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경호원 뒤를 따라온 사람을 확인하고 한소은은 깜짝 놀랐다.그녀가 예상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정체를 숨긴 인물도 아니었다.경호원을 따라온 사람은 흰색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비슷한 옷차림을 한 두 사람이 더 서 있었다. 그들은 손에 약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한소은은 할 말을 잃었다. 직접 나서지 않고 의사만 보내올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아기가 태어날 것 같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정말 아기가 태어난다면 의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 보다.그렇지 않다면 아마 한소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의사를 보냈을 수도 있다.의사와 간호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한소은은 고민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의사는 한소은에게 다가가 두말없이 검사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두 간호사도 구급상자를 내려놓고 의사의 지시를 기다렸다.의사는 구급상자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한소은은 구급상자를 슬쩍 보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상자 안에서 주사기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 의사의 어깨를 꾹 눌러 잡고 주사기를 의사의 목에 갖다댔다.그녀의 행동이 워낙 빠른 탓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의사는 필요 없어. 당신들 보스 데려와.”의사와 두 명의 간호사는 비명을 질렀지만, 두 경호원은 오히려 덤덤한 반응이었다.“No,No,No.”의사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을 표시했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생명의 위협을 받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가서 당신들 보스한테 전해. 날 만나러 오라고.”한소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3일간 관찰한 것에 따르면 한소은과 접촉한 사람은 모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어떤 특수한 교육을 받았든, 아니면 그녀를 위해 특별히 안배한 사람이든 한소은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조차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
한소은이 고개를 들어 보니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그녀를 향해 살짝 웃고 있었다.금색 곱슬머리에 파란색 눈, 대충 30대 정도로 보였다.우아한 그의 모습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분명 예의 바른 신사로 여겼을 것이다.그가 온 것을 보고 두 경호원은 즉시 똑바로 서서 인사를 했다.아무도 의사의 생사나 현재의 어수선한 광경을 신경 쓰지 않았다.이 남자가 나타남으로 인해 순간, 모든 상황이 변해버렸다.한소은에게 납치된 의사조차도 더 이상 놀라서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한소은 씨. 안녕하세요. 전 알렉스라고 해요”알렉스는 놀랍게도 한국어를 할 줄 알았고, 생각보다 능숙했다.한소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당신이 이 사람들 보스인가요? 이 조직의 보스?”알렉스는 살짝 미소를 짓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손을 흔들어 경호원을 방에서 내보냈다.“한소은 씨, 당신도 그냥 저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잖아요. 무고한 사람들은 그만 놔주죠.”한소은은 어이가 없었다.“당신도 무고라는 단어의 뜻을 알긴 아는군요.”한소은은 의사를 놔주고 주사기를 구급상자에 툭 던졌다.구급상자에 던져진 주사기를 보고 의사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무의식적으로 자기 목을 만졌다.인내심이 다한 듯한 알렉스는 손을 흔들어 의사와 간호사들도 내보냈다.그들은 1초라도 늦으면 목숨을 잃을까 겁나 허둥지둥 물건을 챙겨 방에서 나갔다.한소은과 알렉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밖으로 부랴부랴 나갔다. 하지만 방문은 닫지 않았다. 두 경호원들은 여전히 방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다.행여나 한소은이 알렉스에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올 기세였다.알렉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소은의 시선은 문밖의 사람들에게 고정되었다.그녀와 밖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던 알렉스가 다시 손을 흔들며 경호원에게 방문을 닫으라 손짓했다.하지만 알렉스의 안전이 걱정된 경호원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실 이것들은 모두 한소은의 추측일 뿐이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정말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고 무엇을 하려는 건지 예측조차 할 수 없게 했다.이 점에 대해선 임상언이 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조직의 배후 세력은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고 그들이 쉽게 손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대항하기 어렵고 적이 너무 강하다고 해서 손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반항과 몸부림을 포기하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한소은의 성격이 아니다. 개미가 아무리 작아도 힘을 합치면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알렉스는 손가락으로 지팡이를 탁탁 치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조금도 급하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순간, 한소은은 자신이 너무 조급했던 것은 아닌지, 후회되었다.원래, 그녀는 이렇게 조급해하지 말았어야 했었다.다만 3일간의 감금 같은 생활은 한소은의 인내심을 점점 잃게 했고, 평소의 냉정함을 잃게 했다.게다가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외부에 대한 소식은 조금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한소은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대신 앞의 탁자 위에 놓인 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두 사람은 침묵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겨루어 보는 것 같았다.그렇게 십여 분이 더 지나서야 알렉스는 지팡이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몸을 자연스럽게 뒤로 기댄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한소은 씨, 사실 저는 당신과 오래전부터 약속을 잡았었어요. 다만 당신이 약속을 미루고 또 미루었죠. 그러니 당신이 여기에서 이틀을 더 기다린 것도 공평한 셈이에요.”한소은은 뭔가 이상하다 싶어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알렉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만약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그들의 첫 만남이다.그녀는 알렉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웃는 듯 마는 듯 옅은 미소를
