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진은 손에 칼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말했다. “그녀는 내가 만든 것만 좋아해.” 허강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그는 냉장고에서 갓 꺼낸 오이를 먹으면서 비스듬히 기대 김서진이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김서진이 재료를 씻고 썰고 하는 모습이 꽤 그럴싸해 보였다.허강민은 그의 바쁜 모습을 보며 감개무량했다. 그는 살면서 환아의 대표가 손수 국을 끓이는 모습을 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인가? 그가 여자를 위해 부엌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점점 그 사람에 대해 더 궁금해지네. 이 여자가 어떻게 했길래 네가 이렇게 변한거지?”허강민은 그에게 말을 하면서도 그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히 말했다.김서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그에게 말했다. “너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어.”그가 국자를 휘젓는 모습이 꽤 즐거워 보였다.뭐야? 나 같은 사람? 내가 연애 경험 별로 없는 게 뭐 잘못된 건가?김서진은 마치 그에게 여자에 대해서 모른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다시 고개를 돌린 채 부엌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어머나!”김서진은 손에 있던 오이 반 토막을 내팽개쳤다. 허강민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그는 놀란 듯 벽에 부딪혔고 김서진은 손에 있던 뒤집개를 내팽개쳤고 그 뒤집개는 허강민의 머리를 향했다. “너 미쳤구나!“귀신이다!”김서진은 주방 입구에 사람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온몸이 더러웠고 흙탕물이 떨어지고 있었다.긴 머리가 젖어있는 모습이 정말 귀신같아 보였다.물론 김서진은 한눈에 그의 아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가스불을 줄인 뒤 그녀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말했다. “무슨 일 있어요?”“저 사람은?!” 한소은은 집안에 낯선 사람이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허강민을 가리켰다.허강민: “...”여자 귀신이 나를 가리키고 있어! 날 죽이려 하는 걸까? 정말 무서워!“그냥 한가한 사람이에요.” 김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은 거죠?”“괜찮아요. 오늘 재료
“...”허강민은 매우 억울했다. 그녀보다 그가 더 놀랐을 것이다!얼마 후 김서진의 요리는 완성되었다. 새우튀김, 토마토 소고기찜, 편백나무찜, 해물탕이 놓여 있었고, 가스레인지에는 삼계탕도 올려져 있었다. 그는 체면은 생각하지 않은 채 여기에 온 것이 헛걸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이 요리들을 먹어야만 했다.그는 스스로 음식을 모두 식탁으로 옮겼고 먼저 앉아 젓가락을 들고 먹으려 했지만 김서진이 그를 가로막았다. “네 건 없다니까!”“에이, 이렇게 많은데 다 못 먹고 버릴까 봐 아까워서 그래! 지금 절약해야 하는 시기인데 내가 도와줄게!” 그는 말하면서 젓가락짓을 하려고 했다.“필요 없어!” 그는 파리 쫓듯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허강민은 다른 건 몰라도 뻔뻔함만큼은 알아줄만했다. 그는 김서진과의 실랑이 끝에 고기 한 조각을 빼네는 데 성공했다. 그가 입에 넣으려는 찰나 듣기 좋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차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내일 검사 좀 해주세요.”“네, 그럼 내일은 제 차 타고 가요.” 김서진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괜찮아요. 당신 차 너무 이목이 집중돼요. 택시 타고 갈게요.” 그녀는 말하면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는 여유로우면서도 너무 느리지도 않았다.김서진은 그녀에게 가면서 큰 수건을 잡아당겼다. “서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할게. 택시는 불편해.”수건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또 머리 안 말렸네요.”“머리 말리는 거야말로 정말 귀찮은 일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대충 털다가 고기를 먹으려는 허강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허강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아직도 안간 거예요?”허강민: “...”그는 얼이 빠져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허강민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적을 만들지 않았었는데 어찌 그들 부부에게는 완전히 미움을 받게 되었을까.첫 만남부터 그를 놀라게 했고 두 번째 만남에도 그가 칭찬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그를 쫓아내려한다.가장 심한 것은 김서진의 부인이었다. 그
한소은은 그를 표정 없이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김서진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면... 그냥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요.”허강민: “...”그는 놀라 멍해졌다. “아니야! 나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아요! 아니, 아니, 나 안 먹어도 돼요! 저기 서진아, 그렇게 인정 없이 굴지 마 적어도 우리 형제잖아. 서진아...”“혼자 갈래, 아니면 서한이 불러줄까?” 그는 눈썹을 고르며 물었다.“싫어, 싫어!”그는 오늘 이미 서한을 두 번이나 만났는데 그가 다시 또 온 뒤 이 소문이 퍼진다면 매우 부끄러울 것이다.그는 두 사람을 본 뒤 머리가 번뜩였다. “형수님, 제가 신혼 선물을 가져왔어요. 이렇게 손님을 문밖으로 내쫓는 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신혼 선물?” 한소은은 김서진을 바라보며 의문이 있는 듯한 얼굴을 했다.김서진은 가벼운 헛기침을 하고는 젓가락을 들어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네, 이미 정해졌는데 빨리 결혼식을 올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기 생각은 어때요?”뒤에 “자기”라는 호칭은 허강민으로 하여금 소름돋게 만드는 호칭이었다.한소은은 차 씨 집안에서 돌아온 뒤 이 소식이 전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들의 관계는 결국 세상에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녀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공개하면 그만이다.“그럼 예물은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허강민을 바라본 뒤 손을 내밀었다.허강민은 어리둥절해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 급하게 오느라...”