 두려울 게 없어요.”“두려운 게 아니에요. 그저 조금 짜증이 날 뿐이에요.”한소은은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처음부터 그녀는 그저 조용히 조향사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향수를 만들고 싶었다. 다른 스타일과
“당신이 상대하기 싫으면 내가 나서서 막아 줄게요.”김서진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그가 처리해 줄 수 있었다. 그녀가 홀로 해결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작은 아내에게서 이런 수단들을 어떻게 생각해 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그녀가 곧게 서며 고개를 저었다.“그것보다 핸드폰 번호를 새로 개통해야겠어요.”기자들의 전화가 귀찮다고 전원을 끌 수는 없는 일이다. 만에 하나 중요한 소식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것은 온전히 그녀의 손해였다. 하지만 이렇게 끝도 없이 전화가 걸려 오게 둘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그건 간단해요. 바로 준비하라고 말할게요.”김서진이 말하며 그녀와 함께 주방에서 나왔다.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한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있는데......”“네?”한소은은 따듯한 물 두 컵을 따라 그에게 한잔 건네며 짧게 대답했다.“하 씨 어르신이 후각을 잃었다는 소식이 사실인가요?”솔직히 이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김서진은 크게 놀랐다. 한소은이 내보낸 소식이란걸 몰랐다면 누가 지어낸 말에 하 씨 어르신이 당한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그는 한소은을 절대적으로 믿었지만 그래도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컵을 잡은 한소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당신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만약 이 사실이 진실이라면 정말 그녀가 대단한 것이다.하 씨 어르신은 조향 업계에서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지금 조향을 종사하는 사람 중 그의 제자도 많았다. 그의 제자들이 또 제자를 거두어 그의 편에 설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 아무도 그가 후각을 잃었다는 걸 몰랐다고?’자기가 가진 정보에도 하 씨 어르신이 후각을 잃었다는 정보는 없었다. 설령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알지 못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