한소은은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잡담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사실 마음속으로는 대충 짐작이 갔다.그러나 짐작은 짐작일 뿐 아직 확답을 받지 못했으니, 그건 정확한 사실이 아니었다.알렉스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사실, 전 당신의 총명함과 재능을 높이 평가해요. 다만 너무 아쉬워요.”그는 고개를 저으며 무슨 말이 생각난 듯 말했다.“그래도 너무 아쉽지는 않아요. 당신은 더 큰 역할을 발휘할 수 있을 거예요. 한소은 씨, 나중에 당신이 세상을 위해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 알게 될 거예요. 이것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모든 사람이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알렉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르지만, 한소은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알렉스를 비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라면, 이 기회를 당신에게 양보할게요. 당신이 완성하는 건 어때요? 제 생각에 당신이 더욱 자랑스럽다 느낄 것 같은데.”그녀가 이렇게 말해도 알렉스는 감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만약 제가 그럴 수만 있다면 더없이 제 자신이 자랑스럽다 느꼈을 거예요. 하지만 아쉽게도 전 조건에 부합되지 않죠. 그러니 그러고 싶어도 전 할 수 없어요. 한소은 씨, 당신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에요. 하늘이 당신을 우리에게 보내 이 영광스러운 사명을 다하게 한 거라고요.”알렉스의 모습에 한소은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마치 어떤 신앙을 향한 경건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신앙에 온몸과 마음을 다 바친 신도 같기도 했다. 한소은은 순간 모든 일이,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당신들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무슨 신도 같은 거예요?”한소은은 그의 말을 듣고 그들이 하는 일이 종교와 어떠한 연관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알렉스의 반응은 세뇌당한 신도 같아 보였다.“신도?”알렉스는 한소은의 말이 재밌다는 듯 옅게 미소를 짓더니
알렉스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한소은은 순간적으로 하던 말을 멈추었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서로의 눈빛을 계속 탐색했다.알렉스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이전의 상냥했던 얼굴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한소은 씨, 제가 충고하는데,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은 함부로 물어보지 말아요.”말을 마치고 그는 방문 쪽으로 걸어갔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가버렸다.“제가 그랬죠? R10은 완전히 성공한 게 아니에요. 저를 약으로 쓴다 해도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거예요. 그래도 제 의견을 듣지 않을 생각인가요?”한소은은 한 번 모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알렉스를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 상대하기 힘든 사람인 건 확실했다.한소은은 그의 약점이 뭔지 몰랐다. 어떻게 그를 자신의 손 안에 두고 쥐락펴락할 수 있을지 몰랐다.실험은 줄곧 베일에 싸인 채로 진행되었고 지금은 R10을 조건으로 그와 흥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알렉스가 이 실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로 생각했다.알렉스는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듯 했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젠장.’방문은 다시 닫혔고 방안에는 한소은만 홀로 남아있게 되었다.그녀는 정신이 멍해졌다. 알렉스는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그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한소은은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한편, 김씨 그룹 빌딩, 맨 위층.넓은 책상 위에는 각종 서류부터 컴퓨터, 태블릿, 핸드폰까지 한가득 놓여있다.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자기기만 가득했다.한편으론 아주 빠른 속도로 회사에 쌓인 일을 처리하고 다른 한편으론 파견된 사람들이 조사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김서진은 벌써 이틀 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다. 눈은 온통 핏줄로 가득한 모습은 한 눈에 봐도 너무 피곤해 보였다.책상 위의 내선 전화가 울리고, 그가 버튼을 누르자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홍보팀과 마케팅부에서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원청현의 정원에서 나왔지만 바이러스의 전염병이 얼마나 강한지, 자신의 몸에 바이러스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서진은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최대한 적게 사람과 마주치고 최대한 확산을 막을 수밖에 없다.다행히도 지금까지 안전한 것 같았다. 적어도 그와 접촉 했었던 사람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게다가 김서진도 몸에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다만, 한소은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그의 인맥으로 제성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한소은이 제성에 있는 이상, 그는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의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딱 한 가지 가능성뿐이었다.‘설마, 제성에 없는 건가?’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한소은을 제성에서 다른 곳으로 빼돌리고 게다가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한소은을 떠올리자 김서진은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지금 한소은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다.