“방금 신혼 선물을 주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한소은은 음식을 천천히 먹으며 이 사람이 꽤 재미있다고 느끼고 있었다.그나저나 그녀는 김서진과 이렇게 오래 있었지만 처음 만났던 서한 외에 알게 된 사람은 허강민이 처음이었고 이런 느낌이 꽤 신기했다.“맞아요! 하지만 저도 단지 소식을 들었을 뿐이지 확실하지 않아서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어요.” 그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예물에 돈 아낄 생각도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동쪽 교외에 있는 건물을 드릴게요!” 그는 이를 악물고 악을 쓰며 말했다.비록 동쪽 교외에 있는 건물이 어떤 건물인지 몰랐고 그녀가 그 건물을 갖는다 해도 쓸모없었지만 작은 도박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그녀의 대답에 허강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 여기서 식사해도 괜찮을까요?”“당연히 괜찮죠. 저희 집은 손님 대접을 잘합니다. 어디서 온 손님이건 간에 모두 밥을 남긴 일이 없어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허강민: “...”어느 누가 방금까지 협박을 했던 부부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그는 하마터면 방금 당했던 일들을 모두 까먹을 뻔했다.이건 미녀가 아니라 마녀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마녀!안정적으로 자신이 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허강민은 다시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참 이렇게 오랫동안 얘기했는데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르고 있었네요?”한소은은 김서진을 힐끗 쳐다본 뒤 미소를 지었다. “형수라고 부르면 될 것 같아요.”어차피 곧 결혼할 것이었기에 이 칭호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허강민은 이 여인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아뇨, 저도 당연히 형수님인 건 알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허강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형수님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한소은은 기대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선생님, 남편 앞에서 아내의 이름을 묻는 것은 실례 아닐까요?”그녀는 함축적으로 웃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허강민: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이름 물어보는 게 어때서?원래는 계속 캐묻고 싶었지만 그의 시선이 김서진으로 향했고 그의 입은 자연스럽게 주제를 바꾸었다. “참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그는 정말 궁금했다. 그의 여동생의 감시 아래 뜻밖에도 한 사람이 끼어들었고 그 사람이 결국
그의 표정이 좋지 않고 말하는 데 주저하고 있자 김서진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한소은과 허강민을 한 번씩 바라본 뒤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왜?”서한이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 하자 김서진의 안색이 변했고 그는 무의식적으로 한소은 쪽을 바라보았다.비록 잠시 봤을 뿐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소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알겠어.”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왔고 서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듯했다.한소은은 식탁 앞에 서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허강민은 여전히 음식을 맛있게 즐기고 있었다. 김서진의 요리 솜씨는 정말 좋았고 5스타 호텔 주방장 못지않았다. 그는 입에 기름기를 가득 묻힌 채 그들이 하는 말에 관심도 갖지 않고 있었다.김서진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한소은을 바라보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동안빌라에서 화재가 발생했대요.”“아, 네.” 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 동안빌라라는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이 지명은 그녀에게 익숙했다.“그럼... 이연이 살고 있는 곳 아니에요?”그녀를 두 번 정도 바래다줬고 회사랑 가까워서 그곳을 기억하고 있었다.김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냈다. 한소은은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연이는...”“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고 대부분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아직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서한도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보고하러 왔다.“제가 가봐야겠어요!” 한소은은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김서진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금 그곳엔 소방관, 경찰, 구급차가 대기 중이에요. 당신보다 훨씬 전문가인 사람들이고 당신이 지금 간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안될 거예요. 당황하지 말고 서한에게 가서 알아보라고 했으니 그녀를 발견하면 우리에게 보고할 거예요.”그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한소은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시원 웨이브에 있는