제성을 다 뒤엎어서라도 한소은을 찾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만약 진정기라도 있었다면 일이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그의 부서를 통해 사람 하나 찾는 건 김서진이 직접 사람을 시켜 찾는 것 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정기마저 실종되었다.오랜 생각 끝에 김서진은 핸드폰을 들고 진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날 진가연에게 일단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틀간 너무 바빠서 아직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아직 나이가 어린 진가연은 걱정되어서인지 두려워서인지 김서진에게 먼저 연락하지도 않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진가연이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너머에서 진가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여보세요? 김서진 씨?”“가연 씨, 진 부장은.”순간, 김서진이 멈칫하며 이상하다 싶어 다시 물었다.“어디 아픈 거예요?”“아빠가 왜요? 혹시 아빠 소식 있는 거예요?”진 부장이라는 말에 진가연은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찾은
진가연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신고했다가 아빠가 더욱 위험해지면 어떡하죠?”전에 진정기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건 그가 납치된 것일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혹시라도 경찰에 신고했다가 납치범에 의해 진정기의 목숨을 빼앗아갈까 진가연은 너무 걱정되었다.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납치범은커녕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만약 정말 납치라면 조건을 제시했을텐데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건 그녀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한편으론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괜히 진정기의 목숨이 위험해질까 두려워 함부로 결정짓지 못했다.“지금으로 봐서는 납치는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저도 확신할 수 없어요.”김서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그의 분석은 이성적이였지만 듣는 진가연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이었다.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그러니 어떻게 상대방이 진정기를 해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지금 확신에 찬 대답을 주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진가연에게 해명할 수도 없게된다.김서진의 말에 진가연은 잠시 침묵했다.사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김서진이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그녀는 그저 위로를 받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위로는 그저 마음만 치유될 뿐 현실은 결코 그녀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알았어요.”진가연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김서진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거의 잊고 있었던 질문을 그녀에게 물어보았다.“잠깐, 혹시 어디 아픈 거예요?”진가연이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괜찮아요. 그저 감기일 뿐이에요. 전 괜찮아요.”진가연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김서진은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혹시 열 나나요?”“그걸 어떻게.”진가연은 조금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 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미열이 있을 뿐이에요. 해열제도 먹었어요. 내일이면 나을 거예요.”이렇게 대답하다
김서진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그가 정원에서 나온 후 수행한 몇 명의 측근을 제외하면 진가연과 가장 가깝게 접촉했다. 사무실의 비서와 접촉했던 거리는 진가연보다 조금 더 멀었다.만약 이 바이러스가 전염성이 있거나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면 진가연은 감염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일 것이다.물론, 이 사실을 그녀에게 말할 수는 없다.아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괜히 이런 말을 했다가 그녀를 공황 상태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아.”김서진의 진지한 말투에 진가연도 생각에 빠졌다. “요즘 알레르기 반응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원래 피부가 예민한 편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든요.”김서진은 한 번 더 확인하려 되물었다.“알레르기 반응이요?”“네.”진가연이 대답했다.“몸에 약간 붉은 두드러기 같은 게 생겼지만 간지러움이 덜해서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에도 그런 적 있었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라질 거예요.”“그럼 다른 곳은 불편한 데 없었나요?”김서진이 불안해하며 계속 진가연을 추궁했다.진가연은 이번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없어요. 이젠 정말 없어요. 그냥 감기일 뿐이라니까요. 열도 아주 미열인 정도였어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다시 조심스럽게 김서진에게 물었다.“김서진 씨. 혹시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거예요?”“아니요. 그냥 참고 차원에서 물어본 거예요.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진 부장에 관해서도 계속 조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요.”김서진이 애써 덤덤한 척하며 대답했다.“네.”진가연은 더 묻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나서도 김서진은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애초에 원청현의 정원의 가사 도우미들도 작은 감기 증상부터 시작했었다.김준도 전에 열이 난 적 있었다. 다행히 빠르게 열이 내렸고 다른 증상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나중에 원청현이 검사를 한 후 에야 김준이 감염되지 않았다고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