만약 그녀의 친척이 그곳에 산다면 그 가문은 정말 좋지 않다는 증거이다.“아니야.” 김서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직장 동료야.”“동료?!” 허강민은 이런 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까...”방금 그녀의 당황스러움과 긴장한 모습을 봤을 때는 마치 자신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는데 결국 동료였다고? 요즘은 회사 동료들 간의 관계가 이렇게 좋단 말이야?“그 둘은 정말 관계가 좋아.”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김서진은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허강민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형수, 의리가 대단하네.김서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제 정말 돌아가. 서한도 너를 데려다줄 수 없어. 빨리 차 끌고 집으로 돌아가.”오늘 밤에 한 말 중에 이 말이 허강민에게 있어 가장 감동적인 말이었다.“됐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는 김서진을 지나 다시 멈추었다. “하지만 나도 해야 할 것이 있어.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뭐?” 김서진은 그를 흘겨보았다.허강민은 뒤쪽 계단을 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도대체 형수의 성이 뭐야?”그가 화를 내기도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너도 내가 나중에 그녀 마주치는 거 원하지 않잖아. 내가 나중에 그녀를 미녀, 선녀라고 부를까? 나는 그래도 상관없지만 나중 가서 나보고 성희롱했다고 하지 마.”“...” 정말 이 주둥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그나저나 비밀도 아닐 것이다. 곧 그들의 결혼은 각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것이다.김서진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녀의 성은 한 씨야.”“오!” 허강민은 ‘OK’사인을 보내며 만족한 모습으로 떠나갔다.그는 가득 찬 배를 매만지며 차 한 대를 골랐다. 그는 오늘 사람도 만났고, 성도 알아냈고 김서진이 손수 차려준 밥까지 얻어먹었으니 이번 방문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전에 담을 넘고, 감전됐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단지...허강민은 눈썹을 찡그리며 한 씨 성을 가진
건물 전체에 화재가 발생한데다 밤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고 있었기에 부상자가 매우 많았고 병원은 갑자기 분주해져서 매우 소란스러워졌다.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섞여 병원 로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한소은은 빠른 걸음으로 그 사이를 누비며 지나갔고 김서진은 그녀를 보호하였으며 서한은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빠르게 오이연을 찾을 수 있었다.그녀의 부상은 심한 편은 아니었다. 팔과 볼 한쪽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고 무릎과 발목은 뛰다가 넘어져 찢어지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그녀는 괜찮았지만 그녀 어머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그녀는 이미 수술실로 들어갔고 오이연은 눈물범벅이 된 채 수술실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이연아!” 한소은은 멀리 떨어진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고 빠르게 그녀에게 향했다.“소은 언니...” 오이연은 그녀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우리 엄마가...”“괜찮아, 괜찮을 거야!” 한소은은 이미 상황을 들었기에 조용히 그녀를 위로했다. 사실 안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확실하지 않았다.한소은은 그녀를 위아래로 훓어본 뒤 그녀의 부상이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 괜찮으면 그걸로 됐어! 아주머니도 분명 괜찮을 거야.”“엄마가 먼저 일어나서 날 깨웠어. 불이 너무 셌는데 엄마가 나 보호하려다가 나무에 맞았어. 다 나...”그녀도 아직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니 충격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었다.한소은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그녀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수술은 아직 진행 중이었고 김서진도 그녀에게 먼저 돌아가 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서한에게 간식과 따뜻한 음료를 사오라고 했지만 도저히 먹을 분위기가 아닐만큼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수술하고 있는 곳도 있었지만 밖에 경미한 부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도 있었으며, 살릴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울부짖는 소리까지 들리는 이 상황은 정말 비참했다.멀리 떨어져 이 참상을 보고
“소은 씨, 소은 씨” 김서진은 그녀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다가 그녀가 이상해지는 것을 보았고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부축한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오이연은 통곡하고 있었고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한소은은 이미 기절했다.“서한아, 네가 이연 씨 좀 보살펴줘.” 그는 냉정한 태도로 지시했다.서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침묵한 채 오이연을 보호했다. 그는 두 손을 가볍게 그녀의 어깨에 얹고 그녀를 부축했다.김서진은 한소은을 안아 들고 의사를 찾아다녔다. “의사, 간호사,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네가 부모를 해친 거야.”“네가 그들을 죽였어!”“넌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그들은 다 죽었잖아? 네가 그들을 죽인 거야!”“엄마, 아빠, 가지 마요. 가지 마세요...”“엄마, 아빠...”많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누군가 그녀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곤거리는거 같기도 했다.눈앞에 수많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시끄러운 소리, 불빛, 파편, 피 묻은 얼굴 등 모든 것이 멀면서도 가깝게 느껴졌다.“아빠, 엄마, 가지 마요, 가지 마...”“아...”한소은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흰색의 천장이 눈에 띄었다.온통 하얗게 되어 꿈속의 그 핏빛의 공포를 희석시켜주었고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얼굴이 땀범벅이 되었다.“깼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소은이 고개를 돌리자 걱정스러운 김서진의 얼굴이 보였다. “악몽 꾼 거예요?”그녀는 그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김서진은 즉시 준비한 물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고 그녀는 사막에서 며칠 동안 굶주린 여행객처럼 탐욕스럽게 물을 마셨다.“더 필요해요?” 그가 물었다.한소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힘없이 누웠다.꿈속의 광경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많은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꿈속의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할만큼 생생했지만 왠지 모르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